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한다. 취향도 성격도. 심지어 가치관도. 원래 나에게도 취향이 스릴러, 호러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공수창 감독, 감우성 주연의 <알포인트> 영화를 심야로 보고 일주일 동안 엄마 옆에서 자야 했던 그 일 이후로 모든 호러물을 끊었다. --;; 그 영화가 뭐 그리 무서웠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유독 그 영화의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과 카메라의 시선이 내가 무서워하는 그 지점과 정확히 겹쳤다고랄 수밖에.

 

책도 그렇다. 추리물과 스릴러물은 미야베 미유키 정도만 간신히 읽어내고 되도록 시선을 안 두는 편이다. 본격 장르물이 아니더라도 그런 요소만 가미되면 뭐랄까, 책장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읽고 난 후 잠들기 전의 이런 저런 연상때문에 그리 즐기지 않는다. 겁이 많아서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는 추리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응집력 때문인지 대단히 흡인력 있게 읽혔다. 여러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고도로 치밀하게 무게감 있는 메시지로 응축되고 있었다. 한국소설이 이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지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소설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신작을 많이 기다렸다. 신작이 나오자마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구입했다. 아껴두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중심에 놓인 '개', 그리고 그 '개'와 '인간'의 이야기. 그 '개'는 눈덮인 설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때로 인간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큰 개'이다. 그 '개'가 광막한 대지 대신 창살 안의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사육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들을 묵묵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치열하고 때로 잔인한 '날것'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러니 소심한 나는 잘 견뎌낼 수가 없다. 다 읽어내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금 부끄럽다. 작가의 발전도 시선의 변화도 온전히 잡아낼 수 없으니 아쉽다. 누군가 다 몰입해서 읽고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련다.

 

 

 

 

 

일백 페이지 남짓한 얇은 이 책은 아주 청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본 나라는 딱 두 곳이다. 호주와 일본.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은 아이가 네 살 때 북해도. 아, 쉽지 않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 휴대용 유모차로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안에서 아이와 실랑이하는 일은 얌전한 일본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남사스러웠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이미 사춘기다. 그러니 조금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사촌남매를 데리고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다닌 이야기. 지나친 감상도 딱딱한 가이드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을 잘 포착한 미덕. 언젠가 나도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거라는 미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

 

 

 

 

이런 상큼한 가이드 지도도 군데군데 첨부되어 있어 여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같다. 이 덥고 습한 날, 여행을 꿈꾸는 일은 당연하고 또 너무 먼 일이기도 하다. 어깨선을 넘어버린 이 긴 머리를 귀밑으로 싹둑 잘라버리고 조금 더 시원해지고 조금 더 어려보이기를 꿈꾸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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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7년의 밤]을 재미있게 그래서 빠르게 읽긴 했지만 그 작가의 신작이 기다려진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신작이 나와도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더라고요. 그 때 아마도 구매자평에 '감탄은 있으나 감동은 없다'는 뉘앙스로 썼던것 같아요. 재미있지만 '아 좋구나' 하는 그런 책이 제게는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더 있기를 원하는데, 제가 원하는 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0쪽 남짓 읽었는데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도 읽으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텐데, 혹시라도 안읽어보셨다면 우리 같이 읽어요!!

blanca 2013-06-26 07:03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읽고 계시군요! 저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 정도만 맛보았어요. 일단 주문한 책들 먼저 소화하고 뒤따라 갈게요. 작가의 능력이나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취향'이라는 면에서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책들이 있더라고요.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강박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3-06-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포인트,는 제가 최고로 치는 한국공포물이에요. 너무나 섬뜩하더라구요. 우리안의 공포감, 그것의 실체를 보여주니 더욱이요. 정유정 신작은 칠년의 밤,보다 더 강한가 보군요. 무장하고 봐야겠어요.^^

blanca 2013-06-26 07: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시만 해도 참 획기적인 공포물이었는데. 후속작들은 평가를 못 받았나 보더라고요.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요. 예, 프레이야님의 감상 기다릴게요. 저는 중반까지도 못 읽었어요^^;;

