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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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를 나왔지만 교사가 되지 않았다. 아니 되지 못했다. 대학 4학년 때 나간 교생 실습, 교실에서 아이들은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기도 했고 나의 예상과 흡사한 모습이기도 했다. 가장 지척에서 가장 오랫동안 볼 수 있었던 '교사'라는 직업과는 영영 멀어져 버렸다.

 

아이를 낳았다. 우연히 가장 친하게 된 동생은 열정적인 교사였다. 아이를 함께 키우며 우리는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녀가 점점 부러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더 교실에서의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 그녀의 모습은 내가 가지 않았던, 못했던 길에서 더욱 빛났다. 교권은 무너지고 교실은 붕괴되었다,고 연일 떠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교사들은 아이들 곁에서 죽고 아이들을 껴안았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위대한 일도 이루어지는 법인 것같다.

 

1학년, 2학년, 3학년. 항상 오십 명을 넘었던 학생. 선생님들은 지쳐 있었고 아이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쓰다듬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도무지 수업 내용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칠판에 판서한 글씨들이 희미해 제대로 필기해 집에 가서 짚어 볼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나 하나로 우주 전체를 채울 것도 같은데 저기 저 높은 곳에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생님의 눈길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어도 누구하나 물어봐 주지 않았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물론 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열등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춥고 초라하고 가슴 아픈 일인지 너무 일찍 알아버려 후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을 올리고 친구들과 교감하며 즐겁게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이 들어 가며 돌아오는 기억은 전반전의 것인가 보다. 후반전을 잘 뛰어도 전반전에 벤치에서 몸을 구부리고 앉아 지명을 기다리던 서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는 '교사'는 나에게 다소 음울하고 차갑고 슬픈 울림을 가진다.

 

백 세를 바라보는 엄마 앞에서 교사로 수십 년을 재직하고 베스트셀러를 펴 낸 유명 작가는 아직 여전히 열등생이다. 세 명의 형과는 달리 연산, 철자법에서 헤매고 꼴찌와 가까웠던 아이의 기억은 인생 중후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교란 속에서 흔들리는 노모 앞에서 혼자 자립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걱정거리다. 다니엘 페낙,은 '학교의 슬픔' 그 자체다. 집안에서 말썽을 일으켜 간 기숙학교에서 그는 진짜 교사를 만난다. 그는 젊고 열정적인 교사가 아니라 교직 말년을 아이들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그는 다니엘의 내면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다. 일주일에 한장씩 소설을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하게 한 국어 선생님은 다니엘을 누군가의 앞에서 진짜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는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성장하여 자신과 같은 열등생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뭐라도 해야지 '결코 아무것도'라는 말은 '결코' 없다는 것, 나와 내 동료들은 절대 그들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이를 수 있게 하려면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p.206

 

다니엘 페낙이 직접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암송하게 하고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재미있는 내용으로 받아쓰기를 정기적으로 테스트하며 한 명씩 한 명씩 손을 잡고 언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재미를 알게 하는 이야기는 무척 유쾌하고 역동적이다. 반항하는 아이, 비아냥거리는 아이들 모두를 뒷전으로 밀어내지 않고 함께 부둥켜 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려는 글 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지나친 이상화라는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솔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에서 학생의 모습을 부모의 부에 기생하는 자본주의 소비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에 분노한다. 오늘날의 젊은 교사들이 이러한 고객들로 이루어진 학급을 대면하는 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로운 것이다. 익명으로 떠오른 아이들을 지칭한 것도 아이들이 입은 옷과 신발의 메이커였던 슬픈 현실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상품을 만들어 순진한 열망을 소비욕으로 치환시킨 어른들에게 의당 가해져야 하는 비난의 몫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 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광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p.348

 

