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좋아하는 작가로 전작주의를 시도해 본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인 올리버 색스는 한번씩 신간을 내는지 아무래도 연로한 탓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최근에 너무나 슬프게도 그가 안구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고 <뉴욕타임스>에 이러한 자신의 상황과 죽음을 앞둔 소회를 기고한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아무리 연로하고 중병에 걸려 있더라도 죽음과 쉽게 화해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는 역시나 그의 저작들에 드러난 세상이나 사물 앞에 위트 있고도 진지하고 사려깊게 다가갔던 그 모습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감동을 주었다. 이제 여러가지 논쟁거리, 걱정거리를 던져주는 세상사에서 초연하게 물러나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겠다,는 거리두기도 인상적이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도 그다웠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그가 환자들을 만나 겪은 실제의 임상사례를 활용하여 인간이 삶에서 급작스럽게 결핍이나 퇴행, 장애의 상황을 겪어도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픽션이 아님에도 환자 하나 하나가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설득력과 몰입도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과학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모두에 빠져 있다고 한 표현은 올리버 색스를 어느 정도 그려내는 데에 긴요한 힌트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인간과 질병에 기울인 관심이 과학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모두를 아우르며 아름다운 글을 완성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의 사적인 삶에 개인적인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 자신의 어린 시절만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에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 자신이 자서전을 마무리지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어 불현듯 궁금해 아마존을 검색하니 정말 며칠 전에 그의 자서전이 발간되었고 더불어 발빠른 리뷰가 3건 보였다. 스스로가 죽음에 다가왔음을 이야기한 그의 죽음이 현실화될까 싶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의 사진 표지. 올리버 색스일까? 자서전 발간은 곧 그의 죽음이 정말 멀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걸까? 우리나라에 그의 자서전이 번역되어 내 손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도저히 영문원서로 삼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읽어낼 자신이 없는데... 하면서 이런 저런 상념들이 지나간다. 나도 늙어서 죽겠구나.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다 이렇게 죽어가겠구나, 하는 그 단순하고도 분명한 진실 앞에서 서늘해졌다.

 

부재중 전화. 엄마는 삼십 년을 함께 했던 이웃 아주머니의 죽음을 알린다. 청명한 하늘. 아이의 운동회. 반에서 제일 작은 아이가 달리기를 하며 자꾸 뒤돌아 본다. 나도 그랬었는데. 적어도 나보다는 더 잘 달리니 다행이다. 눈을 한번 깜빡이니 나는 엄마만큼 늙어버렸고 아이는 나만큼 커버렸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도 늙음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빨리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연해진다. 그 뒤로는 항상 어떤 깨달음도 다짐도 아직은 이르다.

 

사람들은 자신이 늙어갈 거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늙어갈 것인가도 깨닫지 못합니다.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도리스 레싱 <작가란 무엇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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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30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약에 색스가 세상을 떠나면 독자들이 그의 책을 찾게 되겠죠? 저도 그렇고 사람들은 평소에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존재가 갑자기 부재하게 되면 그걸 찾거나 기억하려고 뒤늦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레싱의 말처럼 우리 곁에 있는 사소한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 빨리 소멸됩니다.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죠.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blanca 2015-05-01 08:23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제가 마음이.. 자서전 출간이 의미하는 바가 혹시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서 멍해지더라고요. 그런데 또 그렇게 시간과 죽음에 자주 멀어지는 속성 때문에 일상이 잘 굴러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2015-05-2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5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 보니 인터뷰집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대화와는 조금 다르게 지면화될 것을 의식하는 인터뷰는 사적인 내밀함과 공적인 책임감, 약간의 허영이나 과시, 솔직한 변호나 변명이 혼재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져 더 와닿는다. 말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형상화하고 더 나아가 다수와 공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종국에는 실패에 가까워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시도는 언제나 많은 것들을 남긴다.

