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태백산맥'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오는 길은 참으로 스산했다. 끝 간 데 없이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는 마음과
더불어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져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그 편벽한 구획 안에서 난도질 당하고 있는 인간 본연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조정래라는 작가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역사를 문학 속에
용해시키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민중을 하나 하나 일으킨 그의 저력에 감탄했고, 그 추상성을 구체화한 그의 작업이 궁금했다. 

이 책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감옥이 황홀할 수 있다는 그 역설의 중심에는 글을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 숨을 거두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사위지 않는 열정과 역사 속의 민중에 대한 따사로운 애정이 있었다.
문학 인생 사십 년을 회고하는 자전에세이는 출판사를 차린 <시사IN>에 대한 맞춤한 호의와 더불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인턴기자 희망자인 대학생들의 500여 가지 질문들에서 84가지를 추려 문학론, 작품론, 인생론으로 분류하여 그의 웅변을
들려주고 있다. 

소설에 대한 그의 정의인간의 총체적 탐구이다. 그것이 역사를 포괄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모국어에 은혜 갚기 작업이라 한다. 따라서 단어 하나 하나가 어법에 맞게 용례에 맞게 적절하게 쓰여야 하며 사전을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하는 대목은 그가 질문자들의 질문을 문법에 맞게 정정해 주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항상 어휘가 문법에 맞게 제대로 쓰이고 있는 지 자신 없어지곤 했었는데 책을 읽다 당장 국어사전을 주문하게 되었으니 그에게는 독자를 감화시키는 묘한 힘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또한 소설을 읽고 나서는 항상 전체적 감상을 정리하되 좋은 작품은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한 가닥 곤두서는 자신감을 챙기라는 조언은 '태백산맥'을 읽고 기죽어 버린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쓸 도리가 없다, 고 비애를 곱씹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용기를 북돋어 주는 자상함이 고맙다. 인물 창조에 있어 개성과 전형성을 두루 갖출 것을 독려하면서 요즘 1인칭 시점의 유행을 비판하는 대목은 기억해 둘 만하다. 개성적인 인물을 많이 창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인물들을 '나'를 통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1인칭 시점을 경계하라고 한다. 무심코 읽어내려갔던 1인칭 시점 소설들의 한계가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움찔했다. 그가 '태백산맥','아리랑','한강'에서 창조한 1천 2백여 명의 등장인물들의 그 생동감은 여기에 빚진 부분이 있을 터이다. 또한 그가 가장 애정을 갖는 등장인물은 바르고 굳센 민중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한다. 이것은 곧 역사의 주인이고 원동력인 민중을 독자 앞에 바로 세우고 싶었던 그의 의도와 부합한다.

대처승인 아버지 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하나의 소설 같아 아련하다. '태백산맥'에도 등장하는 겨울의 머슴방의 
그 오밀조밀한 재미는 조정래 자신이 어린 시절 자주 다닌 머슴방 마실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강제로 볼 수밖에 없었던 사살당한 빨치산 시체들의 모습은 또 '태백산맥'의 결말에서 비감어리게 재생된다. 그 자신은 상상력의 고갈을 경계하며 직접 경험을 피한 소재를 소설에 활용하려고 애쓴 시절이 있었다지만, 결국 그의 역작 속에서 그의 경험은
새로운 의미부여를 받고 재점화 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하다. 

겨울방학 두 달 동안 집에 틀어박혀 그린 링컨의 초상화로 평생의 동반자 시인 김초혜에게 구애한 대목은 더없이 낭만적이다.
그 초상화가 아리랑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다니 기회가 되면 꼭 그 배고픈 낭만의 응집물을 확인해 봐야 겠다. '태백산맥'에서
사회주의나 빨치산을 '인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던 시도가 국가 보안법 위법으로 11년의 세월을 시달려야 했을 때에는
영욕이 반반이라는 그의 아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삶의 고달픔과  글감옥 밖으로 나온 작가의 열정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으로 무장할 때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방증 같아 안타까웠다.

하루 16시간씩 20년 동안 글감옥에 갇혀 자기 학대적 노력을 기울여 그가 이루어 낸 찬란한 성취는 그 감옥 안에
머물지 않고 역사 속에 잠든 민중을 깨워 일으키고 민족의 중차대한 통일의 염원을 두드려 시민들을 각성시키고 응집시켰기에
더없이 황홀할 수 있었다. 그 황홀함에 취해 작가에게 감사를 보내고 싶다.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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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태백산맥에 이어 '활홀한 글감옥' 읽으셨군요~~~~
예약주문으로 받아두고 아직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리랑 문학관에 두번 갔는데 링컨초상화를 찍어온 것 같은데 찾아봐야겠습니다.^^
아츰찮이~~ 그 뉘앙스를 정확히 알기가 쉽지 않더군요.

blanca 2009-11-29 20:11   좋아요 0 | URL
아주 고맙다는 얘기인 것 같아요. 황홀한 글감옥 너무 좋더라구요. 눈물도 찌익~ 아리랑도 읽고 싶은데 내년에 읽으려구요. 순오기 님은 제가 가보고 싶은 곳을 다 가보셨군요.

