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mony : A True Story (Paperback)
Roth, Philip / Vintage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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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에서 필립 로스가 "노년은 대학살"이라 했던 연원은 그 자신이 여든 일곱 살에 죽어가는 아버지의 여정에 통절하게 동참했던 체험에 있었다. 삼백 페이지가 안 되는 이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억의 복기가 일상에  괴팍하고 독선적이면서도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이웃의 할머니와 연애를 하는 정력적인 그의 아버지의 그 대학살의 전장에서의 투쟁, 그리고 그것에 함께 동참하여 그 지난하고 참혹한 노쇠와 소멸의 과정을 절절하게 체험하며 삶에 내재되어 있는 그 근원적 비극성을 생생하게 하나 하나 형상화하는 작가 자신의 고백이다.

 

여기에서 미국의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결정판을 출간하게 되는 작가적 성과는 그의 본질이 아니다. 뇌 속에 종양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치료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아버지는 유대인으로서 미국에 자리잡기 위해 평생을 분투했던 기억을 무한히 반복 재생한다. 그의 삶은 차라리 기억 그 자체였다. 성장기에 필립 로스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종양 생검을 앞두고 탄 택시에서 만난 기사가 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을 때 필립 로스 또한 그를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찬찬히 그 감정의 뿌리를 탐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선적이었고 그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타인의 실수에 때로 가혹해서 필립을 숨막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면면의 반대편에는 또 여느 서구적인 자식과 부모와의 다소 건조한 관계와는 다른 끈끈함이 있었다. 아버지의 투병은 필립 로스가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할 만큼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저편에서 커져가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두고 홀로 여기에 있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의 아버지가 생의 투지를 불태웠던 만큼 급격히 소멸로 가는 과정의 가혹함은 그를 어리둥절케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허덕이다 그와 통화한 여자 친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그를 위로한다. "나는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비로소 그는 잠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질서나 명확한 인과 관계를 요구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번 "왜?"가 시작되고 나면 모든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해 보이고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견뎌나갈 도리가 없게 되기도 한다.

 

너무 늙어버린 아버지를 그대로 두어도 공격적인 치료를 해도 그 어느 지점에서도 갈등하고 회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식의 번민은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 이러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버석거렸다. 그는 몇 번에 걸친 의사들과의 상담으로 아버지에게 장시간의 무리가 가는 뇌수술을 권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과 처분에 경과를 맡기게 되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된다. 뇌의 종양 조직 검사에서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참던 대변을 아들의 잘 꾸며진 집에서 실수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는 삶의 정면을 맞닥뜨린다. 그게 바로 삶의 실재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 준 유산은 돈도 아니고 소중히 여기던 유물들도 아니다. 아들은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눈과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수습해 보려던 아버지의 똥을 대신 닦고 청소하며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유대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별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아들을 들어올리고 평생 강건할 것처럼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와 몸은 졸아들고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 자신이 이제는 자신의 용변마저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서 아들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아들은 생이 가지는 그 처절한 비극성과 부자의 긴밀한 유대를 응시하게 된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면 그냥 무릎을 굽히는 것도 때로 답이 되기도 한다.

 

필립 로스는 대단히 솔직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했던 데에 대한 회한, 연명장치 중단 서류를 은근히 아버지엑 종용하는 모습의 고백 등은 그가 언어 뒤에 실체를 숨기려는 본능을 이겨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가 언어의 장막을 뚫고 호흡하는 지점에는 이러한 솔직한 과단, 진정성이 있다. 한편 때때로 계속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은 좀 아쉽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정체성이 가지는 무게를 감히 쉽게 이해하거나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를 가두는 데에도 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그 일을 지키며 필립은 아버지가 죽어도 영원히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로맹 가리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우리의 내면의 증인이 된다. 어떤 판단, 느낌의 준거점으로 기억의 거점으로 눈물로 남는 것이다.