우리는 '아이였을 때'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도구화한다. 성장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들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어른의 말에 반항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름의 방법으로 순종하고 이 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다니엘 페낙이 부끄럽게 덧붙인 사랑.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래서 투박한 진실인 사랑. 그리고 언제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일. 심지어 우리의 손을 뿌리쳐도 포기하지 않는 일. 왜냐하면 주머니에 넣은 그 아이의 손은 사실 잡아 줄 누군가만을 기다리는 중이므로. 이것은 바로 나에게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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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6-26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토닥토닥...그랬었구나....교사가 되셨어도 아이들을 참 따뜻하게 보듬어 안았을텐데.....
가끔 학창시절로 돌아가보면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혼난 기억, 친구들과 싸웠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나더라구요. 나름 그 당시에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가? ㅎㅎ
다섯 종류의 아이들....맘 아픈 현실입니다.

blanca 2014-06-26 18:5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교사가 되지 않았던 게 아이들 입장에서 다행이었을 거라고 ^^;;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다시 생각이 바뀌어 노력하는 좋은 교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가져 봅니다. 저는 사실 가장 자주 떠오르는 기억은 중2 언저리인 것 같아요. 그 때 친구들이 제일 강렬하게 남아서요.

transient-guest 2014-07-09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가 무척 싫었어요. 국민학교도 중학교도 청소하고 매맞고 시달린 기억, 그리고 집-학교를 오가는데 하루에 평균 2-3시간을 쓴 기억밖에 없어요. 그나마 고등학교부터는 미국에서 다녔는데, 일단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리지 않는것, 그리고 3시면 학교수업이 모두 끝난다는게 초기의 어려움을 잊게 했지요. 그리고 처음에 와서는 토-일 쉬는게 그냥 매우 연휴 같더라구요.ㅎㅎ

blanca 2014-07-09 14:01   좋아요 0 | URL
rransient님 댓글 읽다 웃음이 나왔어요^^;; 청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 여러가지로 아직 '학교'가 가지는 문제는 항상 불거지고 결핍은 따라오고.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또 내일이 나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요. 저는 수업 시간에 많이 졸았던 기억, 그리고 여중, 여고를 다녀 아이들이랑 연예인 이야기로 꽃피웠던 기억, 학교 앞 매점에서 열심히 군것질하던 기억 같은 게 많이 남아요.

transient-guest 2014-07-10 01:30   좋아요 0 | URL
지인들 중에 새로 설립된 사립학교에 1기생으로 들어간 이는 학교를 지어가면서 다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1학년 교사만 짓고 학생을 받아서 나머지 공사를 그해에 진행하고, 2학년으로 가면, 다시 3학년 교사를 짓는 식으로 부실하게 운영한 것이겠지요.
 

 

모두는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장님에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잔혹한 짐승들의 핵 주위에 있는 '불구'의 무리였다. 거의 모두가 비겁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p.46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 중 인용된 싯구는 이 책의 '제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것은 지옥이다."라고 절규했던 프리모 레비는 40년이 지난 뒤 젊은이들에게 이 악의 현현이 점점 멀고 희미하게 물러나는 것에, 아니 이 악령이 다른 형태로 부활을 꽤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물러나는 기억들을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먼 기억 앞에서 엄정하다. 심지어 그것을 '의심스런 출처'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고찰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10개월간 생활한 그의 처절한 체험은 <이것이 인간인가>에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저서 중 한 장의 제목인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는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와 절멸한 자에 대한 레비 나름의 관찰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 탐사의 보고였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이것이 인간인가>가 스스로 살아낸 세월이다. 살아남은 자가 언제나 최고는 아니였다,는 그의 이야기는 씁쓸한 진실이다. 심지어 그는 최악의 사람들이 생존했다,고까지 절규했다. 완전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는 그의 냉소적인 목소리는 자신의 생환 그 자체마저 다시금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에 기댄 체로 거르려는 엄중한 도덕적 결벽을 보인다. 그의 자살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단죄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감히 용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어려웠던 가해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말살당하고 나서 그가 삶의 소멸까지 온전히 자연의 힘에 맡기기는 힘들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 인간들이 뿜어내는 숨결로 덮인 삶을 긍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수용소를 하나의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로 보고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만을 가해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그 둘 사이의 회색지대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된 시선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간다. 권력은 마모되지 않고, 부패된다는 그의 경고는 울림이 크다. 수용소의 SS들 뿐만 아니라, 좌절한 사람들도, 억압받는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의 존엄을 저버리고 생존해 나가기를 바랐다는 그의 이야기는 인간 세계에서 권력층과 거기에 기생하는 특권층에 대한 투쟁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에 대한, 그리고 그럼에도 그 투쟁이 영원한 지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빅터 프랑클처럼 그는 차마 희망과 인간이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저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화학자이자 작가로서 성공한 그의 여생도 그가 1년도 채 안 있었던 그 지옥 같던 수용소에서 듣고 보고 당한 것들에 대한 상처와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성에 대한 실망을 상쇄키시지는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증언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기록했던 이 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의 경고는 섬뜩하고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효하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에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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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을 주는 책이군요.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습니다.
저절로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길 기대할 수 없고 공식적으로 거론해야 하는
엄숙한 시간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blanca 2014-06-23 10:3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수용소 관련 책을 모아 읽었는데 절로 기분도 음울해 지고 인간과 세계의 진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나이 들어가는 게 이런 것을 알며 어느 정도 냉소적이 되고 체념도 하게 되고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예전에 참 많이도 걸어다녔던 것같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정되거나 해서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타박 타박 때로는 비도 맞고 때로는 눈도 맞으면서 잘도 걸어다녔다.

