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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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는 은하가 대락 1,000억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개의 별이 있다. 우리 은하수 은하에는 약 4,000억개의 별이 있다. 태양은 단지 그 별중의 하나이고, 이 우리 은하계도 수많은 은하단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성이 별의 형성과정에 동반되는 현상이며, 이러한 행성중 하나인  지구의 나이는 45억년, 빛은 1년이면 10킬로미터를 가는데 이것이 1광년이다. 질식할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수많은 거대한 숫자들의 향연으로 인생을 찰나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철저한 문과생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다분히 소설가 김연수 덕택이고, 더불어 멋을 내보고자 하는 공명심도 함께였다.

이 책 정말 두껍다. 가독력. 이과생은 모르겠으나, 문과생에게는 정말 힘겹게 하는 독서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고등학교 때 물리와 화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라면,(나는 대부분의 문과생이 이해를 단념하고 무조건 외워 시험을 봤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30%는 이해하기를 단념해야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20대에,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10대에 꼭 읽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역사,철학,생물학,물리학,화학,수학,사회학, 더 나아가 미래학까지를 아우르는 이러한 방대한 지식의 체계를 단 한권의 책으로 낼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축복이다. 또한 작금의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괴로운 사람들 당장 이 책을 집어들라. 자신의 고민과 삶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하찮고 허무한 것인지, 조금은 어려운 독서로 진실로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원래 초반이 지겹고 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것이 책이라는 것의 일반적 모양새라면, 이 책은 초반이 재미있고, 중반이 조금 고통스럽다 후반이 아쉬운 모습이다. 수많은 물리공식들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특히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설명되는 부분은 정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누구는 이론을 만드는데, 누구는 만들어진 이론을 설명까지 해주는데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비극적인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흥미있었던 부분은 금성과 화성의 얘기. 금성이 차갑고 화성이 뜨거운줄 알았더니 반대였다는 것. 그리고 둘다 생존환경으로는 불가할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라는 것.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제목은 알고 붙인 제목이었다는 것, 남자가 차갑고 여자가 뜨겁다.? 

물리학자 푸리에의 집에 방문한 소년 샹폴리옹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 대목도 참 재미있었다. 상형문자를 오랫동안 해독하지 못했던 것이 표음문자와 상형분자의 혼용부분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한 것으로 그는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글자와 오벨리스크에 쓰인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자로 써서 비교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첫번째 해독자로 등극한다. 이 해독절차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쉽고 나도 이 둘을 비교할 수 있는 정도의 상황만 됐으면 가능했겠다는 염치없는 망상마저 품게 한다.

영국의 기상학자 리처드슨이 전쟁과 날씨가 모두 모종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고, 전쟁은 일기의 변화와 마찬가리로 이해와 통제가 가능한 하나의 자연 체계 격렬한 분노는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져 아직 우리 머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파충류의 뇌,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설명도 인상깊다. 칼은 인류의 핵전쟁 발발로 인한 공멸의 위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쟁 준비와 수행에 투자되는 자본이 우주탐사에 쓰이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의 인류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지구적 애정은 제러미 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과 닮아 있다. 탈가치적으로 수단화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따사한 인간애, 인문학적 소양 등은 그가 극렬한 무신론자이고 때로는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충분히 훌륭하고 경탄할 만한 것이다.

이 책을 낭만적인 엶은 가스 성운으로 휘감는 대목은 유일하지는 않지만,  2000년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그의 지고지순한 애정이다. 고대의 최고 지성들이 수학,물리학,생물학,천문학,문학,지리학,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여기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의 학문도 당시에 이루어진 연구에 아직 바탕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도서관이 파괴되고 서구문화는 1,000년의 암흑기로 빠지게 됨을 그는 몹시 안타까워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자료들이 전부 소실됨으로써 낭비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단순히 1~2년이 아니라 자그마치 2.000년인 부분도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한 번 읽고 이 책을 한 60%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연필과 메모장을 준비하지 않고 그저 드러누워 쉽게 읽으려 했던 자세도 반성한다. 중반 넘어가서야 북마크를 군데군데 끼워 두며 진지해지려 노력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의 방대한 지식의 양과 그의 인류애적 성찰을 헤아리기에 나의 소견과 자세는 너무나 좁고 초라했다. 적어도 3~4번은 고민하며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이런 과학책을 읽고 일상에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짜 고백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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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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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고, 우선 그녀의 현란한 문체에 앞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량과 그 책을 적절하게 일상에 접목시키는 능력에 감탄했었다.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하고 그녀의 문체가 거북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닥 동의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보면 그녀의 문장은 지나치게 유려하려 애쓴 기미가 군데군데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순간 순간 거북함이 밀려온다. 쉽게 써도 될 말을 이중 삼중으로 꼬아 길게 늘이는 것, 큰 상관 관계가 없는 상황을 단순히 연결시켜 현란한 비유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등 물론 전적인 나의 의견이므로 이것으로 그녀의 장점인 독서의 깊이와 넓이, 지적 소양 등을 훼손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느낌이 그랬다는 것. 또한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인지, 그냥 한 대목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인용한 것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도 아쉽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추천도서목록을 작성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듯.