 

 

 

 

 

 

 

 

 

 

 

 

 

 

사십 대 중반의 수전 손택이 창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 아주 젊지는 않지만 생기와 자신감과 약간의 단호함이 느껴지는 모습. 아무렇게나 신은 듯 하지만 왠지 멋스러운 그녀의 앵클부츠가 돋보인다. 그녀의 책은 <타인의 고통>과 <은유로서의 질병>을,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최후를 지키며 회한에 젖어 쓴 <어머니의 죽음>을 읽었다. 여기에서의 그녀는 유방암 투병을 끝내고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한 후 더욱 강인해진 모습이다. 1960년대 초, 컬럼비아대 학생이었던 조너선 콧은 당시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수전 손택에게서 학교 신문에 평론 한 편을 기고받은 적이 있다.  이후 <롤링스톤>지 창립공신 에디터가 된 그는 수전 손택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1978년에 이르러서야 상황이 무르익었다 생각하고 그녀에게 인터뷰 승락을 얻어내고 파리와 뉴욕이라는 두 장소에서 열두 시간에 걸쳐 수전 손택의 '말'을 듣게 된다. 주로 그녀의 두 저작 <사진에 관하여>와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이었지만 간간이 그녀의 사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문장이 아닌 정연하고 여유로운 문단으로서 말했다는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고 천착하는 그녀의 이지적 열정에 감탄이 일기도 했다. 그녀는 세밀하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원가족을 "붕괴되고 해체되었다"고 표현하고 한번도 누군가의 제자나 총아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후에 모자 관계를 무미건조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수전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아들에 대한 애정과 찬탄은 엄청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글로 쓰는 것만큼이나 지양하는 것 같지만 일찍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경험에 대하여서는 환희에 들떠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다. 작가의 소명은 세계를 향한 것이다. 수전은 자신이 글을 쓰고 난 후 항상 변화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삶의 일부라기보다는 삶을 그 자체로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핵심 동력인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네 시에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 폴 굿맨, 로라 라이딩 같은 작가들의 단편 선집을 기획하는 것이 일이었다,는 이야기 정말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들과 더불어 미완으로 남아 아쉽다. 삼십 오년 전에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했던 인터뷰 전문을 마침내 세상에 내어놓게 된 저자가 무엇보다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과 경탄, 그녀의 저작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어 수전의 이야기는 더욱 강렬한 이끌림을 가지게 됐다.

 

그런가 하면.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세 권 중 두 권을 먼저 읽고 가장 관심이 덜 가고 잘 모르는 작가들이라 뒤로 미루어 두었던 2권을 드문 드문 읽다 그만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3권 중 이 대체로 내가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못한 낯선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에 제일 매혹되었다. '쓰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읽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각양각색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아라는 인식을 공유한 이 작가들의 모든 위트 있는 고백들이 나름대로 다.

 

 

 

 

 

 

 

 

 

 

 

 

 

 

 

이미 거의 맹인이 되어 버린, 그래서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낭독을 듣는, 하지만 국립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며 사람들과 모여 앵글로-색슨어와 고대 노르드어를 공부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 이미 위대해질 대로 위대해져 버렸지만 그는 자신의 글을 차마 부끄러워 다시 보지 못하고 특이한 단어 대신 평범한 단어를 택한다는 겸허함과 사소한 장난, 농담들로 사람들을 놀리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귀여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현장 분위기와 보르헤스의 그 특이한 영어 발음과 젊은 여비서가 끊임없이 방문객의 면담을 독촉하는 그 정경의 묘사의 생생함이 마치 우리도 이 엉뚱한 노작가 앞에 있는 듯한 황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안타깝게도 단 한권의 책도 읽어보지 못한 토니 모리슨이 프린스턴 교정의 그녀의 연구실에서 따뜻한 부엌의 여주인처럼 친밀하고도 보이지 않는 통제력을 보여주며 나직나직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작품 <재즈>의 제목처럼 음악적이다. "낭비라는 사치스러운 특질을 얻기 위해 절제를 연습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밑줄을 긋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저 매 순간을 살았을 뿐이라는 비관주의자 주제 사라마구의 절망적인 비전은 삶이나 쓰는 일의 무기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두 쪽씩 성실하게 글을 쓰는 그가 삶과 일상에 보내는 성실한 경외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살해 협박을 받았던 살만 루슈디가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같은 동시대 작가들의 성공에 소외감을 느꼈다는 고백은 참으로 솔직하게 들린다. 삶 자체가 지나치게 극적인 논픽선의 세계 같아서 상상력으로 창조한 이야기들을 복구하고 싶다는 소망은 당연하게 따라올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것들을 삶에서 박탈당해 세상에 분노와 두려움으로 무장해 있을 것 같은 우려는 짧은 시간 농축된 그의 이야기들로 충분히 상쇄된다. 그는 충분히 따뜻했고 관용적이었다.

