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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소설은 사지 않는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
가장 먼저 처분하는 장르이다...
이런 개별적인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논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의 책이 있다면, 끊임없이 줄긋고 메모하고 별표까지 덧붙이게 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대열의 중심에 김훈의 작품들을 지명하고 싶다. 그는,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철저히 풀어 헤친다. 그는 소설가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이며 수많은 현상들을 채집하여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하나하나 닦아내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기자 생활의 30년 내공이 그의 소설 속 언어들과 묘사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연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근거라면, 소설가로 가는 길은 분명 극도로 험준하고 선택받은 소수들만 걸어갈 수 있다는 아주 특별한 노정이다.
일단 '공무도하'는 아주 재미있다. 사실 그간 '칼의 노래', '남한산성', '화장', '언니의 폐경' 등을 읽었는데, 작가가 워낙 관조적이고 치열한 문장들을 뿜어내는 지라 읽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막 읽어낼 수 없는 본연의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문정수와 노목희의 일상적인 대화를 읽어 가다 보면 툭툭 터지는 웃음들이 김훈도 충분히 간질간질하고 살랑살랑한 남녀 간의 분위기를 살려 낼 수 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의 중량감이 진득한 이러한 소설은 분명 그의 치열한 집필 과정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
주인공? 글쎄, 사회부 기자인 문정수가 1인칭 화자도 아니거니와 그가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를 과연 주인공이라고 지명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는 그 어떤 관조의 중심에 있고 모든 죽음들을 흘려 보내는, 모든 현상과 인간의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개별화할 수 없는 한계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자신 같다. '공무도하'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문득 피안을 응시하는 것 같으면서 피안을 거부하는 약육강식의 현존을 감내하는 조금은 허무하고도 차가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해망'은 작중 인물들이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해망은 작은 어촌마을로 미군의 공습훈련이 이루어져 수많은 고철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곳이고, 매립지 기반공사가 한창으로 급격한 산업화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다. 그 과정에서의 탈인간화는 차라리 하나의 부속품 같다. 이 지명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서는 고도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운동권의 주변부에 있다 선배형사의 권유로 장철수가 삶의 또다른 근거지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인명구조특공조장 소방위였다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훔치고 박옥출이 귀향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의 죽음을 스산함으로 받아들였던 오금자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곳이기도 하며, 문정수가 군복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망은 출발지가 아닌 도착지로서 '에서'가 아니라 '로'가 되었던 곳.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간 백수광부는 어쩌면 또다른 이곳에 정착해 또다른 비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피안도 강건너 이쪽에서 볼 때만 저쪽의 가능성일 뿐, 또다른 이곳이 되면 또다른 남루한 삶이 되버린다. 해망에서처럼.
그리고 노을에 대한 이야기,
해망의 묘사에서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해망 그 자체의 발붙일 수 없는 떠있는 느낌을 가장 극적으로 집약하여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주 자주 등장한다. 정말 아름답고 엄정한 묘사들로.
염전에 소금이 내렸고 소금 위에 노을이 내렸다. 바닷물이 말라가는 동안의 시간의 무늬와 그 시간 속을 스쳐간 바람의 무늬가 소금 위에 깔려 있었다. 사내들이 밀고 나가는 삽날 앞에서 소금은 노을에 버무려졌다. 소금은 노을의 알맹이처럼 보였다.
그. 러. 나. 작가가 냉소적으로 얘기했던 강저편에는 하나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그 지향점에는 노목희가 작업하는 책 '시간 너머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사물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중략>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힐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중략>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이 아름다운 이상화된 사유의 자유스러운 기운을 떨치는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맹목적인 것 같다. 결국 그는 덕적스러운 인간들에게서도 하나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사실 가장 인간들이 가지기 힘든 극복의 과제를 타이웨이 교수에게 던져내어 풀어낸 것은 그 만큼 그런 이상화된 인간형과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큰 탓이 아닐까? 그가 혐오해 마지 않는다는 그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가 기실은 가장 끈끈하게 맺어지고 싶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고독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애정을 갈망하는 이들의 다른 군상이다.
소설이 단순하게 현실의 상념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몽환적인 세계에서 작중 인물들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욕구불만을 한시적으로 누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허구의 중량감으로 모든 진지한 가치를 내리누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성찰(그것이 아무리 처절하고 비루할지라도) 및 그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시지프스적 희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성취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그런 지점에서 분명 빛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