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당신 나이에 생각하듯이 우리 삶에는 장미꽃만 있는 게 아니라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천천히 계속 읽고 있는데 역시 아주 책장이 잘 나가지는 않는다. 솔직히 사람들과의 대화의 그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촘촘한 묘사나 감상이 때로 질리기도 한다. 그런데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 분명 지독한데 매력적이다. 특히나 프루스트는 사람 하나 하나의 그 진저리나는 위선이나 기만, 가식, 속물근성을 어쩌면 그렇게 적확하게 집어내어 언어로 하나 하나 풀어 헤치는지 그 귀족 살롱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엿듣는 기분이다. 민주사회를 가장한 내부의 교묘한 위계를 예상한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화자인 젊은 '나'는 그러한 귀족 세계를 강렬하게 동경하면서도 환멸을 느끼는 그 지점에 걸터 앉아 신랄하게 게르망트 가의 살롱을 씹어대는 중이다. 모순, 모호함의 경계에 걸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직시하며 언어화 하는 작업이 놀랍다. 이 책은 그래서 이렇게 길어지나 보다.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거의 근접해 가며 일어나는 모든 일, 말하여지고 듣게 되는 그 모든 말들을 최대한 다 복기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삶과 닮아가니까 그것을 읽다 보면 정말 그러한 정경 속의 삶을 사는 듯하다.

 

화자는 이제 소년에서 성년기로 넘어간다. 유년 시절의 버팀목이자 평생에 걸친 판단의 준거가 될 할머니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난다. 동경해 마지 않았던 귀족 사회의 화려한 세밀화는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과 어린 시절 집을 드나들었던 유대인 스완의죽음의 전조와 지근 거리에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누군가를 이기고 그럴듯해 보이는 허식에 얽매이는 모습은 사촌의 죽음과 방문객 스완의 죽음의 기운을 짐짓 못 보는 것처럼 거부하는 게르망트 공작의 허위 앞에서 절정을 달한다. 사실 이러한 죽음에의 거부와 향락, 소비에의 집착은 낯설지 않다. 소멸과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일상을 채우는 그 모든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지 않고는 때로 견딜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지금은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무엇보다도 저는 부인이 밖에서 하는 저녁 식사에 늦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하고 그는 남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사교적 의무가 친구의 죽음보다 우선한다는 걸 알았으며, ...<중략>

-p.484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산 자들은 죽어가는 자를 옆에 눕히고도 오늘 저녁 약속, 만남의 즐거움을 떠올린다. 죽음은 자신에게 닥쳐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추상적이고 타자화된다. 스완은 그러한 현실을 담담히 감내하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표현한다. 그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든 적대감과 환멸을 무심히 포기해 버린 듯하다.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일은 비겁하고 어리석지만 그게 또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서야 어떻게 꿈꾸고 욕망하겠는가. 그러나 또 여기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다 보면 추악해진다. 죽음을 기억하며 절절하게 사는 일은 영원한 화두다.

 

젊음이 난무하는 대학교 교정에 아이 유모차를 밀고 가야 했던 일은 묘한 경험이었다. 거의 모든 문을 밀어야 하고 경사로 대신 계단으로 연결된 지점들은 휠체어나 유모차 등을 이용해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적대적이었다. 영원히 건강하고 젊어 모든 것들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누릴 수 있는 순간과 혜택이 전부인 것처럼 조장하는 사회에서 죽음과 노화, 약한 모습은 뒤안길로 밀려난다. 프루스트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나도 게르망트 가의 살롱의 그 환멸이 여전히 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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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01-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이 넘어가지 않지만 매력이 있군요 여러 사람의 안 좋은 면을 보면 그만 보고 싶어질지도 모를 텐데... 그걸 보게 하는 힘이 있는가 보네요 그것뿐 아니라 죽음을 말하기도 하는군요 가끔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죽기 때문에 지금을 잘 살아야지 하기도 합니다 둘 다 맞겠죠 나이를 먹는 것이나 죽음은 누구한테나 찾아오죠 그걸 잊지 않고 살아야 할 텐데...


