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런 이야기. 노년. 그것은 마치 대학살과 같다고 되뇌었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37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제 겨우 서른셋인,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드디어 등장한다.

 

 

 

 

 

 

 

 

 

 

 

 

 

 

 

"자신이 가지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개처럼 일한" 보험 외판원 아버지와 끊임없이 가족 전체를 통제하고 자기기만의 장치로 모정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대인 아이 앨릭스는 부모의 억압, 통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불평한다. 그런데 그 주체는 정작 이미 서른 셋까지 성장해 버린,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아직 미혼이고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앨릭스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신병 주치의임 직한 '선생님' 앞에서 부모가 강압적으로 수여한 '유대인 아이'라는 정체성의 그 얄팍한 모순과 자기기만적인 주술에 대한 처절한 공박과 순종적이고 온순하고 명철한 유대인 소년 뒤의 찌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아들의 간식 메뉴까지 통제하려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느라 나오지 않는 앨릭스의 내용물까지 확인해 보려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통렬한 익살. 그 속에는 '부모'라는 거대한 권력, 아니 우리 인간들이 문명화된 것으로 위장한 수많은 금기, 억제, 규율이 어떻게 하나의 진실을, 삶을, 생동을 억압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예시가 있다.

 

반면 하류층 출신의 여자를 성적인 노리개로 자신의 억압된 욕망의 환타지의 대체물로 (그러나 대단히 신랄하게 정당화하며) 이용하는 앨릭스의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을 하나의 희생물이라고 변명하며 정작 자신의 사회적 권력으로 한 여자를 억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여하튼 참으로 찌질한 녀석의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곳에 선 지점에서의 고백들.

 

화제가 되었던 선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앨릭스의 사춘기 시절 자위에의 탐닉에 할애한 장들은 이 책을 두었다 아이들이 갑자기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의 수위.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노년기를 읊조렸던 필립 로스 할아버지가 삼십오년도 더 전에는 이러한 앨릭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당혹감, 놀라움, 그러나 그 앨릭스의 불평들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어쩌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를 자신의 청사진대로 만들고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들을 대신 달성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욕구를 하나의 '사랑'이라 위장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주 위험한 부모로의 역할에서 균형감을 찾아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자신들만의 이너써클을 만들고 정작 유색인종에는 교묘한 무시를 일삼는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도덕적 기만. 그러니 토가 나오는 '공정한 척, 착한 척'에 대한 가차없는 까발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고 솔직해지기는 대단히 어렵다. 덜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의 사회화 과정인 것처럼 오인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앨랙스의 불평 앞에서 누구나 얼마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선언하고, 어머니가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대우한다고 위선을 떨었던 검은 청소부와 함께 식탁에 앉겠다고 주장했던 소년은 그러나 서른셋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열다섯의 소년이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하지 못한 공생 관계, 애착, 집착은 사실 서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서구 사회에서도 유독 이방인적인 것으로 우리의 끈끈한 부모, 자식 관계와 겹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단일 민족에 대한 자부심, 다른 인종에 대한 이질감, 거부감, 학업적 성취에 대한 높은 평가, 성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금기, 억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신나는 성토의 장에서 앨릭스는 그 잘 길들여짊에 대한 대가로 얻은 것들을 향유하며 뒤켠에서 성적 비행을 일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억압, 금기, 순종에 대한 반역,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 불평만 늘어놓다 판을 치워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마침표가 없는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것들은 마치 예언처럼 빨리 찾아오는 환멸과 종말 앞에 설 때 결국 돌아온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귀결은 이러한 것. 서른 셋임에도 부모 앞에서 열다섯이었던 아이는 망각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전에 일흔 다섯이 되어 '무'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고 만 것. 필립 로스는 말한다. "저는 분명히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쓰는 그런 주인공과 닮았지요."('작가란 무엇인가' 중 인용)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 무용한 시도들, 그 자체를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성과나 답이나 마침표가 없는 그 도정에 필립 로스가 말하는 '진실'이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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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4-03-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페이퍼를 읽고 보관함에 담습니다. 비록, 오래전에 사둔 에브리맨도 아직 못 읽었;;;
어흠, ;;; 저도 블랑카님처럼 읽고, 또 느끼고 싶어요.^^

