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입의 원칙을 세웠다. 다 읽기 전에는 결코 추가 주문하지 않는다.
주문하고 배송오는 그 뜨는 간격 동안 남는 시간 한자 공부를 하기로 했다. ㅋㅋㅋ
반드시 교육부 선정 상용한자 1,800자를 통달한다.(--;)
경복궁에 가서 현판을 못읽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그 참담한 기분이란.  
혼자 계면쩍어져서 괜히 손만 비빈다.

그리고, 소장 가치 있는 책만 구입하고, 쓰윽 읽고 두 번 다시 안 볼 책은 되도록 안사고 사더라도 바로 처분한다.
읽고 싶은 책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는 악평도 많아서 망설여진다.  바람직한 문장들을 훈계조로
조합한 자기 계발서를 읽을 나이는 이제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현듯 요즘 이런 도서에 탐닉중이신
아버지가 떠올라서^^ 이 생각을 취소한다.

30대 중반으로 가면서 갑자기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쟁여 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각에
버리는 연습을 조금씩 시작해야 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들을
바로 내가 하게 되는 변화의 길목에 서게 되는 것 같다.
<고등어를 금하노라>가 그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안나 카레니나>는 실물을 직접 보고 완전 반해버렸다. 즉시 업어오고 싶었지만.
표지에 반해 그 두터운 세 권의 책을 쓸어오는 것은 좀 모험인 것도 같아 주춤했었다.
소피 마르소 주연의 동명 영화가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고전답지 않게 재미있다는 중론이라
망설이지 않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 다시 봐도 너무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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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1-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분간 책을 사지 않고 산 책을 다 읽으려구요. 물론 벌써 오늘 선물받은 문화상품권으로 책을 사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있지만 ㅎㅎㅎ

blanca 2010-01-08 21:47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완전 집착 수준이에요. 정말 참아야 되는데. 읽을 책이 없으면 심장이 막 뛰어서 ㅋㅋㅋ 오죽하면 집에 온 사보를 다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겠어요. 이것도 치료받아야 할 듯.

무해한모리군 2010-01-08 23:17   좋아요 0 | URL
전 길가면서 간판이며 벽보를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ㅎ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큰 눈에, 분명 성형했을 거라고 수군대며 깎아내렸던 오똑한 코를 뽐내던 도덕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보면 그 스프 건더기 하나 더 먹으려고 하는 모습이 말이야~" 

그 뒷부분에 어떤 얘기가 이어졌는지, 아니 왜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도덕시간에 호사스러워뵈는
외모를 지닌 그 샘으로부터 나왔는지를 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중2였나 그 때쯤 그 도덕샘이 하라는 대로
모조리 다 했던 우리 반 아이들은 너도나도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그 왜곡된 기억의 편린들을 조합해 보면 도덕샘은 산다는 것의 신산함과 그 구차함에도 살겠다고 버둥거리며 일상을 꾸려나가는 그 생의 의지를 얘기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얇은 대작가의 명작은 고전답지 않게 더없이 재미있고 익살스러웠다. 실제 솔제니친의 유형생활에 기반한 그 작품은 건더기가 더 많은 스프그릇쪽을 교묘하게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장면이 전체를 압도하고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어떤 기억은 특정한 감각 하나로 편집되는데 그것은 경험하지도 경험할 리도 없는 바로 그 희화화된 바로 그 장면이 풍기는 비릿하고 시척지근한 살의 냄새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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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소설책을 줄치면서 읽어 본 적 있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은 정말 한 줄 한 줄 줄치면서
읽게 된다." 안경 뒤로 느끼하다고 폄하했던 노총각 문학샘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을 때 나는 단정지었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되게 재미없겠다! 그럼에도 무슨 부책감처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꼭 다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후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면, 적어도 픽션을 단순한 상상력의 구획이 아닌 기억해 두고 싶은 삶의 전언으로 간직할 정도의 독서를 한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존경을 바치게 된다. 아직 가보지 않은 그 세계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작품을 나는 쉽지 않은 독서가 되리라는 짐작과 줄을 좍좍 그어대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모습을 조금 미루어 두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당분간도 시작하지 않을 것 같다. 
 

 

 

 

 

 

 

 

--------------------------------------------------------------------------------------------------------- 

7,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 여러 번의 투옥을 거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창립, 고문을 역임한 함세웅 신부님
만난 것은 종교적 회의론에 빠져 있으면서도 끝내 다른 프리즘 안에서 나를, 나의 신에 대한 사랑을, 복원해 보고 싶은
그 관성 같은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았을 때였다.  