희선

blanca 2016-01-11 18:09   좋아요 0 | URL
어릴 때에는 지금,여기가 영원할 것만 같은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도 그런 느낌, 생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그래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잘 살아가려고 노력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방학을 맞아 아주 오랜만에 거리가 좀 있는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갔다. 숲이라기엔 조금 덜 한 나무들이 창으로 보이고 다보록하니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서관은 공부하는 열람실도 책을 빌려보는 자료실도 잘 되어 있지만 걸어갈 수 없는 거리인데 교통 편의성이 떨어져 아쉽다. 분량이나 내용적인 면으로 자꾸 망설이게 되었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1권만 빌렸다. 생각보다 더 두껍고 무거워서 튼튼한 캔버스 천의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들고 오기 힘들었을 모양새다. 전창 앞의 책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에 열중하는 젊은 아이들의 시간이 부러워 살짝 등 너머로 보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밥을 먹을 식당에서 김밥과 오뎅을 사들고 근처 공원에서 미끄럼틀도 좀 태우다 집에 와서 읽기 시작했다.

 

 

 

내 자의적인 생각으로 인생의 중간 정도 온 것 같다. 살면 살수록 더 사는 게 서툴고 두렵다. 이제 아무리 좋은 일들도 마냥 기뻐하기 힘들고 힘든 일들을 툭툭 털어버리는 시원함도 마냥 즐기기 힘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건 상당 부분 아직 미성숙한 내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를 기다리는 순간은 빛난다. 마냥 웃고 온순하고 귀여운 아기의 청사진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례적인 아이와 만나지는 않는다. 반항하는 사춘기 자식도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도 그러한 경우를 상정하고 부모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아직 반도 못 온 것 같은데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고 때로 좌절하게 만들며 다른 차원의 고난이나 상처를 이겨나가기를 요구할 때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너무 기분이 가라앉고 그것은 내가 이제 서른 살이 아니라 마흔 살이 된다는 것과 맞물려 앞에 남은 시간들의 전망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그만 읽을까, 싶었다. 그냥 부모가 되어 부모로 사는 것도 힘든데 어떤 의미로든 특별한 아이의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례적인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애초에 나쁜 부모가 되었을 사람들은 보다 끔찍한 부모가 되고 좋은 부모가 되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다 훌륭한 부모가 된다.

-p.27

 

일상이 무난하고 삶이 비교적 쉬울 때 좋은 사람이 되기란 쉽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고난의 돌부리가 튀어 나오면 우리는 진짜 자기와 진짜 당신을 만나게 된다. 꼭 부모 역할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두드러지게 된다. 그게 자신을 닮은 하지만 또한 자신을 닮지 않은 한 사람의 생애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도 장애가 있는 스무 살 자녀의 어머니가 해마다 아이를 새로 낳는 것 만큼의 고통을 겪는다고 고백한 대목은 이례적인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 역할의 고충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 자신도 난독증, 우울증, 동성애로 그의 부모에게 이례적인 기대하지 않았던 자식의 모습으로 맞서 불화한 경험을 고백한다. 그리고 건강한 아이들을 기대했던 부모들이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증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과 만나고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들과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십여 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나누며 그 자신도 부모와의 불화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잔재들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학대한 부모는 여기에 나오지 않는다. 다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의 기준에서 평범하고 정상적인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아이들을 사랑하며 돌보고 성장시키는 그들의 여정은 참으로 지난하고 고통의 파편들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때로 뭉클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중성화 수술을 중증 장애인 딸에게 감행한 부모의 이야기, 위탁모에게 아이를 맡긴 어머니의 고백 등도 나온다. 저자는 이러한 행동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가 부모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갑자기 떨어진 이 고통스러운 숙제 앞에서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때로 도망칠 수도 있음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고결하고 숭고한 지점도 비참하고 어리석고 악한 곳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그렇게 똑 떨어지는 범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할 수 없다.

