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교보문고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거기에 서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물론 중역본이었고(당시는 그랬다), 축약본이었다. 무척 지루했고 음울했지만 나는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허영으로 서서 온전치 않은 <죄와 벌>을 말 그대로 활자만 읽었다. 이후로 나는 내가 <죄와 벌>을 읽었다고 착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학생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창녀와 유형을 가는 이야기로 그렇게 기억하면서...





다시 <죄와 벌>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팟캐스트를 듣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이렇게 활자가 폄하되는 시대에 1800년대의 러시아어로 쓰인 분량도 적지 않은 책이 여전히 읽힌다는 건 분명 그걸 읽음으로써 얻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와 벌>의 완역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다시 읽은,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죄와 벌>은 놀라웠다. 놀라운 현재적 가치를 지닌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이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고답적이지 않았고 몰입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는 점. 가난한 법대생이 아니라 정말 처절할 정도로 극한 빈곤에 시달려 대학 생활도 지속할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점.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뛰어들어 도와주고야 말았던 내적 선함을 간직했던 청년이었다는 점. 끝까지 자백과 은폐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점. 그러한 점들이 새롭게 읽혔다. 그리고 친구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 곁을 끝까지 지키고 그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그의 우정이 감동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가지는 설득력이다. 많은 작가들이 죽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을 자신의 각본대로 움직이기 위해 활용한다. 잠깐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거나 재미를 느꼈다는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진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창조해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이 하나의 성취로 가는 경계가 나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서 지면을 뚫고 나온다. 특히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두네치카에게 흑심을 품고 덤볐다 자살을 택하게 되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죽음 전 행적은 인상적이다. 여자를 탐하고 아내를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그가 죽기 전 택한 일은 놀랍게도 자선이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가지 없어진 소냐의 동생들이 살아나갈 방도를 세심하게 마련해 준다. 유들유들하게 라스콜니코프를 압박해 오는 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또한 의외의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뜻 라스콜니코프의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게 삶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도록 주도면밀하게 이 청년에게 접근해서 감형을 유도해 낸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내면을 지니고 궁극의 영향을 주인공에게 끼치게 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없지만 결국 지금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껴안고 어머니 앞에 선 아들의 장면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저릿했다. 



"아, 어쩜 이렇게 더러워졌니."

"어제 비를 맞았어요, 어머니......"


이 짧은 대화만으로 모든 것을 모자는 소통한 것처럼 보인다. 둘이 미처 주고받지 못한 말들 사이로 엄청난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어머니는 전도유망했지만 가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이루지 못할 희망을 끝내 환각처럼 간직한다. 살인자로 유형을 떠난 아들. 


결국 자백하고 소냐와 함께 유형을 떠난 라스콜니코프의 엔딩. 마침표는 사랑의 발아다. 나는 이런 결말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비관적인 결말을 예정하고 글을 쓰는 사람인 줄 오해했다. 이런 아름다운 아쉬운 결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삶으로 사랑에 대한 기대로 끝낼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이 작가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끝까지 참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읽는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도.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선과 악의 경계, 죄와 벌의 간극, 생과 죽음의 거리, 이 모든 걸 기꺼이 해체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지형도를 펼쳐낼 수 있는 그러한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읽는 일이 가지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나는 오늘 비로소 제대로 <죄와 벌>을 처음으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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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두 올해안 죄와 벌은 꼭 다시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도끼쌤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나름 추모하려구요!ㅎ 30대에 읽은 어설픈 감정만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키워드를 많이 던져 주셨네요! 감사드리구요, 즐건 독서하시구요!ㅎ

blanca 2021-09-16 10:26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 왜 사람들이 도끼, 도끼 하는지 벌써 태어난 지 200년이 된 작가의 책을 여전히 이야기하고 읽는지 저는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뭔가 경계를 넘어서 훨훨 날아간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의 문장들이 살아 있어요.

다락방 2021-09-15 1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죄와 벌 다시 읽겠습니다. 저는 열린책들 읽었었는데 아 열린책들로 다시 읽을까요(가지고 있습니다) 블랑카 님처럼 문동으로 읽을까요. 아 너무 빨리 읽고 싶어요!!

