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다"와 "불행하다"가 동의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질투심이 없어졌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별것 아닌 일을 별것 아닌 것으로 좀 밀어 둘 수 있지만 그것이 사소한 일들 모두를 쿨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인간이 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살아온 만큼 더 살면 노인이 된다. 지금은 어떤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천상병 시인은 세상이 아름다웠노라고 회고할 수 있게 늙었지만 나에게 비친 세상은 점점 더 참혹하게 느껴지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비치고 나를 감싸던 안온한 포근함은 점점 더 하나의 착각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이 일어나고 언제나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은 수시로 무너지는 풍경, 그것이 내가 곧 사는 곳이다. 이제 더 이상 바깥은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춥지만 지글지글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귤을 까먹으려 읽고 또 읽었던 '쿠오레' 같은 세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엄혹한 현실이다.

 

혹독한 시련과 고통, 불평등과 부조리, 착취와 굴종만이 삶의 조건인 것일까?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느낌은 늘 따듯했다. 비록 늘 지쳐 있었지만 어딘가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와 다정한 엄마, 자신이 누군가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뿌듯한 안심...... 그것은 마치 새 둥지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은 다 사라지고 없는 걸까? 왜 모든 게 가혹하고 싸늘해진 걸까?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천명관 <퇴근> 중

 

맞다. 이런 느낌인 것같다. 미래의 사회상을 그린 극단적이고 어두운 이 <퇴근>이라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세계의 나락에서 건져 낸 이 비참한 가장의 회고는 사실 미래의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때로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종종 가지는 안온하고 따뜻한 그 안정감의 보루만은 명확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구체적인 풍경 때문이 아니었고 어린이만이 세상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그 아주 편협하고 자그마한 영역의 울타리가 주는 본질적인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이 되어간다는 이러한 싸늘한 느낌은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위로,가 분명 주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한국작가가 쓴 단편을 찾아 읽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밀도 있는 찰진 서사가 뚫고 들어오던 내면의 벽이 더 두꺼워진 탓도 있을 테고 어느 순간 한국의 단편에도 어떤 '찡'하던 총기가 감하고 매력이 흘러 넘치던 전성기를 치고 내려오는 지점에서 좀 머뭇댔던 탓도(나만의 생각?)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김훈, 김연수, 은희경, 성석제, 김영하, 김언수, 천명관이 쓴 단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같았다. 그것도 이럴 줄 알았어,가 아닌 역시 산타 할아버지는 늙지 않는구나, 싶을 만큼의 재기가 여전히 반짝이는.

 

김훈의 노량진 고시텔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의 이야기는 역시 그의 정묘한 문장, 묘사 들과 어우러져 생생한 하나의 르포 같았다. 사실 나도 여기에서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낯설지만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사육신의 묘지의 이야기와 공무원 시험 과목 중 국사의 쪽집개 식 강의가 펼쳐지는 풍경과의 교차는 마치 우리의 삶과 어떤 죽어 있는 이론, 상식의 대조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필요에 의해 가난한 계약 동거를 마치고 쿨하게 찢어지는 '나'와 '영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담담하지만 어떤 '찡'한 구석이 있다.

 

김연수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여전히 김연수적인 아름다움과 또 거기에 덧대어진 약간의 권태, 하지만 은은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한국의 포크 여가수가 일본에 공연 초대를 받아 간 사연, 또 그 사연이 서술되는 방식인 이미 끝난 사랑에게 보내지는 이메일, 자신은 미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성의가 익명의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는 감동, 김연수의 시선은 여전히 별을 향해 있어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 된다.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는 섬뜩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이를 잃게 되고 그 아이를 찾아 헤매며 흘러가는 십년 남짓한 세월이 파괴하는 일상, 그 일상을 다시 뚫고 들어오는 실종된 아이의 귀환이 행복이라는 마침표 대신 더한 비극과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의 진폭은 소설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쳤다.  앓던 이가 빠진다,는 표현. 어쩌면 우리는 어느새 '앓던 이'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미결로 남아 나를 규정하고 내가 그것을 하소연하는 데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민했던 모든 문제가 풀리고 남는 것은 명쾌함과 행복이 아니라 어떤 황망함과 또다른 상실감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그러한 예리한 간파.