2013-06-2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6-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랫동안 님서재에 댓글을 안 남겼네요.
아마 비로그인으로 글은 읽은 듯한데...
정유정, 7년의 밤 읽으며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화된다는 애기를 들었어요.
우리지역에 사는 분이라 작가초청하려고 출판사랑 통화했지만 작품구상 들어가면 강연은 안한다고...
작년에 3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성사시켜 달라했어요.
올 여름과 가을에도 작가초청할 건수가 많아서 다시 알아봐야겠어요.
신작은 다음달 구매리스트에 넣어둘래요.^^

아~ 나는 혼자서 호러영화 잘 봤어요. 여름이면 꼭 봤는데~ 이젠 그런 영화는 보기 싫어졌어요.ㅋㅋ

blanca 2013-06-28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화 얘기를 들었는데 진척이 있는지 궁금해요. 오호! 순오기님 지역에 사시는군요! 원래 간호사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이제 작품이 나왔으니 아무쪼록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제는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아요.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는 저어하게 되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3-06-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러물에서 시작하여 매끄럽게 정유정으로 스며들었다가 다른 부분에서 매듭을 짓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알 포인트,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이건 1편만), 엑소시스트, 링(대충 지금은 여기까지만)을 보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참 다양한 것 같아요. 감정의 뿌리를 캐내다 보면 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자국이곤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상상을 자극하는 공포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bgm으로 삐걱대는 문 소리만 들려도 혼자 자지러지는 부류-하는데, 블랑카님을 글을 읽으니 정유정이 궁금해집니다.올여름, 한 번 챙겨보아야 겠어요!

blanca 2013-06-28 10:32   좋아요 0 | URL
쟌느님, 혹시 <7년의 밤>을 안 읽으셨다면 강추드려요. 참 잘 썼더라고요.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여기 저기에서 하도 칭찬을 해서 값을 하나 싶었는데 저한테는 아주 놀라운 소설이었어요. 저는 겁이 많아요. 번지점프, 스쿠버다이빙, 이런 것 죽을 때까지 못할 것 같고요. 무서운 것은 거의 눈감고 안 보는 수준이랍니다.--;;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한번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타인에게 저지른다. 시간의 신은 가해자도 피해자의 윤곽도 흐릿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자기 정당화로 스스로를 재빨리 용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며 늙어간다. 그래, 그때는 어렸어, 철이 덜 들었었어, 라고.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는 견디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명확한 진실을 오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는 일은 흔히 '속죄' 그 자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주 뒤늦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찬탄을 받은 이언 매큐언의 이 책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35년 뜨거운 여름날, 탈리스 가의 막내 딸 브리오니는 오빠의 귀향을 환영하기 위하여 무모한 사랑에 빠져 불행해졌던 소녀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는 내용의 희곡을 쓴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처한 외사촌 언니 롤라와 아홉살 쌍둥이 잭슨과 피에로는 뜻하지 않게 이 희곡의 공연을 위하여 차출되게 된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하고자 하는 열망과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녀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신분 차가 나는 청년 로비 터너가 사랑하는 장면을 엿보게 되고 마침 없어진 쌍둥이 형제를 찾으러 다 흩어진 가족들 틈에서 사촌 언니 롤라가 누군가에 강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기만의 왜곡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며 마침내 로비 터너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렇다. 탈리스 가의 집안 일을 거들었던 어머니와 가족을 방치하고 떠난 아버지의 결손 가정에서 자라 브리오니 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의대생을 꿈꾸었던 전도 유망한 청년 로비 너는 두 소녀의 저마다의 굴절된 진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하게 된다. 그녀들은 어렸고 각자의 욕망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채색했다. 로비를 사랑했던 세실리아는 부모와 의절하다시피 하고 로비는 수감되었다 온갖 살육과 잔인함, 방치가 난무하는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평범했던 안온했던 아기자기했던 그 여름날은 삶의 무참한 우연적 칼날 앞에서 난도질 당한다.

