나이가 많이 들어 살아온 시간과 기억이 충분히 쌓인다 해서 쉽게 죽음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간은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실재적인 것도 아니라 양감도 질감도 없으니 언제나 ‘여기’, ‘지금’ 은 찰나이고 아쉬울 듯하다. 양껏 공기를 마시고 충분히 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여기는 시점이 상상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힘든 일에 지쳐도 그게 삶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의 삶의 마침표를 응시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리와 마음의 간극은 삶과 죽음의 거리와 겹친다.

‘죽음’을 완상하고 토론하기는 쉽지만 내가 주어가 되어 느끼는 그것은 두려움의 진동을 통과한다. 어느 날 ‘내’가 ‘나’라 느끼는 시간과 공간이 스러진다,는 상상은 막연하고 공포스럽다.

그녀는 그 과정을 통과한다. 이제 그녀는 죽음을 직시해야 할 때가 왔고 그것에서 도망가기란 그녀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임을 직감하게 되는 그 시점에 와버리고 만 것이다. 코리 테일러는 자신의 삶의 개별성과 그 개별성이 뻗어나가 도달하는 그 종착점의 보편성을 담담하게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인데 그래서 또한 대단히 공적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데 말이다. 우연이 낳은 탄생과 삶의 점화는 필멸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태양은 지고 사랑은 저물고 생명의 불꽃은 결국 꺼진다. 이 단순명료한 명제가 품고 가는 삶의 복잡다단함에 질릴 때 죽음을 수긍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깊게 공명한다. 아직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느끼고 싶어하는 삶에 대한 애착을 고백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애달프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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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2-1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얉지만 울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참 그렇더군요. 올해로 오빠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고 오빠와 별로 잘 지내지도 못 했는데
가끔 그리워지기도 해요.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해요. 살았을 땐 안 좋은 것들이 죽음 앞에선
연민과 그리움 뭐 그런 걸로 바뀔 수 있다는 게.
저도 기회되면 읽어봐야겠슴다.
잘 지내죠?^^

blanca 2018-02-12 02:5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오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오 년이 흘렀군요. 그럼요. 스텔라님 마음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살아 숨쉬고 같이 얘기 나누던 사람이 죽음이라는 경계로 완전히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진다는 게 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적응이 안되는 문제더라고요.

 

마음이 산란하다. 아이는 다리를 다쳤고 회복중이다. 예측대로 잘 풀려가는 게 인생의 방정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급작스런 사고는 언제나 억울하다. 대충 만든 김치볶음밥을 한 수저도 뜨기 전에 그 편안한 일상은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기적"이라는 말을 유념한다. 그래도 언제나 인생이 그러했듯 다시 그 전처럼 느끼는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 고통의 역치는 결국 그 사람의 한계이자 그 생의 임계점이다. 그 주변부를 언제나 서성인다. 정말이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고 반드시 아픈 각성의 순간이 더 앞에서 떡 버티고 기다리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겠지. 무언가를 단언하는 사람이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다. 


태어나서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깨달은 것이다. 죽어서 땅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잊는 것이다. 깨친 이후는 유한하고, 잊힌 이후는 무궁하다. 삶과 죽음의 중간은 곧 역참과 같으니 하나의 기운이 머물러 자고 가는 것이다. 무릇 저 벽의 등잔이 외로이 밝다가 새벽에 불똥이 떨어지면, 곧 불꽃을 거두고 등잔 기름의 기운도 다한다.

-이덕무, 한정주 저 <문장의 온도> 중
















이백오십 년도 전에 이덕무가 소소하게 끄적인 글들은 그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작 나보다 십 년은 훌쩍 어린 청년은 내가 살아 온 세월의 배를 통과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정결한 언어로 집약해 얘기한다. "깨친 이후는 유한하고, 잊힌 이후는 무궁하다."는 그의 잠언 같은 문장이 들어와 박힌다. 결국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역참 안에서 경험하는 일장춘몽의 내 생이 하루 하루 무탈한 것을 감사하고 무탈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도 욕심일까? 모르겠다. 불꽃을 거두고 나서 경험할 '무한'의 주체는 오늘도 무한한 고뇌에 시달린다. '위대한 백 년'의 시대에서 고뇌하는 청년 이덕무의 글이 많은 위로가 된다. 그 자신이 머물렀던 역참의 온기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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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8-02-0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가 다리를 다친 거에요?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기적‘이란 말 공감해요. 아이가 다치지 않고 자라면 좋지만 그건 정말 기적이죠. 잘 아물고 건강 회복하기를... 훌륭한 선현들의 나이가 나보다 훨 어렸다는 걸 감지하며 화들짝... 공감해요!^^

blanca 2018-02-06 03:5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아이들 키우다 보니 정말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네요. 학교 놀이터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져 통깁스를 했어요. 그러니 걷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요. 잘 회복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감사해요.

cyrus 2018-02-0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날씨가 계속 추우니까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움츠려져요. 얼른 날씨가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8-02-06 03:55   좋아요 0 | URL
네, 고마워요. 맞아요. 더한 경우를 생각하면 또 이 상황에서 감사할 일도 있는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여러 가지 상황도 다 훈풍이 부는 나날들이 오기를 바라봅니다.