 

표지 안쪽에는 세 부자가 수영복을 입고 일렬로 서 있는 아름다운 사진이 실려 있다. 서른 여섯의 젊은 아버지, 아홉 살의 필립, 네 살의 남동생의 아름다운 찰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빛난다. 아, 사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대조적이고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또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한 생을 꾸려가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끝나지 않는 것인지... 이 모든 이상스럽고 신비한 것들의 원리를 모두 알고 이해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을 계속 꾸려가고 계속 읽고 쓰고 사랑하고 표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게 삶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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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12-13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서 다시 아기로 돌아가니,
아기가 된 어버이(아버지 어머니)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서 선 내 모습도
앞으로 내가 아이들과 나아갈 모습도
함께 되새길 수 있을 테지요.
아기가 된 어버이를 마주하고 껴안으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구나 싶어요

blanca 2015-12-14 14:44   좋아요 0 | URL
어른이 되는 길은 아마 죽을 때까지 또 배우고 돌아보는 과정인 듯해요. 거진 다 배웠다고 생각해도 또 튀어나오고 또 나오고 그러네요.

2015-12-14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5-12-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 작가는 굉장히 솔직하구나하고 깜짝 놀라곤 했는데 역시@_@; 읽고싶은데 번역되어있지 않은가봐요. 블랑카님 존경합니다♡

blanca 2015-12-14 14:47   좋아요 0 | URL
아, 필립 로스의 솔직함이라니, 정말 놀라고 또 놀라요. 어느 인터뷰를 보니 `~척` 안 하고 산다고 얘기한 게 빈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일견 자신감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
 

삼십 대를 거진 다 보내고 나며 달라진 것은 책에 대한 마음가짐도 해당된다. 이제 다 소유하고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번 읽었다, 해서 '읽었다'고 단정짓지 말고 정말 단촐하게 소유하고 제대로 읽어서 내가 늙어 남은 사람들이 나의 책 처분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물론 아닐 때도 있다) 읽는 것도 가지는 것도 처분하는 것도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얼마 전 고전에 대한 재미를 처음 일깨워 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처음 세 권을 다 읽고 덮었을 때에는 톨스토이의 필력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감동이 있었는데 그 정도의 감동이 또 다시 오지는 않았고 대신 처음 읽을 때에는 놓쳤던 좀더 디테일한 면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안나보다는 안나를 떠나보낸 그녀의 남편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의 정점보다는 그들의 사랑이 일상으로 가라앉으며 각자 겪게 되는 그 지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다툼들이, 레빈의 신중함과 검소함보다는 융통성 없는 면과 모순된 면면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톨스토이 그 자신이 평생 가진 것들과 가져야만 한다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던 것 만큼 수많은 상충하는 인간들의 수많은 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언행들이 대단히 핍진성 있게 다가왔다. 이것은 정말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 주변에서 살아갔던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적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마다 그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그 비극적인 삶을 다시 살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톨스토이의 인간들은 우리 현실에서 쉽사리 만나는, 하지만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가당착, 위선, 위악, 자기기만, 고결함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어제는 불우이웃 돕기를 이야기했던 사람이 오늘은 슬척 새치기를 하는 모습, 분명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고 고결한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는데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예쁜 옷이나 가방 앞에서 괴로운 마음이 나의 것이거나 그의 것이라고는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언제나 옳은 사람은 언제나 고결하고 야비한 인간은 내도록 그러기를 저도 모르게 예상하고 바라기도 하는 게 조금 더 쉬운 길이니까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미묘한 지점을 톨스토이는 얄미울 만큼 잘 포착하고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거나 미워하기에도 적절한 인간형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이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이야기다.