첫영세를 받는 그 6개월의 예비자 교리 막바지 즈음하여 신부님의 강론을 듣게 되었고 당시 둔중한 울림이 나의 몸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율했다. 함신부님은 성직자 이전에 치열한 학자였고 삶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각성으로 말 하나 하나에 실은 그 진실의 추가 작은 성당 전체를 드리우는 듯했다.  

종교 안으로 사람과 인간사 전체를 가두려 하지 않았고 말장난으로 공허한 메아리를 매듭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강론을 듣고 있으면 나는 다시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 있는 듯 했다. 강론을 메모하고 정리하고
또 되새김질하는 것은 모처럼 생경하지만 찬란한 경험이었다.
 

부활절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함신부님은 톨스토이의 <부활>을 통해 강론을 열고 닫았다.
어린 시절 분명 치기로 일역에서 다시 한역으로 오독된 그 엉망의 번역서를 다 읽은 것도 같은데 그 어떤 기억도 담지 못한
나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톨스토이의 <부활>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그 분의 그 빛나던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활은, 인생의 고난을 겪고 난 후에 그것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고 깨닫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그 곳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이 지나가고 난 그 자리. 훗날 그 자리는 분명 다시 피어난다.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깨달으며 그 고난도 남기고 간 것이
있음을, 그 고난 덕택에 지금 이자리에 내가 있음을 안도했을 때 뿌듯하게 차오르던 그 미지의 느낌 속에 꼭 나의 하느님을
모시고 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얘기였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드디어
아퀴를 짓게 되었다. 

 

 

 

 

 

 

 

 

정작 냉담으로 불편하고 자신없는 마음과 러시아로 떠났던 예쁜 친구의 귀향이 우정의 복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이 추억들에 얽힌 나의 슬픈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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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1/4 정도 읽게 되면 불편해진다, 에로티시즘의 향연이 너무 노골적으로 펼쳐질까봐 지레 난감해진다.
1/3 정도 읽게 되면 생각보다 음탕하지 않아 지루해진다.(저자 나보코프는 예리하게 독자들이 멈출 것이라 예견한다.)
1/2 정도 읽게 되면 대체 롤리타와 험버트가 어떤 결론을 맺을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길을 서두르게 된다.
다 읽게 되면. 에로티시즘의 정수에 있는 어떤 아이콘으로 잘못 길을 찾은 롤리타를 데려와 도덕과 관습의 틀마저
부수어 버린 정열이 공글린 사랑 안에 가두어 놓고 싶게 된다. 

의붓 아버지가 열 두 살의 법적인 딸을 끌고 다니며 벌이는 변태스러운 도피 행각으로 <롤리타>를 규정지어 버리면 더 이상 이 책의 가치를 논할 여지가 없다. 흔히 롤리타의 이미지에 덧댄 음란하고 노골적인 장면을 기대했다면 이 책은 더없이 실망스럽고 지루하다. 그 수많은 암시들, 해독하기 힘든 암호들이 어우러져 펼져지는 난해한 기류가 몽환적인 에로티시즘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은 결코 포르노나 각종 에로영화에 영감을 주는 것 이하로 전락할 만한 졸작은 아니다. 

험버트는 어린 소녀들에 대한 도색적 성기호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첫사랑 애너벨에게서 출발한 롤리타에 대한 사랑의 여정이 단지 육체적인 쾌락을 희구하는 욕망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떠나버린 롤리타가 더이상 아름다운 님펫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여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도 그는 돌아오라고 눈물로 애원한다.  또한 그녀의 행복한 유년을 갈취한 것 같은 죄책감으로 몸을 떤다. 그는 미성숙이 주는 그 완전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에 매혹당했지만, 그 매혹이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존중해 주지 못한 것으로 끝났음에 절망한다. 험버트는 뻔뻔하지 못했다. 그의 자책과 스러져가는 시간에서 침식당하는 롤리타에 대한 여전한 사랑은 우리가 그의 롤리타를 철저히 잘못 이해하고 그 이미지를 차용해 왔음을 깨닫게 한다.