 

스티븐 킹은 역시나 스티븐 킹 답다. 자신을 비난하는 세력들에 거침없이 응수하고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여전히 성실히 참가하고 있으며 하루에 딱 세 개비의 담배만 피운다는 그의 고백들은 그의 작품들 만큼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도약한다.

 

 

지금은 192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쓰인 예이츠의 후기 시를 읽고 있습니다. 예이츠는 일흔세 살에 죽었지요. 그가 제 나이인 일흔두 살때는 어땠는지 알아내려고 애씁니다.

-오에 겐자부로 p.513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음악가 아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아직도 사십 대 아들을 화장실에 데려간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데에 대해 그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토로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삶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아들과의 시간의 무게를 존중한다. 이는 그의 작품으로도 승화되었다. 일본의 천황 숭배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그의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작가로서의 책무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는 것이라 했던 수전 손택의 모습과도 만난다. 더이상 젊지 않고 이제는 황혼기에 접어든 그에게서 아직 온갖 비리와 허위에 분노하는 힘과 용기가 불타오르는 모습이 뭉클했다. 여전히 읽고 연구하고 쓰는 노년의 모습은 질리지 않는 부러움의 지향이다.

 

읽는 일은 이래서 질릴래야 질릴 수가 없다. 가까운 곳의 나이듦은 훈계와 기이함으로 비춰지기 쉽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오며 깨달은 것들, 지금 추구하는 것들을 장시간에 걸쳐 언어화하는 장면은 영 낯설다. 그 낯섦이 해체되고 자연스러워지는 곳이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책이다. 읽기만 하면 그들의 지혜와 깨달음, 회한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집과 독선도 비어져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말'의 모든 것이 진실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로 모든 것을 위장하는 것도 어렵다. 그 중간 지대에서 언제나 적절히 타협해야 하는 모순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글을, 말을 들려주려는 성실하고 진실한 의도 앞에서는 주춤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쓰고 읽고 말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나 보다. 포기되어서도 안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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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5-04-2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책에서 손을 놓고 지냈는데, 다음 책은 수전 손택의 말,,로 정해버렸어요! 이 자리에서 ^^

blanca 2015-04-29 23:06   좋아요 0 | URL
와,icaru님이 다시 독서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에이바 2015-06-1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터뷰 좋다고 내려오다가 겐자부로의 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너무 너무 멋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자주, 생각날 것 같아요. 지금 제 삶과 마음가짐을 반성합니다. ㅠㅠ 인터뷰 읽기에 대한 블랑카님 말씀- 그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말도 가슴에 와 닿아요.
 

드디어 오단 책장 두 개가 꽉 차고(물론 이것은 꽂은 책 위로 남는 공간에 책을 눕힌 것도 포함) 책상에 붙어 있는 삼단 가량의 책장도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몇 권 정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전혀 짐작도 안 되는 실정이고 있는 책을 몇 번이고 들춰보며 처분할 책을 고민해도 더 이상은 내가 이 책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생각 안 나는 그런 상황. 이 책은 사실 처분할까 싶어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퍼더앉아 입 벌리고 지식인들의 넓은 서재에 감탄, 부러워하는 부작용에 시달렸다. 나는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니 사실 이런 넓은 서재에서 작가별, 혹은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나의 애서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미래가 과연 올까 싶은 데에서 오는 자괴감도 좀 들고.

 

 

 

 

 

 

 

 

 

 

 

 

 

 

특히나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널찍하고 입체적인 서재가 부러웠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집류를 처분하지 않고 소장할 수 있는 공간, 마음의 여유도 더불어. 읽고 또 읽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난 마당에 첨부되어 있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더불어 그것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던 계몽사의 <소년소녀문학전집>은 이미 오래 전에 내 손을 떠나 버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몽환적인 표지의 <보리와 임금님>. 작가는 이야기 시작 전에  다락방에서의 자신만의 책들과의 잔치에 대한 추억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었다. 나도 그런 다락이 있었으면, 그 다락 속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세상에나. 그런 오랜 이야기와 추억은 모조리 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가란 무엇인가 2>의 역자 후기에서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방> 이야기를 만났다.