 

천명관의 <퇴근>은 놀라웠다. 회사에 정식으로 출퇴근하는 정규직들은 극소수의 상류층으로 고착화되고 대다수는 '담요'라는 너절하고 초라한 '환유' 아래에서 하루 하루 힘겹게 생존을 위하여 투쟁해야 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일말의 진실은 사실 우리가 지금 오늘 애써 외면하는 지대에 있다. 미 모든 역겨운 일들의 중심에는 사실 사람마저 도구화 부속화시키는 천민자본주의의 횡행이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이제 욕할 정부마저 슈퍼리치들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들이 철저히 돈의 논리에 종속되는 황량한 풍경을 눈에 보이듯 그린다. 천식에 걸려 암시장에서 약을 구해야 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해매던 무능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아버지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압권이다.

 

토마 피케티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 터라 그와 함께한 좌담 자리의 기록이 반가웠다. 자본주의의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그의 대안적 관점은 실현 가능성이나 한계 등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누구나 느끼고 있는 물질에 의한 삶과 생명의 소외,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진지하고 젠체하지 하고 모색하는 움직임이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자주 인용하는 발자크의 소설에서의 인물들의 '돈'을 매개로 혹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가 반가웠다. 발자크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돈'에 시달렸던 '돈'에 집착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날에도 지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같다. 기회가 된다면 토마 피케티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삶을 기록하는 데 끝내 실패하는 행위잖아요. 중요한 건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기록한다는 거죠.

-리뷰 좌담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의 곁에서' 중 양재훈 

 

이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만져지는 것들만으로 효율성으로 수익성으로만 무언가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세태에서 실패하는 게 당연한 무용한 시도들을 밀고 나가는 일은 분명 쉽지 않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가지는 무게와 가치, 아름다움이 있다. 응원을 보내주고 싶고 오랜만에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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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네 살 어린 테오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형제는 서로에게 무척이나 각별했다. 둘에게서 오고 간 편지는 668통이나 되고 고흐는 죽어갈 때에도 동생의 품 안에 있었고, 형이 죽고 육개월 뒤 테오도 형 옆에 묻히게 된다. 고흐는 생전에 그 위대함을 인정받지 못했고 경제적인 능력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가 절망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데에는 동생 테오의 지지,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 두 형제가 사랑과 신뢰로 현실을 이겨나가는 그 처절함과 절절함이 녹아 있는 편지는 시간의 풍화에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서글프다. 간질성 발작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물감값을 요구하는 형,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는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형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존중, 존경을 보내는 테오의 모습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흐의 위대한 작품들 못지 않게 그 어떤 현실을 뛰어넘는 장대한 미덕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 못지 않은 과업이다.

 

 

 

고흐의 삶은 신산 그 자체였지만 그에게는 이런 보물 같은 동생이 항상 곁에 있었으니 따사롭다. 형의 강직함을 선망해 자신의 아들에 그 이름을 붙여준 동생에게 형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 조카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현실로 돌아와서 가난하고 무능력하고 정신병에 때로 충동적인 언사를 내뱉는 형에게 자신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동생이 한결같이 지지와 지원을 보낼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 없는 일이다. 이 지점에 또 하나의 비슷한 상황, 이야기,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카미유 클로델은 위대한 조각가 로댕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모델이자 연인, 조각가였다. 그녀는 천재였다. 점토로 이런 저런 형상을 빚던 여섯 살부터 그녀의 영감, 열정, 재기가 번득였던 시기는 찰나였다. 그녀는 후에 잘 나가는 외교관에 시인, 극작가로 노벨상 후보에도 회자되었던 폴 클로델의 누나이기도 했다. 남매 역시 젊고 각자의 열정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서로에게 각별했다. 함께 시인 말라르메의 화요 모임에서 각 분야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고 카미유의 조각과 폴의 시는 서로를 독려하고 위로하고 지지했다. 하지만 그녀가 스물네 살이나 많은 이미 위대해질 때로 위대해지고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조각가 로댕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내조하고 그의 아이를 낳아 길렀던 로즈 뵈레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에 카미유가 이별을 결심하고 점차 파멸해 가는 모습 앞에서 폴은 자신의 꿈이었던 세상을 누비는 자유를 누리는 대사관 영사직으로 부임하고 누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데 일종의 방관, 동의를 보냄으로써 남매는 예전의 결속에서 풀려나게 된다. 누이는 유배되고 남동생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사랑에도 빠지며 대조되는 삶을 살게 된다. 카미유는 사랑했던  남동생을 잊지 못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점점 더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 사회적 명망을 얻게 됨으로써 또한 자신만의 어떤 편견, 아집으로 덧쒸워진 종교에 탐닉함으로써 누이에 대해 더욱 더 비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나 집에 돌아오고 싶어했던 누이는 병세가 호전되어도 가족 중 누구 하나 그녀를 잠시라도 외출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려 하지 않고 외면한다. 그녀는 삼십 년간 갇혔고 삼십 년간 흙에 손도 대지 않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죽음에 이르고 무연고 무덤에 안장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남동생의 이름이었다.

