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연년생 동생은 선물로 책을 사 주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의 영상이 곳곳에 실려 있었고 작가의 원작과 그 영화의 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책. 에로티시즘이 잔뜩 깔려 있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헛헛하고 어딘 가에 진지한 무게 중심이 실려 있는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와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무채색의 원피스가 근사해 보였다. 그녀의 자유와 도발,아름다움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고 조금 더 지루했다. 그때도 역시 그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게 되었다. 출발은 성적 이끌림이나 호기심이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사랑으로 변질되었음을 깨달은 가망 없는 연인들이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각자 흐느끼는 모습이 서러웠다. 채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 같은 소녀는 남자를 떠나는 뱃전에서 그 남자가 멀리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불현듯 선상에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 속에서 그녀는 오열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앳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년의 작가가 된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절망 어린 정사로 가득했던 그 어둑 어둑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것 같았던 숙소에서의 날들은 그녀 내부에 차곡 차곡 쌓여 발효하고 있었다.

 

 

 

 

 

 

 

 

 

 

 

 

 

 

 

 

 

 

소녀의 가족은 프랑스령 식민지 베트남에서 눈에 띄는 백인 가족이었다. 아편에 중독된 망나니 큰 오빠와 유약한 작은 오빠, 미망인으로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절망과 우울을 오고가는 어머니가 주는 아픔은 그녀가 언제나 얼마쯤 슬픔에 잠겨 있게 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이 든 어머니의 항상 눈물에 젖어 있는 눈가의 주름들. 아들을 배웅하며 부둣가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 소설에는 이러한 가망 없는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죽을 때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독차지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갉아 먹고 산다. 어머니가 가진 모든 희망, 기대, 물질들들 무참히 빼앗고 짓밟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중국인 남자의 퇴폐적 애정, 돈, 절망에 기대어 사춘기 소녀가 마음 붙일 곳 없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을 하나 하나 펼쳐 보이게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자전적'이라는 말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다 모두 언어의 숨골에 가 닿아 한 인간의 내밀한 성장기를 폭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장들.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시제가 경계 없이 섞이고 '나'과 '그녀'와 '그'의 시선이 무람 없이 교차하는 데도 그리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그 모든 것이 질서 없이 혼재되고 교차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언어로 걸러낼 수 있었던 작가의 저력에 기댄 바가 크다.

 

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 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p.98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 "에서의 이야기는 언뜻 순수한 사랑이 아닌 욕망을 위장한 것처럼 보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스러져 버릴 덧없는 찰나에 대한 살풀이 같지만 그것은 순간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멀어져 가는 존재의 몸짓의 그 생래적 무상함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다. 메콩 강을 건너가 버린 사랑은 그 사랑이 왔을 때보다 한층 더 깊어져 있고 삶 그 자체를 웅변하는 듯하다. 초반부터 시작된 노작가의 나레이션은 이미 늙어버리고 변해 버릴 소녀의 그 모든 것들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소녀가 거기에서 만들어 나간 서사가 절대 무의미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Y.A. 당신은 무엇에 몰두하죠?

