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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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정중앙에는 자그마한 붉은 게가 상대적으로 커다란 '암'이라는 불길한 제목 아래 있다. 고대 그리스의 게를 뜻하는'카르키노스'는 암의 어원이 되었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하여 다시 그것을 둘러싼 역사를 풀어내려 한다. 이것은 '암'의 전기를 표방하고 있는 책이다. 마치 암은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어 연대기를 엮어 나갈 힘을 얻은 듯하다. 그래야 이 엄혹하고 처절한 '암'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싸움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은 삶의 어두운 쪽, 더 성가신 시민권"이라는 수전 손택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이 몇 번이나 실제 획득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어두운 자의 왕국에서 두 번이나 건강한 자의 왕국으로 넘어왔다 끝내 그곳에 다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이 책은 거기에서 바로 시작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죽을 때까지 건강한 자들의 왕국에서 살 수는 없다. 죽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의 성장과 노화에서 비롯된 그 필연적인 결과인 '암'과 조우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저자 자신이 바로 종양학자이자 실제 환자를 보는 의사다. 어느 날 세 아이의 엄마 칼라가 그 앞에 백혈병과의 사투를 예고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싯다르타는 암과의 싸움이 실제 이 혈액암에서 커다란 조언을 구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2004년의 칼라의 병은 1940년대 정력적인 병리학자이자 임상의인 시드니 파버가 백혈병 아이들을 구할 중요한 전환점의 중심에 있었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글리벡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머나먼 여정을 돌아와야 했지만 여하튼 우리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통로에서 이 에너지 넘치는 학자의 부활은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분명 긍정적인 미래(이미 우리가 소유한 현재)를 예고하는 지점에서 빛난다. 이것은 정말 이야기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아이들을 부활시키는 그 힘으로 향해 절둑이며 걸어가다 심지어 그 자신도 암과 대치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그 사람과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잊혀지고 기억되고 기념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경로에 바로 '암'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그 불가해한 성격이 드러난다.

 

암의 연대기는 비교적 우리가 숱하게 넘어지기는 했어도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능케 했던 백혈병을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그것이 그 전부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절망이기도 했다. 기원전 2625년경의 파피루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것은 이윽고 수술로 전부를 도려내는 급진적인 수술법 앞에서도 엑스레이, 보조화학요법, 표적치료 앞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 내고 부활하고 전이했다. 시드니 파버가 메리 래스커라는 정치적으로 기민하고 탁월한 로비 능력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과 연합하여 미국 정부를 암과의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한 시간들이 블랙홀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너무 냉정하고 아직 우리가 암을 모른다는 것을 중언부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암은 투자한 노력, 시간, 열정, 좌절된 숱한 시도들의 총합 만큼 파악되고 정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암'의 생존 방식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고 철저히 우리에서 출발하여 우리에게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암은 우리의 성장에 내재한 결함이다. 이 결함은 우리 자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리작용에서 성장-노화, 재생, 치유, 번식-에 의존하는 과정들을 제거할 수 있어야만, 자기 자신에게서 암을 제거할 수 있다.

-p.510

 