 

 

 

전기작가 도미니크 보다는 폴 클로델이 말년에 한 인터뷰에 분개하고 중립성을 버린다. 카미유와 폴의 교차하는 삶을 충실히 그려내었던 이 섬세한 작가는 폴이 자신의 삶을 충실한 것으로 누이의 그것을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실패한 것으로 규정짓는 데에서 그가 노년을 통해 이루어낸 생의 과업들이 보이는 측면에서는 다복한 가정, 정치적 외교적 입지 구축, 작품들의 평가 등으로 장식되었을 지 모르지만 어떤 독선, 아집, 냉정함 등으로 사실 오만한 편견으로 얼룩졌음을 간파한다. 그의 마침표는 누이에게서 멀어져 갔다. 누이가 끝까지 동생을 찾으며 그리워했던 모습은 비록 폴이 유일하게 누이를 가끔이나마 찾아갔던 가족으로 남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과 슬픈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 어두움에 묻혀 있었던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사장을 방지하는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폴의 자손들이 손을 보태게 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던 카미유의 후원자 외젠 블로의 이야기는 맞았다. 그녀는 어둠의 장막을 걷고 걸어 나온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모든 상실, 체념, 분노, 원망의 집약체였던 로댕은 늙어가면서도 그녀를 잊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의 전시 공간을 부탁했다. 생전 외면되었던 카미유의 작품들은 이제 자신들이 있을 곳을 천천히 찾아 간다.

 

고흐, 테오, 카미유, 폴은 누구라도 처할 좌표이자 상황이다. 또 어떤 지점에 서도 필연적으로 상황이 가지는 속박의 힘은 대단할 것이다. 누군들 폴처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테오처럼 할 자신이 있을까, 카미유처럼 자신의 열정, 일을 놓아버릴 위기 앞에 담대할 수 있을까. 이 넷이 그리는 삶의 궤적은 좀더 극단으로 치우쳤을 뿐 현실의 그것과 멀지 않다. 고흐와 테오가 저 머나먼 곳의 별을 향한 시선을 공유했듯, 카미유과 폴이 함께 바라봤던 별이 스쳐 지나간 지점에서 멀어져 버린 피붙이들의 모습은 또 우리의 삶이 교차하는 그것과도 닮아 있다. 더 위대한 더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더 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눈앞의 그것들에 침잠할 때 삶은 조금 더 편해지겠지만 조금 더 역겨워진다. 나는 그래도 아직 고흐와 테오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더 위대해 보인다. 어떤 특수성의 한계로 폴의 선택을 합리화한다고 해도 지금은 역겹고 실망스럽게 느끼는 대로 놓아두려 한다.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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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느 델베가 쓴 카미유 평전이나 카미유의 편지글을 모은 <카미유 클로델>도 읽어보면 좋습니다. 만약에 카미유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로댕의 실력을 능가하는 조각가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카미유의 삶을 그린 오래된 영화도 보고 싶군요.

blanca 2014-12-19 13:57   좋아요 0 | URL
cyrus님, 언급하신 책 미처 몰랐어요. 추천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자벨 아자니가 나왔던 영화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그 영화가 카미유를 세상 밖으로 내어 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이 책에도 나오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제대로 봐야겠어요.