blanca 2014-03-21 08:56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에브리맨이랑 함께 읽으면 정말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하고 의아해지실 거예요.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에브리맨이 더 좋았어요. 군더더기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잘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가 있구나, 싶었어요.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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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때로 지루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의 표면은 너무나 허술해서 어느 순간 찢어지고 여린 속살이 드러나고 삶은 저만치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준다. 영원한 평안과 불멸은 없기에 누구나 이러한 순간에 당도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듣고 볼 때 우리는 우리가 그 '누군가'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안도, 그래도 삶은 또 그런 결함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렇게 이다지도 연약하고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이라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끄달리는 작디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하필 그 때 임신 중이었고 아무래도 이러한 내용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뒤로 미루어 두었던 트루번 커포티의 논픽션 소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르르 굴러나올 것만 같았던 <풀잎하프>의 작가는 이제 잔혹한 일가족 몰살의 현장에 자신만의 현미경의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 전체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일단 그가 짚어가는 사건의 내막과 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의 단면들은 그의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들로 대단한 흡인력을 보인다. 1959년 캔자스 서부의 홀컴 마을에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발을 들여놓고 마는 것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버트 윌리엄 클러터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성실했고 또 그 만큼 부유했고 언제나 바라는 것을 어느 정도 손에 넣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자선에도 너그러웠고 홀컴 마을의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치들를 대표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뒤에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듯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중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11월의 어느 날, 사과를 먹기 좋은 날씨에 생명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여덟 시간 뒤, 그는 아내, 딸, 아들과 살해당한다.

 

원한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고작 없어진 40달러의 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강도 살인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 커포티는 마지막에 범인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수법이 아닌 애초 처음부터 이 무자비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사내의 삶도 병렬적으로 배치, 추적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이 두 명의 교도소 동기는 다른 잔챙이 같은 범죄들은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정작 리버밸리 농장주 가족의 살인 사건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지점에 있다. 분명 범인은 맞는데 그 범인의 범죄 현장에서의 행각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커포티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편견 없이 딕과 페리, 이 두 청년 그 자체를 먼저 알아가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비교적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딕과는 달리 인디언 어머니의 피가 섞이고 체구가 왜소한 페리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애정과 연민이 닿아 있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페리는 양친 부모에게 학대당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고아원에서 방치되는 등 비참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정상적인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고 따뜻함에 대한 기대와도 멀었다. 페리는 상처받은 짐승의 오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트루먼 커포티는 형사 듀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이 사건 취재 중 페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객관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이 범죄를 추동한 것은 감옥 안에서 우연히 리버밸리 농장에서 일했던 이에게서 농장주의 금고 이야기를 듣고 이 농장을 털 생각을 한 딕이었다. 그러나 이 범죄의 전면에서 범죄 자체를 주도한 것처럼 나오는 페리는 사형 집행앞에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사죄한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이나 실제 선고와 집행 사이의 그 머나먼 간극의 허점에 대한 이야기는 담담하게 덧붙여져 있지만 핵심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는 욕심을 가지지는 않는 그 현명한 지점을 포작해 낸 대단한 명민함이 돋보인다.

 

트루먼 커포티는 피해자의 관점도 가해자의 관점도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마는 수사팀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그들 편에 다가가 있다. 이것은 중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객관성에 대한 집착도 아니다. 다만 어떤 진실, 삶의 그 허무한 실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 대한 애면글면한 천착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처음에는 애꿎은 무고한 선량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가까이에는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죽임을 당하지만 정말 끝에는 사 년의 시간동안 그 사건에 시달림을 받았던 형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엔딩씬이다. 한 편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들은 또 삶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것처럼. 카버의 말처럼 소설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삶을 바꿀 수는 없다.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서 어쩐지 허무했다.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분명 행복해지는 책은 아니다.

 

이 작품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초라한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삶은 하나의 첨언 같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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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3-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놓고 영화로 먼저 봤네요. 얼마전에 약물과다로 돌아가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카포티로 연기했던 그 영화요. 제가 산 책은 그래서 표지에 배우얼굴이 나와있어요. 영화에서는 이 작가를 좀 안좋게 표현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blanca 2014-03-13 21:2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이 영화 못 봤는데 최근에 죽은 배우가 커포티로 분했군요! 이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너무 글을 잘 쓰는 작가지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지만 이 작가의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결핍을 숨기기 위한 과장이 상당 부분 작용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후애(厚愛) 2014-03-1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가끔씩 다녀가는데 댓글을 안 남겨서 너무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blanca 2014-03-17 10:24   좋아요 0 | URL
후애님 서재는 종종 방문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한 반에 육십삼 명이 이부제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오후반이 되면 커다란 운동장 뒤켠의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동생을 가져 배가 남산만했다. 나의 1학년은 너무 춥고 슬프고 두려운 기억들.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육십 명 넘게 거느려야 했던 선생님은 이상적인 스승 이전에 이미 너무나 지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체벌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자욱이 남았지만 이제는 이해의 덮개로 슬몃 지워보고 싶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있다는 말. 누구든 훌륭해지기는 쉽지 않은 그런 상황.