그래도 적어도 암의 본질에 대한 천착은 그 깊이와 넓이가 분명 확장되고 있다. 암 유전자가 사람의 유전체에 있고 그것이 촉발되는 것도 제어되지 않는 것도 이미 저마다의 유전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발견은 모든 암 유전체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전체 지도가 암의 정복과 동의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과정에서 제어장치가 제거되고 미친듯이 폭주하는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의 경로를 효과적으로 방해할 방법에 대한 긴요한 힌트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암세포로의 회귀는 결국 의학이 과학과 다시 친밀하게 소통하고 융합함으로써 반목하고 대치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암의 성질과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좁은 골방 같은 연구실에서 때로는 동료들에게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어  외롭게 그것과 싸우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좌절을 밥먹듯이 했던 의사,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삶들의 총집합이다. 자신에게 닥친 이 암초 앞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알아가고 때로 의사들에게 치료에 시사점을 주었던 환자들의 이야기 또한 그러하다. 싯다르타는 그 자신의 이름처럼 해탈한 지점을 넘어선 관조 대신 "그러나 삼켜지지 않기란 불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아이 셋, 백혈병 앞에서 창백했던 엄마는 부활한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대차게 희귀한 암에 대처하며 자신의 여명을 오년 가까이 확장했던 저메인은 두번 째 암의 공격 앞에서 패배하고 만다. 싯다르타는 그녀의 끝까지 무기력하게 암 앞에서 지지 않기 위하여 분투했던 모습에서 암과의 투쟁의 본질적인 면을 깨닫는다. 그것은 "이 질병을 따라잡으려면 , 계속 전략을 창안하고 재창안하고 , 배우고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암의 전기는 우리 인간의 그 끈질긴 재생력의 은유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싯다르타 자신도 이것은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누구'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모두 절망했던 세기를 뚫고 나왔던 의사의 이야기로부터 끝내 패배해야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패배를 당당하게 거부했던 환자의 이야기로 끝맺는 '암'의 이야기는 아직 그 전기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결말은 열려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질병을 은유로 변질시키는 것을 경계했던 수전 손택의 질병의 왕국 이야기의 인용으로부터 시작했던 이야기는 그럼에도 우리 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면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삶과 결코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만다.

 

어느 날 평온한 일상을, 그 크지 않았던 기대들을, 약속들을 모조리 무참히 짓밟고 마는 암선고를 받은 가족, 친척, 친구. 희망과 절망을 오고가다 미처 체념을 다 끌어안지도 못한 채 이제는 번복할 수 없는 곳으로 급작스러운 배신처럼 떠나 버리고 마는 그 아팠던 결말. 인간의 생로병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 오류들이 존재의 결말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러한 무력한 이야기들의 무한반복의 궤도에서는 걸어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생을 꿈꾸어서도 무한 존재를 긍정해서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바랐던 그 숱한 내일들이 예상하지 못한 틈새로 무참히 짓밟히는 그 통절한 절망 앞에서 삶과 존재 자체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는 제왕의 권력을 그것에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희망의 이야기도 과학의 승리에 대한 면류관도 아니기에 그 마침표는 더욱 씁쓸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든 어제보다는 더 알아가고 있다는 그래서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기에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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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6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6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10-0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네요.
누구든 언젠가 이런 책 한번쯤 읽어 둬야할 것 같아요.
예전엔 암이 특별한 사람한테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흔한 병이 되어버렸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보장도 잘되있고, 예후도 좋고 생존률도 높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이
언젠가 나도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생존률만 높아졌다 뿐이지 낫기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환자들에겐
힘든 과정인 것 같아요.ㅠ

blanca 2015-10-06 13:30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저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암은 특히나 특별한 병이 아니라 누구나 부딪힐 수 있는 병이더라고요. 그 전 단계에서 계속 관찰해야 되는 경우도 많고요.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져요. 제발 힘든 과정이 어떻게든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희선 2015-10-1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암 잘 낫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걸로 죽는 사람이 많군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니... 그랬겠죠 지금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암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거군요 그 생각을 하면 어쩐지 무섭기도 하네요 무서워하기보다 알아야 할지도 모를 텐데...