qualia 2014-12-19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 윗글 읽고 뭉클했네요.

blanca 2014-12-19 13:59   좋아요 0 | URL
저는 고흐가 그림 못지 않게 읽기와 쓰기에 보인 열정, 깊이가 참 놀라웠어요.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요. 남동생을 임종 직전까지 찾았다는 카미유의 이야기도 너무 가슴 아팠어요. 요새는 참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꼭 필멸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다 비참한 일면을 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책세상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대단히 솔직한 사람을 대면하면 그 미덕의 무게만큼 다소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구태여 의식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나열되고 그것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의견까지 요구한다면 더더욱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시간, 장소는 어느새 어떤 공모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나는 도저히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미 듣고 느낀 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이 책은 그러한 책이다. 플롯이 있고 창작 의도가 명료한 장대한 이야기들을 써서 삶의 의미와 존재론적 핵심에 가닿으려 하는 그 지난한 노력이 주도하는 문학은 그 앞에서 절멸하고 만다. 데이비드 실즈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책의 주인공이자 매개체였던 구순이 훌쩍 넘었던 노장 아버지도 그 필멸의 과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버지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는 이 말더듬이였던 그래서 도리어 더 언어에 천착했던 작가는 그 '죽음'이라는 간명한 화두 밑에 모든 것들을 허무화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어차피 죽는 우리들은 왜 그것을 항상 의식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대척점에 놓인 삶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분명한 명제를 가끔씩 놓쳐야 하고 이따금씩 이러한 글쟁이들 앞에서 또 그 잊어버렸던 슬픈, 어쩌면 다행인 마침표를 환기한다.

 

이 문학적 자서전은 문학에 대해 별 기대가 없는 아니,이제는 그 기대의 몸짓조차 허무로 환원해 버리는 편린들의 무작위적 조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를 흔들었던 수많은 작가들의 경구들이 편재하고 이제 정말 솔직히 삶과 문학의 기만을 응시하는 명민한 작가들의 조언을 적극 차용한 저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실즈는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그에게 있어 조지 부시는 그의 부정적 기질들이 구현된 존재이고 몰락한 타이거 우즈는 그 모습에서 은근히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시기심의 가운데에 있다. 대학 시절 그가 벌인 그 어설픈 연애들은 가장 못난 구석까지 가감없이 머리를 들이밀고 조이스의 단편이 훌륭한 것은 알지만 이제 그 비슷한 것을 쓰는 데에 더이상 흥미가 없음을 고백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무언가 짜임새 있고 유의미한 척 하는 것에 대놓고 역겨움을 표시하는 오십대 후반의 "우리 자기 자신에게만 쌓이게 되는" 그 어떤 나이를 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두렵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각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정말이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빠져나가는 길은 더 깊이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은 아찔하고도 홀가분한 일이다.

-p.112

 

열네 살 아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으로 읽다니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고 말한 어머니를 둔 그런 사람은 언제나 드잡이해도 백전백패할 것 같던 아버지와의 애증으로 '죽음'을 '존재'를 응시했었다. 이제 그는 삶을 향해, 그 삶의 환각을 향해 그리고 그 삶의 구조화를 꿈꾸는 문학을 향해 냉소적으로 고개를 흔든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망과 허무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더욱 의기소침해지게 된다. 거짓말을 과장을 허구를 연기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그래서 건조하지만 무게가 있다. 당자에게는 아찔하고도 홀가분한 일이 때로는 청자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는 다음에 또 그와 만날 날을 꿈꾸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존재의 방점'이 있기 때문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외면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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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2-1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이 궁금했는데 더 궁금해지네요. 다음주에 주문할 때는 반드시 이 책을 넣어야 겠어요.

blanca 2014-12-13 11:4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은 뭐랄까, 기존의 책에 관련된 책과는 조금 달랐어요. 어떤 고정된 틀이나 선입견을 해체한다고나 할까요, 그 시선이 좀 불편할 수는 있는데 흥미로웠습니다.