 

 

 

 

 

 

 

 

 

 

 

 

 

 

이렇게 또 다시 소장해야 할 책의 목록들은 늘어만 가고. 나름대로 책의 충동구매를 지양하고자 아주 느리게 한두권씩만 주문하려고 하는데 장바구니의 배는 터지고. 소설가 김연수처럼 이제 나도 다시 읽을 책들 위주로 책장도 좀 정리하고 해야 하는 나이로 가고 있다는 마음은 언제나 아침에 읽을 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노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마음과는 좀 어긋나면서도 통하는 것도 같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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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4-2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는 뒤죽박죽인 책장이 정리될 날이 오겠지요. ㅎㅎ

blanca 2015-04-29 06:45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언젠가는 저도 가능하겠죠, 프레이야님?

파란놀 2015-04-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책을 만나면서
사랑스러운 생각이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blanca 2015-04-29 06:4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조금씩 더 커나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방심하면 다시 못난 구석들이 비어져 나오네요. 아직 읽어야 할 책도 커야 할 일도 많은 듯해요.

하이드 2015-04-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프로 정리해요. 다시 읽어지고 싶을때 사는 책이 내 책이라 생각하구요. 그렇게 두번째 사서 읽는 책은 헤어졌다 다시 만난 남친처럼 아, 내 책이 아니구나,바이바이 하기도 하고, 나랑 살자. 책장에 탁 꽂아두기도 하구요.

...그러면 늘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책은 왜 계속 늘어나는가 ㅡㅜ

blanca 2015-04-29 06:48   좋아요 0 | URL
아 ㅋㅋ 이해하죠. 저 분명 이사오기 전에는 책장 두 개도 여유 있었는데 책장을 하나 더 추가하니 더 모자르는 이 지경은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ㅋ 사실 그 책장도 제 책을 위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새끼를 치나 봐요, 책도.

transient-guest 2015-04-29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연말부터 미루고 있습니다만, 사무실방 공간을 정리하고 가구를 재배치해서 약간 도서관처럼 만들고 더 많은 책을 가져다 놓을 생각입니다.ㅎㅎ 모든 책벌레들의 꿈이겠지요? `지식인의 서재`는 좀 기획도서의 냄새가 나는대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국교수님은 안경환교수님과 함께 아주 약간 인연이 있는 분이기도 해서 더욱 그분의 이야기는 잘 읽었지요.ㅎ

blanca 2015-04-29 06:49   좋아요 0 | URL
부럽기만 하네요. 저도 서재 만드는 게 꿈이에요. 엑셀로 색인도 좀 만들고. 무엇보다 작가별로 분류해 놓고 싶어요. 의외로 이 책은 소장가치 충만해서 또 읽어도 좋더라고요.
 

나이가 드니 '사람'보다 '상황'의 힘이 때로 더 힘을 발휘하게 되는구나, 싶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는 언행을 할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 앞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내 손 안에 쥔 것들, 내가 지향하는 것들이 때로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 저렇게 늙고 싶지 않다,는 모습도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듦'과 '성숙'은 동의어가 아니다.

 

 

 

 

 

 

 

 

 

 

 

 

 

 

 

 

 

장 아메리는 '늙어감에 대하여'  어떤 미화나 위안의 비늘도 가차없이 벗겨낸다. 드러난 속살은 서글프다. 결국 그가 이야기하는 '늙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미화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쪼그라듦을 향한 잔인한 노정이다. '성숙'도 '달관'도 다 헛소리다. 세상은 노인 앞에서 등을 돌린다. 그는 그 누구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던 잔인한 진실들을 가감없이 내뱉는다. 말라 비틀어져도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 뒤에 읽는 이들은 '삶의 찰나'들을 즈려 밟으리라 결심하지만 원경에서도 근경에서도 너무 초라해져 버린 삶의 풍경 앞에서 일순 아연해진다. 모두가 극명한 진실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과장일지라도 거짓말일지라도 생은 긍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의 전진은 '나이듦'과 떨어져 이야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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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듯한 제목의 중편집을 통해 무라카미 류를 처음 만났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한없이 어여쁜 제목에 기대어 그를 만나볼까 하며 인터넷 서평을 이르집다 멈칫했다. 그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아닌 듯하다는 인상. 제목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작품들은 아니라는 평. 하루키와 같은 성을 가진 그와는 그렇게 멀어졌다, 다시 만났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다. 섣불리 그를 만났다면 섣불리 멀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오랜만에 아껴 읽을 만한 이야기들을 만나 일부러 천천히 갔다.