 

불륜에 빠져 아이와 남편을 떠나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서마저 떠나 버린 안나는 그래서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전적으로 이해하거나 사랑하기 힘든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애써 담담하게 가장하는 다소 냉혈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 알렉세이의 마음 속에서는 한없이 많은 번민과 고통이 오고 간다. 사랑의 열정에 호응했던 젊은 귀족 브론스키는 그것이 서서히 스러져 가는 자리에서 점차 자신의 것들을 기억해 내고 찾아 나가며 결과론적으로 안나를 고문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습 또한 사실적이다. 사랑을 택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추구하고 받들여지는 가치를 전적으로 등지고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톨스토이는 단선적이거나 단편적인 삶의 경로는 실제적이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이 두번째에서야 겨우 보였으니 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 책들 어느 하난들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하다. 다시 읽으면 또다른 것들이 보이고 놓쳤던 그 수많은 것들이 하나씩 돌아올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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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세번은 읽으라 하나봐요 .^^
읽을 적마다 뭔가 캐내어지는 기쁨 ㅡ

blanca 2015-12-10 14:07   좋아요 1 | URL
아, 한번 더 읽어야겠군요.^^ 사실 저는 기억력 자체가 별로 안 좋아서 두번째 읽어도 영 처음 읽는 느낌 받는 책도 종종 있더라고요...

[그장소] 2015-12-10 19:48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좋은것 같아요..전혀 새롭다고나 할까요.
분명 읽었는데 ..억울하긴해도..또 새로운!

물고기자리 2015-12-09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는 걸 참 좋아해요. 새로운 이야기도 물론 좋지만, 같은 이야기 속의 재발견에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해엔 오직 재독만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완전한 실천을 할 순 없었어요ㅎ 소장하고 있는 책의 양도 되도록 일정량을 넘기지 말자며 해마다 한 번씩 정리하고는 있는데 좀 더 나이가 지긋해지면 세 번이상 읽었던 책들만 간직하겠단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 그때 제게 남은 책들을 보면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ㅎ

blanca 2015-12-10 14:12   좋아요 2 | URL
아, 물고기자리님은 이미 이런 생각 하셨군요! 그런데 또 책 욕심은 덜어지지 않는 게 나이들어 자그마한 서재라도 확보해 다 잘 꽂아두고 톺아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서요...

[그장소] 2015-12-10 19:52   좋아요 1 | URL
아 ㅡ세번이상 읽은 책만 ...그런데 책은 있으면 늘 꺼내보게되요.어떤 확인이든 ㅡ뭐 그런 걸 필요로해서든 ..작은 계기로든 ..늘 손닿는 곳에 두는게 관건인것 같아요..

후에 ㅡ자신의 모습을 책으로 돌아본다는 생각은
참 근사해요~^^

물고기자리 2015-12-10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설은 부분만 재독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완독하진 않더라도 부분부분 늘 확인하는 책들이 있어요. 그마저도 아닌 책들은 미련 없이 정리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눈도 침침해지고(상상해보니 슬프네요ㅜㅜ) 더 이상 독서랄만한 행위를 못 하게 될 때가오면 읽고 또 읽어서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아진 책들만을 제 곁에 두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됐냐면요, 책을 좋아하시던 제 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턴가 가져다 드리는 책들을 더 이상 읽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젠 읽는 게 힘들어지신 거였어요. 그리고 책장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책들을 보니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의 일기 같은 그 책들은 언젠가 제가 가져오려고 해요..)

그래서 전 어떤 시기가 오면 읽지 않은 책엔 미련을 거두고 재독을 하며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싶은 책들만을 간직하겠단 생각을 해봤어요. 언젠가 더 이상 읽는 것이 힘들어지면 만져보고 넘겨보기만 해도 좋을, 정말 내 것 같은 책들로만 제 책장을 채우고 싶어서요. 그래서 지금도 채우고, 비우고를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요. 잘 비워야 잘 남길 것도 같거든요.. 제 머릿속도 그래야 할 텐데 말입니다ㅎㅎ / 근데 블랑카님의 글에서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blanca 2015-12-11 13:09   좋아요 1 | URL
ㅋㅋ 좋죠. 왠지 집에 초대한 기분이 드네요.

cyrus 2015-12-10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까레니나》를 두 번 완독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예전에도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이 소설에 관한 글을 본 것 같아요. ^^

blanca 2015-12-11 13:08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고 싶은것들을 인물로 표현하려 할 때 좀 지루하거나 거친 대목들이 있긴 한데 또 그게 톨스토이의 매력인 듯도 해요. 러시아 작가들 특유의 색깔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십 대 때에는 그냥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기에 바빠서 읽거나 곱씹을 여유를 못 낸 게 너무 아쉬워요. 그런 점에서 cyrus님이 참 부럽습니다...