막시무스 2021-09-15 19:51   좋아요 2 | URL
책을 읽겠다는 강한 의지는 구매로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가진 1인으로서 문동판 구매를 적극 권장드립니다!ㅎ

다락방 2021-09-15 20:05   좋아요 2 | URL
아아..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흑 ㅜㅜ 그게 낫겠죠? 🙄

blanca 2021-09-16 10: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우리의 재독은 소비를 합리화한다. 저는 요새 이렇게 새로 나온 버전으로 다시 고전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답니다. 새 종이의 감촉을 느껴 보시죠. 가독성이 정말 좋더라고요.

새파랑 2021-09-15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니까 죄와벌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책은 다시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blanca 2021-09-16 10:28   좋아요 1 | URL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마지막 장 읽는데 더워 죽겠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작가는 그냥 태어나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접신들린 작가 같아요. 인물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도스토옙스키한테 쏟아져 들어온 느낌....

라로 2021-09-15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제대로 읽고 싶어져요!!! 저도 열린책으로 읽었는데 문동으로 다시 읽어볼까요? 그런데 전자책이 없네,, 철푸덕

blanca 2021-09-16 10:30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한 권짜리(말도 안 되는 축약본이죠) 완전 오독한 상태에서 제대로 처음 읽으니 정말 너무 너무 좋더라고요. 너무 짧아서 화가 날 정도였어요.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상이...아, 그런데 왜 전자책이 없을까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지 않을까요? 보니까 세문은 거의 전자책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세트] 죄와 벌 1~2 - 전2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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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중의 걸작. 마지막 대목 읽고 전율. 도스토옙스키가 생존해서 로쟈와 소냐가 유형 생활을 겪고 마침내 어떻게 됐는지 후속편을 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있고 문장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악과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줌.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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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이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읽기였다는 말씀에 너무 공감합니다!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도 아시는군요!오랜만에 느낀 감정이었어요.

새파랑 2021-09-15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 멋지네요 ^^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정말 많은 인내심을 요구할 줄 알았거든요 ㅋㅋ

다락방 2021-09-15 17: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물다섯에 읽었는데 블랑카님 평을 보니 지금 새로 읽고 새로운 감상을 갖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사야할 그리고 읽어야할 책의 목록은 늘어가나요..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라스꼴리니코프..

막시무스 2021-09-15 17:55   좋아요 2 | URL
개인적으로 뫼르소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인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1-09-15 18:29   좋아요 3 | URL
뫼르소!! 그러네요!! 😱

blanca 2021-09-15 19:19   좋아요 1 | URL
아놔, 러시아 이름 ㅋㅋ 그런데 너무 신기한게 러시아 사람들은 전혀 어렵다고 생각 안 한대요. 당연한 거지만 ㅋㅋㅋ 오, 너무 좋은 나이에 읽으셨어요. 라스콜니코프 나이가 딱 스물셋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친구가 될 일은 없다. 친구가 되는 선결 조건은 전제는 일단 연령대가 같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에 대해 가지는 불만, 기쁨을 느끼는 지대가 겹쳐야 비로소 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나는 여긴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가 아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하는 조언이나 의견은 잔소리가 된다. 발끈한다. 요즘 애들은 저러니까 안 돼, 저 아줌마는 꼰대스러워. 모든 이해와 곡해는 세대차로 환원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경계한다.


아주 예쁜 이탈리아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는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불렀다. 아이가 동갑이라 친해진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끝까지 모른 채 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애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면 우리가 나눴던 그 수많은 교감의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우정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우정은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교감은 간접적으로 읽기를 통해서 가능할까.
















젊은 작가 서이제의 문장은 특이하다. 확실한 단언형이 아니라 의심과 머뭇거림, 전복과 도치의 그것들로 해체된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 그 흐름은 무언가 어떤 리듬감이 있어 이탈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 지금 느끼는 것들이 혼재되어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서이제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이십 대에 느꼈지만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을 언어로 소환한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있는 것들을 환기한다.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을 때, 앱으로 지도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또는 반쯤 왔다고 힘내라고. 또는 한참 멀었다고. 지도를 보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와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삶에는 지도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야 했다. 