icaru 2014-12-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게도 주문한 이 책이 도착했는데요~ 화제의 글에 님 글이 떠서 득달같이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혼자만의 책 읽는 시간과 같은 맥락의 책일거라고 짐작했는데,,, 음.. 정면으로 삶을 응시할 거 같은,, 바람부는 적막한 사막에서 존재의 실체와 맞닥뜨리는 느낌 들거 같네요..헛,,, 혼자 멀리갔나요?? ㅎ

blanca 2014-12-13 11: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icaru님은 이미 시작하셨겠지요? 저보다 더 저자와 잘 소통하실 것 같아요. 저는 솔직히 제가 기대했거나 예상한 방향과 좀 어긋나서 중간부터는 좀 헤매고 그랬답니다. 저는 아직 어떤 진실이나 실체와 마주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나 봐요.

Jeanne_Hebuterne 2014-12-1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늘 가장 밖으로 오픈된 것이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how are you?` 같은 것이오.

그럴 때는 배운 대로 fine, thank you. 가 나와야 하는데 살아있는 게, 꼭 그렇지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블랑카님의 다가서기 쉬운 길잡이를 접하고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달달 외운 그 공식과도 같은 대화문이 떠올라요.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이어 이번에도 이러한 진리를 다시 끄집어들고 나왔군요. 늘 그랬듯이, 그것이 가장 자명하지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blanca 2014-12-15 19:48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영어권에서 무슨 인사처럼 상대 기분을 알아내려 하는 게 참 허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기분 안 좋다고 이야기할 것도 아닌데 ^^;; 말이에요. 아, 누구나 죽는다,는 게 너무나 확실한 명제지만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을까요? 너무 선뜩해요. 나이가 들수록 삶에 생명에 자꾸 연연하게 되네요. 차라리 어렸을 때는 그 명제를 더 겁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제 이런 함박눈도 영원히 맞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맞으면 더 기쁘기도 하고 더 슬프기도 해요, 쟌느님.
 

주로 반지갑을 쓰다가 처음 내 손으로 장만한 장지갑을 골똘히 들여다 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물건을 가지지만 그 물건만 내가 죽고도 완강하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비가 주는 환상은 어쩌면 불멸에 대한 기만적 위로가 아닐까, 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후대에 역사 속에서 추려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숱한 익명 속에 스러질 것이고 어쩌다 나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족적을 남기게 된다면 책을 좋아했던 할머니 정도로 추억되어 한 문장 정도로 남을까.

 

그러니 16세기의 프랑스 농부의 이야기는 태반이 문자를 쓸 수 없었다는 그 시대에 운명의 장난으로 기이한 송사에 휘말리고 그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21세기의 나에게 날아올 이유가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시사점을 남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가는 나날들이 몇백년이 지나고도 과연 유의미한 가치를 지닐까. 지금 우리는 언어를 써서 자신의 일상이나 읽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 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마저 소실된다면 아니 가까스로 그것들이 남는다고 해도 그 행간, 사이에서 비어져 나간 것들은 어떤 식으로 유추되고 정리될 것인가.

 

 

프랑스의 근대사 전문가인 저자가 살려 낸 16세기 가장의 가출로 벌어진 한 가정 내에서의 일련의 소동은 그것을 법정에서 지켜보고 내러티브의 주축이 되기로 한 판사 자신의 삶, 오늘날 여기에서 그것들을 복원해 내고 추정하고 추측하는 우리들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아버지의 곡식을 훔치고 난 후 벌어질 일련의 후속타가 두려워 어린 아내와 아들을 남기고 돌연 가출해 버려 피렌체 산맥을 넘어 심지어 적들을 위해 전쟁을 하고 다리까지 잃게 된 마르탱 게르가 마침내 귀향한 후에 맞닥뜨린 현실은 기함할 노릇이었다. 자신을 자처한 낯선(아마도) 사내가 아내와 동침하여 아이까지 낳고 버젓이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떡하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초엘리트 코스로 엄친아였던 판사 코라스는 이 기이한 사건의 사기극의 주인공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자신이 담당했던 소송에 관련된 모든 것들과 자신의 주석을 남기게 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사기꾼 가짜 마르탱에게 자신을 이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톨릭이 대세였던 당시에 가랑비에 젖듯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프로테스탄티즘에 물들며 그는 자신이 딛고 섰던 그 굳건한 지반이 와해되고 있음을 알았을까. 이 출세에 기민했던 인문주의자는 가짜 남편의 품 안에서 행복해했던 마르탱 게르의 아내의 그 납득하기 힘든 변절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 삶에 대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생각의 제단을 쌓아간다.