순오기 2009-11-30 00:05   좋아요 0 | URL
남도에 사는 덕분에 호남의 좋은 곳은 여러곳을 가봤지요.^^
 

상황에 따라 똑같은 사물이 다르게 다가온다. 한 삼년 정도 전에 요놈 사고 분노했드랬다. 그 때야 엎드리거나 누워 재미있는 부분만 읽는 건달 독서를 자주 했던지라 북다트가 책갈피인 줄 알고
주문했다가 개봉해 보고 한 번 놀라고, 책갈피로 써보려고 하다 너무 얇아 어디 꽂힌지 찾아야 
하는 그 번거로움에 짜증이 솟구쳤다. 

요새는 간지 대용, 줄긋기 대용으로 다시 쓰게 되고 보니 어찌나 실한 녀석인지 벌써 다 써버리고
한 개 더 주문할 참이다. 책 귀퉁이 접는 행위를 제일 저어하는 지라, 메모해 두고 싶은 문구마다
요 놈을 슬쩍 끼워 놓으니 나중에 돌아보기도 좋고, 여러 모로 유용하다. 

단점이라면, 색깔이 금새 변해 버리고 느슨해져서 가격대비 질을 놓고 본다면 비추다. 거무죽죽해진다. 미쿡의 대학교수인가가 발명해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똑같이 만들 수 없나 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비자 민감도와 손의 정교함을
본다면 반드시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까운 부분이다. 

옆지기가 보더니 당장 두 개 사내라고 해서 주문해 줬더니, 신나서 가지고 가버리고 비싸다고 투덜댄다. 또 살거라고 하니
재활용하란다.-..- 왜 쓴 걸 다시 안 빼냐고. 그게 참 이상한게 좋은 대목대목 꽂아 놓은 북다트를 다 빼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해서 싫다. 왜냐고 묻는다면 언젠가 다시 그 책을 펼칠 때 내가 요 대목에 꽂혔구나,를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결론은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알라딘에서 또 하나 더 주문하겠다는 얘기.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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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1-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포스트잇을 붙여 두는데요, 그걸 하나하나 떼서 바로 옆의 책장에 다닥다닥 붙이면서, 내용을 정리해둬요. 비공카테고리 같은 곳에 ^^ 하나하나 떼는 것, 재밌는데- ^^

blanca 2009-11-29 00:13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포스트잇을 붙이면 될 것을 하면서 머리 한 대 콩 쥐어박았습니다.^^ 그 간단한 품목을 사러가기는 귀찮은 거지요.

라로 2009-11-2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귀퉁이 접고 밑줄 긋는거 안좋아하는데,,,이놈이 괜찮군요!!!!저도 함 써봐야겠는걸요!!^^

blanca 2009-11-29 00:14   좋아요 0 | URL
산타클로스 넘 귀엽네요^^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한데 유용한 건 사실이에요.
 

 

십권을 붙들고 나는 울고 말았다. 잘 우는 편은 아닌데 그렇다고 책보고 처음 운 것도 아닌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몸을 들썩이며 운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이제 내가 보는 세상은 무언가 아주 많이
달라져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울고 난 다음의 마음은 시원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눈물이 흘러간 자국이 고랑이 되어
스산한 바람이 휙휙 지나가고 있다. 올 겨울은 더 추울 것 같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서 순결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분비물이다. 생명의 분비물일 때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동시킨다. 우리는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 김 훈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산 속에 남아 끝까지 자신들이 지향했던 이데올로기를 향해 목숨을 던졌던 그들이 떨치고 간 애잔함은 초등학교때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고 파란 눈의 금발 미군들이 그저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온 아주 젠틀하고 샤프한 구원투수 정도로 여겼던 무지함과 더불어 부조화였다. 무언가를 전혀 몰랐지만 이상하게 무언가를 향해 그렇게 전체를 던지고 그 깊은 산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들에 대한 아슴프레한 애상은 어린 시절부터|
흐릿하게 나를 감돌았던 것 같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 애수가 흘러나온 그 지점을 더듬으며 드디어 그 부연 감상의
정체는 제몸을 드러낸다.  