 

학부모가 되었다. 아이는 또 나만큼이나 작다. 유치원과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끝이 올라가는 상냥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모든 것을 들어주고 도와주던 시대는 마감했다. 형형색깔의 아기자기한 주변환경도 조금 살풍경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규칙과 통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이 반 학생은 다해서 스물다섯 명. 오십 명을 넘어가는 아이를 통제해야 했던 피곤함은 다행히 없다. 아, 그런데 엄마는 아기를 안고 업고 있다. 아이를 밀착해서 도와줄 수는 없는 여건. 게다가 동생은 이제 엄마를 안다. 제3자에게 맡길 수 없는 한계. 학교에서는 아직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한다. 엄마의 딸이었던 나의 1학년과 나의 딸의 1학년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그 추웠던 1학년에서 저만치 물러나지 못했다. 자꾸 돌아오고야 마는 것들.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힘들지만 그래서 읽고 쓸 시간이 없지만 아니, 읽기만 하고 정리를 할 시간은 없지만 무언가를 끄적거릴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으려 한다. 말대꾸를 시작한 아이가 사실은 나에게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도 결국은 책으로 얻어낸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벌써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많은 것들의 정서를 잃어 버렸다. 이제 눈높이를 조금 낮추어도 될 텐데.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아이 앞에서 잘난 척을 한다. 중학교 때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에 흠뻑 빠져 티비 앞에서 심드렁한 엄마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렇게도 가슴 떨리는데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스타가 더이상 멋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나이가 되면 더이상 가슴 터지도록 눈부시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이 그레그라는 아이의 눈높이는 작가의 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책인데 내가 잊어버렸던 많은 것들이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이 책을 통하여 걸어들어왔다. 웃기기만 한 가벼운 책은 아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느끼는 왕따 문제, 형제 간의 소외감, 어른들의 편견, 성적, 숙제의 중압감 등이 그레그를 둘러싼 코믹한 일화들을 통하여 묘사된다. 구태여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 천천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초특급 엄친아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레그와 같은 구석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정도 된 아이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같다. 일부러 어떤 화제나 공감대를 찾아내지 않고 그냥 이 책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만으로도 아이와의 교감, 공감이 가능할 듯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씌어져 읽기 어렵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 솔직히 막 책장이 넘어갈 정도로 서사가 긴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분량 자체가 많지 않고 자식을 여덟이나 둔 중년의 램지 부인과 시대의 인습과 편견에 저항하는 그림 그리는 여자 릴리 브리스코에 투영된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모습을 짐작해 보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어느 순간 램지 부인은 죽고 그녀의 집은 쇠락하고 릴리 브리스코는 늙어 다시 램지 부인의 집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램지 부인의 아이들은 반항과 살의의 대상인 아버지 램지와 함께 등대로 향한다. 이 모든 것을 상징과 은유로 읽는다면 <등대로>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어려운 추상화가 되어 버린다. 그저 '삶' 앞에서 때로 무력하지만 어떤 지향과 영원히 남을 불멸의 것을 추구하며 '꿈'을 꾸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 낸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식들 때문에 최고의 것을 향한 지향의 노정에서 넘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좌절된 꿈을 그린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에 대한 하나의 헌정된 이해와 경의일런지도 모르겠다. 릴리는 홀아비가 된 램지에게 그가 바란 '공감'을 의도적으로 주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등대에의 상륙을 예감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완성하려 했던 그림을 마침내 마친다.