M.D. 글 쓰는 일에. 비극적인. 다시 말해 삶의 흐름에 관련된 일이지.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 속에 있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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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9-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는데 거의 생각나지 않고, 그때 제대로 못 봤던 것 같네요 그런 책이 이것만은 아니기도 하네요 그렇다고 그런 걸 다시 다 볼 수도 없고... 게을러서 그렇죠 누군가는 여기 나오는 여자아이와 같은 나이 때 봐도 알지도 모를 테지만, 저는 몰랐네요 지금은 어떨지... 그렇게 된 배경이 있었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뜻 스친 책을 나이들어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책도 아니 가독력도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혼란스럽다.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사람들은 비교적 선의를 가지고 있고 운명은 대체로 관대하고 비상식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가혹한 일들은 예외적으로 치부된다. 꿈이 있고 이상이 있고 내일을 기대하고 추억은 아름답다. 다른 세계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타락해 있으며 운명은 불공평하고 냉혹하다. 미담은 예외적인 말장난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삶이 또 있다. 그러니 너무 이상주의적이거나 감상적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항상 극단적인 절망이나 회의 속에 살 필요도 없는 세계. 어쩌면 양 극단의 세계를 오고 가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만 남기고 답은 주어지지 않는 게 삶인 걸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그녀가 그렇게나 살고 싶어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작가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는 음험하다. 하녀 셀레스틴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녀의 주인들의 세계도 또 그녀가 속한 하류층의 생활도 모두 탐욕과 위선,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 어디 한 곳 선의가 게재될 여지가 없다. 하인들은 주인들에게 인간이하의 대우와 처우를 받으며 주인의 것들을 탐하고 도둑질하고 그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주인과 하인들과는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존중, 공감도 오가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조롱한다. 사람 사이에 일방적으로 용역이 제공되고 그 대가로 생계가 보장되는 상황 자체에서 인간의 존엄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런지도 모른다. 사회적 대의에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부엌에서는 인간을 비하하고 수단화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희화화된 상류층의 인간상이라고 폄하하기에 작금의 현실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점에서 유죄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식으로 자신의 일을 받아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 그는 삼십오 년 간의 봉사에 '품위'와 '자부심'을 거론한다. 주인의 생의 오점에 대한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그 주인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 주인에 대한 충성 전체를 긍정해야만 자신의 삶 자체도 무의미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얼마간 비겁하지만 그러한 그의 자신의 하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노년에 뒤돌아보는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폄하하고 절망하기란 쉽지 않다. 한 인간에 전적으로 종속된 삶, 생사여탈권까지 그에게 헌납하는 그 무모한 투신은 때로 이러한 정당화로 견뎌내고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하녀의 일기>의 하녀도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다 각자 나름대로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견뎌내고 살아낼 수 있었다.

 

 

 

 

 

 

 

 

 

 

 

 

 

 

 

 

하녀 셀레스틴이 악덕에 감염되어서도 무감각해했던 것처럼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주인이 나치에 협조한 것을 애써 외면하며 악덕에 일조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워버리려 한다. 견뎌 나가는 날들이 도덕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완벽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운명이 여지를 남겨주어서인 지도 모른다. 얼마간 역겨운 행태들,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불평등한 수직 구조에 의하여 유린 당한 삶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그 정도로 사는 일이란 쉬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너무 역겹고 눈에 번연히 아닌 길을 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살에 막 스치는 느낌. 살면 살수록 '절대'와 멀어질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럴까... '상황'이 주는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울감을 가진다. 일말의 진실과 실재를 내포한 이야기에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이러한 종속 관계와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수많은 '갑'과 '을'의 이야기들이 양산되는 세계의 과거 버전의 희화화. 고전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의 고통과 병폐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남아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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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두 권 다 제가 읽고 싶어서 준비해둔 책들인데...아직 안읽고 있어요. 뭐, 그런 책이 어디 이 두권 뿐이겠습니까마는... ㅠㅠ

밑에,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해 쓰신 부분을 읽다보니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도 생각나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란 단편집의 한 단편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집사부부(혹은 하인 부부)가 주인을 지하실에 숨긴뒤에 식량을 챙겨주거든요. 그러나 지하실에서 하인들이 주었던 음식만 받아먹었던 주인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죠. 그래서 집은 아예 하인 차지가 되었던... 뭔가 서늘했던 소설이었어요. 그 소설이 생각나네요.

blanca 2015-08-20 13:27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다락방님 지금 <남아 있는 나날>을 가지고 계신다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영화도 참 처연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나이 든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했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합리화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하는 그 담담함을 가장한 어조가 참 저릿해요.

cyrus 2015-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하인이 나오는 소설작품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덕분에 <남아 있는 나날>을 알게 되었어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 나오는 하녀 나농도 <어느 하녀의 일기>의 주인공과 약간 비슷해요. 돈에 집착하는 그랑데 영감을 대놓고 비꼬는 인물로 나와요.