 

고통을 제거한 삶은 허상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건 삶이 아닐 거다. 그리고 고통이 흩뿌려진 삶이 고통에 의하여 압도되고 추락하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삶은 고통의 바다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경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고통이라는 거친 파편들은 절대로 부족한 법이 없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라도 그 안에는 이런 교훈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히 많은 고통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p.88

중증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우다 둘 다 세상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가 그럼에도 그러한 경험이 주어진다면 또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졌다. 너무 무겁고 진지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이라 차마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그 틈새, 공백, 뒤에 가라앉은 것들에 얼마나 많은 미덕이, 진실이 숨어드는 지를 이렇게 찬찬히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2권에서 진행될 이야기들 역시 부모의 평범한 기대를 어떤 형태로든 배반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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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1-03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사놓고 아직 못 읽고 있는 수많은-_-책들 중 하나예요ㅠㅠ 삶이 쉬울 때 좋은 사람이 되기는 쉽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엄마가 아닌 고모로서도 조카들을 대할때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책을 읽으며 자꾸 가라앉게 된다는 말씀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됩니다ㅠㅠ

blanca 2016-01-04 14:27   좋아요 0 | URL
달밤님, 이 책 부피가 어마어마한데 게다가 두 권이잖아요. 사실 아주 잘 읽히는 책은 아니더라고요. 천천히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셔도 괜찮을 듯해요. 저도 2권은 아직... 예전에 다섯, 열씩 키우셨던 할머니 세대 생각하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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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속물이다. '나'는 비겁하다. 그리고 이야기 뒤에 숨어 그것을 위장하지 않는다. 귀족 사회의 모든 화려함을 대변하는 게르망트 가의 별채로 이사한 그는 이제 목하 가장 속물적이고 치기어린 또 하나의 짝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게르망트 부인은 그가 가지고 싶어하고 도달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서 나의 모든 환상과 어리석음과 치기를 구현한 존재다. 젊은 '나'는 미성숙한 '나'는 그 부인의 시선을 한번이라도 받아보려 계획에도 없는 산책을 매일 가장하여 마침내 그녀에게 스토커 같은 인상을 남기고 만다. 게르망트 가의 후계자인 친구 생루의 병영으로 찾아간 것은 우정을 빌미로 그녀와의 만남을 얻어내려는 수작임을 독자에게 밝힌다. 이렇게 솔직하고 어리석고 적나라한 젊음의 치기는 언제나 비현실적이고 때로 기이하게 커져만 갔던 그 미성숙한 모든 우리의 열망들을 반영하고 있어 낯설지 않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언제나 떨쳐낼 수 없는 여정인가 보다. 그 길에서 찾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이상과 모든 아름다움은 예민한 '나'의 시선으로 적나라한 속살을 들키고 만다. 퇴락해 버린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 방문하게 된 것도 '나'의 아버지가 사회에서 원하는 자리를 얻어내려 물밑 작업을 하려 아들을 밀사로 보낸 것이 아닌가. 정작 애송이인 그가 발견한 것은 숱한 어른들의 그 왜곡된 욕망, 저마다의 탐욕, 위선, 가식의 향연이다. 만화경은 유대인을 탄압하려 한 통속이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저마다의 그 잇속에 관려된 왜곡된 진실의 가공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각자의 결핍과 은폐된 욕망을 비춰 준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나의 미래를 격려해 주었던 전직 대사는 정작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나'를 험담하고 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미 늙어버린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여인들은 저마다의 살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추잡한 경쟁과 연극을 벌인다.