 

딸아이를 업고 안고도 사방팔방 잘도 걸어다녔다. 아기띠 밖으로 비어져 나온 손과 발을 무심코 만져보거나 그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거나 하는 낯선 이들을 만나면서.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걷기'가 뚝 끊겼다.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업으면 이제 허리가 아파서 등등의 변명을 대면서. 며칠 전 무심코 이 책을 기대없이 펴 들었다. 와, 신기했다. 어떤 책인지 모르는 와중에 만난 책, 마치 아주 친절한 철학 선생님의 찬찬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 '걷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까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랭보도 루소도 소로도 칸트도 이렇게 '걷기'라는 단순하고도 평범한 주제로 교차시키며 이렇게 길게 늘이지 않고도 전 생애를 보여주듯이 이야기해 줄 수 있다니. 난 이제야 랭보가 걸핏하면 집을 나오던 가출 청소년이었다는 이야기를, 위선적이었다는 평도 들었던 루소가 마흔 이후로 자신의 지난 날 마차 위에서 보낸 화려한 삶을 정리하고 잘 늙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니체가 미쳐가고 있을 때 어떻게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헌신적으로 보살폈는 지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프레데리크 그로. 파리의 철학교사. 미셀 푸코 연구가란다.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p.17

 

콩코드의 연필 공장을 하는 사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걷기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예증이 될 것이다. 경제적 계산 대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쓸 때 내가 순수한 삶에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계산하자는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그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주 당연하고 아주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가 삶의 의미까지 희생하며 이 세계의 부속품이 되려고 자원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며 이러한 자각은 때로 괴로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연한 불가피한 한계 속에서 뛰어넘고자 하는 저 지향을 보여주는 이러한 책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냥 꼭 걷기가 아니더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니체는 카프카는 간디는 다시 한 번 감동적이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나 외워댔던 이 사람들의 그 업적의 편린들은 이 저자의 시선 끝에서 저마다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산다. 진짜 철학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제대로 맛본 기분. '걷기'는 단지 하나의 연결고리이자 은유인가 보다.

 

 

 

 

생 자체를 순례에 비교한 것은 사실 이미 진부해져버린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것은 검증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단단한 곳에 결박당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에드워드. 이 도자기 토끼 인형은 소위 차도남이었다. 소녀 품에서 사랑받다 여러 사람, 각종 상황에서 방황하다 장난감 가게로 돌아오게 된 그가 마침내 맞닦뜨린 이는.

 

여기까지는 그래서? 였다.

장난감 가게 안에 들어와 이 인형 앞에서 서 있던 여자아이의 엄마. 에드워드의 원주인. 커버린 애빌린. 사랑을 믿지 않던 도자기 인형 앞에 돌아온 사랑.

