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시기, 일탈에 관대해지고 욕망에 솔직해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돌아올 수도 돌아와서도 안 되지만 나이들수록 더 생생해지는 그리움을 휘감고 뒤돌아보는 정경이 된다. 소설가 김연수는 서른 이후에도, 마흔 이후에도 이렇게 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여유로운 20대를 보낼 수 있었을까, 라고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야기했지만 뒤늦게 찾아올 깨달음과 신중함을 장착한 청춘은 진정한 의미에서 청춘이 될 수 없다. 내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새털 같은 나날들이 결국 늙음과 죽음으로 귀결될 것임을 절절하게 인식하고서야 어찌 마음껏 욕망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뒤도 안 돌아다 볼 것처럼 이별할 수 있겠는가. 청춘은 무지하고 무모해야 제맛이다.

 

 

 

 

 

 

 

 

 

 

 

 

 

 

 

 

 

 

 

그리하여 나는 해가 져 버린 미국의 어느 밤 낡고 망가진 강둑에 앉아 뉴저지 위로 펼쳐진 넓디넓은 하늘을 보고 있자면, 육지가 갑자기 믿기지 않을 만큼 크게 부풀어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지고, 모든 길이 펼쳐지고,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중략>

누구도,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버려진 누더기처럼 늙어가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딘 모리아티를 생각한다. 끝내 찾아내지 못했던 아버지, 늙은 딘 모리아티도 생각하면서, 딘 모리아티를 생각한다.

-p.197

 

 

<길 위에서>는 작가 잭 캐루악이 길 위에서 보낸 자신의 청춘을 다시 살아내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어떤 관습, 어떤 금기, 어떤 경계 들은 가뭇 없고 찰나 안에 가두어진 존재의 불꽃만이 휘황하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신비로운 바보, 잃어버린 형제 같은 딘 모리아티가 나타나면 작가의 분신인 샘 파라다이스는 다시 떠나고 또 떠난다. 미대륙을 횡단하며 뚫고 지나가는 강렬한 흔적들 갈피마다 이미 나이들어 버린 샘 파라다이스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늙음과 헐벗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 젊음은 사실 온전한 것이 이미 아니다. 이미 나이든 시선이 관조하는 청춘의 덧없는 아름다움은 눈물겹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샘 파라다이스의 아버지와 이미 몰락해 버린 딘 모리아티의 아버지를 또 다른 내일의 '나'로 애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의 여정과 길이 오버랩 된 자리에 남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청춘이 이야기하는 나이듦, 몰락, 작별, 죽음이다. 가벼움으로 위장한 깊이가 가닿은 곳이 바로 이 이야기.

 

스무 살, 친한 친구에게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생각했던, 생각하는, 생각할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야기는 해도 해도 줄지 않고 아무리 많이 말하여져도 들어져도 갈급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그 아이를 또 만나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그 시간 만큼 더 늘어난 이야기의 간극을 줄이고자 또 이야기를 시작하고 듣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샘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의 이야기도 그러했다. 그 아이들은 모든 것을 소통하고 나누고 싶어했다. 그 불가능한 별을 향해 쏘아 올려진 그 무모한 시도들과 노력들은 청춘과 함께 스러졌다. 이미 그럴 것을 알고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아프다. < 길 위에서>를 아쉬움 없이 편안하게 읽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그것이 끝나버릴 것을 알고 듣는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청춘은 그런 것같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5-06-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마흔을 넘어도
쉰 줄이나 예순 줄을 지나도
우리 마음에 푸른 바람이 분다면
우리는 늘 청춘이지 싶어요.
언제나 새로운 길로 씩씩하게 나설 수 있는~

blanca 2015-06-29 08:49   좋아요 0 | URL
육체의 노화도 그렇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 현재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마음이 노화의 징후인 것 같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

Nussbaum 2015-06-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상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의 20대 초반은 나름 기억할 것이 많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 주사바늘을 꽂으며 열심히 책장을 넘기던 그 기억이 무릇 파랗게 다가오네요 !

blanca 2015-06-29 08:50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안 그래도 저 이 책 너무 늦게 읽은 것 같아요. 이십 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더 흠뻑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moonnight 2015-06-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매우 충격으로 느껴졌던 책이었어요@_@; <길 위에서> 라고 하면 우선 두근두근하는 이 마음.;; blanca님의 글로 다시 만나니 참 좋습니다.^^

blanca 2015-06-29 08:52   좋아요 0 | URL
저도요, 달밤님. 지금까지 접해 오던 소설들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어요. 논픽션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어떤 틀이나 형식이 해체되는 느낌이 신선했어요.