희선

blanca 2015-10-14 14:03   좋아요 0 | URL
아직 알아가는 단계인 듯해요. 정작 알았다고 해도 이제 또 그것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숙제가 또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영혼뿐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어려운 듯합니다.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영화음악을 듣게 되었다. 단순히 영화음악 라디오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떨리며 흥분하기도 하고 게스트로 나온 영화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 앞에서 팬심을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왜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하지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안들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 용기와 비겁하지 않은 모습. 2004년에 정지된 그녀의 시간으로부터 벌써 11년이 지나도 방송인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돌연 나는 왜 내가 며칠 계속 불쾌했는지 그 진원지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시끌시끌하게 하는 문제로 격앙된 주민들이 동조를 바라는 문제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공감했지만 돌아서면 영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주민들이 분노하는 행정 절차상의 많은 하자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이 반대를 위해 들춰낸 논리에 나는 동조하지 않음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하고 심정적 분노에도 일정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그래도 내가 내 자신에게 떳떳하려면 나는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 앞에서 부끄러웠던 것이다. 타인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무엇보다 솔직했어야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다수 앞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침묵했으면 편했을 것이지만 그게 그녀의 방식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흔도 채 되지 못한 채 그녀는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서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꾸었던 수많은 꿈들, 아직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들의 더께는 홀연 바람에 의해 걷히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렬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바쳤고 또한 그것을 표현했고 때로 미움받고 비난받을 여지가 있음에도 용기 있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던 그녀의 삶의 농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때로 산다는 것은 멈추어 서서 생각하지 않으면 비겁해지기 쉽다. 다수를 따라가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 성실함과 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히 토바이어스 울프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다만 레이먼드 카버가 그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젊은 시절 리처드 포드를 포함한 낭독회에서 낭독을 마치고 미소를 띤 모습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기억할 따름이다. 그 사진을 찍을 때 레이먼드 카버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예견했는데 정작 그만 제외하고 나머지 둘만 살아남아 그 중 한명인 토바이어스 울프가 작가로서의 삶을 반추하는 노년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힘없고 쇠락한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어딘가 차곡차곡 경험과 이야기와 깨달음을 쌓아 익힌 듯한 성숙함과 관록을 가지고 여유 있게 카메라 앞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다행히 아버지가 죽기 전에 화해한 대목에 이르러서 그의 파란 눈은 젖는다. 나의 영어는 그의 이야기 전부를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선과 어조는 그 이상을 가능하게 한다. 매일 영어를 공부하지만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거나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영어를 듣고 읽고 이따금 쓴다. 그냥 그저 그러는 게 습관처럼 좋아서다. 학창시절, 취업을 앞두고 필요에 의해 시작했던 영어 공부는 이제 그냥 생활이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인터뷰를 영화를 어느 정도 영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걸로 족하다. 더 바라기도 하지만 그 지점은 내가 잡으려고 하면 또 저만치 물러간다.

 

 

 

 

 

 

 

 

 

 

 

 

 

 

감히 줌파 라히리 같은 작가가 이탈리아어 앞에서 느낀 애정, 좌절, 경의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에 공감이 갔다. 벵골어를 쓰는 가정환경에서 영어를 쓰는 학교에 등교해야 했던 그녀가 느낀 그 혼란은 쉽게 스러질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제 영어로 글을 쓰고 그 글이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위치에 선 그녀가 단지 이탈리아어에 이끌려 로마로 이주해 이탈리아어로 에세이를 내고 소통하는 과정에 대한 짧은 글은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사려깊고 섬세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집념과 성실성, 언어를 조탁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그녀의 경험과 느낌을 그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p.42

 

이제 늙는 일만 남았다,고 체념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면 또 넘어지고 다시 배워야겠지. 얼마간 부끄러웠고 미웠던 나의 모습들을 다시 돌아다 본다. 잘 늙고 싶다.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은임은 토바이어스 울프는 줌파 라히리는 각기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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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10-07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늙고 싶다. 계속 성장하고 싶다..격하게 동감합니다^^
정은임 참 안타깝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죠.
오늘 얼마전에 읽었던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 생각했는데...

blanca 2015-10-10 10:43   좋아요 0 | URL
세실님, 그런데 이게 참 쉽지가 않네요. 상황이라는 게 항상 머물러 있으면 퇴보하기 쉽게 흘러가서... 공부와 내공이 더 필요할 듯해요. 줌파 라히리는 굉장히 모범적인 이미지더라고요. 단정하고 공부 열심히 하며 자랐을 것 같은 느낌이요^^;;