일단 책 표지 및 제본 상태가 참 이쁘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그냥 행복했다. 판형도 날씬하고 작고 표지의 아름다운 여인네의 다리와 하늘색 배경은 아기자기한 어여쁨을 발산한다. 
 

그녀의 덕택에 물론 김연수도 강추했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게 되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우회와 지연의 행성' 아,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 단어들. 우회와 지연. 우회와 지연. 이런 단어가 왜 이제야 나에게 왔지? 사족이지만 토성의 하늘은 연분홍빛이란다! 아. 쓰러진다.

다음은 배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에서.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내가 요즘 느끼는 바로 '그것'이 '이것'이다. 나중의 것에서 이전의 것을 만나는 것. 그 묘한 지점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체감하며 가슴을 두드린다. 나도 더 리더를 읽었는데 이 대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저자는 이렇게 오감이 깨인 독서를 하니 훌륭하달 수밖에....누구나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잘근잘근 씹어 내 피와 살이 되어 흐르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무의미한 것 같은 독서 속에 알게 모르게 지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좀 빈약한 변명으로 들린다. 
 

그리고 '보르헤스' 말년에 눈이 멀어가지나 국립도서관 관장이 된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여긴 사람. 그.

내게는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모든 것, 특히 나쁜 일이 장기적으로 글로 변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다른 것으로 변환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니까요.

이것도 내가 요즘 생각만 하고 짧은 문장력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 글은 삶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작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 단조롭고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산 작가의 작품은 그 역시 단조로운 서사 구조를 숨기려 동원한 언어유희의 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는 점.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허물어져가는 순간'(보르헤스가 자주 인용했던 브라우닌의 시구)

현재를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재정의에 이처럼 충실한 반기를 들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다음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고독해지는 이유는 타인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는, 즉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내가 자주 처하는 상황.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남의 판단 안에 나를 가두고. 그래서 삶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 책은 수많은 인용과 수많은 작가의 직간접 경험이 어우러져 달콤한 변주곡을 들려주는 조금은 어려운 선율 같다. 다만 그 음악에는 너무나 많은 기교가 얽혀 있고 그 기교가 조금은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숨어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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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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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도서목록에서 조르바는 꼭 현학의 과시처럼 포함되어 있다. 고전이고 다수의 추천을 받는 책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을 결정지어 버리는 묵은 습관이 있기에 나의 생각은 음. 그리스인 조르바가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청년인 줄 알았고, 어떤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한 신에 가까이 닿은 그런 존재일 거라 상상했다. 

책을 펼쳐봄과 동시에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고, 오히려 젊은 청년은 작중 화자(작가)이고,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욕망과 육체를 묶어 놓는 인습, 관념, 사회적 속박의 고삐를 완전히 풀고 망아지처럼 날뛰는 인간상이었다.  

이러한 인간에 그토록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머리로 지향하는 케케묵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진저리와 무조건 욕망과 육체를 하위의 것으로 치부하고 꾹꾹 눌러담아 수단화 하려는 거대담론에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의 전체적인 감상평은 기대이상은 아니었고, 딱 기대 만큼, 아니면 조금 덜한 정도. 일단 조르바보다 주인공의 나약한 선병질적 기질과 조르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관념론에 기대어 현학적인 어휘를 마구 섞어 대는 것이 진부하게 보였고, 친구의 언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면이 있다. 고전은 반드시 고전인 이유가 있다.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서사 구조가 조금 지리하더라구도 꾸욱 참고 읽으면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겹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정말 그랬다. 기억하고 싶은 대목들. 