blanca 2015-08-21 11:33   좋아요 0 | URL
아, 어떤 테마를 중심으로 읽는 거예요? 그러는 것도 의미도 있고 즐거울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도 나름의 색깔을 서늘하게 잘 표현하는 작가인 듯해요. 기회되면 읽어 보세요.

cyrus 2015-08-21 17:57   좋아요 0 | URL
딱히 정해진 테마는 없어요. 그냥 하인이 비중 있게 나오는 소설을 찾고 있어요. ^^

희선 2015-08-22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있고 가운데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다 착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겠죠 잘못을 하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죠 그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아야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희선

blanca 2015-08-22 08:39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실제 인간의 복합적인 모습이 소설의 인물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언어로 온전히 한 인간을 그려낸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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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의 에세이는 그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고 느끼고 깨달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면 나는 무언가 조금 더 진지해지고 사려깊어지고 달라진 느낌이 좋다. 이미 가져버리고 느껴버리고 고착화되어버린 것들이 아닌 형성되어가고 유연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글을 읽는 느낌.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는 이미 늙어버린 하루키가 아니라 중년기에 접어든, 그래서 자기 앞에 남은 유효한 시간을 헤아리게 되고 자기의 이상과 가치관에 그리고 주어지는 것들에 회의하고 반문하는 그가 있다. 스무 살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아직 사십 대가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이미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저만치 걸어가 있는 하루키의 미국 체류기를 읽는 경험이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피츠제럴드의 모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키는 프린스턴에 가게 된다. 이 인연은 여차저차하여 지적 스노비즘을 벗어버리지 못한 그래서 버드 드라이를 마시는 하루키를 이해하지 못하는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점잖은 그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되고 거기에서 오는 어떤 편안함(일단 그 개념, 그 틀만 유지하면 그들은 반문하지 않는다.)도 깨닫게 되는 과정. 리무진의 흑인 운전 기사와 재즈의 역사에 대하여 흥겹게 토론하고 피츠제럴드의 손녀의 깔끔한 길 안내에 경탄하기도 하고 폴 오스터의 문체에 대하여 진지한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는 에피소드들이 단편 소설들처럼 생생하고 깔끔하게 펼쳐진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무심히 흘려 보내기 쉬운 느낌, 깨달음 들이 역시 쿨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포착되니 적확하고 유머러스한 언어 안에서 유쾌하게 춤을 춘다. 미국에 무조건 경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만도 아닌, 이방인 작가의 관찰기가 흥미롭다. 기회가 된다면 하루키의 감상, 느낌이 나의 그것과는 어떻게 만나고 반목할 지 직접 체험해 보고도 싶다.

 

여러 영어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그가 사실 영어 회화에 있어서는 큰 자신감도 확신도 없다는 고백이 의외였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노력을 경주할 만큼 시간도 정열도 없다는 덧붙임.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외국에 이방인으로 체류하며 느끼는 어떤 '자명함에 대한 회의'가 주는 근원적 애조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다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다 얼마간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분명한 것도 확실한 것들도 삶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어떤 불확실함, 회의, 모호함 속에 발을 딛고 때로 슬퍼하는 것이 나날들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꼭 외국에 잠시 체류하지 않더라도 삶의 유한함이 존재의 소멸을 아우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확실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슬프다. 하루키의 회의와 하루키의 반문들이 설득력을 띠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러한 모호한 아련한 것들을 기가 막히게 자기화해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언어가 모호함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언제나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 그것을 항상 의식하는 게 하루키다운 하루키스러운 글들의 색채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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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08-1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도 좋아하는데, 그게 먼 북소리와 슬픈 외국어를 읽고 나서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도 하루키가 회화는 자신 없다고 했던 것 같아요.. 전 이상하게 여름만 되면 하루키 소설이 댕기더라구요. 작가가 저렇게 본인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건 대단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전 대학입시에 하루키 소설이나 에세이 지문이 나오면, 아 이건 하루키다라고 알 것 같아요.

blanca 2015-08-15 11:52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하루키 소설 추천해 주세요. 진짜 여름이 끝나가니 하루키 소설 좀 읽어야겠다, 싶어지네요. 단편이 훨씬 낫다,는 평도 있더라고요. 저는 하루키가 왜 이리 부러운지 ㅋㅋ 사는 모습도 부러운 부분이 많아요. 거칠 것도 거리낄 것도 없으면서 규칙적이고 건강한...