-서이제 <(그) 곳에서>


우리가 소환하는 청춘에 대한 미화된 이상화된 그리움과 지금 청춘이 그들의 젊음에 대하여 느끼는 현실적 결핍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경제적 성장기에 향유한 우리들의 청춘과 잔치가 끝난 뒤의 그 허탈한 공간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오늘날의 청춘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 지금 한창 힘든 젊음에게 얘기하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야단맞다 넘어지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가라앉을 찰나에 서이제 작가의 문장들은 부력을 부린다. 진지한데 한없이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도 덩달아 떠오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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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어나더커버)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딸이 어릴 때 감정 동화책을 읽어주다 정작 내가 울어버린 적이 있다. 슬픔을 상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책에서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도 되고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해도 괜찮다는 처방이 실린 책에서 나는 늦은 치유를 경험했다. 그때는 절대 그 사람을 떠올려서도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된다고 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월과 성장으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렵고 고차원적인 이야기 속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명한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 책은 그렇고 그런 책으로 축소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거대하고 심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 최혜진은 작가들의 성장을 묻는다. 그 성장은 결국 그들의 삶의 이야기로 그것은 다시 그들의 창작으로 뻗어 나가며 한 사람의 삶의 지도를 만든다. 제대로 된 질문과 그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타난 창작자들의 교감의 향연은 놀랍다. 여느 철학서 못지 않게 그것은 진지한 삶 속의 내밀한 질문들과 탐구, 그에 대한 천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림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 누구라도 이 인터뷰 내용들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갈 수밖에 없다. 


"시도해보고, 감탄하고 실패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변화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에요. 그 말 좀 믿지 마세요.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산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언제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수정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클로드 퐁티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프랑스의 국민 그림책 작가 클로드 퐁티는 대단히 불행한 유년 시절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유년에 함몰되는 대신 그것을 딛고 자신이 잃어버린 유년의 꿈들과 자유를 아이들에게 선물한다. 인간의 회복 탄력성의 산 증인이 바로 그다. 슬프고 외로웠던 유년을 통과한 사람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동화들이 눈부시다. 인간이 대단한 점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절망 속에 고꾸라지는 사람도 목격하지만 그곳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때로 목격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그 어떤 육아서보다 실질적인 조언이 된다.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기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아이를 삶의 중심에 놓고 이 사회가 제시한 경쟁 사회의 규격에 맞게 아이를 통제하고 채근하는 우리나라의 현 교육 과정에서의 학부모로서의 삶과는 다른 이야기다. 엄마가 엄마 본위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모성을 의심하도록 키워졌다. 우리는 우리가 열망했던 자본주의의 위계의 사다리 위로 아이를 올려놓는 것이 가장 잘 성취된 양육과 교육의 최종 도착지인냥 간주해 왔다. 작가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의 열망과 대치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하며 배워나가도록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본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생경하게 들리지만 그런 여건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바람직한 부모 자녀 관계는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같아야 합니다. 지하수로 연결되어 소통은 하지만 서로의 생태계를 존중하는 관계여야 하죠. 

-클로드 퐁티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모든 인간 관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 같다.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기억하고 싶은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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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0-08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1-10-08 19: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라요.

새파랑 2021-10-0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축하드려요 ^^

blanca 2021-10-08 19:44   좋아요 2 | URL
잊지 않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프레이야 2021-10-12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블랑카 님 리뷰만큼이나 좋은 비유라고 생각이 되네요.
분홍공주는 많이 컸겠어요. ^^

blanca 2021-10-13 07:5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제 그 무서운 중2랍니다. 세월이 정말 빠르죠!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어나더커버)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작가들의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부모가 되어 한 인간의 창의력을 일깨우는 일에 대한 진짜 이야기가 들어있다. 잊고 살았던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다시 되찾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 책, 자신들이 만든 그림책처럼 사진 속 작가들의 미소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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