 

쉰네 살에 이혼한 여자는 마트나 백화점의 식품 매장 시식 코너에서 일한다. 그녀는 생계를 걱정하다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춘 남자와 재혼하기로 하고 결혼 상담소에 등록하여 나이든 남자들과 선을 본다. 물론 성공하지 못한다. 업체에서 선별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파티 참석차 간 호텔에서 우연히 위로가 필요한 젊은 남자에게 얼그레이를 권하며 그와 일회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무언가를 그녀에게 남기고 간다. 미련을 잘라내는 일. 그리고 그것은 진심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전남편과의 재회에서 그녀는 그와 보낸 긴 세월의 친밀감을 인정하지만 자신과는 다름 사람임을 절절하게 인식하고 깨끗한 이별을 한다. 미련들이 밀려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더 삶을 성실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이라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멈추지 않고는 읽어낼 수가 없을 정도로 묵직하다. 작은 출판사에서 해고당하고 아직 대학 등록금을 대야 할 아들이 있는 인도 시게오라는 남자의 그 노숙자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한때는 소설가를 꿈꾸었던 그가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공사 현장의 차량안전요원 일을 하며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는 모습은 그 누구도 불편감을 느끼지 않고는 읽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아무도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그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앞에 나타난 중학교 동창생. 한때는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했던 그들의 추억은 노숙자가 되어 병든 몸으로 나타난 그 친구 앞에서 무색해진다. 인도 시게오가 그렇게나 두려워했던 바로 그 노숙자가 되어버린 친구. 친구는 이혼해서 떠나버린 어머니가 남기고 간 반지를 돌려주는 일을 부탁하며 둘은 그 여정을 동행한다. 노숙자 냄새를 지우려 싸구려 여자 향수를 뿌리고 버스 안에서 오줌을 싸 버리는 그 친구를 부축하며 인도 시게오는 마침내 삼십 년을 떨어져 있었던 모자를 상봉하는 데 손을 보태게 된다. 그런 드라마틱한 경험 뒤에도 그는 여전히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임시직을 전전하고 일자리를 잃은 아내는 여전히 구직중이다. 하지만 어머니 옆에서 죽게 된 그 친구와의 만남은 무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지척에서 목격하지만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되려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된다. 모든 불안정한 것들, 두려워했던 것들이 물러나고 남은 것은 생의 긍정이었다. 친구는 가엾고 서글픈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에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학창 시절의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생을 마감하고 인도 시게오는 그 친구의 마지막 나들이에 동행함으로써 그렇게나 끄달리던 두려워했던 것들에서 놓여난다.

 

이밖에도 겉도는 남편 대신 반려견에 기대었던 그녀가 반려견의 죽음을 함께 하며 남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 퇴직 후에 캠핑카를 사서 아내와 자유로운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꾸었다 그것이 깨어진 마당에서 가족 간의 진정한 소통, 독립에 대하여 숙고하게 되는 전직 세일즈맨, 어린 시절 해녀 할머니와의 추억들과 늘그막의 사랑의 실패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게 되는 전직 트럭 운전사의 뒤늦은 성장. 그들은 모두 사회에서 때로는 함께 지내던 배우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침내 스스로를 들여다 보고 잊었던 것들, 놓쳤던 것들 앞에 자연스럽게 당도하게 되며 단순한 쇠락이 아닌 또 하나의 성장의 전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미래상이다.

 

그러니 이들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기대고 싶다. 분명 지나가고 남는 것들이 있다는 믿음. '나이듦'이 반드시 '상실의 과정'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이러한 위로들이 어쩌면 와글와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캐릭터들의 일상을 통해 이야기되는 과정은 참으로 따스하다.

 

어젯밤에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대성당' 편을 마침내 다 들었다. 결국 사람 사이의 소통은 아무리 어렵고 미망일지라도 끊임없이 포기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에서 만나는 작가들 앞에 서는 것이 좋다. 너무 순진한 믿음이라고 해도 이미 태어나 만나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며 살게 된 마당에서 '절망'과 '체념' 주변만을 서성거리고 싶지는 않다.