 

난무하는 진실을 가장한 허위들을 명료한 시선으로 기술하는 이는 화자가 아니다. 화자를 관통한 시선은 사실 프루스트의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도 아직 충분히 깨닫지도 못한 어린 '나'는 이런 노회한 이들의 살벌한 전장에 발가벗겨진 채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유약하고 무기력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어리석음과 그 모든 편견들은 어느 한 시기 모두 화자를 통과하고 화자를 오염시킨다. 정작 위선과 가식에 귀족연하는 게르망트 부인이 가진 그 숱한 모든 부스러기들이 가지는 환상 앞에서 아연해하는 화자의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게르망트 가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생루가 거리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화자의 도움을 청할 때 때로 그를 도와주고 그의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에 동조하고 싶다가도 그를 둘러 싼 그 공고한 이미 이루어진 기성 세대들의 고정 관념에 복무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미성숙함과도 만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 그 어떤 이상이나 기대도 이미 포기한 프루스트 자신의 체념과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외할머니가 병과 노화로 허물어져 가는 옆에서도 그 모습을 부인하려 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삶을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이 아닌 언제나 얼마간은 비겁하고 얼마쯤은 무감한 것처럼 견뎌나갔고 견뎌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들은 때로 길을 잃는다. 만연체의 문장 안에서, 의식의 흐름 안에서, 시간의 낙차 앞에서. 그런데도 읽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 같아서? 잃어버렸던 그 수많은 치기, 실수, 실패, 환상 들을 이미 주섬 주섬 챙기는 읽기다. 쓰잘데기 없는 것 같은 살롱에서의 그 가식적인 행동들, 비겁한 언동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시공간의 격차를 가로질러 복제되는 축도 같은 오늘날의 현실의 연상에 찌릿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반복이다. 모든 좋은 것도 대부분의 나쁜 것도 결국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속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사회가 주입하는 그 모든 욕망 앞에서 무한정 초연하고 고결해지기란 어렵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 끝이 향할 곳을 예감할 수 없기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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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2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blanca 2015-12-29 18:26   좋아요 1 | URL
네, 다사나단했던 한 해 되도록 잘 마무리하려 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도 미리 복 많이 받으세요.

2015-12-31 0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1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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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랑스 제2제정의 법정에는 두 작품이 풍기문란죄로 소환되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이것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보바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변론해 준 변호사에게 <마담 보바리>를 바친다.

 

<마담 보바리>는 '결혼 생활 만큼 진부해지'는 간통의 파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통이 골격을 이루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인 경우는 거의 없다. 삶을 지나가는 숱한 파국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들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이야기하는 엠마 보바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직접적으로 혼외정사를 묘사한 대목이나 간통을 옹오하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는데 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내는 것은 어쩌면 플로베르의 이 이야기를 법정으로 불러내려 한 이들이 정확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느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플로베르가 엠마가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생활에서 결코 그녀의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킬 수 없어 곁길로 뛰어나가는 것들이 간통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엠마 보바리로부터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샤를르 보바리의 소년 시절의 동급생들이 기억도 못 할 만큼 유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모습, 창턱에 팔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소년은 미래의 아내의 배신과 자신의 몰락, 어이없는 죽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골의 의사가 되어 첫 결혼에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환자의 딸이었던 엠마에게 반해 그녀에게 구혼하는 장면,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신혼생활에 대한 묘사는 아릿할 만큼 아름답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 과한 공상과 환상, 허위에서 허우적대다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 된 귀족의 무도회에서 엠마의 허영심과 외도에 대한 욕망은 비도덕적인 출구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화려한 저기에 시선을 둘수록 여기에서 그녀를 둘어싸고 있는 것들은 헐벗고 초라하게 전락한다. 외도의 초입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가져왔던 환상이나 환각을 구체환 한 것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윽고 그것들 역시 플로베르의 말처럼 진부함으로 지리함으로 치닫는다. 플로베르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택하는 것 역시 '저기'를 '여기'로 변환시키는 삶의 그 가혹한 어쩌면 다행한 속성에 기초한 것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작가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엠마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꿈꾸는 한,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착각, 환상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 한 엠마 보바리 같은 패배는 남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축도처럼 집약된다. 플로베르의 인간형들은 그래서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닮지 않고는 못 배겨낸다. 특히 약제사 오메는 보바리 의사 집안 일에 뻔질나게 훈수를 두고 때로 적극적으로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 부부의 불행에서 상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속물이자 위선자로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보바리 부부가 모두 몰락하여 죽고 나서도 끝까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이 바란 바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는 승리자는 오메이다. 하지만 플로베르가 그의 성공을 묘사하며 정말 삶에 있어 그가 성공을 거두었는 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조소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보이는 성공 안에 진짜 '산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한계 안에서 그러한 시선으로 그러한 만족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다 죽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심판할 수 없는 지대다.