 

 

 

 앨리스 먼로는 현대 단편 소설의 쇠락에 단연코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이 상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가 무엇인가, 조금은 갸우뚱 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면 그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노벨 문학상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어야 받을 수 있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작품은 그녀가 절필을 선언하기 직전에 낸 것이라 하니 여든이 넘은 이 작가의 가장 최근의 성취를 목도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에 탐닉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일본에 가 닿기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버림받고 나중에 우연히 조우하는 그 광경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아문센>, 장애가 있는 부유한 여자와의 긴 외도로 뜯어낸 돈으로 자신의 안온한 가정생활을 유지했던 남자에 대한 깨달음이 반전인 <코리>,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같은 문장을 얻게 하는 <돌리>.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여든이 넘어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여자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망한 사업, 어머니의 병("그것은 너무 일찍 발병한 파킨슨병이었고, 그때 어머니는 사십대였다."),아버지의 구타.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을 불행한 것으로 추억하지 않는다. 설거지가 끝나면 문짝이 떨어진 따뜻한 오븐에 발을 넣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는 모습. 혀가 굳어버린 어머니의 말을 대신 통역하는 그녀. 아이 맡길 사람과 차비가 없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 일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용서하며 사는 삶으로 수긍해버리는 마지막 문장.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것을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대가라면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은 비겁한 것일까.

 

 

 

 앨리스 먼로는 평생 같은 주제에 대한 변주라는 비난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주영 작가의 어린 시절의 변주는... <홍어>에서도 <잘 가요 엄마>에서도 또 여기에서도 항상 배고픈 소년과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날품을 팔아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자식을 키우는 홀어머니에 대한 애달픈 묘사는 각도와 결과 요철을 달리해서 변주된다. 그러나 그 변주는 지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아픎을 더 세밀하고 절절한 것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섬세하고 생생하고 형형한 문장들 속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대체된 삶으로 가능하다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세 살 터울의 굶주림으로 마른 버짐이 핀 아우가 아직도 어미에게 업혀야 하는 나이임에도 형과 품팔이를 나간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 따라 나섰다 주인집 아이를 대신 업고 있는 엄마의모습에서 뒤돌아서는 장면은 "세상은 아무리 비열한 배반도 능히 저지를 수 있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너무나 처절하고 너무나 빈한하고 너무나 슬프고 그럼에도 아이들의 그 속절없는 기대와 믿음과 희망의 부스러기를 하나 하나 짚어가는 아름다운 눈길이 있다. 가난이 훑고 간 그 너절한 뒤켠에서도 고고함과 꿈을 지키려 하는 모자의 모습은 한 작가를 태동시킨 저력이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한 곁눈질을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조금 덜 치사하고 조금 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잠깐 청명했던 하늘은 다시 찌푸리고 울고 다닐 줄 알았던 아이는 웃으며 교문을 나오고 설마, 하며 다시 친정 엄마에게 시도했던 육개월 아기의 엄마 인식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고(대성통곡) 나는 이제 마흔이라는 나이를 향해 걸어가고. 모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가능해지고 당연할 것으로 알았던 일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그렇게 '절대'라는 말과 절대 멀어지는 게 삶인 것 같다. 봄이 오는 것을 보면. 그럴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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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3-0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부모 되신거 축하드립니다. 첫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때 참 많이 설레였죠~~~ 제 아이가 벌써 고3이라니.....ㅎ
학생수가 반으로 준만큼 선생님의 손길도 많이 닿아서 다행입니다. 더 밀착되는 느낌은 있더라구요.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단편속에 숨어있는 반전이 참 기발하게 생각되더라구요^^
<디어 라이프>도 도전해야 겠군요.

blanca 2014-03-08 19:1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도 유치원생이랑 거의 같은 스물 다섯이라는 숫자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저는 이상스레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어 괜히 어렵게 생각하고 그랬는데 말씀도 다정하고 좋은 분일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제 아이는 생애 처음 만나는 공교육 현장에서의 선생님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기대와 기억을 가져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더 좋았어요^^

꿈꾸는섬 2014-03-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님 입학을 축하해요.^^
둘째가 어리면 힘들더라구요. 현준이 입학하고 현수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ㅜㅜ
그래도 이제 곧 자립하겠죠.^^

blanca 2014-03-08 19:20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현수도 축하드려요! 아, 저 같은 경우는 잘 눈에 띄지 않아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당장 학부모 총회에 애를 업고 가야 하나, 고민이에요. 요새 한시도 안 떨어지려 해서...민폐나 되지 않을 지 모르겠어요.