희선 2015-10-1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가 자신은 늘 자란다고 했는데,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젊다고... 나이를 먹고 몸은 다 자라도 마음은 다 자라지 않았죠 아직도 자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또 그러기 위해 애써야겠네요 예전에 정은임 아나운서가 하는 라디오 방송 들었습니다 그만뒀을 때 언젠가 또 다른 방송으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군요


희선

blanca 2015-10-14 14:04   좋아요 0 | URL
아, 정은임 아나운서 방송을 실제 들으셨군요. 저는 그러진 못했고 이름과 요절에 대한 소식만 알고 있어서 팟캐스트로 이따금 과거 방송을 들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요. 목소리가 가지는 생생함은 도저히 그 사람의 부재를 써올리지 못하게 합니다.
 
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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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를 먼저 보았다. 내면의 심리를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한때 누드집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짧은 숏컷 머리에 담담하고 물기 없는 모습으로 우메자와 리카의 끝간 데 없는 탈선을 적절하게 잘 연기해 내었다. 무채색의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힘겹게 구르며 은행으로 출퇴근하고 외근을 나가는 중년의 리카가 자신의 직장에서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고 태국으로까지 도피하게 되는 파국은 그 과정에서 어떤 설득력이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 오히려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또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돈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 그 어쩌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간파한 탓일 게다. 또한 누구나 그 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경제적 상황이 내 개인적 자유와 어긋날 때 시작된다. 기본적인 의식주 뿐만 아니라 흔히 경험하게 되는 사람 간의 인사나 선의 교환에도 분명 돈은 유효한 매개가 된다. 그것이 부족하거나 없게 되는 지점, 돈의 날카로운 요철은 살갗을 찌르기 시작한다. 분명 인간은 그 위에 있다고 비교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이것이 무언가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순간부터 가치관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다. '삶'과 '돈'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메자와 리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의 학교 동창, 신혼 시절 다녔던 요리교실에서 만난 친구, 심지어는 결혼 전 사귀었던 남자 친구 등의 삶이 들쑥 날쑥 끼어든다. 그리고 묘하게 그들의 갈등, 고민은 리카의 횡령과는 또 다른 시점에서 돈과 겹친다. 때로는 너무 그것을 의식하고 아껴서, 혹은 함께 사는 사람과의 돈에 대한 다른 가치관으로, 아이와의 관계에서 돈은 힘을 행사한다. 우연히 듣게 된 리카의 횡령, 지명수배 소식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돈'에 대하여 가지는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태도를 의식하게 된다. 리카가 그 날 하필 외근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며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점원의 유혹에 설복당해 자신이 가진 돈보다 더 비싼 화장품들을 구입하지만 않았더라면,으로 시작되는 가정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돈과의 힘겨루기의 장면이었다. 받아 둔 고객의 예금에서 일부를 잠시 꺼내 화장품을 사면서 시작되는 그녀의 고객 돈 횡령은 갑부 노인의 손자와의 불륜으로 폭주하게 된다. 어린 고학생과의 그 비현실적인 행복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리카는 점점 더 대담하게 은행 고객들의 돈에 손을 대게 된다. 그녀는 죄책감 대신 언젠가 반드시 모두 되돌려 놓을 거라는 비현실적인 자기와의 약속에 매달리며 죄책감을 희석시킨다. 은행 문서를 위조하고 거짓말을 남발하면서도 그녀가 정작 맛본 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일종의 비현실적인 '자유'였다. 어떤 상황, 심지어 삶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그것은 '종이달' 같은 환각이었다.