에이바 2015-06-2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은 무지하고 무모해야 제맛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그거예요. 조금 더 무모했더라면, 도전했더라면 어땠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의 글을 두고 중2병이라고들 하던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비트닉에게는 매력, 날 것의 무언가가 있어요. 저도 이 책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blanca 2015-06-29 14:01   좋아요 0 | URL
중2병 ㅋㅋ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그러기엔 좀 많이 늙은 나이가 아닐런지. 언제 한번 이렇게 살아 보겠어요. 어른들 말씀 잘 안 들어도 좀 넘어가 주는 시기, 어느 정도 누려야지요. 하지만 참 모순적인 게 제 딸이 저처럼 열심히 논다면 머리 좀 아플 것 같아요--;

희선 2015-06-3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나이 들수록 여러가지를 알기도 하지만, 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잘 안 되면 어쩌나, 잘 못하면 어쩌나... 나이는 청춘이 아니라 해도 마음은 청춘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살기도 어려울 듯하네요 하지만 철은 잘 안 들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있군요 철들면 죽는다는... 어느 때는 지금 아는 걸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기도 하잖아요 지나간 시간 그리워하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좀 낫겠죠


희선

blanca 2015-07-01 12:40   좋아요 0 | URL
네, 나이들수록 겁쟁이가 되는 면이 많아요. 저는 이제 수영도 자전거 타기,도 배울 수 없게 되어버린 건가, 가끔 좌절합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한 면이 있어야 좀 삶이 다이내믹해질 텐데 아쉬워요.^^;;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되고 차마 언어로 다 담아내기 힘든 참혹한 인간성의 추락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살게 한 것도 결국 인간이었다. 이탈리아인 민간 노동자 중 한 명인 로렌초가 대가 없이 나누어 준 빵, 배려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참으로 읽기 힘겨운 소설이었다.  이 이야기 전에는 영문도 모르는 체 자신의 땅에서 끌려나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박탈 당하고 동물처럼 부림을 당했던 흑인 노예의 역사적 사실들은 사실 개별성이나 구체성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의 말미에 덧붙인 이야기처럼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해나 공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형제보다 더 사랑했던 동료가 자신의 눈 앞에서 불타 죽고,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 생생하게 절절하게 떠올리고 이해하고 아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너무 광활하고 길조차 없어 차마 독자라는 권리를 가지고 발을 들여놓기도 힘든 것이었다. 모성마저 노예 제도 안에서는 사치였던 한 여인이 너무 짙게사랑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고통의 편린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아팠다. 흑인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가 가지는 가치는 그 아픈 역사 속에 사라져 간 숱한 익명의 삶들에 이름을 붙이고 감히 무화되지 않게 붙잡으려는 그 처절한 노력 속에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다시 백인 주인에게 붙잡혀 동물처럼 특징을 관찰당하고 관리되는 그 대장 안에서 익명화되고 계량화되느니 부모의 권력 남용이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 해도 생명을 끊으려 했던 어미의 애닳는 심정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수용소 안에서 짐승 같이 짓밟혔던 프리모 레비가 인간 로렌초에게서 받은 관심과 배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듯 여기에서도 만삭의 몸으로 주인에게서 도망나온 흑인 노예 세서를 도와 준 백인 소녀 에이미가 구원이다. 토니 모리슨의 언어들은 마치 아름다운 선율처럼, 다채로운 빛깔처럼 그 어색한 조합이 이루어 낸 아름다운 성과를 담아낸다. 푸른 고사리의 포자들에 둘러싸여 백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은 흑인 여인의 넷째 아이를 받아내며 당돌하게 묻는다. 이 아이한테 나를 이야기해 줄 거냐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인연은 아이의 이름으로 남는다. 덴버. 에이미 덴버. 프리모 레비가 인간 로렌초를 절규했듯 세서는 딸의 이름에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인간의 몸짓을 각인한다.