감은빛 2014-03-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아이가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메고 나설 때,
저 조그만 녀석이 저 큰 가방을 메가 다니는구나.
나도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학부형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학교라는 또 다른 세상에서 아이가 잘 적응하기를 바래요!

blanca 2014-03-12 15: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선배님이시군요~ 아직 적응기간이라 얼떨떨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은 부분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같은 분은 아직 결혼도 안 한 동창들을 보면 "너희들은 언제 결혼해서 애기 낳아 학부모 될 거니..."하는 마음이 들 거에요.

blanca 2014-03-13 21:29   좋아요 0 | URL
ㅋㅋ 정말 친한 친구가 아직 솔로예요. 저는 지금 결혼해서 아이 낳으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삼십 대 중반의 경계가 가지는 의미가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요.
 
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움베르트 에코, 오르한 파묵,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 이언 매큐언, 필립 로스, 밀란 쿤데라, 레이먼드 카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E.M 포스터.

 

움베르트 에코와 오르한 파묵, 폴 오스터의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루키는 소설을 제외한 에세이, 이언 매큐언은 <속죄>, 밀란 쿤데라는 <농담>,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 카버는 <대성당>,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 헤밍웨이는 제대로 다 읽은 것인지 기억 안 나는 대부분의 작품들, 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누워 죽어 있을 때>, 포스터는 <전망 좋은 방>의 앞부분 정도.

 

그러나 '완강한 무관심'이라는 전부를 다 아우르려는 만용을 경계하는 신선한 개념과 글쓰기를 기본적으로 '사랑의 행위'라고 보는 에코의 "저는 모든 것을 후회해요"라는 고백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는 이야기다. 작품을 다 쓰고도 다시 타자기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손끝으로 체감하는 폴 오스터가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다음에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는 "인생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알 수 없다."는 덧붙임으로 더없이 투명해진다. 그래, 분명 내가 느끼는 것들, 하지만 이야기하여질 수 없고 언어로 담아낼 수 없었던 것들을 명징하게 눈 앞으로 불러오는 그의 재능은 그의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파리 리뷰 인터뷰'의 강력한 매력이다.

 

모든 작가는 믿을 만한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중략> 그렇지만 독자는 솔직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독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격입니다.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거짓으로 위로해서도 안 되며, 칭찬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칭찬을 해서도 안 됩니다.

-P.181 

폴 오스터의 이야기다. 이것이 그 인터뷰 자체의 질과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작가와의 인터뷰가 고른 흥미와 감동과 몰입을 자아낸 것은 아니다. 대단히 기대했던 필립 로스는 아직 <에브리맨>을 쓰기 전이라 그런지 도통 읽어보지 못한 작품과 캐릭터들에 집중한 이야기가 나로서는 노년의 대작가가 늙음과 죽음을 그렇게도 생생하고 포괄적으로 그려 낸 연유를 알아내지 못해 아쉬웠고 밀란 쿤데라의 작품의 기법은 평범한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어렵게 느껴져 알아듣는 데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왜 카버가 단편작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삶 앞에서 그가 느꼈던 무기력함과 고단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럼에도 그가 사치라고 생각했던 예술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 지를 가감없이 이야기하는 대목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답고 슬픈 단편 같았다. 나는 정말 레이먼드 카버가 이런지 몰랐다. 정말 몰랐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살아남고, 공과금을 내고, 식구들을 먹이고, 동시에 자신을 작가로 생각하고 글쓰기를 배우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해 동안 쓰레기 같은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글을 쓰려고 애쓰면서 제가 빨리 끝낼 수 있는 걸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한 권에 2~3년이 걸리는 소설을 쓸 방법이 없었어요. <중략> 그래서 단편이나 시를 썼지요. 삶이 제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언제나 엄청나게 많은 좌절감에 직면해야 했어요. <중략>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고, 언제나 한 발만 내딛으면 파산이 기다리고 있었어요.-p.323 