염상진, 하대치, 이태식, 천점바구, 강경애 아무리 그들을 빨갱이라고 욕하고 '무찌르자, 공산당!'을 연호해도 그들은
우리와 피를 섞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지향했던 그 이데올로기가 허구였을지라도 그들 자체까지 미워하라는 강요가
어린 가슴에도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굶어죽고 얼어죽고 총맞아 죽은 그네들이 그렇게 순정하게 전체를
투신할 수 있었던 그 열정이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그 지향점이 비록 붕괴되었을지라도.  
무언가를 보고 어딘가를 향해 나의 전체를 던진다는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기
때문에 더 사무치게 아름답다. 하루 세 끼를 먹고 배설하고 몸을 부리는 것이 전체가 되어 버리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너무 스산하지 않은가.

이데올로기의 편벽한 경계 너머로 죄없는 양민들을 몰아넣고 총질해댄 대목에서는 분노가 생목처럼 치밀어 올랐다.
거창양민학살사건 같은 경우는 경악이라는 어휘가 그 감정의 파고를 다 담아낼 수 없음에 절망한다. 공비를 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배설하고자 피난시켜준다는 거짓말로 한 곳에 죄없는 양민들을 몰아넣고 전원 사살해 버린 사건.
이는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고 민중은 그저 마구잡이로 눌러 그들이 몰고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했던 천인공노할 작자들의 행태이다. 역사는, 지배자의 웅변이 아니다. 민중의 피가 민중의 숨결이 어루만지며
끌고 가는 생명이다.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기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자각한 자에게 역사는
비로소 시간의 단위구분이 필요없는 생명체인 것이다. 역사는 시간도, 사건도, 기록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저 먼 옛날로부터
저 먼 뒷날에 걸쳐져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올바른 쪽에 서고자 한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엮어진 생명체.
그래서 역사는 관념도, 추상도,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10권 294쪽 인용

일제치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인민군 군관이 되어 돌아온 김범준이 벌교읍에서 유일하게 선량한 지주였던 아버지
김사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석산 줄기에 숨어 그 수많은 만장들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그 하나로 문자들이
하나 하나 웅집되어 슬픈 영상을 만들어 내어 가슴을 쳤다. 숨어서 오열하며 아버지와 작별하는 그 장면에서 이데올로기가
치고 나간 그 공백을 메우는 인간의 정리가 풀어놓은 이야기, 그것은 그 어떤 명분도, 그 어떤 사회적 가치 기준도 떨치고
맨몸으로 나온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다.  

빨치산이 정식 군병력이 아니라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단계에서도 포로교환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북에서도 오히려
실패한 투쟁의 주역들로 간주되어 그들은  버려진 채 초라한 최후들을 맞아야 했지만,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인민해방을 성취한다는 명분밑에 생명을 스스로 내던진 사례들도 많았다는 대목은 비감어린 것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결핍이 일상인 그 숨어사는 투쟁을 행복한 것으로 추억하는 하층민들의 회고는 그네들의 고충이 어떤
것이었는 지를 대변하는 듯해서 속이 아렸다. 그 처절함 속에서도 무시받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었던 그 생활을  아름다운
것으로 회고하는 그들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남겨진 숙제가 아닐런지. 

불사신일 것 같았던 염상진은 적의 포위 속에서 자폭한다. 염. 상. 진.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숯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범학교까지 마쳤음에도 당시 그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고 끝까지 사회주의 인민 해방이라는 그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사내. 그의 목은 잘려 악질 빨갱이라고 써붙여져 벌교역 앞에 전시된다. 형과는 완전히 돌아서 철저히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온 동생 염상구가 달려와 그것을 내리라고 포효하는 장면은 결국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바로 그 얘기가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그것을 뛰어넘을 더 큰 가치가
있을까? 그런 가치가 있다고 믿어 버리는 데에서 모든 사회적 갈등의 불씨는 점화되는 것이다. 그저 다 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그 기본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무시되었는가. 사랑이라는 더 추상적인 개념으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결국 인간이 인간임을 알고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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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밖에 못 읽은 저로서는 10권의 저 감정을 오로시 공감할 순 없지만 알 거 같긴 합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에서 벌교역전에 걸렸던 염.상.진의 머리를 얘기했었지요.
염상구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했었고...
님이 쓰는 페이퍼에 상품넣기로 해당도서를 넣어주면 좋겠어요. 그 책을 살 때 땡스투하게요.^^

blanca 2009-11-29 20:10   좋아요 0 | URL
주말 잘 보내셨어요? 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관련 페이퍼를 혹시 작성하셨는지 찾아 봐야겠습니다. 아, 글구 페이퍼에 상품넣기를 할 수 있군요. 순오기님은 저에게 알라딘 서점의 등대입니다.^^

순오기 2009-11-30 00:09   좋아요 0 | URL
페이퍼에 상품 넣기를 생활화해 주세요.^^
태백산맥 문학기행은 2007년 5월에 갔는데 디카 화소를 줄이지 않고 찍어서
알라딘에 올리려면 전부 사이즈를 줄여야 해서 여직도 못 올렸어요.ㅜㅜ
문학기행 갔다 와서 포스팅 안 한 것이 한두 개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주말은 방콕하며 읽고 쓰고~ 리뷰대회 마감 앞두고 올인이에요.
9시 40분 닌자 어새신 보고 방금 왔어요~~
으 끔찍한 장면의 연속이라 모자로 가리고 봤어요.ㅜㅜ
 