 

'돈'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기실은 환상, 환각과 가장 가깝기도 하다. 무엇보다 빚을 권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환각은 도처에 난무하며 삶에 게재된다. 무시무시한 고금리를 숨긴 사금융의 광고 노래를 꼬마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따라하고 신용카드를 몇 장식 소지하며 그것의 신용한도가 나의 소비 여력처럼 느껴지도록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카드 회사, 각종 브랜드가 마치 개인의 정체성이나 라이프 스타일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매체들. 소비하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분위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이달>에서 삶과 돈은 대단히 밀착되어 있다. 그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것과 그 사람이 쓰는 것, 또 돈에 대한 생각 들을 들어낸다면 분명 빈한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것은 반면 그러한 것들에 밀착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요긴한 시점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그러니 드문 드문 드러나는 리카를 둘러 싼 이들의 생활의 단편들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이를테면 마트의 전단지의 할인 품목을 체크하고 절약에 집착하는 유코가 사실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가즈키가 왜 그러고 있는 지, 과소비 때문에 이혼당했으면서 여전히 딸에게 원하는 것들을 안겨 줌으로써 관계를 지탱해 나가려는 아키가 정작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 지를 말이다.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들은 사실 평범한 주부가 어떻게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었는 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명만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아니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러한 리카의 행동들을 영화에서는 갑자기 그 커다란 진폭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공백을 과하지 않은 언어들이 채워준다. 그 수많은 어긋난 선택들이 모여 리카의 그 도피의 삶을 만들었음을 그 경로를 찬찬히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아귀가 꼭 맞는 인과관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슬프지만 처연하지만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게 되는. 그것이 꼭 돈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삶의 어느 지점에 가닿으려는 그 무용한 시도에 약간의 의미를 덧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온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 보게 된다. 내가 했던 그 수많은 선택들과 지금 하고 있는 이 자잘한 작디 작은 순간 순간의 움직임이 진실로 바람직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진정 나의 온전한 의지로 행해지고 있는가? 라는 자문에서 아연해지는 것. 삶은 상당 부분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드니 때로 참 힘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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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는데... 지금은 돈으로 다 얻을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돈 중요하지만 이것만 생각해도 안 되겠죠 반대로 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군요 그래도 가끔 걱정합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그저 생각만 할 뿐이군요

돈 때문에 지금을 희생하고 사는 사람 많기도 하죠 리카는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걸 돈으로 하려고 하다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쓸쓸함도 있었을 것 같네요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살면 좋을 텐데,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도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blanca 2015-09-30 14: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리카의 학창 시절, 조금 과하게 개발도상국 아이에게 기부를 해서 문제가 되었던 그녀의 에피소드가 나와요. 결국 인정받고 사랑받고 도움을 주고 싶은 욕구가 물질의 형태로 변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제목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다. 글쓰기 작법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은 작가의 삶을 감추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단순히 장르 안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었던 깊이 안에는 쉽지 않았던 그의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것들이 쌓여 있다. 특히 두 살 터울의 형 데이브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는 각종 육체 노동을 전전하며 형제를 홀로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를 뒀던 외로운 형제의 삶이 단지 음울하고 고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형제는 말도 못하는 개구쟁이에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창출해 냈으며 어머니에게 각종 자랑거리와 생각지도 못한 걱정거리를 선사하는 다이나믹한 아이들이었다. 형은 아우를 사랑했으나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아우를 골탕먹일 수 있을 지를 늘 고민하는 사색가이도 했다. 과학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수퍼막강전자석을 만들어 내기 위해 벌인 일들은 마을에 소방차까지 출동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개구지다' 남의 일일 때에는 읽으며 키득거렸다. 하지막 막상 이제 갓 두돌을 지난 둘째 아이가 드디어 사내애의 개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니 매일이  심적으로 놀랄 일 투성이다. 일단 며칠 전 화장실에 들어 와 있을 때 딸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달려가 보니 티비 화면에 무참히 금이 가 있었다. 티비 고장 중 가장 비용이 높다는 액정. 수리도 안 되고 아예 교체를 해야 하는데 정확히 구입해야 했던 비용의 반이었다.

 

다음 날, 가까스로 사람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알자고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데 만년필 잉크를 책상에 쏟아 자신의 발과 손, 내 손을 검게 착색시켰다. 씻어도 씻어도 지문과 살결에 스며든 잉크는 끝끝내 버티었다.