회복된 알코올 의존자라 자신을 명명하는 레이먼드 카버는 열여덟에 결혼해 열아홉에 아빠가 되었다. 그 부부에게 청춘이라고 할 게 없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전설로 남은 위대한 단편 작가의 실제 삶은 얼마나 처절했는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니 그는 삶을 제대로 알았다. 겉만 핥고 남는 시간에 여유롭게 써대는 그런 긴 이야기 대신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이상과 꿈에 좌절당하는 현실의 속살을 절절하게 알기에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은 소설의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라 반드시 카버의 것, 그의 작품에 적용되는 찬사일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르케스는 기대 이상으로 대단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다섯 권의 책을 내고도 단 한 권의 인세도 받지 못했다는 이 작가는 노벨상은 자신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단었했는데 노벨상을 결국 받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심심한 위로를 표해야 할 것 같다. 계속해서 작가에게 명성이 가져오는 해악과 불편함에 대하여 역설하는 마르케스는 그것이 나쁜  고독을 만들기 때문에 권력자의 고독과 닮아 있다고 덧붙인다. 게다가 소설을 읽는 대신, 여성 잡지와 가십을 읽느라 바쁘다는 너스레와 정말로 유일하게 평생 동안 후회하는 일이 딸이 없다는 점이라는 고백은 이 작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아쉬울 정도로 유쾌할 것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 아주 귀엽고 유쾌한 사람인 것 같다.

 

노벨상을 받기 전의 마르케스와 아직 <에브리맨>을 쓰기 전의 필립 로스는, 그리고 세상의 온갖 찬사를 받기 전의 레이먼드 카버는 마치 결말을 다 알고 있는데 입에 침을 축이며 그것을 머금고 있는 알고 있는 자의 여유를 두둑하게 하는 묘한 이끌림이다. 한편 그러기 전의 그들이 그런 후의 그들과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과 아쉬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백이다.

 

솔직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폴 오스터의 말을 유념하고. 그럼에도 이 책은 칭찬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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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2-0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가 귀엽고 유쾌한 사람이었군요^^
오늘 아침 출근길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초등 두 아이의 엄마이며 학원 강사인 직장맘의 육아 애환을 듣는데 눈물 나더라구요. 레이먼드 카버........에구 딱해라.

blanca 2014-02-06 22:11   좋아요 0 | URL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고백하는 모습이 사실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작가가. 읽다가 가슴이 참 아프더라고요. 저는 막연히 알코올 중독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왜 술에 빠지게 되었는 지 현실적인 고통, 좌절로 막다른 골목에 빠진 결과였다는 것을 (물론 그게 잘못된 거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듣고 나니 그런 상황에서 빚어낸 그의 작품들이 더 빛나게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4-02-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벌써 이 책을 읽으셨군요.
신문의 신간 안내 면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 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던 책이에요. ^^

blanca 2014-02-06 22:11   좋아요 0 | URL
저도 관심만 가지다가 읽게 되었는데 아주 너덜너덜해졌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참 좋았어요, 페크님.

mira 2014-02-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고뇌들이 제대로 나와있네요. 읽고 싶어지는군요

blanca 2014-02-06 22:13   좋아요 0 | URL
mira-da님, 사실 작가들의 소설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이러한 사적인 고백들과 어우러진 인터뷰가 참 흥미롭기도 하고 그 작가의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정말 작품 얘기 위주로만 한 인터뷰도 있어요. 밀란 쿤데라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저는 그래서 좀 오히려 섭섭하더라고요.^^;

transient-guest 2014-02-07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솔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팬심이랄까, 그저 그 작가의 글은 무조건 읽고만 싶고,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두 개를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더 유명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더 잔잔한 맛이 느껴져 좋아합니다.

blanca 2014-02-07 13:1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관심이 있었는데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솔직히 <백년 동안의 고독>이 저의 취향이 아니었던 터라서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입이 좀 힘들었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너무 좋아하는 작가인데 역시 인터뷰 내용 듣고 나니 더욱 더. 정말 정직하게 솔직한 사람 같았어요.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삶 그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면 그는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는 모습이 진정성이 있어 보였어요.

감은빛 2014-02-2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의 인터뷰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움베르트 에코와 오르한 파묵은 읽어봤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책장에 방치중이예요.
헤밍웨이는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막상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네요.
나머지 작가들은 확실히 읽은 기억이 없네요.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을 시작으로 저 작가들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 읽고 싶어져요.

blanca 2014-03-01 08:0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재미있어요. 에코와 파묵을 읽어보셨다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저도 <백년 동안의 고독>은 힘겹게 읽었어요^^;;

앤의다락방 2014-12-23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이면 아마 주문한 책들중에 이 책도 섞여 배달 됩니다~ 읽고 싶은책이었거든요~ 이 리뷰를 보니 더욱 기대되요^^

blanca 2014-12-26 07:34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늦었지요? 지금쯤 이미 다 읽으셨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보내셨겠죠!