[그장소] 2015-12-10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ㅡ아버지의 일기와도 같은 책들 ㅡ이라니..
참 좋네요..제가 살던 곳은 어릴때 수해가 잘 나는 곳여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책을 모아두지 않으셨는데..어디서오는지 몰라도 많은 책들이 보이다 자취를 감추곤 했어요.
그걸 안계실때 ㅡ몰래 훔쳐보는게 제 낙이었고요.
아마 나중엔 신변 정리를 늘 해오신 거란 생각을 하게되었지만 그게 참 서운했어요.아무것도 남긴게 없어서요.

제가 일찍부터 모아온 책들은 이제 아껴도 책등이 바랬어요.
이십년 넘는시간..가까이 같이 다녀서..^^
해가 더할수록 단상들이 빼곡해..함부로 버릴수도 없죠.
누굴 빌려주지도못하고요.
나중엔 제 딸이 보면 싶어요.저는..


희선 2015-12-11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에는 책이 별로 없어서 읽은 책 여러 번 보고 외우기도 했겠습니다 톨스토이 책도 그러지 않았을지... 지금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 여러 번 보는 사람 있겠네요 저는 아직 이 책 못 봤습니다 언제 볼 수 있을지... 세권이나 되니 마음먹고 봐야 하겠네요 첫번째, 두번째 볼 때 다르겠죠 그런 것을 느끼고 살아야 할지도 모를 텐데, 지금 세상은 책이 많네요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책을 찾은 사람은 기쁘겠습니다(블랑카 님은 그런 책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희선

blanca 2015-12-11 13:11   좋아요 1 | URL
이러다 또 갑자기 막 다 새로 읽고 사모으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어요. ^^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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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p.7

 

이 책의 첫문장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 에릭 포토리노의 체험이다.  평생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물리치료사 일마저 뇌경색 휴유증에 의하여 그만둬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 개인파산까지 했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셋에게 나란히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전해주는 책임은 자신의 성을 주었던 큰 아들 에릭에게 남긴다.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왜 '은밀하게'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러한 표현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용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 가장 드러내 놓고 천명할 수 있는 애정이 아니었던가. 비교적 성공한 언론인이자 작가의 아버지였음에도 끝내 스스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사내에 대한 복기는 왜 작가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를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에릭은 아홉 살이 넘어서야 수줍게 들어서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언론에서 회자되는 가혹하거나 파렴치한 계부와 계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오연하게 서서 생명을 준 아버지보다 더 아들의 인생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다 때 맞추어 망설이지 않고 독립시켜 보낸 훌륭한 아버지가, 심지어 배 안으로 열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작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가 서 있다. 자전거로 인생을 가르쳐 준 아버지. 운동을 마친 아들의 근육을 손수 다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버지. 생부를 찾아 만나겠다는 아들을 운전해서 데려다 주는 아버지.

 

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p.123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 든든하게 지켜서서 그를 응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서히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같다. 아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죽는다. 그와 쌓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 애정, 신뢰는 시간에 허물어져 간다. 견딜 수 없는 망각에서 작가의 언어로 구원 받은 젊고 정력적이고 가장 아버지다웠던 모습들은 주춤 주춤 눈물겹게 아련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때로 짓이기고 묻어버린다. 거기에 대항하려는 글쓰는 이들의 언어들이 뭉클하면서도 때로 무력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스민다. 대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빛나게 생동하던 젊은 아빠의 눈망울은 움푹 패이고 아들의 자전거를 밀던 든든한 뒷배는 정작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어쩌면 작가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눈물 스민 감정의 편린들은 아버지를 둔 그래서 언제나 불효를 했고 불효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식들 모두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저히 눈물 없이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버지를 '그'라 칭하며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다. 이미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둘의 삶은 혼재되고 우리 둘의 이야기는 섞인다. 아무리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우뚝 선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들과의 연결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 속에 스민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간, 노화, 병마, 죽음, 앞에서 점점 종말로 다가가는 그 삶의 경로에 동행하며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 들어도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에서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덧대어질 때 비장해진다. 끝이 있는 이야기에 영원을 꿈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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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0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버렸어요.ㅠㅠ 블랑카님의 명품리뷰ㅠㅠ;; 어제 책을(다이어리를-_-;) 주문하면서 넣었다 뺏거든요.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눈물없이는 열수도 닫을 수도 없다니. 두렵습니다ㅠㅠ;