기억의집 2015-08-1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사는 모습이 부러워요.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고 세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방인으로 살기도 하며 자기 세계가 있는 하루키가, 저런 인생이 진정한 로또 당첨 인생인 것 같아요. 저는 한달 돈도 없어 쩔쩔 매며 박복한 일상을 꾸리는데!!!

소설은 호불호가 갈려서.., 전 이 사람 소설은 장편을 좋아해요. 장편은 다 좋았어요. 단지 성적인 게 좀 걸리긴 했지만요!!!

blanca 2015-08-16 15:22   좋아요 0 | URL
본인도 혜택 받은 인생이라는 걸 의식하고 감사한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장편이라고는 <노르웨이의 숲>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본 게 다예요. 시작해 볼까 싶다가도 저도 그가 묘사하는 성적인 대목의 어조가 별로 유쾌하지 않더라고요. 반면에 에세이글이나 언더그라운드 같은 진지한 탐사 이야기들을 읽으면 너무 진지하고 사려 깊고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아주 팔색조예요.

파란놀 2015-08-1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읽기하고 말하기는 아주 달라요.
말을 할 적에는
말소리마다 느낌을 다 다르게 실으니
글 한 줄 적을 때하고는 언제나 다르지요.

말로 배우고 이웃을 사귀려면 말도 저절로 잘 하게 되고
글로 배우고 이웃을 보려면 글도 저절로 잘 쓰게 될 테지요..

blanca 2015-08-16 15:20   좋아요 0 | URL
네, 숲노래님.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고 동일시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순오기 2015-08-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블랑카님~~^^
분홍공주랑 둘째도 많이 컸지요?
육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님에게 감탄해요~ ♥♥

blanca 2015-08-16 15:21   좋아요 0 | URL
둘째도 크고 저도 늙고 있어요,순오기님^^ 내년 정도면 저도 이제 육아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런지... 터울이 많이 지니 애로가 많네요. 건강하시죠?

희선 2015-08-2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그때그때 글을 써서 좋겠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나서부터 글이 있지만, 더 예전을 떠올리는 글을 쓸 때도 있으니... 보통 사람은 그런 순간을 잡아두기 어렵기도 하잖아요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도 있지만, 쓴다고 해도 그렇게 잘 쓰지 못해서... 하루키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blanca 2015-08-22 08:41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 썼던 일기를 간직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어쩌면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도 같고 그래요. 작가들 같은 경우는 그게 삶의 족적이 되어 돌아볼 거리들이 생겨 행복하기도 할 테고 부끄러운 부분도 있을 듯도 해요. 잊고 싶은 일들이나 한때의 문체도 있을 테니까요.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여덟부터 쉰 살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오로지 단테의 <신곡>만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먼저 <지옥 편>과 <연옥 편>을 읽기를 권한다. 단테가 서사시적 영웅 율리시스를 끊임없는 '순환'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종말관으로 뛰어들어가는 이야기로 그를 마침내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일부이지만 차근 차근 자신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곡>을 풀어 설명하는 노작가의 간명한 문체가 <신곡>의 가장 효과적인 소개이자 이끌림을 유발한다. 꼭 기독교적인 교리가 아니더라도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내러티브는 역설적으로 삶의 이해와 무게를 더한다. '쓰는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으로서의 성실성이 돋보인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그의 모습이 삶과도 겹친다.

 

 

 

 

 

 

 

 

 

 

 

 

 

 

 

 

오에 겐자부로가 가장 좋아한다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 제26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가 죽을 배급받으러 가는 시간을 이용해 알자스 출신의 학생에게 이탈리어를 가르치려 이 텍스트를 활용했던 어느 유월의 눈부신 날을 떠올리게 한다. <신곡>의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배고픔' 그 자체로 한 덩어리였던 사람들 속 그 가혹한 운명을 지옥으로 추방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프리모 레비는 실감하고 망각하고 승화시킨다.