 

번역자 김화영의 작품 해설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에 기반해 한 편의 명강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값지다. 무엇보다 무심코 읽어내려갔던 것들에 대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분석과 플로베르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들이 어우러져 작품 자체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외동딸 엠마를 홀로 키우다 시집 보내고 자살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 루오 영감에 애정이 갔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농부는 전처와 사별한 그래서 장래에 자신의 사위가 될 보바리를 위로하며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귀중하고 다감한 조언을 남긴다. 그것은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목마다 만나는 그 모든 떨쳐내기 힘든 부스러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서 기억해 두고 싶다.

 

그런데 말씀이죠, 아주 서서히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한 조각 한 조각, 한 알 한 알, 흘러가더군요. 사라졌달까 떠나갔달까 아니 가라앉았다고 할까요, 여기 가슴 밑바닥에, 글쎄 뭐랄까......여전히 뭔가 묵직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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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내영화로 본데다 최근 읽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에도 언급되어있어서 조만간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에 조급해집니다.ㅜㅜ 미미여사 책을 후딱 읽고 바로ㅠㅠ;

blanca 2015-12-19 22:33   좋아요 0 | URL
아, 달밤님은 영화도 보셨군요. 아, 꼭 읽으셔야 해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책장은 가볍게 넘어가고 감동은 묵직합니다. 이러니 책 선전 같네요.

2015-12-2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7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년 연말에 쓴 페이퍼를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지금은 2015년이고 이제 곧 2016년이 온다. 조금만 더 시간을 늘여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도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잠시 내려도 보고 싶은데...시간의 속도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또 이렇게 읽었던 것들을 갈무리 해두려 한다.

 

 

 

 

<길 위에서>는 산문 형식인데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이다. 작가 잭 케루악의 경험이 태반이라 그 내밀한 청춘의 방랑의 고백은 그 누구의 그것과도 공명하는 아련한 순간이 될 것같다. 너무 가볍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젠체하지도 않는 딱 그 지점의 젊은 우리들의 이야기.

 

돌아올 것을 알고 떠나는 길의 굽이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은 내가 놓쳐버린 것들을 톺아 보고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게 한다. 즐겁고 그리운 읽기였다.

 

 

 

 

 

 

 

 

 

 

 

카버의 단편들은 정말  별 것 아니지만 항상 뭔가가 있어 찡하게 한다. 그 '뭔가'가 결국 그의 힘겨웠던 삶 속에 있었다는 발견은 '어느 작가의 생'을 통해 온다. 성실하고 아름다운 평전이다. 함부로 개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지만 작가에게 애정을 가진 시선은 그를 한 작가로서 한 아버지로 청춘을 다 바쳤던 첫 결혼에 실패했지만 끝까지 전처에게 의리를 지키려 했던 우직한 사내로 살려 놓는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의 생애를 이렇게 촘촘하게 엮어 나가다 보면 누구나 뭉클한 이야기로 재평가 될 것같다.