 

작지만 분명 뭔가 있는, 위로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는 진부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위로는 위안은 언제 받아도 넘치지 않으니까. 이야기마다 따스한 마실 것들을 나열하는 작가의 섬세함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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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4-20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몇 권 읽었었는데 정말 제게는 맞지 않는 작가라 생각하고 그간 멀리 했거든요. 제가 읽었던 작품 중에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제목이 살짝 괴상한 [55세부터 헬로라이프]가..소설이군요? 그것도 꽤 괜찮은? 류를 이제는 다시 만나도 되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블랑카님.
물론 저는 55세 헬로라이프 보다는 사실, [늙어감에 대하여]에 더 관심이 가긴 합니다만.

blanca 2015-04-20 16:0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이 작품이 무라카미 류 작품으로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라 사실 그의 전반적인 작풍은 잘 모르겠어요. 그에게 있어 조금 의외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들인가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너무 좋아서 다락방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너무 좋은 이야기들이어서 진짜 푹 빠져 읽었어요.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고 나면 서러워져요.

hnine 2015-04-2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저의 우울한 정신 상태를 고려하여 <늙어감에 대하여>는 읽지 말고, 대신 무라카미 류의 책은 읽어봐야겠어요.
(이래놓고 어쩌면 늙어감에 대하여를 더 먼저 읽을지도 몰라요 저란 사람은 ㅠㅠ)

blanca 2015-04-21 07:14   좋아요 0 | URL
나인님, 두 책을 함께 읽으시면 *^^ 각 책이 가지는 어두움이 서로 상쇄되지 않을까요?

라로 2015-04-2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라카미 류는 하루키와 성이 같다는 것 말고는 전혀 모르는 작가인데 블랑카님의 글을 읽으니 막막 읽고 싶어요!! 저도 블랑카님 나이에 늙어가는 것이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그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나이가 더 든 요즘은 오히려 젊어지는 얘기를 더 읽게 되는 것 같아요~~~~ㅎㅎㅎㅎ 어짜튼둥 저는 언제나 위로가 되는 이야기 좋아해요!! 잘 읽었어요~~~^^

blanca 2015-04-22 11:06   좋아요 0 | URL
아, 나비님, 제 나이가 과도기라 그런 걸까요? 여기를 넘어가면 좀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어요. 아, 이 소설 정말 강추드립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어요. 주인공들의 말, 행동이 어찌나 현실적인지, 그냥 자신이 체험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겪은 일들을 쓴 것 같아요.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이벤트 준비는 소비로 시작된다. 휴가를 가도 기념일을 맞아도 심지어 내 자신이 너무 우울하고 지칠 때에도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게 된다. 거창하고 값비싼 것이 아닌 한 자루의 연필일지라도 사물은 신기한 착각, 잠시 위로를 준다.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갈 곳도 없고 꼭 구태여 가운뎃 손가락에 포인트 반지를 끼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손가락에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백화점 행사장에 목을 들이민다. 명품관은 '언젠가'는 이다. '사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사물'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도 다 '속물성' 지근거리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욕망하고 꿈꾸고 과절하는 과정에서 '사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지, '지금', '여기'에서 단 하나의 흔들림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한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거의 모든 것의 소비에서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또다른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아무 사물도 남지 않은 거의 소비가 없었던 시간들은 돌이켜 볼 때 더 큰 슬픔을 남긴다. 그때는 '일'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시간. 그 시간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 회사에 가지고 다녔던 다 낡아빠진 가방을 보면 지금도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어쩐지 가슴 한켠이 시큰하다.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이야기'를 꿈꾼다. 그것은 명백히 환각이자 착각이지만 그럼에도 일상이 조금은 덜 단조롭고 덜 무기력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소비를 지양하는 책을 사대는 또 다른 모순 속에서 잠시 사물에서 멀어져 보고자 하지만 그 사물들은 구심력으로 다시 여심을 당긴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아주 얇은 책이다. 하늘색 마카롱 빛깔 표지가 손안에 쏘옥 들어온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경이로운 이야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소설에 빠져 있는 사람도 누구나 잠시 이 책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굉장히 건조한 척 담담한 척 이야기하는 실비와 제롬의 그 사물들에 허덕이는 탐닉, 좌절의 여정이 너무나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누구나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있어도 너무 없어도 그것에 끄달리게 된다. '돈' 이야기 앞에서 초연하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도의 자립이 가능한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의 조건에서 더 나아가 행복의 조건까지 모두 돈의 가치로 교묘하게 환원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해서 사는 물건보다 정말 가능해서 꿈꾸는 미래상보다 항상 잉여의 것들이 욕망의 언저리를 부유하고 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집착은 대개 사소한 물건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행위로 드러났다.