조르바가 늙은 할머니가 토요일이면 이웃집 처녀를 우르르 찾아오는 청년들을 의식해 곱게 단장하는 모습을 철저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대목. 그것으로 할머니는 종말을 맛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것을 희화화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독자는 포복절도하게 된다. 유언이 조르바를 붙잡고 "나를 끝장낸 건 바로 너다." 라고 했다면 여기에서 배꼽을 쥐어잡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폄하가 조금 거북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기탄없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항상 갓 도착한 나그네를 탐색하여 찾아내어 대접하고 "말하소!"라고 외치는 부분. 나그네를 따라 간접경험의 길을 떠나는 조부에 대한 회상이 너무나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조르바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가슴팍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구 들이부어주는 기분이었지만, 특히 이 말은 꼭 메모해 두고 싶었다. 이 얘기를 심장에 박아 두어야지. 사람이 미워질 때마다. 열어 보아야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오히려 조르바보다 마치 퇴물 기생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러나 조르바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우스꽝스런 치장으로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미래를 꿈꾸는 가련한 부불리나를 제일 사랑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혁명당시 온 네 나라의 제독을 무릎위에서 가지고 놀았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허풍이 너무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조르바와의 결혼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기회로 그녀의 하찮은 물건들을 어떻게든 훔쳐가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추한 인간 원형의 밑바닥 욕망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려 나의 사소하고 추잡스러운 작은 욕심들을 채우려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모습.    

 

조르바가 추진한 케이블 고가선이 다 무너지면서 그들의 갈탄광 사업은 망한다.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그들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며 그 순간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결론이 좋다. 리얼리티. 실존 인물이었다는 조르바와의 아름다운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의 후기에서 보면 조르바의 딸이 환갑이 넘어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아온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유대는 사후에도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철학서를 대한 느낌이었고, 나에게 조르바 같은 인연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였으며, 고전을 읽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한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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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도 많이 들어 읽은듯한 이 책을 읽기로 이 연말에 문득 결심을 한 것은 누군가 나를 조르바 같은 인간이라고 불렀기 때문인데, 이 리뷰를 읽으니 읽을 힘이 나네요ㅎ (땡투를 드리며 휙)

blanca 2009-11-12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리뷰를 꼭 쓰기로 결심한 거구요. 읽기만 하고 기록을 안남기니 참 허무하더라구요. 조르바 같은 인간은 극찬인데요? 꼭 읽어볼만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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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나는 작가. 감히 전업작가에게 경쟁심 생긴다면 참으로 시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  

일단 그의 인문학적 지식의 깊이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음. 운동권이라야 작가 연배가 설명해 주니 넘어가고, 대체 일제 치하 및 독일 전후 상황, 또 천체 관련 지식까지(물론 이는 '코스모스'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임.) 그 절대로 대충 넘어가는 법 없는 지식의 깊이와 정확성에 소설은 치열하게 탐구하는 것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작가2로 임명함.(이미 한 평론가가 오정희님에게 써 먹었으므로) 

또한 그는 시대 의식 있는 소설과 더불어 말랑말랑한 연애 소설에도 상당한 저력을 보여 주는 보기 드문 작가인 것 같다. 소설도 결국은 작가의 인생을 뛰어넘을 수 없다지만 그는 그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치열한 공부로 가능한 것임을. 

이 소설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난삽할 수 있다. 일단 시점의 이동과 시대의 이동이 분주하고, 시대 배경에 대한 개관이 있다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이라면 모조리 지루한 것으로 폄하되어 가독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진지한 소설이고 ,흥미 본위의 통통 튀는 서사를 기대한다면 글쎄 강추는 못하겠다. 그러나 소설이 소설이상으로 눈을 맑게 하는 경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면, 그래도 시대를 고민하는 무리들이 언제나 있어 왔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고 싶다면, 지루한 생활에 청명한 사랑의 추억을 되씹어 보면서 응큼하게 툭툭 웃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펼치라. 