2018-02-05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6 0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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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도 사는 일도 고단하고 허덕일 무렵 이 이야기가 왔다. 정미경은 이 작품을 미완의 유작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차마 그녀가 온몸을 삭아내리며 써내려 간 이 이야기를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쓰는 일을 때로 부수적인 것으로도 가능하다고 여겼던 나의 오만이 수만 가지 결 속에 웅크린 그 결코 스러지지 않을 엄중한 실재 앞에서 무너졌다. 그녀 앞에서 이야기는 장치에 불과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곁가지였다. 그 이야기를 지탱하고 그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은 그녀의 명징한 처절한 언어였고 그것은 쉽게 치기로 호기로 쓰여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삭아내리게 하고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건 시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것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시간의 눈금 위를 걸어가는 건가.

-p.7


시작의 문장에서 나는 흠씬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미 짜여진 시간의 날줄과 씨줄 위를 걷는 것이 삶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처연하고 허무한 것인가 하고. 이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긍하는 지점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그렇게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그저 운명에 몸을 내맡기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의 절대 숙명의 엘레지가 아니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오지만 풍경은 매번 달라진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오지 않았던 또다른 풍경이 보인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p.58


돌아보면 항상 그렇다. 결국 시간. 모든 사람, 공간, 사물은 결국 그 시간의 풍화로 해체된다. 시간의 결은 예리하고 엄혹하다. 그것이 남길 것에 항상 회의했다. 바람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마치 예언 같다. 무겁지도 대단치도 않은 바람이 남아 그 존재가 살아냈던 시간을 증언해 줄 것이라는 예언은 저릿하게 아름답다. 


섬으로 돌아온 정모가 꿈꾸었던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금도서관은 과연 시간의 풍화에 견뎌낼 수 있을까. 삶이 그러했듯 확실한 것은 없다. 전적으로 옳은 것도 언제나 빛나는 것도 없는 게 삶이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그게 생이었을 것이다.


"속 끓일 것 없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야."

-p.176


팔십 년을 넘게 산 할미가 이십 년을 채 살지 않은 소녀에게 하는 이야기는 사십 년을 산 나에게 들어와 박힌다. 이제야 이 할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나이에 상실이 없는 삶이란 꿈꾸어서도 안 된다는 뒤늦은 체감의 지점에서 나는 오늘도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위로가 되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경험해야 할 수많은 상실과 고통의 진동이 파르르 전해져 온다. 견딜 수 있을거야. 그래야 비로소 늙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늙어 죽는 자는 전사다. 


작가의 남편이 말미에 붙인 발문이 비로소 미완의 작품의 마침표를 찍는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아내이자 작가를 잃은 그가 다시 덧붙인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는 그의 아픈 상실을 대변한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수많은 답답한 감정이 시인의 언어를 만나 마침내 흘러나온다. 


<중략>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중략>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중



나도 사실은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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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얘기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글도 모르면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책과 글밥이 많은 책을 번갈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우치는 아이들도 많다지만 나는 예외였다. 한글을 모르는 책벌레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둘째는 새해로 여섯 살이 되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서 한글을 절로 깨우치는 신통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묘하게 누나가 좋아했던 책들을 아이도 특히 자주 본다. 백희나의 <알사탕>은 하도 자주 읽어달라 해서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되었다. 친구 사귀는 데에 서툰 동동이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든든한 사랑과 지원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에 나도 절로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특히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목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사후세계를 믿지는 않지만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회가 가능한 그런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하며 명치께를 어루만지게 된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들, 미처 잡지 못한 손, 안아주지 못한 어깨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있다면, 여기 지금이 좀 더 견딜만해질텐데...결국 나에게 동동이의 알사탕에 버금가는 매개가 없다면 다 불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그 '알사탕'은 결국 이런 고정관념, 단언, 아집이 쓸고가버린 동심일 거다. 어린이의 이야기가 어른 안의 아이를 불러내고 치유하는 경험은 각별하다. 어떤 형태로든 상처받고 슬퍼하는 아이들이 치유받고 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런 의미에서 빛난다. 성장이란 결국 경중을 떠나 어떤 고통을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고 묻어버리며 확장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알사탕>은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누구든 한번쯤 같이 놀 친구가 없어 가슴시리게 외로웠던 경험,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형태의 작별 선고를 남기고 떠났던 체험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알사탕>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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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1-11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에 대한 얘기는 아닌데 블랑카님 정말 일찍 일어나시는 것 같아요!!! 갑자기 존경심이!!!!
이른 아침에 아이들 자고 있는 동안 글을 쓰는 건가요! 멋져요!!!
저 책은 읽어볼게요. 저같은 사람이 읽어야 하는 거군요.