 

 

 

 

 

 

 

 

 

 

불타 죽은 남자 노예가 떠나 보낸 여인은 사랑의 결실을 품고 있었다. 모든 가없는 절망을 성토하고 남은 것은 토니 모리슨의 애가였다.

 

 

"그 여자는 내 마음의 친구야. 그 여자는 나를 하나로 모아줘.

조각난 나를 모아서 제대로 맞춘 다음 돌려주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마음의 친구인 여자가 있으면."

-p.444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5-06-2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블랑카님의 글도 좋고 마지막의 인용문도 기가 막히네요. 너무 좋아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blanca 2015-06-21 10: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눈이 부신 책입니다. 어쩌면 문장 하나, 하나가 이렇게 영롱한지 몰라요.

파란놀 2015-06-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땅에서 붙잡히면서 죽고,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너면서 죽고, 노예로 부려지면서 죽고, 얻어맞거나 학대받으면서 죽고... 참으로 많은 흑인이 노예로 뒹굴면서 죽어야 한 이야기는 차마 글이나 말로 담아내지 못하겠지요..

blanca 2015-06-21 10:53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맞아요. 어떤 인종, 민족이 핍박 받은 역사를 어찌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해나 공감도 어쩌면 만용이겠지요. 어제 흑인을 난사한 백인 아이를 용서한다며 오열하는 그들을 보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희선 2015-06-2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만이 희망이다, 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피부색이나 문맹이라는 것 때문에 백인이 흑인을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다뤘지만, 모든 백인이 그런 건 아니겠죠 그 안에는 그 사람들도 사람이다 생각하고 자유를 갖게 해주기 위해 애쓴 사람도 있죠 이런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군요 백인 여자아이가 보여준 친절 때문에 살기도 하는군요 사람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살자고 마음먹죠 아이를 낳게 도와준 건 작은 일은 아니지만... 누구한테든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싶네요


희선

blanca 2015-06-22 13:30   좋아요 0 | URL
네. 사실 같은 피해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돕는 것은 공감에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지만 가해자 집단에서도 용감하게 돕는 행위를 한 사람들이 실제 있었더라고요. 인간으로 절망하고 인간 덕분에 다시 희망을 품게 하는 게 또 사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15-06-2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내기 어려울 것 같아 포기한 책 중의 하나가 이 책이거든요.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까, 꼭 읽어야할 것 같아서,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그러면서 약간 떨리고 그러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항상, 제가 님의 리뷰를 감탄하며 꼼꼼히, 아쉬워하며 천천히 읽는다는... *^^*

blanca 2015-06-26 11:1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저도 이 책 분량도 많고 여러 가지로 쉽게 못 읽겠다, 생각했는데 웬걸요, 일단 재미있고 서사의 폭이 깊고 넓어서 정말 흠뻑 빠져 금세 읽었어요. 그러니 망설이지 마시고 덤비세요 ^^
 

애거서 크리스티는 나이들수록 점점 자기다워지기 마련이고 이것이 다행이라고 얘기했지만 점점 더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힘들어지고 독선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나이듦의 징후가 아닐런지.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수를 옹호하며 핏대를 올리는 노인과 싸우는 일은 어쩌면 당신들의 삶과 노고에 대해 제발 존중해 달라고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나이듦에 대한 오독과 겹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작 이야기 되어야 할 지점은 언제나 빗겨가고 싸움의 잔해는 소통하지 못했음에 대한 적나라한 증거물들이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라 난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은 동양인이지만 영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터라 좀더 물러나 자신의 부모들의 삶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관조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었을 것도 같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나치에게 협조한 주인에게 거의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집사의 내면에 들어가 어떤 하나의 신념 아래 삶에 성실하게 복무한 노인의 이야기를 풀어 낸 그 섬세한 결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도 작가의 저력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고 동조할 수 있는 것들에게 물러나 그렇지 않은 것들을 건조하게 변호하는 문장들은 생소하지만 문학의 또다른 역할일 수도 있겠다 싶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의 신혼 시절을 회상하는 미망인의 담담한 회고담은 그녀 자신의 삶보다 사실 그녀를 둘러 싼 주변인들의 삶의 경관을 읽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며느리 눈에 비친 시아버지 오가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그리고 전쟁에 반기를 들지 않았고 하물며 거기에 따른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가정에서는 성실한 가장이었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이제 와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아들 친구의 글은 그를 충분히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임신한 며느리와 함께 그 아들의 친구를 찾아 나서고 그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논쟁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격하지 않고 어떤 합의나 절충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어긋난다. 노인이 아들의 친구를 지목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의 항변과 분노는 정작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원망, 아쉬움과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은 그래서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잘 살아왔다,는 노인의 삶에 대한 평가 아닌 평가를 희구하는 것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소위 보수를 표방하는 정권의 엄연한 실책까지 아들, 딸, 며느리, 젊은이들과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논쟁의 패배라고 오인되지 않는 풍경이 그립다. 더해서  그것을 격하게 지적하며 아버지의 생각, 삶 전체를 부정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보수와 진보는 한 집단이 전체를 대변하고 담아낼 수 있는 그릇도 아니요, 상식과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을 자의적으로 폐기할 수 있는 방패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 기본 원칙에 대한 상기만으로도 나이듦과 젊음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5-06-1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기`하고 `논쟁`은 서로 달라서,
이야기를 나누려 하면 서로 마음을 열지만
논쟁을 벌이려 하면 그만 서로 생채기만 입히는구나 싶어요...