 

반전도 아니건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에게도 에드워드 같은 인형이 있었다. 비록 비주얼은 훨씬 못 미치는 사람과 원숭이를 섞은 묘한 인형이었지만 나의 뽀송이.

 

엄마는 어느 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버린 뽀송이를 처치하셨다. 울고 불고 했던 기억. 엄마에 대한 원망. 나는 고맘 때 내가 이름을 붙이고 재워주는 뽀송이에게 에드워드 같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엄마는 나의 그런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뽀송이는 어디로 갔을까. 에드워드처럼 온갖 역경, 온갖 사람 다 만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결말이 질투났다. 모든 잊혀졌던 것들은 돌아온다고 하는 그 은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나 보다. 자꾸만 돌아오는 기억들. 사랑을 믿지 않고 오만했던 도자기 인형 에드워드 툴레인의 긴 순례가 남긴 교훈 대신 그 인형을 잊고 지내며 늙어갔던 소녀에게 결국 돌아온 유년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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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06-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걷기 참 안 하는 편이에요. 주로 차로 이동하고 게을러지네요.
볕도 바람도 좋은 시간대에 아기 유모차 태워서 조금씩 걸어보세요^^ 분홍공주도 유모차에 손 얻고.
첫번째 책이 끌립니다. 담아가요^^
건강한 날들 보내요 우리^^

blanca 2014-06-11 10:3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즘 아침은 좀 걷기가 선선한데 오후는 더워 힘들더라고요. 공주님은 벌써 잠깐 유모차 놓아 두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면 그거 밀고 멀리 도망가버린답니다.^^;; 아, 정말 좋은 덕담이네요! 건강한 날들! 명심할게요, 프레이야님.

페크pek0501 2014-06-1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산책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일 규칙적으로 걸었다는 거죠.
저도 걷기를 좋하해서 밥 예약해 놓고 해 질 무렵에 걸어요. 소화불량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려
걷고 싶어지기도 한답니다. 물론 걷는 게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일단 걸으면 기분이 바뀌어 버려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의 말이, 걷기만 해도 머릿속 스트레스가 밖으로 빠져 나온다고 해요.
그러니 걷기는 몸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거죠.
걸으면서 길거리 풍경을 보는 재미를 이젠 즐길 줄 안답니다. 저는 걷기 예찬론자예요.
우리 많이 걸어서 몸도 정신도 건강합시다. ^^

blanca 2014-06-17 10:08   좋아요 0 | URL
페크님, 댓글이 늦었어요. 저도 그러고 보니 걷기를 통해서 위염도 낫고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점점 더워져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요. 요 며칠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니 좋았어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운동화 신고 더 멀리 더 많이 걸으렵니다.^^
 
밤은 고요하리라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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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삶을 마감한 방식이나 연유에 대해서 그답다,는 진부한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해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로맹가리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45년 동안 최측근에 있었던 친구 프랑수아 봉디가 있었고, 이 책은 그 친구와의 대담 형식이다. 그러나 그 대담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어쩌면 그는 프랑수아 봉디라는 인물의 외피만 빌려 로맹가리 내부에서 묻고 답하는, 그가 그렇게나 경멸해 마지 않았던 두 개의 자아를 형상화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에 '합리화'와 중언부언의 '변호'는 없다. 자신의 작품이 '자아를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이라 이야기했던 그의 목소리가 정직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다소 괴팍하고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은(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맹가리의 모습이 지척 같다.

 

 

난 한 여자의 사랑의 눈길로 만들어졌네.