 

 

 

 

 

 

 

 

 

 

 

 

필립 로스는 '쓰는 일'과 언어에 영원히 기대를 가져도 무방함을 보여주는 작가다. <에브리맨>에서의 그의 통찰력은 삶의 굽이마다 발휘된다. <네메시스>는  더 이상 나이 든 사람의 쇠락에 집중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구나 한때 지나치는 그 찬란한 시간, 그 비상에 대한 찬탄과 그 뒤안길을 놀라울 정도의 대비감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놀이터를 지키던 그 모두의 형이자 오빠였던 그의 몰락은 대미를 장식하지 않는다. 무너져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여전히 빛나던 그 영웅의 어깨가 눈부시다.

 

 

 

 

 

 

 

 

 

 

 

 

 

 

 

 

 

 

 

 

 

 

꼭 대단히 진지하거나 분석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는 책들이다. 각각 시간과 늙어감과 자기 성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무엇보다 잘 읽히고 일상에 몰아닥치는 그 수많은 고충과 고난들 사이에서 조금 더 삶을 길고 큰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제목이 평이하다고 내용까지 진부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 아툴 가완디가 실제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로서 병환에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는 이야기는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즉답은 될 수 없어도 적어도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진지하게 최선을 찾아 나아갈 가능성과 길의 전범을 보여준다.

 

 

 

 

 

 

 

 

좋아하고 존경했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올해 타계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남긴 글의 약속을 그는 정말 지켰다. 태어나는 과정을 통제할 수 없듯이 삶 속으로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인간이지만 적어도 어떤 고귀함을 지키려는 노력은 허무한 것이 아니었다.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을 스스로가 정리한 자서전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언제 읽어도 이 대목은 정말 사는 게 좋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2015년 말미에 이렇게 갈무리해 둔다.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 만이, 그다음엔 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 <올리브 키터리지> 중

 

 

그런 아침들로 이루어진 삶. 그게 사는 일의 전부는 아니지만 뼈대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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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2-1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아메리인가요..늙어감에대하여..올해 저도 읽었던 책이 있어서 반갑네요..

blanca 2015-12-16 13:3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 <늙어감에 대하여>가 좀 지나치게 냉소적인 감도 있어서 읽고 나면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도저히 아니라고는 말하기 힘든 대목이 많더라고요.

파란놀 2015-12-1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갈무리하신 글월을 보니, 문득 <행운아>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행운아>를 읽을 때 느낀 바람 한 줄기가 비슷하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행운아>는 존 버거와 장 모르 두 분이 엮은 `어느 시골 의사` 다큐멘터리입니다. 아름다운 십이월로 즐겁게 갈무리하셔요 ^^

blanca 2015-12-16 13:32   좋아요 0 | URL
아, <행운아>는 못 읽어 봤어요. 그런 분위기라면 읽고 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yureka01 2015-12-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보니까 장아메리는 유태인으로 독일의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더군요.그런데 늙어서는 벨기에서인가 자살했다고 하더군요.아!~~~~

blanca 2015-12-17 13:36   좋아요 0 | URL
역시...그랬군요. 삶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의 글을 읽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희선 2015-12-1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2015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새해를 맞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십이월이면 늘 이 생각을 하는군요 기억에 남는 책을 정리해두는 것도 좋겠네요 한해 동안 어떤 책을 만났는지 알 수도 있고...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하지 않겠다 생각하는군요 날마다 같은 날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희선

blanca 2015-12-17 13:37   좋아요 0 | URL
시간이 정말 너무 빨리 가서 이제는 작년에 했던 일이 올해 했던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예요. 나이들수록 더 빠르게 느껴진다는데 기억만 자꾸 늘어 큰 일입니다.

테레사 2015-12-1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마지막 인용 문단은 참말 평이하면서도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져요...저도 그의 작품을 좋아해요^^; 전체적으로 이번 포스팅은, 좋네요..ㅎㅎ 대부분 그렇듯이

blanca 2015-12-17 13: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가 요새 든 생각이 그냥 별 것 아닌 아주 작은, 자잘한 것들이 어쩌면 사는 일의 본질일런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서 단순해지는 것도 때로 참 좋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