퍼즐 같이 난해한 각종 암시 및 끊잆없는 시점의 이동, 인칭의 파괴 등이 다소 어지럽고 불편했다. 그러나 늙수그레한 중년 남자의 옆구리에 끼인 듯한 미성숙한 소녀의 이미지로만 롤리타를 생각해 왔던 나에게 롤리타는 저자 나보코프의 잃어버린 유년에 대한 비대한 그리움이고 자유롭게 쓸 수 없었던 모국어에 대한 애상어린 비가였다는 발견만으로도 값진 독서였다.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 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 하는 내 설움에 있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p.s. 이 책을 들고 다니면 표지의 그 예쁜 소녀의 두 눈과 제목이 한데 모여 묘한 오해받기 쉽상이다. 다들 한번씩 책 표지와 책 주인을 물끄러미 볼 수도 있다. 그게 롤리타의 현주소다.^^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재미있고 잘 되었다는 평이다. 비감어린 애상이 잘 재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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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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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미없더라, 위대한 개츠비."
"나도 들었어, 그 책 재미없다는 사람 많더라." 
................................................................
영어학을 전공했던 친구의 재미없다는 얘기는 그 후로도 <위대한 개츠비>의 명성과 비례하는 부정적 아우라였다.
걸핏하면 쏟아져 나오는 가장 위대한 영어 소설이라느니 미국대학생들의 필독서라느니 하는 찬탄은 역으로
그 책을 더 얄밉게 보이게 했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 재미없다고 학교 게시판에서 한 마디 거들다가 개츠비 추종자로부터
약하게 한 대 얻어 맞은 기억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얄미운 개츠비가 성큼성큼 걸어온 것은 문학동네전집의 책 디자인이 요요하기도 했고, 번역자 김영하에 대한
무언가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영하가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번역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서점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다"고 성토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에 바쳐지는 각종 헌사들 그 자체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개츠비가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점에는 동감할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만난 개츠비에 대한 기억의 고백은
되레 너무 재미있어서 중간에 덮어 놓고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정. 말. 이. 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한 가난한 남자가 부잣집 아가씨에게 차이고 난후 절치부심하여 거부가 되어 나타나 그녀와 재회하고 밀회를
즐기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 간단한 플롯의 로맨스가 사실 졸라 재미없을 정도로 처질 것은 아니지 싶다.  
충분히 재미있을 개연성을 품고 있는 스토리가 그간 번역의 한계의 틀 안에서 지루하게 처져버린 것이다. 
그 안타까움은 김영하가 다 스러지게 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자~ 그럼 김영하 오빠의 귀환 신고식의 향연들~ 

좀 재수없었다. p.22
웬 촛불? p.24
나야 뭐, 올해 오십이고, 있어봐야 주책이고......p.93
미친 거 아냐? p.146

 

김영하 번역의 미학을 뛰어넘는 피츠제럴드의 저력은 상황과 풍경과 인물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다. 그 묘사는
여느 다른 고전의 나른함과는 다른 통통 튀는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의 집에서 커튼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장면의 묘사는 그 커튼 자락을 독자의 코 앞까지 드리운다. 또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분위기와
개츠비의 지향의 덧없음을 표상하는 데이지의 묘사는 당장 1920년대 중반 미국 동부의 된장녀를 끌어다 내 앞에
세워놓는 듯한 환각에 빠지게 할 정도다. 데이지는 이런 여자다.
 

"저 분홍색 구름 하날 가졌으면 좋겠어. 거기다가 당신을 집어넣고 밀고 다닐 거야." p.119
이런 뻔하고도 수작 좋은 얘기를 개츠비를 버리고 떠나 부유한 톰 뷰캐넌과 결혼할 때는 언제고 부자가 되어 컴백한
그한테 했던 여자라면 짐작 가능할 것이다. 

오후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허망한 꿈만이 홀로 남아 싸우고 있었다. 방 건너편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향해,
더이상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암울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으면서 끝까지 분투하고 있었다.-p.169 

물질만능주의로 흥청대던 전후상황에서 신생 제국 미국의 인격화라고 개츠비를 이해하는 당시 평자들이 많았다지만
우리는 이미 2010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 개츠비를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개츠비는 누구나의 마음속에나
살고 있고 죽을 때까지 붙들고 싶은 무모한 순정에 대한, 무모한 열정에 대한, 무모한 도전에 대한 아련한 향수라고.  
그 지향이 덧없음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순정을 가녀린 손끝에 걸치고 있었던 우리 스스로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개츠비의 외로운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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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10-01-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럭... 이 뽐뿌질은 정말이지, 너무하십니다아아아아아아!
저 위대한 개츠비 이미 세권이나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게다가 그 중 한권은 민음판 세계문학 전집의 75번 이구요. 저 또한번 강력 주장하건대, 민음판 세계문학전집 이미 백오십권!!!이 넘게 콜렉션 했단 말이여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ㅠ.ㅠ
괜히 샀어, 괜히 샀어, 사지 말걸, 문학동네 기다릴 걸, 괜히샀어, 괜히샀어~!!!

