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읽다>를 읽다 보니 자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특히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의 팟캐스트처럼 그대로 책 대목을 군데 군데 인용해 주는데 마치 담담한 그의 어조로 다시 책을 읽는 느낌.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돋을새김처럼 확 눈에 들어온다. <읽다>를 읽다보면 정말 읽고 싶어진다. 분명 자꾸 듣다 잠이 드는데도 그의 팟캐스트 업데이트를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전혀 상관 없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서른 초반에 다시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초입에 있던 그 책에서 제목에서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부각됐던 안나 카레니나보다 그녀와 큰 관련성도 없지만 이야기 내내 커다란 중량감을 가지는 레빈이라는 사내와 아내에게 배신 당한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에게 초점이 옮겨 갔다. 특히 레빈에게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감, 내부에서 싸우는 여러 가지 대의, 이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뇌, 첫사랑, 농민, 육체 노동에 대한 이상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천착. 유독 레빈을 묘사할 때 톨스토이는 어떤 거리감 조절에 실패하고 그 실패가 오히려 이 남자에 대한 애정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여러 가지 사회적 이상, 대의, 죽음의 허무감에서 허우적대다 연정을 품고 있던 어린 아가씨 키티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이 참 귀엽게 그려져 있다. 갑자기 적대적이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경험. 바로 여기까지 읽었다.
앞으로 레빈은 키티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다시 그가 고민했던 주제들로 돌아올 것이다. 열정이 훑고 간 자리에는 다시 살면서 겪는 자잘한 고민들과 고뇌들이 제자리를 찾아 비집고 들어온다. 안나는 끝내 브론스키와 지리멸렬한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모든 결론, 즉 스포일러를 알고 되짚는 읽기는 근경과 원경을 적절한 거리감으로 가늠하며 더 찬찬히 그들을 스쳐간 감정들, 풍경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재독이 가지는 의미는 또 남다르다. 결론을 궁금하게 하는 초조감이나 재미는 덜하지만 이미 완성된 풍경 안에서 그려 가는 저마다의 삶의 경로를 관찰하며 느끼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크다. 그래서 인물들을 더 친근감 있게 마치 살아 있는 주변 인물들처럼 느끼게 되고 그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너무 빨리 헤어지기 싫어 붙들고 있고 싶어질 정도로.

동쪽과 서쪽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는지 일몰을 볼 줄 알았던 곳에서 뜬금없이 일출광경을 보게 됐다. 기다렸던 것도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갑자기 보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언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묘사했던 일출 광경의 문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묘사된 일출 대목을 필사하기도 했었는데. 정말 그 광경에 맞닥뜨렸을 때에 떠오른 것은 필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광경을 그대로 마음에 눈에 담기로 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대체로 이러한 것 같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결론이 지어질지 모르고 걸어가는 길은 때로 두렵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같다. 다 알고 듣는 이야기 같은 인생을 직접 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말이다. 또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2016년 새로운 해가 뜨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이 풍경으로 갈음하려 한다.
다시 책을 읽고 또 쓰고.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그렇게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