blanca 2018-01-11 06:39   좋아요 1 | URL
그것은 같은 대륙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라로 2018-01-11 07:52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아메리카 대륙에 사세요??? 와~~~괜히 가까워진듯한!!!!^^

프레이야 2018-01-1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책으로 위로 받는 건 아이와 어른이 좀 다른 깊이인 것 같아요. 블랑카 님 말씀처럼 어른이 어쩌면 더 필요한 책이 그림책 같아요. 그래서 그 추억이 있기에 그 많은 그림책들을 다 갖고 있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셨군요 역시!! 아이와 함께 그림책 보던 시절을 추억하며~^^

프레이야 2018-01-1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책은 보지 못했지만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요. 영화 봄날은간다 에서 유지태가 할머니에게 하얀 손수건에 싸인 알사탕을 받는데 어찌 눈물이 나던지요. 상심해 있는 다 큰 손자에게 플라시보 효과로 내민 알사탕. 할머니가 고이 싸서 갖고 있던 알사탕이었어요.

blanca 2018-01-12 02:44   좋아요 1 | URL
아, ‘봄날은 간다‘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군요! 저도 그 영화 잔상이 참 길게 남았는데 말씀해 주신 장면이 떠오르지 않아 아쉬워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는 장면이 그려져요. 생각해 보니 저희 할머니도 그런 사탕을 항상 품안에 두고 가끔 먹으라 권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른의 깨달음을 가지고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러면 더 진하게 충실히 그 시간을 보낼텐데... 하지만 모든 걸 다 알고 다시 하는 경험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YoonSoo 2018-01-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너무 좋아해요. 쓰신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팍, 울음이 나왔어요. 고마와요. 저만 엄살 부리며 계속 어떤 작별들을 자꾸 떠올리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고 믿고 싶은데, 가끔 부끄럽기도 해서요. 왠지...

blanca 2018-01-12 02:4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아니예요. 저도 계속 몇 년 이고 몇십 년이고 그러한 시간들을 다시 꺼낸답니다. 그러면 또다시 아프지만...결국 시간은 상실의 경험을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통과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윤수님의 작별도 저의 작별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작별도 다 어느 부분에서는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억압하곤 했었는데 오히려 충분히 슬퍼하고 아쉬워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그 상실감이.

꿈꾸는섬 2018-01-1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둘째가 어느새 많이 자랐네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는거죠?
ㅎㅎ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15 02:51   좋아요 1 | URL
꿈섬님! 현준이 현수도 많이 컸지요? 시간이 너무 빨라 아이들도 훌쩍 크고 저도 훌쩍 나이들어 있고 그래요. 시간을 쫓아 같이 성숙하면 좋은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꿈섬님도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작은 행복들과 성취들 많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연히 1993년도에 오프라가 마이클 잭슨을 독점 인터뷰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 서른다섯의 마이클 잭슨은 이미 정점에 서 있고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꿈들을 한데 모아 건설한 그만의 원더랜드는 아직 각종 추문으로 얼룩지기 전이다. 그럼에도 그는 슬퍼 보인다. 그 자신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무대에서 내려오면 언제나 울었던 자신을 슬퍼한다. 잭슨 파이브 시절의 성공은 그에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단 한번도 또래 친구와 놀거나 그 나이 아이들이 당연시하는 평범한 것들을 즐긴 적이 없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지나쳐 스튜디오에 가야 했던 어린 팝스타는 흐느껴 울곤 했다. 이러한 결핍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그에게 박탈된 어린 시절의 평범한 추억과 성장통, 아버지의 학대는 그를 정상적인 범주 안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기술을 너무나 어렵고 먼 것으로 만들어 버린 듯해 마음이 저렸다.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시네 형제들>중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중 재인용
















나의 어린 시절 역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다른 여느 어른들처럼 영원히 복기하고 싶은 빛나는 순간들이 한켠에 쌓여 웅얼대고 있어 힘들 때 귀기울이게 한다. 마이클 잭슨처럼 비범한 재능이나 특수한 상황이 없는 대신 거기에는 수많은 지난한 아무렇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에피소드들이 밀고 들어와 풍화되고 있다. 물론 그처럼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던 적도 많고 상실의 경험도, 소외된 생채기들도 있지만 그 사이 사이에는 다정한 손편지로 따스한 위로를 주었던 친구들, 나무의 옹이마냥 거칠거칠한 손으로 항상 손녀를 이고 지고 걸었던 할머니, 힘든 삶의 굽이마다 바람막이가 되어주려 했던 부모님, 친구보다 더 친구 같았던 동생들이 그 시간 안에 고여 있다. 불평했던 모든 순간들이 결국 한데 어우러져 나를 성장시켰다. 한편 해결하지 못했던 그 성장 과정들의 감정적 부채들이 언젠가는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든다.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완벽한 치유나 망각을 가능하게 하는 전지전능한 권력자는 아닌 것도 같다. 하나하나씩 그 시간의 비늘은 벗겨지고 그 안에 소장된 것들이 돌아오며 늙어간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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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