 

절규하는 서사 앞에서 이언 매큐언은 담담하게 소설의 역할을 역설한다. 그것 안에는 과장되지 않은 진실의 핵이 강력한 흡인력의 자기장을 떨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이것은 브리오니의 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실수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잊어버린다. '너'도 '나'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 감정을 지녔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폭력, 오해, 전쟁, 기만적인 이기적인 행위 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로비 터너가 전쟁터에서 겪게 되는 그 수많은 처절한 참상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이 끈적끈적한 여름 속에서 한기를 실어온다. 마치 그 현장에서 직접 그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목격하고 겪는 듯했다. 로비가 느끼는 고통, 무감함, 피로, 욕망은 이윽고 독자의 것으로 환치된다. 그것은 이언 매큐언의 위대한 힘이다. 지천에 깔린 죽음을 목격하며 사내들이 아버지가 되기를, 생명을 갖고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루기를 꿈꾸는 그 슬픈 모순의 욕망에 대한 묘사는 히 더 그러하다.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되기를 열망하는 로비 터너의 꿈에 대한 묘사는 처절하리 만치 현실적이고 몽상적이고 아름답다. 됭게르크를 향하여 힘없이 퇴각하는 영국 군인들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우리 인간이 극단적인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되려 생명을 매개로 한 회복과 부활을 꿈꾼다는 그 무력하지만 끈질긴 생존에의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이언 매큐언은 삶에 대한 그 무조건적인 애착의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브리오니는 속죄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브리오니가 아니라 읽는 우리들은. 그녀가 언니처럼 전쟁터의 병사들을 치료하는 간호사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고행의 행군으로 밀어넣는 그 절절한 대목들에서 어쩌면 그녀의 그 실수가 용서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녀가 결국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만나고 로비 터너의 그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뒤로 하고 런던 남부의 지하철역에서 연인들과 헤어지는 장면. 어쩌면 적절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수도 있었을 그 장면은 슬픈 반전을 품고 있다.

 

1999년 런던. 유명한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는 일흔일곱 번째 생일파티를 유년 시절의 대저택에서 맞게 된다. 그곳에는 그 여름날 실종되어 모든 사건의 전초를 만들게 되는 쌍둥이 형제 중 생존한 노인 피에로의 증손자 등이 육십사 년이 지나서야 무산되었던 공연 <아라벨라의 시련>을  연기한다. 그리고 브리오니의 슬픈 고백은 위험한 반전을 예고한다. 그녀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로 헤어져야만 했던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 슬픈 연인은 전쟁통에 죽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브리오니의 고백은 소설을 통하여 그 연인의 결합과 그녀 자신의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것의 복선이기도 했다. 브리오니는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는 슬픈 고백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독자는 철저히 속았다. 그러나 이 기만 행위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속죄'는 드라마틱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쩌면 하나의 허망한 환상일런지도 모른다. 이미 저질러진 행위와 가한 상처는 무뎌질 뿐이지 '무' 아래로 가라앉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이 있다,는 그 사실을 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내 마음의 속살과 같은 여린 부분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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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2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4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3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폰4의 홈버튼이 말썽이다. 지긋이 한 네 번 정도 눌러야 가까스로 켜지고 작동된다. 이것을 고치러 수리센터까지 가느냐, 아니면 아예 갈아타느야, 그것이 고민이다. 약정도 다 끝나고 전화비는 이만 원대로 안착했다. 그런데 다시 기기값과 약정 기간의 노예로 최소 2년 이상을 지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잘 되는 스마트폰이면 더더욱 손 안에서 놓기 쉽지 않을 텐데 이런 저런 생각에 망설여진다. 자주 가는 인터넷 까페에는 2G폰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사람들을 만나면 어색한 침묵 대신 각자의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자기 전에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눴던 가족들은 드러누워 스마트폰의 명멸하는 빛을 자장가로 청한다. 전화비는 애초에 사만원 들을 넘은 지 오래다. 자극적인 표제의 뉴스거리들은 터치하자마자 말도 안 되는 낚시글들인 경우가 많고. 그냥 불편한 대로 덜덜거리는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지그시 눌러 달래는 기분으로 얼러서 쓰다 사망하면 생각할까, 고민하다 답도 없어 그냥 치워 버린다.