에이바 2015-06-1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작가란 무엇인가` 1권이 2014년에 나왔었군요. 인터뷰는 더 오래되었지만, 개인적으로 깔끔했다고 느낀 인터뷰는 포크너였고요. 카버와 오스터 인터뷰는 작가의 인성이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따뜻하고 진솔하고요... 전 파묵 인터뷰가 별로였어요.
 

김주영이라는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됐다. 아쉽게도 유명한 <객주>는 읽어보지 못했다.

 

"잘 가요, 엄마."

안개처럼 씨앗처럼...... 한평생 무겁고 가혹한 삶의 중력에서 벗어날 날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한줌의 먼지였다. 그러나 민들레 꽃씨가 되어 바람을 타고 멀리로 흩어지는 것은 잠깐의 착시였을 뿐, 먼 느낌이 들도록 던진 몇 줌의 먼지는 대부분 우리들 두 사람의 바짓가랑이와 구두 위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해주 최씨였던 어머니는 끼닛거리 마련에 평생을 박해받은 이승에서 처연하게 소멸되고 말았다.

- 김주영 <잘 가요 엄마>p.88

 

 

 

어떤 이야기는 마치 작가가 단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픽션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작가를 만나게 된 첫 작품이면서도 내도록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도저히 억지로 그냥 만들어 낼 수 없을 것같은 느낌. 정묘하고 아름다운 묘사는 작가의 가슴에서 나와 손끝으로 영글었다. 소설은 정말이지 아무나 막 되는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절로 내려앉는 처절한 문장들. 책장이 쉽게 넘어가도 아쉽고 더디게 넘어가도 아쉽다.

 

구순이 넘은 노모가 자식들과 며느리에게 천덕꾸러기처럼 대우받다 혹은 스스로가 어느 정도 자초하기도 한 소외에 갇혀 있다 슬프게 사라지는 장면.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들의 곡절 많은 삶의 복기. 소설 중간을 무지르고 바로 '작가의 말'로 가본다.

 

어머니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로부터 유린당하고 희생당하면서도 그런 질곡과는 무관심한 채로 일생을 보냈다. 오히려 그 참혹한 공포심을 끌어안고 흡사 아무런 구애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혹은 남의 것이든 끌어안고 살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죽음조차 아무런 불평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곧 함정은 아니란 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작가의 말 중

 

 

어디까지가 작가의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그가 만들어 낸 이야기인 지의 그 모호한 경계쯤에 그의 가엾은 '어머니'는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어머니'는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고단한 삶의 뒤안길에 서성인다. 일단 그녀는 그 시대에서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남편의 사랑과 부양을 받을 수 없었다. 성이 다른 두 아이를 데리고 평생을 신역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장남은  머리가 영글자 그녀를 떠나버린다. 나이가 들어서는 유명해진 아들의 뒤켠에서 숨을 죽이고 엎드려 지낸다. 그녀의 수명은 길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 염꾼들 앞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져 쪼그라든 그녀의 몸은 마침내 돌아온 아들 앞에서 눈물겹다.

 

대문이나 사립문, 담도 울도 없었던 초라한 집에서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와 배를 곯아야 했던 어린 아들이 새아버지와 의붓아우를 얻게 되며 느꼈던 소외감과 비애는... 새아버지가 나타난 후로 잠들면 따뜻한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 건넌방에 옮겨질 때마다 느꼈던 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것같은 느낌에 대한 묘사는 이윽고 몰래 나타나 아들을 껴안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눈물에 대한 감각으로 더욱 아프다. 아들을 사랑했지만 아들은 어미의 그 사랑을 실감하지도 받아내지도 못한다. 새아버지와 새아우, 믿고 의지했던 사촌누이로 만나야 했던 친누이의 야반도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친구와의 이별, '나'는 설 곳이 없어 떠나고야 말았다. 어린 마음은 오기와 복수심, 치기로 꽁꽁 얼고 만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제 노인이라고 불려도 될 만치 늙어서도 이러한 어린 아이는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치뜬다. 그러니 그와 어머니와의 이별은 화해와 용서, 사랑으로 감동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는 못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사내의 모습은 그러니 더욱 비감어리고 공감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깨닫고 성숙하고 용서하고 감내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렇다면 그것은 위장이자 위선이자 거짓말이다.