blanca 2015-06-16 13: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논쟁이란 이상향인 것인지. 다들 감정적으로 발끈하는 지점들이 있어서요.
저도 그렇겠지요. 정말 성숙해야 가능한 것이 논쟁, 토론이지 싶습니다. 사실 토론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의견을 들어주는 정도인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5-06-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론을 자신(상대)에 대한 공격, 또는 자신(상대) 가치의 폄하로 여기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데, 이성적인 논쟁이라고 표방하지만 간접적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나 편견, 너는 그런 사람이야 라는 규정화가 들어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보여져요. (저도 짜증나서 그런 공격을 할 때가 있었구요.. ^^) 그 사실만 가지고 논쟁해야 하는데, 그 밑에 줄줄이 엮인 고구마 줄기 같아서 차라리 입을 다물고 피해야지 싶을 때가 점점 많아지니.... 소통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는 노인이시더라도 현명함과 여유, 따스함을 가진 분들도 많은데
목소리 큰 분들 때문에 나이든 분들은 편협하다고 규정화되는 현실도 많이 아쉬워요.

blanca 2015-06-17 09:29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어떤 사안을 놓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의견을 듣고 다른 측면으로도 생각해 보기보다 내 주장의 정당성을 찾는 경우가 있어요. 마고님 말씀대로 그런 경우 딱 그 사안 뿐만 아니라 평소에 쌓은 그 관계의 결핍, 그 사람에 대한 불만이 혼재되어 있더라고요.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도 소설도 못 봤지만 오늘날 특히 이 한국 사회에서의 노인들에 대한 인식, 대우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살아온 나날들이 쌓여도 그 무게가 때로 근거없이 폄하되고 혹은 그럴 만한 행동이 부각되기도 하고 노인의 삶에 대해 참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몬스터 2015-06-1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인간은 4세 이후부터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고 하더라구요.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이 진정한 토론의 출발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단지 나와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뿐인데 , 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기분이 상할때가 아직 종종 있어요. 의식하고 있으니까 고쳐가고 있어요. 나이를 헛으로 먹지 않아야 하는데 , 노력해야죠.

blanca 2015-06-17 09:30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저도 요새 저를 좀 관찰하고 있어요. 무언가 격한 감정이 일거나 덜 이성적이 될 때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분명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욕망,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게 있더라고요. 이 과정만으로도 좀 크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만인 건지, 앞으로 더 노력해야 겠어요.