 

아이가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해 달라고 먼저 얘기했다. '공주양'이라고. 친구들이 너도 나도 다 가져와서 자랑하고 선생님도 읽어 주고 했다고. 다른 장난감은 말리지만 엄마가 책은 되도록 사주려고 당장 같이 검색에 들어갔으나

 

 

 

 

 

 

 

 

 

 

이 시리즈 자체가 다 품절, 절판이다. 교차검색도 해봤지만 절판이 분명하다. 원서라도 찾아보려 영어책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절대 안 된단다. 그렇겠지. ㅋㅋ 혼자서 땀 뻘뻘 흘리며 침대방에 문닫고 들어가더니 웃으며 나온다.

"엄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품절된 책도 다 선물로 줄 수 있어?"

이런 난감한 질문. 아...나는 절판된 책을 구할 재주는 없다.

"으음, 글쎄"

"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그 품절된 시리즈 책 여덟 권 선물로 달라고 기도했어. 그럼 12월달에 유치원에 가져갈거야!"

여덟 권! 품절도 아니고 절판된 책을. 무슨 수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선물을 무슨 수로 구할까? 절판된 책 구하기. 그것도 시리즈 여덟 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절판된 책을 구하는 재주는 없단다, 아이야.--;;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이 책이 재출간되던지 아니면 새로운 것이 너를 유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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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째요. 일단 아쉬운대로

1. 중고알림등록을 신청해둔다.
2. 출판사에 전화해 재고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해본다.
3. 출판사에 전화해 재판을 신청한다.

아, 품절된 책을 구하는 아이가, 제가 다 안타까워요. 구해주고 싶네요. orz

blanca 2013-06-19 13:01   좋아요 0 | URL
아!!! 출판사에 전화를 한번 해 볼까요? 그런 방법이! 너무 고마워요. 다락방님. 삐뚤 빼뚤 품절된 책 목록을 메모지에 적어 놓았더라고요 ㅋㅋ 맞춤법도 틀리면서요. 아이가 이게 '절판'이라는 의미도 모르면서 알라딘에 좌르륵 뜬 목록을 적는 것을 보니 빵 터졌어요.

like 2013-06-1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전 조카 사주려고 찜해놨던 책 품절이 풀렸더라구요! 잊고 있다가 얼마전에 검색했더니 다시 판매^^(오늘 배송예정이에요)
크리스마스까지 책 꼭 구하실 수 있을 거에요.

blanca 2013-06-19 13:02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더 예쁘게 잘 찍어 쫙 떴으면 하는 소망이 생기네요^^아직 육개월이나 남았으니 기다려 볼까요?

꿈꾸는섬 2013-06-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님의 로망이 된 책이군요. 우선 급한대로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건 안될까요?

blanca 2013-06-19 13:02   좋아요 0 | URL
저희 집 근처 도서관에는 없어서요. 너무 아쉬워요. 없으니까 애는 더 보고 싶어하고. 집 앞에 큰 도서관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13-06-1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귀여운 분홍공주^^
산타 할아버지가 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저도 최근 스맛폰 다른 기종으로 바꿨는데 기능이 좋으니 더 손이 가는 경향이 있어요.
영화도 전자책도 그걸로 자꾸 보게되고 아무튼 좋은 만큼 역기능이 있어요.ㅠ 눈도 더 피로해지고ㅠ
요즘 사람들 서로 눈을 쳐다보는 시간보다 각자의 스맛폰을 보기 바쁘니 에효ㅠㅠ
디지털 치매,도 문제구요.

blanca 2013-06-19 13: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스마트폰 바꾸셨어요? 혹시 무엇으로 바꾸셨는지 만족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이런 것 선택하는 것도 너무 괴로워요. 근데 저도 그럴 거에요. 아마 또 중독될 것 같은. 지금 제 폰은 아예 키는데 오래 걸리니 멀리 하게 되는 장점이 있어서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래요. 저도 또 요새 고유명사 생각 안 나는 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레이야 2013-06-21 13:43   좋아요 0 | URL
갤럭시 노트 2에요.
모니터가 좀 크니까 전자책이나 영화 보기에 괜찮네요.^^

icaru 2013-06-1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이를 어째,, 세상에 책은 많은데,,, 딱 원하는 그 책이 없으니 말이죠...
저도 아이폰4 홈버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하는데,,, 아직 갈아탈 생각은 없구요 ㅎㅎ

blanca 2013-06-19 13:06   좋아요 0 | URL
어어! icaru님 폰도 그래요? 또 다른 사람도 그 얘기 하더라고요. 네 번 눌러야 된다고 ㅋㅋ 아, 너무 반가워요. 우리 아예 안 켜질 때까지 기다려 볼까요? ^^;; 이게 혹시 사망 징조면 곤란한데. 예전에 쓰던 폰이 하나 고장나더니 갑자기 죽어버리더라고요.