 

<새벽의 약속>은 그와 어머니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버지 없이 늙은 홀어머니 밑에서 그 어머니의 희생과 눈물로 어떻게 그녀의 성공의 대리자가 되는 지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신파조가 아님에도 이 땅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 모두를 결국 울게 하고 말았다. 로맹 가리도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해 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랑에서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가 모두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경의는 그가 성장 과정에서 내면에 어머니를 간직하고 그녀의 감시와 보호의 증인을 간접 경험하며 잘못된 길로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 힘과 통한다. 비행청소년들이 내면에 그러한 증인을 두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지적은 기억해 둘 만하다. <새벽의 약속>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에서 구원해냈을 뿐이라는 그의 겸양은 도리어 우리는 그러할 도리조차 없다는 자조로 무력감을 자아낸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숱한 익명으로 당신들의 희생과 눈물은 망각으로 스러져 갈 것이다. 그저 우리의 삶 자체를 어머니에 대한 헌사로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

 

그가 여성성과 연약함의 대변자로 스스로를 칭하게 된 것도 결국 그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 덕택일 것이다. 마초적인 것에 대한 염증, 그것이 횡행하는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개탄은 로맹가리가 가지는 소수자, 소외된 이, 여성적인 것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대척점을 이룬다. 가난한 유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결국 자신의 삶을 완성했다.

 

 

'유럽 만들기'의 허상,-프랑스는 인간의 손이었네.

 

외부무가 15년 동안 로맹가리라는 시련을 겪었다고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그는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 틈에서 제3세계를 딛고 '유럽 만들기'를 주도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행동에 일침을 가한다. 그가 주장하는 프랑스적인 것은 삶과 맺는 수공관계, 지적 정직성에 있다. 이는 오늘날 유럽연합에서 불거져 나오는 각종 잡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작 동맹을 주장하며 실은 약소민족이나 국가를 수탈하여 이득을 탈취하며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각축의 장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정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대신 스무 권의 작품으로 항의하고, 시위하고, 청원하고,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스스로를 인도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갈망을 품을 자유주의자 부르조아라고 칭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는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누구도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는 지적과 달리는 방향에 대한 통제나 의문은 교통수단 내부의 물질적 안락에 대한 문제로 대체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현실에 대한 비판 같아 섬뜩했다.

 

 

꿈의 착취보다 더 역겨운 걸 난 알지 못하네.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전처 진 세버그가 할리우드의 스타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직접 할리우드에서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그의 할리우드에 대한 목격담은 그 화려한 이면에서 어떻게 스타를 꿈꾸는 젊은 이들의 꿈이 착취당하고 농간당하는 지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이기도 하다. 그의 '역겹다'는 표현은 기성세대가 청춘의 꿈과 소망을 하나의 소비재로 폄하하고 이용하지는 않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다.

 

 

나의 천성을, 삶에 대한 사랑을 야심과 성공욕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지.

 

외무부에서 보낸 시간들이 욕구불만과 무력감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였지만 때로 그곳에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있나 확인해 보며 초조해하기도 했다는 솔직한 고백 또한 그답다. 막상 드골이 외교고문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가장 로맹가리 다운 거절을 한다. 타인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또다른 역사를 살게 된다는 소설쓰기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정치를 하게 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서 그는 초연할 수 없었다. 다시 우리의 로맹가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그는 결국  춤추는 아틀란티스가 되어 무거운 세상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그 매혹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겐 아들이 하나 있네. 그거면 따뜻하지.

 

로맹가리는 육십이 넘어가는 나이에서 거의 다 왔다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한다. 진 세버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이제 겨우 열한 살. 진과는 헤어졌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기를 닮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어머니와 맺는 첫 관계를 문명과의 관계라고 칭송했지만 그를 겁내고 그를 사랑했던 아들이 매일 그 사랑과 아버지를 확인하게 위해 올라온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부자의 관계는 결핍과 칭송을 조금 걸러낸 로맹가리와 늙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밤은 고요하리라.