 

오늘 아침. 부엌에서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온갖 집에 있는 도구를 다 활용하여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꿈쩍도 않는다. 급한 대로 각종 수리 및 열쇠를 취급하는 아저씨에게 전화하니 하필 지방이란다. 관리소에 전화해 보니 특정 도구가 있으니 빌려주겠단다. 아이는 화장실 안에서 절규하고 큰 애는 등교 시간이 다가오고. 머리 산발을 하고 관리실에 달려가 도구를 빌려 오는 길에 아는 분을 만나니 구멍에 젓가락을 넣어 들어올리란다. 관리실에서 빌려 온 도구로도 꿈쩍 하지 않던 문이 젓가락을 넣어 살짝 들어 올리니 눈물, 콧물 범벅의 아기와 재회하게 해 주었다.

 

 

아, 이런 거다. 이런 거였다. 개구쟁이를 키우는 것. 나처럼 순발력이 떨어지고 정해진 루틴을 중시하는 사람한테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일. 하지만 지나고 나면 또 별 것 아니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고 빙긋이 웃게 하는 일. 그러고 보면 지난 일들은 다 이야기가 되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는데 닥친 일들은 언제나 급박하고 약간은 격한 반응을 끌어낸다.

 

그 개구쟁이 형제는 장성하여 어머니의 마지막을 성숙하고 아름다운 나름의 방식으로 지킨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훈계도 보호도 필요치 않게 된 시간들, 형제는 자신들을 먹이고 키웠던 그 위대한 몸이 이제는 병마로 줄어버릴 대로 줄어버린 최후의 어머니의 곁에 나란히 선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

 

"내 새끼들."

 

그래, 내 새끼를 키우는 일은 이런 것일 테지. 그리고 시간은 또 하염없이 가서 나와 이 개구쟁이의 관계를 역전시킬 것이다. 나는 작아질 것이고 약해질 것이고 아이는 크고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이별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그루딘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재의 사건을 좀 더 큰 시간적 맥락 안에서 보는 습관을 키워야 겠다. 그래야 나중에 덜 아쉬워하고 덜 후회할 테니까. 나 자신을 다독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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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9-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구진 아이들이 벌이는
엄청난 짓... 놀이... 삶을
지켜보고 돌아보면
허허 너털웃음도 나오고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재미있어서
가만히 보면
새로운 기운이 솟습니다 @.@

blanca 2015-09-23 20:27   좋아요 0 | URL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재미있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나중에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에 몰입하고 순간 순간 즐거움을 찾아야 아쉽지 않을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15-09-2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화장실에 갇힌 적이 있는데(저의 집 화장실은 문고리가 개모양이라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어요. 제가 설치를 잘 못해서..), 그 때 핸드폰 들고 화장실에 들어간 게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하루종일 갇혀있을 뻔 했어요. 아들냄 무서웠을 거에요. 잘 달래주세요.

blanca 2015-09-23 20:28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댓글을 읽고 반성했어요. 사실 저의 당혹감에만 집중해서 아이가 놀라고 무서웠을 생각은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야단만 치고 말았어요. 그게 화장실 문이 정말 집마다 구조가 달라 최악의 경우 전문가가 아니면 못 연다고 하더라고요. 기억의집님이 경험했을 상황도 상상만 해도 두렵네요.