2013-06-19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0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3-06-20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워라~~~
다락방님 말씀처럼 출판사에 전화해서 재고 확인 및 재판을 희망한다고 말씀하세요^^
아마 큰 도서관에는 있을거예요.
프야님은 노트로 바꾸셨어요. 저도 노트!

blanca 2013-06-20 10:53   좋아요 0 | URL
아아! 노트군요.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 일단 구경부터 슬슬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jkim1117 2013-06-2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hopping.naver.com/search/all_search.nhn?query=EQ%EC%9D%98%20%EC%B2%9C%EC%9E%AC%EB%93%A4%20%EC%B6%94%EA%B0%80&cat_id=40004661&nv_mid=6965412383&frm=NVSCPRO

이거 아닌가요? 저희 아이도 좋아하는 책이라 이메일에서 이 글이 뜨길래 뭔가 하고 보니 고민중이신 것 같아서요... 이 시리즈는 성황리에 판매중이랍니다 ㅎㅎ 이건 추가세트구요, eq의 천재들 81권 구성으로 찾아보시면 원래의 세트에 이것까지 포함해서 가능하구요... 이 책 파는 사람 아니구요... 저희집 두 아이때문에 수 백번 가격비교하고 찾아본 경험으로 말씀드립니다~~ ^^

blanca 2013-06-24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찾아 보니 품절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 전집 출간이 되었네요.^^
 

'프랑스적'이라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연상시킬까. 코코샤넬과 각설탕, 소피 마르소와 바네사 파라디, 마리 앙투와네트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고향인 그곳은 무언가 조금 더 근사하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가본 적도 없고 제2외국어로 잠깐 공부했던 불어의 99%를 망각한 나로서는 큰 감회는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주 달달하고 감각적인 책인 줄만 알았다. 진지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뉴스위크>의 해외 통신원과 <뉴욕 타임스>의 지국장을 지내며 수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낸 저자 일레인의 이야기는 가볍지 않다. 그녀는 프랑스를 무작정 칭송하지도 않고 싸잡아 매도하거나 속단하지도 않는다. '유혹'이라는 키워드로 프랑스적인 것들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프랑스는 다채로운 프리즘으로 재조명되고 진지하게 때로는 더없이 흥미롭게 재해석된다.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향수, 정치인들, 란제리, 3성급 셰프, 와인, 심지어 잔 다르크까지 유혹의 엔진이 장착된 채 정교하게 가공된 '갈고닦은 아름다움'과 '쾌락에의 관용'으로 다시금 이야기되고 그 이야기는 더없이 유혹적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다시 이야기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색다른 면, 뒤안의 이야기들과 함께 그것들을 더 잘 어루만게 된다. 앎과 깨달음의 즐거움들은 끊임없이 연마된다.

 

 

 

 

 

 

 

 

 

 

 

 

 

 

 

 

게다가 프랑스는 아이들까지 우아하단다! 태어난 지 4개월만 지나면 엄마의 수면을 더이상 방해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도 얌전하고 심지어 코스요리까지 무난하게 소화해 낸다. 그런 엄마들은 금세 날씬한 몸매로 빠르게 직장에 복귀하고 육아를 험난한 여정이나 자신의 커리어의 장애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 관찰자 역시 윌스트리트저널의 경제 섹션 여기자로 미국인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엄마가 되고 육아가 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 여자들은 매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부담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것은 프랑스적인 것의 장점이기도 하고 가혹한 사회적 시선이기도 하다. 아이도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하고 정중한 배려를 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그리고 절제와 적절한 규제의 사회적 합의를 온건하게 도출해 낸 그 민주주의적 방식에 있어서는 칭찬 받아 마땅하겠지만 프랑스에서는 뚱뚱한 여자나 관리하지 않은 외모, 전업 주부는 설 곳이 없는 곳이다,라는 대단히 경직된 편견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용인되는 것들보다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곳들로 느껴졌다.