blanca 2015-12-05 13: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 공교롭게 요새 읽는 책마다 그렇게 눈물 쏙 빼는 내용이라 자꾸 가라앉아 고민입니다. 다이어리. 이미 새 다이어리 증정 받은 거 사용중인데 알라딘 거 보고 흑심이 들어 그것 또한 고민이에요.

2015-12-0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영하의 <읽다>를 읽다 보니 자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특히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의 팟캐스트처럼 그대로 책 대목을 군데 군데 인용해 주는데 마치 담담한 그의 어조로 다시 책을 읽는 느낌.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돋을새김처럼 확 눈에 들어온다. <읽다>를 읽다보면 정말 읽고 싶어진다. 분명 자꾸 듣다 잠이 드는데도 그의 팟캐스트 업데이트를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전혀 상관 없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서른 초반에 다시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초입에 있던 그 책에서 제목에서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부각됐던 안나 카레니나보다 그녀와 큰 관련성도 없지만 이야기 내내 커다란 중량감을 가지는 레빈이라는 사내와 아내에게 배신 당한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에게 초점이 옮겨 갔다. 특히 레빈에게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감, 내부에서 싸우는 여러 가지 대의, 이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뇌, 첫사랑, 농민, 육체 노동에 대한 이상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천착. 유독 레빈을 묘사할 때 톨스토이는 어떤 거리감 조절에 실패하고 그 실패가 오히려 이 남자에 대한 애정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여러 가지 사회적 이상, 대의, 죽음의 허무감에서 허우적대다 연정을 품고 있던 어린 아가씨 키티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이 참 귀엽게 그려져 있다. 갑자기 적대적이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경험. 바로 여기까지 읽었다.

 

앞으로 레빈은 키티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다시 그가 고민했던 주제들로 돌아올 것이다. 열정이 훑고 간 자리에는 다시 살면서 겪는 자잘한 고민들과 고뇌들이 제자리를 찾아 비집고 들어온다. 안나는 끝내 브론스키와 지리멸렬한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모든 결론, 즉 스포일러를 알고 되짚는 읽기는 근경과 원경을 적절한 거리감으로 가늠하며 더 찬찬히 그들을 스쳐간 감정들, 풍경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재독이 가지는 의미는 또 남다르다. 결론을 궁금하게 하는 초조감이나 재미는 덜하지만 이미 완성된 풍경 안에서 그려 가는 저마다의 삶의 경로를 관찰하며 느끼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크다. 그래서 인물들을 더 친근감 있게 마치 살아 있는 주변 인물들처럼 느끼게 되고 그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너무 빨리 헤어지기 싫어 붙들고 있고 싶어질 정도로.

 

 

 

동쪽과 서쪽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는지 일몰을 볼 줄 알았던 곳에서 뜬금없이 일출광경을 보게 됐다. 기다렸던 것도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갑자기 보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언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묘사했던 일출 광경의 문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묘사된 일출 대목을 필사하기도 했었는데. 정말 그 광경에 맞닥뜨렸을 때에 떠오른 것은 필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광경을 그대로 마음에 눈에 담기로 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대체로 이러한 것 같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결론이 지어질지 모르고 걸어가는 길은 때로 두렵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같다. 다 알고 듣는 이야기 같은 인생을 직접 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말이다. 또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2016년 새로운 해가 뜨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이 풍경으로 갈음하려 한다.