2015-06-22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2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년 2월, 여섯 살 딸아이의 콧물 감기는 좀처럼 낫지 않고 열과 기침까지 동반하게 되었다. 열이 잘 나지 않는 편이었는데 해열제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바로 39도와 40도를 넘나들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단순 감기로 보이지 않아 평소 다니던 대학 병원에 가서 다시 딸아이의 증상을 얘기하자 폐사진을 찍어보자 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전문가가 보지 않아도 사진에 하얗게 전면을 뒤덮은 무언가가 좋은 것이 아님을 예견하게 했다. 당장 입원하라는 권고가 떨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걸어다니며 떼도 부릴 수 있었던 터라 아이는 입원하지 않겠다고 울었다. 사실 유치원 친구들도 폐렴으로 종종 입원하는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딸아이의 입원을 크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이틀, 사흘이 되어도 호전되지 않고 아이는 밥도 먹지 않고 놀지도 않고 육인실 병상에 누워 기침만 했다. 어린이 병동의 육인실은 대부분 아주 심각한 질환을 가진 아이가 장기로 입원하는 곳은 아니었기에 유독 딸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휠체어를 타고 어린이 방송을 보고 복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형제와 놀기도 했는데 나의 아이만 불덩이 같은 몸으로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재차 아이의 폐사진을 찍어보고 의료진은 더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항생제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 더 독한 항생제 투여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폐렴은 점점 악화되었다. 아이는 일반 병동에서 더 이상 안전하게 치료받는 상태가 아니라 점점 경과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연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 하나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각종 상황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코감기에 걸렸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고 외출하고 평상시 생활을 계속 했던 것,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아이를 무리하게 한 것, 빨리 입원시키지 않은 것 등 온갖 죄책감의 요소들은 난무했다. 그리고 든 생각, 하필 왜 우리 아이가 이런 위중한 폐렴에 걸렸는가, 왜 내가 아니고 내 아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반문하게 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을 믿었지만 이런 각종 의구심과 반문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 사실 기도도 잘 되지 않았다. 엄마로서 결국 내 아이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 불운은 나를 비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정면으로 나를 가격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앞으로의 삶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이었다.

 

필립 로스가 절필을 선언한 지 몰랐다. 찾아 보니 2010년 그가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 <네메시스>는 자신의 선언 아닌 선언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첫 폴리오는..."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현재의 상황과도 겹친다. 1944년 위퀘이크 유대인 구역에서의 폴리오 대유행으로 촉발되는 이 비극은 철저하게 정제된 경제적인 문장으로 농밀하게 전달된다. 치료 약도 백신도 없던 당시에 소아마비로도 알려져 있는 폴리오의 창궐은 아이들을 속수무책으로 쓰러뜨렸다. 이야기의 핵심에는 이 지역의 놀이터 감독이라는 조금은 낯선 일을 맡았던 스물세 살의 버키 캔터라는 다감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조부모의 손에서 가난한 지역에서 성장한 그였지만 강인하고 생활력 강한 조부의 가르침과 다정하고 섬세한 할머니의 배려로 버키는 여러 좋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여 소년들의 친밀한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만 나쁜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한 터라 그는 자연스럽게 놀이터 감독의 일을 맡게 된다. 폴리오의 창궐로 놀이터에 나와 놀던 소년들도 하나씩 감염되어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무고한 어린 아이들의 죽음이 그들이 꾸던 꿈과 그들의 미래를 한꺼번에 탈취해가는 잔인한 그 무엇으로 생각되어 신에 대한 분노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랬다. 내가 그때 아이의 폐렴이 악화일로로 치달았을 때 느낀 감정도 어쩌면 버키가 자신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의 필연적인 설명이나 정당성을 어딘가에서 얻고 싶었던 그 무력한 느낌과도 닿아 있어 낯설지 않았다. 그의 연인 마사가 폴리오 창궐 구역에서 70마일이나 떨어진 지역의 인디언 힐 유대인 소년 소녀 캠프의 물놀이 감독직을 제안했을 때 망설임 끝에 그가 거기에 간 것은 결국 그의 양심을 괴롭히는 도피이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것은 이 선량한 청년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리고 삼십칠 년이 흐른 뒤. 이야기의 서술자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해 여름, 폴리오로 친구들이 죽어 나갔던 그  지역에서 버키의 감독으로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던 소년들 중의 하나. 그 자신도 폴리오에 감염되어 다리가 마비되었지만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비극을 개인적 비극으로까지 심화하지는 않아도 되었던 비교적 운좋은 무리에 속해 직업도 갖고 어엿한 가정도 꾸릴 수 있었던, 그래서 이제는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쉰이 된 소년 시절의 놀이터 영웅 버키를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된 것이었다. 버키가 놀이터를 뒤로 하고 떠난 곳에서 당면하게 된 더 큰 비극은 버키에게는 하나의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운명의 가혹한 힘이자 잔인한 신의 횡포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훑고 간 자리에서 버키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굴복한다.