 

 

 

 

 

 

 

 

 

 

 

 

 

 

 

나는 운명의 호의에 대해 어마어마하고, 뿌리 깊고, 어리석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일이 나와는 관련이 없는, 문학적인 허구로 보였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중

 

모든 이야기들은 삶을 딛고 있다. 인간의 머리에서 가슴에서 떠올릴 수 있는 허구는 허구로서 그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으며 단련시키고 연습하며 때로는 너무나 가혹한 일들을 감당해야 되나 보다. 읽는 자로서 망각했던 사실들을 삶은 경험으로 가르치려 든다.

 

이제 정말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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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8-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은 사춘기 시절 사 놓고 안 읽은 적이 있어요.
너무 어려워서 차마 못 읽겠더군요. 지금쯤이면 어려워도 읽게 되려나요?
한창 반값도서 할 때 <단테 신곡 강의>란 책을 사 놓은 적이 있는데
이건 게으르고 다른 책에 밀려 아직도 못 읽고 있는데
그거라도 읽어 봐야겠어요.ㅋ

blanca 2015-08-13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시도조차 안해봤어요. 그런데 이렇게 군데 군데 인용된 대목들은 어찌나 절창들인지 꼭 읽어보고 싶지만 역시 쉽지 않을 듯해요.

cyrus 2015-08-1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민음사의 <신곡>을 읽다가 짜증나서 포기했어요. 주석이 본문 맨 뒤에 있어서 본문 읽으랴, 주석 확인하랴, 종이를 이리저리 번갈아 넘기는 것이 귀찮아요. 그래서 도서관에 열린책들의 <신곡>을 빌려서 읽었어요. 주석이 본문 아래에 있어서 읽기가 편했어요. 지옥 편만 읽다가 그만뒀는데 만약에 <신곡>을 다시 읽는다면 열린책들 판본을 사야겠어요. 민음사 판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요. ^^

blanca 2015-08-13 21:51   좋아요 0 | URL
오늘 안 그래도 주문하려다 말았는데 이게 주석이 뒤에 있으면 굉장히 번거롭더라고요. 열린책은 저는 활자가 너무 촘촘해서 또 피곤하더라고요. 이러나 저러나 저는 아직 신곡이 때가 아닌 걸까요? 역시 사이러스님은 읽으셨군요!! 젊음과 방대한 독서량이 다시 한번 부럽네요^^;;

moonnight 2015-08-15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페이퍼예요^^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니 이 기회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네요^^

blanca 2015-08-15 09:25   좋아요 0 | URL
달밤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대단해요. 저도 언젠가는 읽을 거라 다짐만 해봅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회자되고 인용되는 고전은 그 만한 무게와 가치가 있더라고요.