 

죽을 때까지 이성한테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유혹의 이데올로기는 젊음과 아름다움, 자기애가 뭉뚱그려져 자칫 인생이나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 쇠락,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저어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또한 그 반대편의 것들에 대한 거부감의 온건한 표현이기도 하다. 온순하고 예의바른 아이들로 가득한 공공장소는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의 또다른 형상화일런 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론은 우아함을 동경하면서 정작 발은 뜨거운 노면을 디디고 사는 지금이 더 다이나믹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저기'가 근사해도 나는 '여기'가 좀 더 좋다. 참, 미국의 여류언론인들이 그려낸 프랑스가 물론 '다'라고 보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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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6-1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제목이 굿이네요^^

blanca 2013-06-18 09:4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세실님^^ 여긴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막 내리니 시원해요. 일단 좀 쉬어가는 분위기고 무더워서 힘들었던 것들이 날아간 기분이네요. 거기는 장마가 시작되었는 지 모르겠어요. 중부부터 시작한 건 거의 이례적인 일이라고 뉴스에서 그러더라고요.

프레이야 2013-06-1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담아둔 책들이에요. 반가운 리뷰, 맛깔난 리뷰! 유월중순도 지나가고 있네요. 잘 읽고 잘 쓰시는 블랑카님.^^

blanca 2013-06-19 12:5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진짜 오늘 벌써 6월도 19일이 되었어요. 정말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저는 지금 정유정의 28을 배송받고 기대하는 중이랍니다.^^;;

꿈꾸는섬 2013-06-1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ㅎㅎ
첫번째 책은 저도 눈여겨 보던 책인데, 진지하군요.^^

blanca 2013-06-19 12:5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흥미위주로 씌어진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책은 아니더라고요.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아이들 여름방학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꿈꾸는 섬님도 미리 체력 충전 해 놓으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icaru 2013-06-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가 4개월이 지나도 보채고, 공공장소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한국 정서에서 자라는 아이라 그랬던 걸까요? ㅎ
여전히 님이 글이 근사해요~ 책도 그럴려나...
사람들이 프랑스에는 뚱뚱한 여자가 없어, 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먹거리에서 짐작했는데,,,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로는 먼지나는 발헤엄이 존재했네요.

blanca 2013-06-19 12:59   좋아요 0 | URL
이게 참 대단한 강박인 게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임산부의 체중 증가도 12키로까지만 관용적으로 봐 준다네요. 바게뜨 빵 사러 집 앞에 나가도 차려 입는다니 (실제로 그러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야구모자 눌러쓰고 동네 돌아다니는 저로서는 참 피곤해 보이는 일상입니다. 그래도 여자들이 참 예쁘고 매력적인 것은 사실인 듯 해요. 공짜는 없나 봐요^^;;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 다산책방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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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닐스의 이상한 여행>에서 닐스가 새를 타고 스웨덴 전역을 여행다니는 장면보다는 초입부에 어머니 아버지가 닐스가 교회에 안 가는 대신 그날 설교 내용이 담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책상에 억지로 앉히던 장면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책상에 성경의 페이지까지 확인하여 놓아주던 어머니의 자상함과 천방지축 닐스가 느끼던 답답함, 압박감이 그 또래 피어나기 시작하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저를 이루는 애정과 뒤섞여 혼란스러웠던 그 느낌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이름도 어려운 스웨덴의 여작가 셀마 라겔뢰프는 단 하나의 어린이 소설로 나를 사로잡았다. 파란 장정의 계몽사책의 후반부에는 항상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어 꼬박꼬박 읽었던 기억이 난다. 셀라 라겔뢰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만 쓴 것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도 썼는데 그게 아마 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였던 것같다.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터에 국내 첫 완역으로 드디어 셀마 여사의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기대했던 내용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스웨덴의 시골 베름란드를 배경으로 파계한 목사 예스타 베를링의 진지하고 낭만적인 연애담을 기대한다면 좀 황당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일단 이 책은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예스타 베를링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그와 그의 연인들이 삶을 더 풍성하게 인식하는 데에 부차적인 역할 정도로 그친다는 것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스웨덴의 아름답고 가공되지 않은 자연 풍광에 대한 근사한 묘사, 그곳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의 옴니버스, 끊임없이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 모험과 고난을 택하는 기사들의 방랑벽, 기사들을 거두어 먹이고 마을 전체의 경제를 책임지다 시피했던 소령 부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다층적인 인식 등이 보물 꾸러미처럼 펼쳐진다. 흔히 남미 소설들을 거론할 때 단골로 등장했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색채가 이 작품에서는 또 북유럽 식으로 재창조되어 현란하게 구현된다.