 

죽음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이 충분히 쓰지 못했고 충분히 사랑할 줄 몰랐다고 회한섞인 이야기를 남긴다. 그가 들려주는 죽음은 그가 한때 몸담았던 영화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라스트씬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랑하는 개 샌디와 오솔길를 올라 빛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그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죽음 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가장 로맹가리다운 불멸의 길을 택한 것 같다. 쓰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며 모든 사람 안에 있고자 그가 남긴 이야기는 수많은 이들의 눈과 입과 마음에서 떠돌아다닌다. 아들을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자신은 궁핍하게 지내도 아들에게는 최고를 고집했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불멸의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강조했던 인간애, 약자, 소수자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무시되면서도 가장 추구되어야 할 하나의 지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한 의미와 해석은 제각각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바란 바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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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에 대해 잘 모른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한 권 정도 읽은 게 다. 그마저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를 작가로서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의 이해력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신작이 그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죽은 아내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에이전트였다고 한다. 뇌종양으로 거리에서 쓰러진 지 삼십 칠일 만에 운명하고 만 비극적인 최후의 주인공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로 떠돌기를 바라지 않은 듯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비상의 죄

 

아내 팻에게 바친다,는 제사. 그리고 비상의 죄라는 표제 아래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는 포문. 표지가 암시했듯 기구에 미친 사람들.  프레드 버나비, 투르나숑, 베르나르. "하늘을 나는 문제에 개입하는 건 신의 섭리를 거르스는 행위"이기 때문일까. 19세기 기구의 역사, 그리고 그 기구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작가의 아내 팻과의 사별 이야기라고 했는데 웬 뜬금없는 기구 이야기일까.

 

고도는 '모든 것을 고유의 상대적인 비율로, 또는 진실에 가깝게 축소시킨다.' 근심, 후회, 환멸의 감정은 낯설어진다. '무관심과 경멸, 태만이 이리도 쉽게 떨어져 나가다니...... 그리고 용서가 내려오다니.'-p.26

 

 

평지에서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는 이야기는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다. 땅의 자식인 우리가 신 못지 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사랑이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락은 나쁜 예감처럼 덧붙여진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비탄의 이야기라는 첨언. 아, 줄리언 반스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비상의 죄를 저지른 버나비와 여배우 베르나르의 비탄으로 끝나는 짧은 사랑의 이야기.

 

 

깊이의 상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p.110

 

작가 박민규가 어느 지면에선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사람들 간의 공통점보다는 눈이 부신 곳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가에 시선이 갈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이듦은 결국 모든 사람을 지면으로 더 나아가면 지하로 끌어내린다. 결국 화두는 견뎌내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수렴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 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한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p.111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사랑했던 아내와의 재회에의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그 황량한 그곳에서 아내와의 작별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모습은 이 섬세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비탄을 딛고 나아가는 지에 대한 하나의 처절한 탐사의 보고다. 차마 쉽게 읽어낼 수가 없어 멈추고 또 멈추게 된다. 그의 슬픔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아니면 남편이 겪어야 할 일이라는 전조는 두렵고도 또 두렵다. 절대적인 분류. 슬픔을 견뎌낸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결국 대별되는 지점에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그 가혹한 진실. 그것을 겪고 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말라서)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기억의 (지하) 동굴' 등을 표시한 지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살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로 그녀를 두 번째로 죽게 하는 것이기에 마침내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은 '내 삶'에서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며 나이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냥 누구나 이 정도 지점에서는 이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독서는 유효하다. 이렇게 끝나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p.195

 

작가의 비탄의 이야기에 슬프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결국 다 한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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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2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줄리언 반스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요, 그 두 권 모두 그다지 '좋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블랑카님 처럼 '잘 모른다'고 해야겠지요. 잘 모르고 그다지 호감도 없었던 그런 작가였는데요, 이 책의 소개글을 읽어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블랑카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블랑카님의 이 조용한 글을 읽노라니 저도 이 책에서의 줄리언 반스를 만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저도 블랑카님처럼 쉬엄쉬엄 읽게 될까요? 내처 한번에 읽게 될까요?

요즘에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슬퍼요, 블랑카님.

blanca 2014-05-28 11: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야 왜 이 작가가 칭송을 받는지 십분 이해가 가더라고요. 아주 섬세하고 예리한 문장, 진짜 작가란 이런 모호한 감정을 이렇게도 적확하게 집어내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싶은.

그냥 요새는 쉽사리 겁나 우울해지네요. 시원한 라떼 한잔 마시면 그 순간 기분이 확 좋아지긴 해요, 다락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