희선 2015-08-2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는 어떤 책이든 오래 보는 듯합니다 제가 이 책을 본 건 아니고 다른 분이 쓴 걸 보니 그렇더군요 하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때까지 보는 거겠네요 쓰는 것뿐 아니라 읽는 것도 마음을 다하다니, 어려운 일인데... 저도 《신곡》 사두기만 하고 안 봤네요 언젠가 볼 날이 올지... 오에 겐자부로만큼은 못 보더라도 한번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3   좋아요 0 | URL
아, 희선님에게는 <신곡> 있군요. 곁에 두고 언젠가를 기약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해요. 오에 겐자부로가 작가로서도 훌륭하겠지만(저는 그의 책을 한 권만 읽어서요) 읽는 독자로서의 태도가 아주 성실하더라고요.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속 괴물들은 아이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니, 어느 정도 친근하고 자기들과 같이 살자고 너스레를 떨기까지 한다. 아이가 떠난 괴물들의 세계는 아이가 침몰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이가 돌아오면 그 아이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따뜻한 밥이 있는 엄마의 품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성장하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그 수많은 두려움, 모호한 부정적 감정들은 괴물, 귀신, 전령의 판타지를 통해 건강하게 해소된다. 괴물들의 나라에 간 것은 갑자기 경험한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주변인의 생로병사의 충격, 사랑과 관심을 앗아간 동생에 대한 미움 등이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아이의 시선이 응집되어 만든 상징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의 결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 다 실체가 규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호하게 뭉쳐지고 흐릿하게 투사되어도 그러한 것이 살아가는 데에 불가결하고 성장통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너그러움은 아이가 잘 커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잘 쓰여진 성장소설은 아름답고 천진하기만 한 어린 시절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다. 때로 눈물겨운 일들도 고통스러운, 두려운 에피소드들도 모자이크처럼 잘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말 그대로 '성장'은 정지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정경의 스냅 사진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마냥 웃고 떠들고 부모님과 어른들이 든든하게 지켜서서 아이에게 닥쳐올 모든 난관과 위기를 사전에 막아주고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친구들에게 부정당한 경험, 아기 동생이 별이 된 일, 엄마의 투병이 없었더라면 유년 시절이 완전무결했을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뼈아픈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살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그 수많은 곤란하고 난감한 일들에 대처하고 의미를 통합할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사이로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친구들, 밤새도록 싸우고도 부둥켜 안고 인형 놀이를 할 수 있었던 동생, 사랑을 주고 배려를 주었던 어른들에 대한 달콤하고 아련한 추억들도 농밀하게 배어 있다. 뒤돌아서면 결국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날들, 감사할 따름이다.

 

 

 

 

 

 

 

 

 

 

 

 

 

 

 

열두 살. 소년의 마법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일들은 우리가 한때 상상했던 괴물, 유령, 천사, 심지어 멸종된 공룡까지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판타지일까? 성장 소설 안에서의 환상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역설이다. 꿈만 꾸면 하늘을 날아오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시절들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정말 하늘 전체를 수월하게 잘 놀고 어떤 날은 꿈에서도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추락하고 만다.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는 시점이 분명 있다. 그 시점까지의, 그 시점을 이미 넘어서버리고 그 나날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호수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야기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마을 사람 거의 전부를 용의자선에서 진지하게 의심하는 소년의 철없는 귀여움은 일부다. 아이는 친구들과 사방을 뛰어다니고 환상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 친구가 갈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 속에 펼쳐 놓으며 이별한다. 외부에서 닥쳐오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 들은 아이의 이야기 세계 속, 환상 속에서 나름대로 건강하게 완충지대를 찾아 안착한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친구가 급작스런 사고로 떠나고, 형제처럼 친밀했던 개도 죽고, 아버지가 실직해서 가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소년 코리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거기에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흔 살 생일이 다가오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코리가 복기하는 제퍼에서의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익다. 꼭 다시 한번 살고 싶은 열두 살. 잠시 힘듦이 유예되어 있었던 눈부시던 나날들. 짧은 머리에 눈이 인형처럼 큰 여자애가 전학와 나의 단짝이 되어주던 나날들.

 

이제 나의 힘듦은 완충 지대가 없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리는 나날들이다.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밀려온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지만 때로 통제해야 하는 책임감은 야멸차게도 걸어온다. 아직 배워나가야 할 것들도 묻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나는 이제 '어른'이라는 탈을 썼기에 성숙한 척 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는 것은 그것이 뻗어나갈 여로와 중간지대를 알기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영원한 해피엔딩은 없는 게 삶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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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8-1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이라고 해도,
눈을 감고 바라보면
얼굴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만날 테니,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나
그림책을 보는 아이나
모두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사이좋게 노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리라 느껴요

blanca 2015-08-11 10:28   좋아요 0 | URL
네, 모리스 샌닥의 괴물을 은근히 귀여워요.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괴물들 태반이 사실 아이에게 두려움이나 위협을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친근한 형 같은 이미지예요. 무서운 척 하지만 기실은 안전하다,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의 또다른 얘기인 것도 같아요.

희선 2015-08-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으면 어릴 때가 좋았어 하지만, 어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듯합니다 어린이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으니까요 나이를 먹고 겪는 일보다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한다면 별로기도 하네요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은 없겠죠 아주 조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린이만 그런 건 아니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어요. 희선님 말씀이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