 

책임감 없이 집을 떠났다 나무 의족을 달고 돌아온 남편, 그 사이 남편을 자처하는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 남이 일구어 놓은 것들을 거짓 행세로 가로채고 버젓이 그 안의 따뜻한 사랑까지 소유하려 했던 아르노 뒤 틸이 남긴 흔적은 지금 여기에 숨겨 놓은 어떤 추악한 욕망, 진실에 대한 소망, 타인에 대한 미움, 질투가 한데 어우러진 삶의 축약본 같다. 지근거리에서 커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 어떤 조망 아래에서는 한없이 사소한 것들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 조망은 '읽는 일'에 기대는 바가 크다.

 

 

 

 

 

 

 

 

 

 

 

 

 

 

 

 

프루스트는 독서를 우정에 비유한다. 그 우정은 부담없고 진실한 것이다. 내가 하는 실수, 언변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든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그 친구가 나의 생 전체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젊은 날 존경해 마지 않았던 대문호 러스킨에 대한 무조건적 경배의 철회는 그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에 관한 소고에 잇대어 러스킨의 아미앵 기행에 대한 주석, 화가 샤르댕과 렘브란트, 모로, 로세티에 대한 글들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예술 작품에 할애한 섬세한 묘사와 감상, 화가 엘스티르가 화자에게 끼치는 지대한 영향 등이 가지는 깊이를 이해하게 해 준다. 프루스트가 지향했던 어떤 진실, 실재에 대한 천착의 결정체가 위대한 화가들이 도달한 지점에 있다고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번역의 체를 통과한 프루스트의 목소리는 그 어떤 모호함과 사변적인 분위기 안에서 명료해지지 않아 때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이 지루하면 지루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프루스트 자신이 이야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사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좀 부담스럽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 그런데도 그가 어쩌다 토로하는 자신의 깨달음들은 너무 귀중해서 도저히 그의 곁을 맴도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타인의 구미에 맞추어 일할 때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할 때 그 결과는 반드시 누군가의 공감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한 무엇이 아무에게도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법이다.-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중

 

암요,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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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발력이라고는 없어서 상황의 변화, 임기응변, 무질서 이런 것들에 취약하다. 그런데 이제 십육 개월 들어선 녀석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신다. 누나는 전혀 관심없어했던 변기와 신발장에 이 아이는 거의 탐닉 수준이다. 하루의 반나절은 현관에나가서 신발을 만지고 맞지도 않는 자기 발을 꿰어 넣어 안방으로 달려오고 막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 속 물을 휘젓는다. 몇 번이나 훈육을 한답시고 정색도 해 보고 심지어 맴매 시늉도 해보지만 그 때 뿐이다. 다른 말귀는 척 하니 알아들으며 이러한 긴요한 지시 사항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내공도 보인다. 그래서 안으로 들여놓으면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열어 내용물을 다 꺼내 바닥에 늘어 놓고 높은 곳이라는 곳은 다 올라가서 각종 위험한 묘기를 부린다.....

 

그러다 보니 나는 가택 연금 상황이다. 막간의 독서는 유일한 정돈된 세계다. 현실이 너무나 불안하니 책 속 세계에 더 빠져드는 기현상이다.

 

 

 

 

 

 

 

 

 

 

 

 

 

 

아, 좀 전에 다 읽었는데 토마스 하디는 천재가 분명하다. 하녀인 어머니와 석공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신부의 꿈을 좌절당한 그가 소설가로 어마어마한 선금을 지급받을 만큼 명성과 그에 비례하는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며 일생을 보내다 말년에는 시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마치 <테스>의 주석 같다. 어떻게 보면 시골의 절세 미녀가 그 미모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란만장해지는 조금은 진부한 스토리라인임에도 그 클리쉐의 결마다 배어든 하디의 문장들과 그 스토리를 엮는 손길이 눈부시다.