라로 2015-09-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에서 묻어 나오는 블랑카 님의 글,, 점점 깊어지는 걸요!!^^*

blanca 2015-09-23 20:28   좋아요 0 | URL
아, 아마 죽을 때까지 배우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인생은 학교가 맞아요.^^

ADRN 2015-09-2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비해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네요. 반가운마음에 댓글달아요^^

blanca 2015-09-24 12:37   좋아요 0 | URL
플레님,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단 아주 재미있으니까요.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희선 2015-09-2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는데 저런 게 있었던가 했습니다 글을 봐서 그런지 형과 지낸 일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건 앞에 글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글 쓰는 것과 함께 자기 이야기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개구쟁이 글에서 볼 때는 재미있게 보여도 가까이에 그런 아이가 있다면 다르겠군요 아주 모르는 아이도 아니니 어떤 일은 웃어 넘길 수도 있겠죠 지금은 알고 하기보다 잘 모르고 하는 일이 더 많지 않을지... 그렇게 개구진 것도 한때겠죠

명절 식구들과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blanca 2015-09-26 08:26   좋아요 0 | URL
희선님, 정말 곁에 있는 것과 좀 떨어져 귀여워하는 것은 천지차이랍니다.^^ 그래도 참 예쁘긴 하네요.
희선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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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은 일어나고 예측했던 일은 때로 어그러진다.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지만 그게 나는 항상 위험하거나 슬프거나 분노할 일에서 안전하다,는 뜻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늙고 변하고 죽는다. 이건 자명하고 대단히 단순한 논리 같은데 살면서 이 명제를 경험한다,는 일은 대수롭잖은 것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여드름을 짜던 나는 이제 눈가의 주름을 본다.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말로 쏟아내며 네 시간도 너끈하던 친구와의 통화는 겉돈다. 무엇보다 가족, 친구가 때로 거짓말처럼 존재하기를 멈춘다. 죽.는.다. 그렇다면 이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언젠가 나도 없을 그 날이 분명 온다는 얘기다. 그래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그렇게 잘 살아나갈 것이다. '나'에게 '나'는 존재의 축이었지만 세상의 축 그 자체는 아니다. 깊이 생각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방도가 없다. 화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는 그렇게 애써서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견디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나아가고 꿈꾸었을까? 모든 의미가 넌센스 같다.

 

도박에 중독되고 대인 관계 기피증에 욕쟁이에 이미 이른을 넘겨 버리고 병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간기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이다. -p.17

 

찰스 부카우스키. 그는 쉰이 넘어서야 기가 쓴 글로 집세를 낼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가난했고 너무 오래 노동자로서 일해온 시간들은 그가 '정의'나 '신의'를 불신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지옥 학교의 학생으로 명명한다. 노년에서 뒤돌아 보아도 '삶' 그 자체는 그에게 지옥이었다. 글을 쓰며 죽음을 잊고 마치 지난 시절 우체국에 출근하듯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때로는 따고 잃고 아홉 마리의 고양이와 그에 비해 지극히 상식적인 아내에게 돌아와 매킨토시 앞에 않는 그가 써갈긴 노년의 일기는 독설과 저주와 비아냥으로 가득하지만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 도박하듯 토해 낸 글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삶의 실재를 깨닫게 한다. 모두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아무렇지도 않게 익살스럽게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대하기 힘들 것같다.

 

마냥 계속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p.42

알고는 있다. 보르헤스가 그렇게나 죽음을 기다렸듯 노년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렇게 죽음을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 주지 않던 괴팍한 우체국 직원이었던 (또는 스스로를 그렇게 묘사했던) 작가가 동거하던 여인의 산고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것처럼 그가 어쩌다 내뱉는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나 로맨틱하다.

 "모두 죽게  돼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린 서로 사랑해야 하건만 그러지 않는다."  모두 끝나니까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 더 사는 게 쉬워질 것이다. 여하튼 나는 또 항상 잊어버리겠지만, 그럴 때마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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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죽는다에서 빠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죠 다른 말 누구나에는 제가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죽는 것만큼은 들어갑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늘 효과가 있는 건 아니군요 언젠가 죽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기도 한데...


희선

blanca 2015-09-26 08:27   좋아요 0 | URL
`죽음`은 두렵고 알 수 없으면서도 한편 때로는 어떤 안도감을 주기도 하는 그런 거겠지요.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들, 과제들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어려워요. 그것이 닥쳐오는 그 순간까지도 그럴 것 같아요. 인간의 숙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