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인터뷰집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대화와는 조금 다르게 지면화될 것을 의식하는 인터뷰는 사적인 내밀함과 공적인 책임감, 약간의 허영이나 과시, 솔직한 변호나 변명이 혼재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져 더 와닿는다. 말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형상화하고 더 나아가 다수와 공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종국에는 실패에 가까워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시도는 언제나 많은 것들을 남긴다.
사십 대 중반의 수전 손택이 창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 아주 젊지는 않지만 생기와 자신감과 약간의 단호함이 느껴지는 모습. 아무렇게나 신은 듯 하지만 왠지 멋스러운 그녀의 앵클부츠가 돋보인다. 그녀의 책은 <타인의 고통>과 <은유로서의 질병>을,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최후를 지키며 회한에 젖어 쓴 <어머니의 죽음>을 읽었다. 여기에서의 그녀는 유방암 투병을 끝내고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한 후 더욱 강인해진 모습이다. 1960년대 초, 컬럼비아대 학생이었던 조너선 콧은 당시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수전 손택에게서 학교 신문에 평론 한 편을 기고받은 적이 있다. 이후 <롤링스톤>지 창립공신 에디터가 된 그는 수전 손택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1978년에 이르러서야 상황이 무르익었다 생각하고 그녀에게 인터뷰 승락을 얻어내고 파리와 뉴욕이라는 두 장소에서 열두 시간에 걸쳐 수전 손택의 '말'을 듣게 된다. 주로 그녀의 두 저작 <사진에 관하여>와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이었지만 간간이 그녀의 사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문장이 아닌 정연하고 여유로운 문단으로서 말했다는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고 천착하는 그녀의 이지적 열정에 감탄이 일기도 했다. 그녀는 세밀하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원가족을 "붕괴되고 해체되었다"고 표현하고 한번도 누군가의 제자나 총아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후에 모자 관계를 무미건조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수전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아들에 대한 애정과 찬탄은 엄청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글로 쓰는 것만큼이나 지양하는 것 같지만 일찍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경험에 대하여서는 환희에 들떠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다. 작가의 소명은 세계를 향한 것이다. 수전은 자신이 글을 쓰고 난 후 항상 변화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삶의 일부라기보다는 삶을 그 자체로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핵심 동력인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네 시에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 폴 굿맨, 로라 라이딩 같은 작가들의 단편 선집을 기획하는 것이 일이었다,는 이야기 정말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들과 더불어 미완으로 남아 아쉽다. 삼십 오년 전에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했던 인터뷰 전문을 마침내 세상에 내어놓게 된 저자가 무엇보다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과 경탄, 그녀의 저작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어 수전의 이야기는 더욱 강렬한 이끌림을 가지게 됐다.
그런가 하면.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세 권 중 두 권을 먼저 읽고 가장 관심이 덜 가고 잘 모르는 작가들이라 뒤로 미루어 두었던 2권을 드문 드문 읽다 그만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3권 중 이 대체로 내가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못한 낯선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에 제일 매혹되었다. '쓰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읽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각양각색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아라는 인식을 공유한 이 작가들의 모든 위트 있는 고백들이 나름대로 다.
이미 거의 맹인이 되어 버린, 그래서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낭독을 듣는, 하지만 국립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며 사람들과 모여 앵글로-색슨어와 고대 노르드어를 공부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 이미 위대해질 대로 위대해져 버렸지만 그는 자신의 글을 차마 부끄러워 다시 보지 못하고 특이한 단어 대신 평범한 단어를 택한다는 겸허함과 사소한 장난, 농담들로 사람들을 놀리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귀여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현장 분위기와 보르헤스의 그 특이한 영어 발음과 젊은 여비서가 끊임없이 방문객의 면담을 독촉하는 그 정경의 묘사의 생생함이 마치 우리도 이 엉뚱한 노작가 앞에 있는 듯한 황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안타깝게도 단 한권의 책도 읽어보지 못한 토니 모리슨이 프린스턴 교정의 그녀의 연구실에서 따뜻한 부엌의 여주인처럼 친밀하고도 보이지 않는 통제력을 보여주며 나직나직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작품 <재즈>의 제목처럼 음악적이다. "낭비라는 사치스러운 특질을 얻기 위해 절제를 연습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밑줄을 긋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저 매 순간을 살았을 뿐이라는 비관주의자 주제 사라마구의 절망적인 비전은 삶이나 쓰는 일의 무기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두 쪽씩 성실하게 글을 쓰는 그가 삶과 일상에 보내는 성실한 경외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살해 협박을 받았던 살만 루슈디가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같은 동시대 작가들의 성공에 소외감을 느꼈다는 고백은 참으로 솔직하게 들린다. 삶 자체가 지나치게 극적인 논픽선의 세계 같아서 상상력으로 창조한 이야기들을 복구하고 싶다는 소망은 당연하게 따라올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것들을 삶에서 박탈당해 세상에 분노와 두려움으로 무장해 있을 것 같은 우려는 짧은 시간 농축된 그의 이야기들로 충분히 상쇄된다. 그는 충분히 따뜻했고 관용적이었다.
스티븐 킹은 역시나 스티븐 킹 답다. 자신을 비난하는 세력들에 거침없이 응수하고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여전히 성실히 참가하고 있으며 하루에 딱 세 개비의 담배만 피운다는 그의 고백들은 그의 작품들 만큼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도약한다.
지금은 192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쓰인 예이츠의 후기 시를 읽고 있습니다. 예이츠는 일흔세 살에 죽었지요. 그가 제 나이인 일흔두 살때는 어땠는지 알아내려고 애씁니다.
-오에 겐자부로 p.513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음악가 아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아직도 사십 대 아들을 화장실에 데려간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데에 대해 그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토로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삶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아들과의 시간의 무게를 존중한다. 이는 그의 작품으로도 승화되었다. 일본의 천황 숭배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그의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작가로서의 책무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는 것이라 했던 수전 손택의 모습과도 만난다. 더이상 젊지 않고 이제는 황혼기에 접어든 그에게서 아직 온갖 비리와 허위에 분노하는 힘과 용기가 불타오르는 모습이 뭉클했다. 여전히 읽고 연구하고 쓰는 노년의 모습은 질리지 않는 부러움의 지향이다.
읽는 일은 이래서 질릴래야 질릴 수가 없다. 가까운 곳의 나이듦은 훈계와 기이함으로 비춰지기 쉽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오며 깨달은 것들, 지금 추구하는 것들을 장시간에 걸쳐 언어화하는 장면은 영 낯설다. 그 낯섦이 해체되고 자연스러워지는 곳이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책이다. 읽기만 하면 그들의 지혜와 깨달음, 회한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집과 독선도 비어져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말'의 모든 것이 진실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로 모든 것을 위장하는 것도 어렵다. 그 중간 지대에서 언제나 적절히 타협해야 하는 모순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글을, 말을 들려주려는 성실하고 진실한 의도 앞에서는 주춤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쓰고 읽고 말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나 보다. 포기되어서도 안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