 

1944년, 미국 뉴어크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과 그리고 내게도 일어났던 일과 닮았다. 누구도 왜, 무엇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해명하기 어려워 원인과 죄과는 여러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를 둔 엄마들은 모든 것들에서 아이들에게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두려움에 전염되어 놀이터에 마음껏 아이를 내보낼 수 없고 학교나 기관 같이 여러 아이들이 한데 모이는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 숨이 막힌다. 1944년의 보건국과 2015년의 질병관리본부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한낱 놀이터 감독인 어린 청년에게 아이의 엄마들은 대체 누가 책임자냐고 책임자가 어디 있느냐고 절규하며 물어본다. 대답할 수 없는 버키는 그 질문의 화살들을 신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책임론은 결국 그에게 죄의식으로 또 실제적인 비극으로 수렴된다.

 

필립 로스는 절필을 선언하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이제 쓰는 것과 관련된 사투는 끝이 났다.",는 포스트잇을 붙였다고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했다. 그는 더 이상 쓰는 것과 관련된 좌절을 견뎌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쓰는 것을 좌절과 연결한다. 그러니 그것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는 그의 겸손한 고백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말하는 삶과 그것을 포박하는 거대한 운명의 힘, 우연의 힘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은 공교롭게도 절망이 아니다. 이 비극적 서사시의 엔딩은 필립 로스의 마침표가 웅변한다. 다시 소년 시절로 돌아온 서술자인 '나'는 쇠락하고 무너진 버키가 아니라 한없이 아름다웠고 찬란했던 버키가 아이들 앞에서 창던지기 시범을 보이던 그 날을 묘사한다. 그 찰나 안에 가두어진 그 아름다움, 그 생생함, 생명력은 눈물겹다. 소년들의 영웅. 미래의 꿈을 간직했던 미래가 창창했던 젊은이.

 

있었으나 사라진 것도 결국 있었던 거다. 필립 로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기자와의 인터뷰의 말미에 어두워진 실내를 밝히기 위해 그가 불을 켰던 것처럼. 그는 단순히 운명에 굴복하는 무력한 인간의 패배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아름다운 공명음을 내는 이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5-06-0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아픈 모습을 지켜보기도 힘들지만,
어버이가 아플 적에 아이가 지켜보는 눈길을 받는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더군요.
아이도 어버이도 우리 누구도 아프지 않으면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삶을 노래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하고 비는 마음입니다..

blanca 2015-06-09 08:47   좋아요 0 | URL
병세가 호전된다,는 확신만 있으면 시간과만 싸우면 되니 견디기가 쉽지만 그런 전망이 불투명하면 여러 모로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고 참 힘들더라고요. 네, 다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로 2015-06-0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는 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네메시스는 아직 못 읽었어요. 근데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선뜻 손이 인 가네요. ^^;;
근데 분홍 공주가 그런 일이 있었군요!! 블랑카님 많이 힘드셨겠어요. 저도 해든이 가와사키 병에 갈려서 열이 40도가 넘는데 원인을 모르고 물에 애를 담기놓고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엔 병명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입원시키고,,,, 암튼 그때 일이 어제 생긴 일처럼 생생하네요~~~ㅠㅠ 엄마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블랑카님의 표현처럼 저도 제 탓만 하게되고,,,, 그런 게 시험 일까요???

blanca 2015-06-09 11:21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해든이가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가와사키도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병인데 아주 잘 이겨내서 다행이에요. 자식을 키운다는 게 나날이 더한 도전에 당면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더 성장하는 거겠지만 참 쉽지가 않네요. 그 이후로 트라우마가 남아서 아이들이 조금만 아프면 최악의 상황이 자꾸 상상이 되서 힘들어요.

세실 2015-06-0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그저 아이 아프지않고 씩씩하게 커주는 기쁨이 제일인데 클수록 욕심이 생깁니다.
좀 더 겸손해야겠어요.

blanca 2015-06-09 11:22   좋아요 0 | URL
세실님, 당시는 자꾸 극단적인 상황이 자꾸 가정이 되서 너무 괴롭더라고요. 참, 건강이라는 게 잃으면 전부 같은데 유지되면 금세 잊어버리게 되니 또 다른 것들에 끄달리고 아이를 혼내게 되고 저도 그렇더라고요.