-p.27

 

실비와 제롬은 파리의 사회심리 조사원이다. 프티 브루주아 출신의 젊은 남녀는 파리의 상점가, 벼룩시장이 열린 곳들을 기웃거리며 각종 사소한 것들을 사모은다. 물론 그들의 지향과 꿈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여기'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 유예된 곳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물론 더 많이 욕망했다. 조르주 페렉이 쫓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소진해 버린 청춘들과도 닮아 있다. 찰나적인 즐거움이 난무하는 이십 대, 그만큼의 불안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시간들의 묘사. 시간은 흐르고 친구들은 '안정'을 찾아 떠나간다. 실비와 제롬은 용단을 내린다. 튀니지의 교사 자리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곳은 파리 만큼 사물들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곳은 아니었다. 실비와 제롬은 마침내 욕망을 잊기 시작하고 그 지루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에 함몰되며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안정, 안온함, 자족과는 다르다. 그것은 권태였다. '돈'에서 탈출하여 '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곳'은 그들이 바라보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에필로그는 엄정한 가정법을 동원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파리로의 귀환, 다시 '사물'과 '욕망'이 조우하는 지점으로의 끊임없는 내달림. 그리고 또 다른 '그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여기 지금 우리와 얼마쯤 닮아 있어 섬뜩하다. 에필로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카를 마르크스 p.139

 

에필로그 뒤의 첨언. 이야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솔직히 납득이 잘 안 가면서도 삶의 모든 추구의 과정 자체에 대한 무게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작금의 어지러운 상황들에 가하는 엄중한 경고 같아 더 와닿았다. 조르주 페렉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들켜버리고 만다. 예리한 문장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대 앞에서 읽는 이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다시 한번 멈추고 심호흡 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나의 삶을 모두 좌지우지 해버리고 말것이라는 깨달음. 그가 기획한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우리 삶의 흐름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정법들. 그러니 "~ㄹ수도 있었다"의 무게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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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4-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언제나 부자일 수 있는데
막상 `부자`는 저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만 있다고 여겨...
그만 오늘 이곳에서 내가 어떠한 부자인가를 미처 못 보고
그냥 달리고 또 달리는구나 싶기도 해요...

blanca 2015-04-16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끔씩 멈추어 서면 보이는데 또 달리다 보면 그런 헛된 끄달림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 `나`인 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cyrus 2015-04-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돈이 없는데도 돈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죠.

blanca 2015-04-16 13:14   좋아요 0 | URL
죽기 직전에도 다 해탈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니까. 평생을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해요.
어떤 강렬한 감정의 기저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이 어떤 욕망, 결핍이 있더라고요.
그럼 아직 멀었구나,하며 또 한숨쉬고. 그래도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많은 것들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이 참 부럽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5-04-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굴데굴 굴러서 구렁텅이 안에 쏙 빠지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하고 눈을 치켜뜨던 순간.
그 두 순간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조르주 페렉은 참 쉽고 간단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문제는 자성과 자각, 생각은 늘 그것이 남의 것일 때에만 쉽다는 것. (제겐 그랬어요ㅠㅠ 저 그리고 오늘 후레쉬베리 사서 블랑카님의 이 좋은 리뷰를 읽으며 그만 한번에 여섯 개 `마셨`어요ㅠㅠㅠㅠ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다 내가 많이 먹어서......)

blanca 2015-04-16 13:16   좋아요 0 | URL
`한끝 차이` 이 말 좋네요.^^ 맞아요, 어느 책에서 인간들이 사실은 대부분 아주 비슷한 평균적 대응, 반응을 보이는데 자기만은 특별할 거라 생각한다는 지적이 떠올라요.

후레쉬 베리. 저도 그래요. 한 개로 절대 끝나지 않아요.--;; 여섯 개는 좀 과한대요 ㅋㅋ 저는 며칠 전에 아이가 베란다에 던져 놓은 후레쉬 베리 두 개를 발견하고 원샷했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5-04-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리뷰가 그리웠어요. ^^

blanca 2015-04-20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프레이야님이 그리웠답니다. 돌아오신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