 

다시 책을 읽고 또 쓰고.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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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5-12-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담 보봐리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그 누가 뭐래도..플로베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blanca 2015-12-09 14:34   좋아요 0 | URL
저는 고등학교 때 읽고 최근에 다시 민음사 번역으로 읽었어요. 그런데 역시 독서에도 어떤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한 문장, 한 문장 정말 적확하게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그게 전혀 지루하게 안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더라고요. 영화로도 개봉한다고 하니 더욱 기다려지지만 볼 수 있을지... 다시 제대로 읽을까 고민중이랍니다.
 

오늘 아침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이러했다. 세계 최장기간 투병 메르스 환자 사망. 아래에는 추모 게시판. 혹여 그의 것일까 싶어 확인해 보지만 이것은 공과가 분명한 비교적 장수한 전직 대통령의 자리였다. 그의 죽음 앞에 망연하고 원통할 가족들의 심정이 상상되어 마음이 괴로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이 자명한 명제가 구체화될 때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어떤 회한이나 억울함이 게재되면 남은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떠나보낼 수가 없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수만번 복기되어 할 수 있었거나 했어야만 하는 일들은 끊임없이 들고 일어나 왕왕댄다.

 

네 살 아이의 아버지, 늦깎이로 새로운 분야 공부를 하고 직장에 출근했던 가장은 메르스 80번 환자가 됐다.메르스 초기 대응에서 많은 질타와 비난을 받았던 학습된 공포감은 암투병 중인 젊은 아버지 앞에서 과도하게 관료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메르스 양성 반응과 음성 반응 사이의 자리는 제대로 된 검사, 치료에 소극적이게 했다. 간병인과 가족의 집중 케어를 받으며 이겨나가야 할 암투병은 격리병동에서 힘겹게 이어져 나갔다.

 

누구나 불확실성 앞에서 두렵다. 게다가 학습된 것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여러 전문가들, 심지어 WHO에서도 이 환자의 메르스 전염력은 거의 없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초기에 그렇게 했어야 할 행동이 하필 암투병 중인 이 젊은 아버지에게 가혹하게 발휘되었다. 가족들은 격리 병동에서 제대로 된 항암도 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늘 네 살 아이에게 돌아왔어야 할 아버지는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름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80번 환자로 마지막 환자로 언론에서 요약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간들, 꿈꾸었던 것들은 저만치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잿빛 하늘 아래서 먹먹했다. 그 가족의 자리, 그의 자리, 질병관리본부,정부의 자리를 상상해 본다. 나의 대응은 어땠을까. 나의 자유의 권한, 나의 결정의 범위, 나의 재량을 넘어서는 자리에 정말 해야 하는 일, 진실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었을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나는 그냥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밀려나가는 것일까. 이 모든 불확실성 앞에서 두려움과 비겁함을 때로 밀고 나가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이렇게 된다. 신중함은 이런 곳에서 발휘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메르스는 종식된 게 아니다. 그냥 단순히 한 줄로 80번 환자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을 게 아니다. 그 뒤에서 놓친 숱한 것들이 정말 중시해야 할 국민의 생명과 안전, 존엄에 있었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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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애 2015-11-2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자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듯합니다. 기억하는 방법은 다시 이야기하는 거라는 것도 잊지 않으렵니다.

blanca 2015-11-25 23:14   좋아요 0 | URL
네, 아애님 말씀처럼 더욱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싶었어요. 유가족들한테 누가 안 되고 그 분을 추모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게 되었으면 합니다...

헤르미온느 2015-11-2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jtbc에서 미망인의 울먹이는 음성을 들었어요. 아픈 사람들의 더 아픈 이야기를 어찌해야 할까요.

blanca 2015-11-25 23:16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저는 차마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가족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그분이 어떻게 힘들게 가셨는 지를 기억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미약한 의미나마 있기를 바라 봅니다.

웽스북스 2015-11-26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환자 사망, 메르스 종식. 이라는 워딩은 진짜 끔찍했어요 ㅠㅠ

blanca 2015-11-26 14:47   좋아요 0 | URL
.... 때로는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게 굉장히 두렵게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