Nussbaum 2015-06-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긋는 한 줄. 멋진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blanca 2015-06-10 13:40   좋아요 0 | URL
읽고 댓글 주시니 감사하지요...

2015-06-14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4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5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5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스틱 장난감을 빨며 쓰레기통 뚜껑을 둥둥 치던 여자아이는 어느날 문득 뱅그르르 소시지컬을 한 연한 금발 머리의 어린 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멍하니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진지한 얼굴의 아이는 칠레소나무 주위의 푸른 풀밭에서 굴렁쇠를 쥐고 서 있으리라. 두 번째 소녀는 첫 번째 소녀가 빨고 있던 플라스틱 우주선을 바라보고, 첫번째 소녀는 굴렁쇠를 바라보리라.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중

 

장장 십오 년에 걸쳐 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이 마침내 일흔다섯의 나이에 마무리지어질 때 덧붙여진 이 아름다운 대목은 누구나 스스로를 대입해도 유효한 부분이다. 물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놀이는 달라지겠지만 꼭 노년이 아니어도 문득 쉼없이 달려온 나의 삶의 연대기의 초입 부분에서 소녀 시절, 소년 시절의 '나'를 또 다른 시간 속의 '내'가 맞닥뜨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뭉클하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우뚝 선 이 우아한 할머니 작가는 자신의 삶 속의 수많은 파편들을 하나의 자리에 잘 통합하여 정리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그녀 자신의 이야기에서 발휘한다. 따뜻한 가정의 막내딸로 보낸 행복한 유년과 남편의 배신으로 아프게 끝나 버린 첫 결혼 생활과 연하의 고고학자와 사랑에 빠지고 어린 시절 유모가 들었으면 깜짝 놀랐을 여왕과의 만찬까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언뜻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그녀의 삶 속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삶에 대한 애정, 겸허함과 이야기를 쓰는 일에 대한 천착으로 한데 뭉그러져 향그럽게 발효한다. 우리는 그녀가 때로 어떤 시점의 환희와 절망 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되지만 그녀가 결국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알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얼마간 좀더 현명해진다.

 

정작 우리의 삶 속에는 그럴 수 없다. 오늘 가려운 곳, 아픈 곳은 영원히 나을 것 같지가 않고 어제의 불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어제를 후회하고 그리워하고 내일을 기대하고 때로 가망 없어 보이는 숱한 미래 앞에서 압도 당한다.

 

 

 

 

 

 

 

 

 

 

 

 

 

 

 

 

로버트 그루딘. 이 생소한 이름의 저자가 드디어 '시간'에 대한 객관적인 담론의 장을 조심스레이 펼친다. 프랑스 혁명력을 본따 만든 글의 목차는 간명하고 예리한  성찰의 말들과 개인의 삶에 대한 성실한 기록들이 어우러진다. 어쩌면 거들먹거리는 듯한 단정짓는 경구들에 시달려 온 우리들에게 단정하게 타이르는 듯한 그의 이야기는  절로 귀기울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군데 군데 그 자신의 삶에서의 회한과 경험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진실에 중량감을 가져오고 투명하게 아름다운 문장들이 노래처럼 울려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중요한 사건을 사진으로 찍을 때처럼, 또는 먼 훗날의 향수를 예견하면서 어린아이의 아름다움이라는 잡기 힘든 본질을 머릿속에 새겨두려 애쓸 때처럼 바로 그렇게, 현재의 모든 정신 상태를 하나의 고유한 전체로, 일시적이고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힘과 내용의 상호작용으로서 음미하고 기억해야 한다.  -p.31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난 정확히 이 반대로 행동했었다. 그저 이제 밤새 숙면을 할 수 없고 종일 아기의 욕구에 맞춰 하루를 재편성하고 나의 욕구와 나의 감정을 존중할 여유를 가질 수 없다는 데에 상실감을 느꼈고 모든 낯선 과제에 너무나 압도 당해 상당 기간 이 힘든 상황이 지속될 거라는 데에 지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게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지를 미처 몰랐고아이의 성장에 있어 그 아이와 함께 하는 축복받은 찰나라는 것을 삶의 긴 시간 측면에서 관조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후회가 남는다. 먼 훗날 그 시간을, 그 젊음을, 그때 그 시간 속의 아이를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 지를 미처 몰랐기에 아름다운 시간들은 상당 부분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스무 살이 서른 살을 상상하지 못하듯 밤에 두 세번씩 깨는  아가가 책가방을 매고 타닥타닥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 걸어갈 것을 몰랐기에 그 아기 옆의 엄마는 빈곤했다. 아직도 여전히 자주 상황에 먹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상황이 전체가 아님을 알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리니 숱하게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어리석은 근시안의 나날들이 아쉽고 그립다. 로버트 그루딘은 "하루하루는 8만 6천 초가 넘는 작은 영원이다."라며 그 자신 언젠가는 그리워하며 돌아볼 '오늘'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삶의 미미함, 그 오목한 자국과 새김눈 자체가 만족스럽게 길어지기를 소망하려면 실로 시시콜콜할 만큼 충만하게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삶을 소망하는 건 이미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삶을 무한히 확장하는 길이다.-p.65