 

 

 

 

홍어를 떠올리면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먹게 되었던 그 비릿하고 충격적인 맛이 코를 알싸하게 만든다. 정말이지 지독했다. 첫맛이 전부라 착각하며 안심했던 나를 한번에 가격했던 그 암모니아의 잔향. 그 후로 홍어는 나에게 쉽지 않다. 역시 같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표징. 떠난 아버지. 어머니와 남은 '나'라는 사내아이. <잘 가요 엄마>와 비슷한 구도의 가족. 설국을 뚫고 하나씩 찾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또 떠낢. 사실 이 소설을 서사의 다이나믹함으로 이해하려 하면 곤란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만큼 눈이 덮어버린 그 풍경 위로 사각 사각 밟고 걸어오고 걸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문시처럼 눈부시다. 작가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산고 끝에 새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자로 보인다. 분명 그의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 누가 이 이야기를 펼쳐든들 그의 호흡 앞에서 외면할 수 있을까.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 눈을 뚫고 그해 겨울 눈을 살고 사는 삼례, 집을 나간 아버지가 결국 돌아올 것인지, 어머니는 그 아버지를 맞아줄 것인지, 부엌에서 사라져 버린 홍어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모든 것에 대한 답 대신 그 질문들을 충실히 살아가는 인물들의 그 삶을 정직하게 맞아내는 열심에 그저 감탄하게 되어버리는 이야기. '홍어'는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나 쉽지 않고 역시나 끈질긴 잔향이 남는다. 그러니 홍어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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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주영 님의 소설을 저는 '신문 연재'로 처음 만났었는데 '81년과 '82년까지는 꼬박 꼬박 읽었던 듯해요.('83년 이후엔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그 분의 소설을 못 읽었죠.) 그 당시 저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할 때였는데, 하숙생을 많이 치는 하숙집에서는 대개 주요 일간지 서넛 정도는 보는 편이었죠. 아침밥을 먹다가도 연재소설을 읽고, 그때 못 읽으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신문을 찾아서라도 읽곤 했었지요. 그땐 참 모든 전화도 하숙집 여주인을 통하지 않으면 받지도 걸지도 못할 때였죠.

김주영 님의 연재소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깊이와 가슴 깊숙한 곳을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쑤시는 듯한 맛이 있었지요. 이 분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이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 마을과 이십 리 남짓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특히 고향 어르신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답니다. 이문열 작가의 고향(영양군 석보면) 또한 김주영 소설가의 고향인 진보와는 지척인데, 두 사람은 거의 동향 사람이라고 할 만한데 작품과 작풍이 다른 게 저로서는 몹시 흥미롭더군요. 아마도 이문열 작가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찍 상경하는 바람에 (제 생각으로는) 도시물을 많이 먹은 듯한 반면 김주영 작가는 어렵게 자랐고 안동에서 십여 년 동안 엽연초 생산조합의 주사로 일할 정도로 시골 생활을 오래 한 경험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어요.

blanca 2014-01-28 13:00   좋아요 0 | URL
oren님 댓글 읽으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얻네요. 김주영 작가가 실제로도 어렵게 컸군요. 군데군데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궁핍에 대한 묘사가 가슴을 아프게 해서 아, 이 작가의 성장 과정에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많았겠구나, 하고 짐작만 했어요. oren님의 댓글 속에서 대학 시절 하숙집에서 연재 소설을 읽던 청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순오기 2014-01-30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위치 레시피는 페이퍼에 있는 대로 하되, 재료는 그때 그때 냉장고에 있는 게 뭐냐에 따라 달라지죠.^^
감자 삶을 때 소금을 조금 넣으면 되는데, 저는 되도록 싱겁게 먹으려고 소금 안 넣어요.
그래도 식품마다 소금을 함유하고 있으니 요플레만 해도 괜찮았어요.
어제는 아들이 휴가와서 샌드위치 먹고 싶대서,
감자와 요플레는 기본이고 양배추와 사과에 견과류도 넣고 딸기를 듬뿍 얹어 만들었어요!^^

blanca 2014-02-01 09:5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이제 한창 마무리하시고 쉬고 계실까요? 저도 명절 잘 보내고 아기 때문에 짬을 못 내 이제서야 커피 한 잔 하네요. 친절한 레시피 잘 참고해서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 볼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