 

그들은 계속 만났고,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날마다 그 이상스럽고도 장엄한 중간 지점,

즉 여명에, 보랏빛이나 분홍빛 새벽에 만났다.

-p.200

 

남녀의 만남을, 그 만남 속에 소리 없이 살그머니 스며드는 사랑의 묘사를 이런 문장들로 엮어 낼 수 있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여주인공의 질곡의 삶은 처절한 비장미가 느껴지지만 옹색하지 않다.

 

그녀가 지나갈 때 이 작은 물웅덩이 위로 별빛도 재빨리 지나갔다.

그곳에 반사된 별빛을 보지 못했더라면 머리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을 몰랐으리라.

거대한 우주가 그렇게 하잘것없는 곳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p.349

 

현실이 너무 단조로워서(사실 이제 단조로운 게 얼마나 감사한 지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테스의 사연 많은 삶의 곡절에 몰입되어 그녀가 너무 가엾게 느껴졌다. 부적절한 시기에 너무 늦게 만난 사랑으로 계속 좌절되는 그녀의 소망,꿈들의 나약함이 눈물겨웠다. 스물 언저리의 여자, 아니 청년들이라면 세상의 그 허술한 얼개 틈에 발을 빠뜨리는 실수를 곧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운이 나쁘면 그 실수가 발목을 잡는다. 테스의 삶이 슬픈 것은 하디가 바로 그 청춘의 그 나약한 지점을 너무나 절묘하게 포착하여 형상화해 낸 힘에 기댄 바가 클 것이다. 삶은 리허설이 없다,는 그 가혹한 진실의 민낯을 조금은 광포한 결말로 다시 한번 마주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이 정돈될 수 없는 일상에 기대게 된다. 나중엔 눈물나게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머리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을 기억하기로 하자, 나에게 하는 말. 바닥에는 온갖 물건들이 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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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2-0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분명히 아까 북플로 점심시간에 댓글 달았는데 제 댓글 어디갔어요? 네? ㅠㅠ 북플이 먹었나봐요..

블랑카님 글 정말 좋다고, 그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테스에 저렇게 반짝거리는 문장들이 나오던가요? 새삼스럽습니다.

blanca 2014-12-05 20:37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어요? ^^ 아웅, 넘 좋더라고요. 이 세상엔 너무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제 다 읽고 죽을 수 있을지 그 전에 노안 오면 어쩌나, 이런 고민을 ㅋㅋ 합니다. 다락방님의 칭찬이 참 따땃해요.

icaru 2014-12-0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돈될 수 없는 일상이 도피처이고 안식처라는 것을 저는 좀 늦게 깨달은 케이스인데,, 일찌기 @@@ 테스를 안 읽었더래서 그런 걸까요?? ㅎ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했다고~ 어린아이를 거두는 삶은 실은 풍요로운 것일지도요... 이마저도 나중에 깨닫는다는요,,

blanca 2014-12-05 20:40   좋아요 0 | URL
저는 첫째 아기 시절 너무 힘들게 기억해서 지금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조금 더 즐기면서 여유를 가지고 그 예쁜 시기를 함께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둘째인 지금은 최대한 노력하려 하지만 현실은 --;; 끊임없이 불평할 거리를 양산하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게 요새 아기만 데리고 다니면 나이드신 분들이 다 지금이 이쁠 때다, 힘들지만 즐겨라,라고 약속한 듯이 이야기들을 하셔요.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 봅니다.

moonnight 2014-12-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엉 저도 퇴근전에 분명 댓글 썼는데 어디로 간 걸까요. ㅠㅠ;;; 좌우지간 블랑카님 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테스를 꼭 읽어보겠다고.. 그랬는데ㅠㅠ;

blanca 2014-12-06 13:11   좋아요 0 | URL
아, 북플로 작성하셨어요? 아직 불안정한가봐요. <테스>는 정말 강추입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어요^^ 책이 아무리 좋아도 인내를 필요로 하면 연말에 힘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