나는 평생 동안 과분한 영예를 얻었지만 그 어떤 영광보다 나를 흡족하게 해 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립도서관의 관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항상 천국을 도서관과 같은 종류로 상상했습니다.
                                                                                - Jorge Luis Boreges <정혜윤의 침대와 책중 재인용>

 가문의 내력대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 마침내 실명하고 도서관장이 된 그가 상상한 천국에서 단지 책의 겉표지의
 굵은 표제만을 어렴풋이 해독할 수 있었던 그의 이 얘기는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어느 개그맨의 안타까운 근황과 더불어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닥치는 대로 읽고 보는 나의 활자중독에
 제동을 건다. 왜냐하면, 나는 늙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노안이 와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은
 정말 너무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혹은 라식 부작용으로-..-. 

 무언가를 읽을 수 없고 누군가를 합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없고, 결코 우연이라도 조우할 턱이 없는 이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그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더이상 들여다 볼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일 터이다.
 보르헤스처럼 나에게도 천국이란 도서관이다.  읽고 쓰고 또 누군가는 읽어주고 책을 추천해 주고 빌려주고 사주기도 하고,
 그런 세계가 나에게는 전부이고 지향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도 일어나고 나와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이가 발을 내려 놓고 앞으로 또는
 뒤로 허우적대며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위안이다. 삶과 독서는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더로 다른 차원에서
 일으켜 주고 밀어주는 그 맛이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결론은 눈을 쉬어야 한다는 것. 더 오래 더 많이 읽으려면. 태백산맥 한 권이 남았다. 그냥 너무 서운해서 그 마지막
 한 권은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옆지기가 입이 댓발 나왔다. 자기도 다 이해한다고. 무협지 보던 시절 그 중독성을
 경험해 봤다고, 이러니 그 앞에서 정신무장 교육좀 시키려고 어설픈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코를 골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천상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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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misshide/707100

위의 인용의 인용보니, 이 책 생각나요. 보르헤스에 대한 정말 멋진 책이에요 ^^
리뷰의 링크 두개 있는거도 다 멋진 글. 시간날때 함 보러오세요~

blanca 2009-11-27 11:5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보르헤스 책 정말 읽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누군가 추천해 주기를 기다렸죠. 꾸벅~
 

태백산맥 3부 분단과 전쟁 6,7권을 읽었다. 1949년 10월부터 다음에 11월까지 1년을 다루고 있다. 6.25발발 전후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최근까지도 회자되고 있고 그 후속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 '보도연맹' 사건의 묘사는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다.
정부주도로(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반공교화단체를 만들어 좌익색출에 혈안이 되어 심지어 할당량까지 내려
마구잡이로 가입하게 한다음 초기후퇴시에 가입한 이들을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집단학살해 버린 사건. 최소 이십만이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니 경악스럽다. 그러니까 쌀주니까 지장찍으라고 하여 엄지에 인주 묻힌 옆집 삼돌이가
갑자기 뒷산에 끌려가더니 다음날 구덩이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아니, 내 아들이, 남편이,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예고도 없이 짓밟히고 매장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이 아닌가.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 

이런 식으로 조정래는 그 학살의 현장에 유독 시간이 잇새로 새어나가지 않게 천천히 다가간다. 독자도 이 대목은
같은 말들이 열 번씩 반복됨에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 하나의 문자를 잉끄려뜨리듯 눈 속에 박아넣게 된다. 그 만큼
충격적이고 살갗이 아프다. 가장 아픈 지점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았던 그저 그대로 하루하루를
꿰어나갔던 평범한 양민이 역시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옆사람과 묶여 총성에 사라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덜 가지고 덜 배우고 그래서 주어진 체제 속에서 비판이나 반항없이 일상을 꾸려나갔다는 이유로. 

동란 초반 북이 우세했을 때 사회주의 해방촌이 몇 달간 건설되어 염상진 일행이 벌교로 귀향하는 대목.
그 혁명이라는 것에. 그 비현실적인 지향에 생명의 줄까지 매달고 어린애 마냥 좋아 날뛰는 그들에게
애달픈 연민이 든다. 결국 그 귀착점이 부패에 의한 자멸이고 돌아 돌아 결국은 다시 자본주의라는 결말이
예고되어 있어 더더욱. 

이런 긴 작품 속에서도 문장 하나 하나에 형형한 불빛을 점화한 작가에게 경탄을 보낸다. 다음 같은 문장. 

묽은 가을안개가 슬픔처럼 들녘 가득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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