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가수 호란이 인터뷰중 마구 칭찬해 준 덕택에 읽게 되었다. 뉴욕타임즈에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까지 수여받은 그의 냉철하지만 다정다감한 시선이 너무 좋아 닥치는 대로 그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신경외과의사인 그는 주로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통해 결함,장애, 질병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역설적으로 창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갑자기 눈이 멀어도, 반신불수가 되어도, 기억을 잃어버려도 그들의 혹은 우리들의 삶은 비관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변화 진보해 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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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인류학자'에서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연장선상에서 임상사례를 통한 그의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꾸려가는 삶에 대한, 명쾌한 긍정은 계속된다. 다만 후자가 약간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색맹의 섬'은 일종의 여행기다. 전색맹과 신경퇴행장애가 풍토병화되어있는 미크로네시아를 두 번 방문한 기록이다. 사적인 감상과 과학적인 성찰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양치식물, 소철에 대한 지질학적 이야기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수전 손택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려있는 해설에 차용된 부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대중문화계의 퍼스트레이디'(이런 거 보면 미국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관념적이고 선정적인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문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심미가에서 더 나아가 조국인 미국의 패권주의를 용기있게 고백하고 성토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진화했다. 그녀의 문장은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재조합되어 평범하고 무딘 사람들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어려운 내용일 것도 같은데 그녀의 펜에서는 명쾌하고 간결하게 재해석되어 나온다. 가독성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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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사회 제반 현상에 만연되어 있는 정서에 대한 통찰로 집약되는 내용들이다. '타인의 고통'이 좀더 읽기 쉽지만 이제까지 타인의고통을 은연중 즐기고 있었다는 못된 관음증을 깨닫게 되는 불편한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연민으로 연결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그 불편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사회에서 펼쳐지는 거대 담론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그 헤게모니를 질병(결핵, 암, 에이즈)에 붙이는 각종 표식들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실제 암투병을 여러 번 하였던 그녀는 암이 생각만큼 무서운 병이 아니라 그 병에 걸린 사람에 낙인을 찍는 사회의 횡포가 더 무서운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후에 그녀의 투병기에서는 이것은 일부 수정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죽음 앞에서 펼쳐진 그녀를 둘러싼 풍경과 그녀의 그 처절한 투쟁을 담담하게 회한에 젖은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사실 수전 손택이 절대로 평범해지지 않을거라 절규했던 그 장면이 끊임없이 오버랩되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추스려야 할 만큼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녀는 끝까지 죽음과 불화하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번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과연 삶을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사는 것과 결국 오고 말 죽음과 화해하고 평화스럽게 가기 위해 조금 덜 집착하고 더 포기하는 것이 나은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나 경멸했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뻔뻔한 연민과 연루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연결은 우리도 공통의 그 피할 수 없는 종결을 공유하고 있다는 자각의 고리가 있기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따라온다. 유명인의 최후에 대한 선정적인 보고가 아니라 데면데면해서 더 담백했던 그 모자 관계 만큼 투박하지만 진지하고 특별한 책이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고 그녀는 말했지.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모든 제반 현상의 가운데에 있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책임감 있는 연민을 가졌던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