 

주인공 예스타 베를링도 그를 둘러싼 주위 인물들도 절대 선이나 악으로 조악하게 감침질되지 않는다. 예스타 베를링은 근사한 사내였지만 술독에 빠져 목사직에서 파면 당하고 브루뷔의 언덕을 떠돌다 옛사랑을 잃었지만 그 사랑이 남긴 재산과 지헤로 마을 전체를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삼셀리우스 소령 부인에게 의탁하게 되며 그녀 아래의 기사들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악의 현현 같은 사악한 지주 신트람에게 속아 소령 부인을 쫓아내고 기사관을 차지하게 된 기사들은 예스타 베를링을 둘러싼 경솔한 연애 사건에 일조들을 담당하면서 좌충우돌 마을을 말아먹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예스타 베를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사들의 실수 투성이의 삶에 대한 다양한 만화경이라 해도 될 듯하다. 예스타 베를링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기사들은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기사관으로 돌아오는 그 회귀의 도정에서 방황한다. 하나의 긴 이야기는 여러 장의 작은 이야기들 자체만으로 역동성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열하고 인정머리 없기로 유명한 브루뷔의 목사가 자신의 옛사랑이 죽음을 앞두고 젊은 시절의 연인을 추억하러 왔을 때에는 가장 정열적이고 진심어린 늙은 청년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죽음이 가지는 아름다운 종결의 의미와 초자연적인 느낌을 섬세한 언어로 되뇌이는 어머니의 이야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 기사가 이른 새벽 첫 햇살이 나무들 꼭대기에 불타고 있을 때 살그머니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머무르지 않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 하나 모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나의 퀼트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야기의 화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작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응축된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해도 될까? 지금까지 환상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벌들이 우리 주위를 내내 맴돌았다. 이 벌들이 어떻게 현실이라는 조그만 벌통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잘 살필 일이다.

- p.536

 

다 거짓부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삶과 나 자신을 잘 살핀다면 우리의 삶도 이처럼 환상을 현실 속에 꼭꼭 잘 눌러담는 능력에서 그 행복이 판가름나는 게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좋은 안내 지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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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 아니군요! 제인 에어 같은, 폭풍의 언덕 같은, 오만과 편견같은, 그런 로맨스 소설은 아니란 말이구요.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니, 저는 그쪽에 취약한데,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고마운 리뷰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3-06-07 11:1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사실 그런 류인줄 알고 읽다가 그만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어찌 어찌 읽아 보니 아주 독특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저도 사실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잘 안 맞는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류에 순수하게 몰입이 안 돼요. 그래도 이 책은 아주 참신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3-06-0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닐스가 탄 새가 기러기더군요. 시골 살 때 이웃에 거위가 있었는데 그 주인이 "기러기를 길들인 게 거위"라고 해서 아하...그렇군 했죠.

blanca 2013-06-07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보니 기러기더라고요.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다니 신기하네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3-06-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러기를 길들이면 거위가 된다는 얘기였어요.야생기러기를 사람이 잡아 집에서 가금류로 길들였다는 얘기죠.설마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을라구요~

blanca 2013-06-09 17:58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무식이 탄로났군요 ㅋㅋ 신기하네요. 결국 거위가 기러기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6-10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기러기 사진과 거위 사진을 비교하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 거위를 실물로 보신 적이 있나요? 거위를 안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요.

blanca 2013-06-11 09:32   좋아요 0 | URL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예요. 기억은 정확히 안 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