 

이제 반이나마 온 것같다. 자도 자도 읽고 또 읽어도 항상 남아돌았던 청춘의 하루는 저만치 걸어가 버리고 이제 내 앞에 남은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중년이 되었다. 시간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삶의 핵심을 좌우하는 가장 큰 힘이다. 그것을 배워가는 것이 어쩌면 삶 그 자체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시간'을 통해 배우고 '시간'에 헌납하고 가야 한다. 저자의 소망처럼 이 책은 섣불리 결론으로 이끈다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고 숱한 찰나의 파편들을 원경에서 커다란 패턴 속에서 관조하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이 책도 나와 함께 같이 늙고 숙성해 가기를...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애 2015-06-0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도 아침마다 버스를 두 번이나 타고 아이와 함께 하는 어린이집길을 소중히 즐거워하며 가고 있습니다. 물론 등원 전의 그 엄청난 소란함도요.

blanca 2015-06-04 13:08   좋아요 0 | URL
아애님, 버스를 두 번이나 타는 길이어도 아이와 더불어 아애님한테 지금 이 시간들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테니 참 부럽네요. 이제 큰 애는 초등학생이어서 유치원 시절 추억들이 어찌나 그리운지. 참 아기자기한 행사도 많고 유치원생 학부모로서 누리는 작은 즐거움들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려 해요. 오늘 오전에 고무줄 공예 도구들 주문해 달라고 책상 청소 하더라고요.
귀여워요^^

파란놀 2015-06-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곰곰이 보면, 어머니 자리에 서는 이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나날`을 되돌아보지만,
아버지 자리에 서는 이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나날`을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는 채
너무 빠르게 내달리기만 하지 싶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모두 축복일 텐데요

blanca 2015-06-04 13:10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숲노래님이 지금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참 더욱 값지게 다가와요. 특히 정성스럽게 차리는 밥상이 저한테는 언제나 자극을 줍니다. 천연재료들로 그득한 밥상은 양육자의 아이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니까요.

바람향 2015-06-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를 먹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네요...ㅎ

blanca 2015-06-04 13:10   좋아요 0 | URL
바람향님, 저도 여전히 두려워요. 아주 많이...

Nussbaum 2015-06-0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하루하루가 비슷한 요즘 저는 어딘가에 뭔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기록하는 데 시간을 많이 두지 않고, 기록하는데 필요한 장면을 마음에 담는데까지 시간을 많이 두고 있는 점이 다르네요. 올리신 글을 보니 다시금 그 기록을 빼먹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blanca 2015-06-04 23:59   좋아요 0 | URL
기록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게 시간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시간에 온전히 패배하지는 않을 최소한의 노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저는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려 하는데 제가 기억하는 상황과 기록이 어긋날 때가 있더라고요. 누스바움님은 저보다야 더 기억도 명료하고 또 기억을 남길 그림도 그리실 수 있으니 더 행운이신 게 아닐까요.

lachrimae7 2015-06-0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저는 이 책을 만들 때 옆에서 일을 조금 거든 편집자입니다. 이 글을 읽으니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마음에 와 닿는 서평 감사합니다.^^

blanca 2015-06-05 00:00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책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렇게 읽고 또 인생의 책으로 간직할 독자가 있다는 것 기억해 주시고 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

2015-06-07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