운동권 학생인 '나'가 또 같은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정민' , 끊임없는 단서의 결정체로 작용하는 여체의 누드 사진을 불태워 버리려 했던 '나의 할아버지', 한밤에 정민을 오토바이 뒤켠에 태우고 지금 아니면 벗꽃이 절하듯이 고개를 숙이는 터널을 통과할 수 없다고 꼭 지금이어야 한다고 얘기했던 '정민의 삼촌', 그리고 우연히 만난 사내의 분신자살로 인해 인생 통째를 시대에 저당잡혀 버리는 프락치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길용.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은 헬무트 베르크. 유태인으로 사랑하는 아내 안나를 두고 수용소의 가스실로 들어가는 동족을 위해 역설적으로 더 즐거운 음악을 연주했던. 그리고 결국은 안나에게 버림받는. 이들을 통해 작가는 얘기한다. 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군상. 우연의 사회. 그 사회에서 그러나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의 고귀함.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성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그의 제목들은 그 하나하나가 시구같다. 책의 제목도 그렇지만. 제목 짓기에 상당히 능한 듯. 시로 등단했었다는 약력 덕택인지. '지옥불 속에서도 붐붐할 수 있는', '건포도 폭격기와 낙타의 역설'. 이런 제목들은 대체 어떻게 터지는 거지? 질투난다. 서사 전개의 다이나믹함과 문체의 유려함, 둘 다가 능통하니 이건 모. 다만 우연의 남발. 그 누드 사진으로 등장 인물들을 다 엮어 버린 것은 지나친 도식화의 집착으로 보임. 사실 소설적 허구의 가장 취약한 지대에서 김연수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 그렇다고 자기 얘기만 이름 바꾸고 주위 사람들이락 섞어 줄창 해댈 수도 없고. 허구는 그 간들간들한 허리를 툭 치면 바로 쓰러지는 형상이고. 소설이 붙들어야 하는 화두는 참인생 같으면서도 그 스토리가 다들 한 번쯤 살아 보고 싶게 탐나게 만드는 것.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의 요구인 것을. 간질간질한 연애담도 잘 쓰고 여하튼 아주 훌륭한 작가임은 분명한 듯. 아마 팬이 될 것 같다.  

간질 간질 발바닥 긁고 싶은 표현은 이런 것.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을 고마움을 느꼈다. 

정민과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이런 표현 정말 근사하다. 좀 일찍 읽어둘 것을 ㅋㅋㅋ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별들은 중심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가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전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에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섭동' 작가는 이길용이 막무가내로 외운 개념으로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이 대목에 설명을 생략했다. 의도적으로. 사실 이 부분에 이 작품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집단 전체의 중력. 시대의 영향. 별들은 인간. 섭동과 조우는 인간들 간의 관계. 그가 가장 지향하는 관계는 섭동 같은 관계가 아닐런지. 충돌하지 않고 비켜가면서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개념의 발견 만으로 심 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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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9시경 매케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함께 왔다. 

불안감에 베란다 문을 열어 보니 세상에. 

시커먼 연기가 정확히 집 베란다 정면 건너편에서 미친듯이 회오리쳐 들어오고 있었다. 참고로 우리집은 남고 건물과 500미터 정도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남고에서 일요일밤 9시 불이 난 것이다. 소방대원들이 분주하게 학교로 투입되고 있었다. 무 서 웠 다. 몇 달 전에는 아랫층에서 큰 불이 나서 전소되어 마치 아파트 속에 흉가가 숨어 들어온 모냥새로 몇 달이 지나더니 이제는 바로 마주보고 있는 남고에서 불이 났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지나갔다. 저 불이 건너 우리 집 베란다까지 붙으면 나는 어째야 하나. 아. 저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웃들과 좀 친해둘걸. 외롭고 무섭다! 

역시나 좀 떨어져 있는 단지내 아파트 주민들은 신나게 심지어 놀이터까지 와서 불구경 중이었다. -..- 왜 우리집은 남고와 이렇게 가까이 있나. 마구 원망까지 해대며 시커먼 연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 때 지나가는 생각들. 우리는 왜 평범하게 숨쉬고 걸어다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행복해 하지 않나. 정말이다. 예전 일본 작가의 글이 하도 좋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힘들 때마다 읽곤 했는데 그런 내용이었던 듯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숨쉴 수 있고 두 다리로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하라고.  

인간들은 극히 이기적이라 자신들은 절대 불 타 죽지 않을 것 같고, 신종플루는 남 일이고, 온갖 재난재해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현재 사는 아파트 평수가 불만이고, 시집 잘간 고등학교 동창을 때려주고 싶어하고, 중간등수의 아들 머리를 쥐어 박고 싶어지는 모순을 그러안고 산다.  

순간 철학적인 생각들이 마구 지나가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었다. 저 속에 내가 있지 말란 법이 없으며, 또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으리라는 필연성이 있을 린 만무하다. 그럼에 나는 행복한 것이다. 충분히..... 

오늘 아침 고등학교를 왁자하게 채운 녀석들이 와글와글거리는 웃음들이 얼마나 다행이고 예쁜지. 놈들이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참아주기로 했다. 지난 겨울 눈온다고 그 찢어지는 목소리들을 마구 질러대며 눈싸움하며 뒹굴대던 모습도 참 귀여웠지. 나 이러다 변태 아짐 되는 거 아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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