자, 이제 제 앞에 요술봉을 삐리링 하고 휘저어 주셔요. 제발!

blanca 2010-01-05 14:23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세 권이요?ㅋㅋㅋ 그럼 안사심이 맞을듯. 제가 저지하겠습니다. 아무리 김영하라지만 개츠비 네 권은 좀--;; 이 정도면 되나요? 개츠비 네 권 주르륵 꽂혀 있는 모습은 과히 바람직해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1-0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도 민음사 위대한 개츠비지만, 이런 뽐뿌질은 피해갈 수 없을거 같아요.
다독다필상 적립금 들어오면 님께 땡스투 할랍니다.ㅋㅋ
고딩때 그러니까 30년도 더 전에,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개츠비에 껌뻑 넘어갔던 1인~ 내사랑 개츠비!^^

blanca 2010-01-05 16: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대단하십니다. 연초부터 여기저기서 상금이^^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였어요?
우와~ 지금 막 상상하고 있어요^^
 

신입사원 시절 사수의 추천으로 김훈을 만났다. 나이는 세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그는 명철하고 기민해서 조직에 맞춤한 사람이었다. 냉정과 실리가 점령한 사회에서 상처받아
기우뚱하고 허우적대는 나에게 그는 창의력을 기르려면 책을, 특히나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김훈의 <칼의 노래>를 얘기했다. 촌스럽게도 아무런 저항 없이 당장 그 책을 샀고 꽤나 힘겹게 읽어 갔다.
솔직히 나는 그의 문장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수사도 거부한 채 문장 자체를 툭툭 휘갈겨 던져내 놓은
듯한 인상은 내내 불편했고, 현학의 과시마냥 쉽지 않았던 단어들의 조합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가 없어 숙제하듯 읽어냈고, 그 후 무슨 의무마냥 그의 신간을 사모았다.
간간이 그가 발표한 단편들은 의외로 아주 재미있었다. 그의 작품은 진중했지만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신선했던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었다. <남한산성>도 몰입하여 읽지는 못했다. <공무도하>에서 마침내
그의 그 건조한 문장은,그 몸으로 밀어내는 듯한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영들은,놀랍도록 처절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짧고 여전히 버석댔지만, 그 간결함과 그 응축의 미가 드디어 나를 향해
깨어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너무 많이 인용되어 거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그의 이런 문장. 

 인간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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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이름이 주는 그 아련하고 섬세한 느낌이 문장에서도 그대로 풀려 나온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나는
이 문장에 줄을 긋고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자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줄줄이 비엔나 같은 표현기법이 그만의 것이 아니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이미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몽환적인 느낌이 서려 있는 이 귀여운 문장도 엄마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에 열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의 어투를 닮게 된다. 이를테면, 을 자주 쓴다고 인터뷰했던 그의 기사를 읽고 다음날부터 나의 글들에는 부쩍 '이를테면'이 빈번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글을 쓰면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저도 모르게 문장을 닮아가기 때문이란다. 실제 리뷰에는 흔하게 작가들의 작품에서 등장했던 어휘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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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나는 뒤늦게 읽은 <외딴방>을 더 좋아한다. 초기작인데
오히려 후속작들보다 문장들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떨었다. 문학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생각했던 바로 그 대목이 언어로 명징하게 떠오르는 순간, 바로 이거였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그녀의 문장은 섬세하고 유려하고 시적이다. 한없이 보드라운 그 속살에는 문학 소녀의 여린 감수성이 향수처럼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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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우리 모국어가 담아낼 수 있는 그 수많은 사연들의 응축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어 낸 것 같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놀라웠다. 수많은 사연, 광경을 그려낸 문장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빛나는 시의 어구 같았다.  

햇빛이 교장 선생님의 안경을 가로지르고 그 뒤 흑판에 아아아아아아 떨며 금을 긋고 있었다.  

낫을 벼리듯이 치열하고 처절하게 다듬어 내어놓은 문장은 그 자체로 작가들의 투혼을 발산하기에 찬란하다.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허섭쓰레기들을 반드르르하게 치장만 해서 호사스럽게 내놓았을 때 그것에 대한 공명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자신의 삶을,혹은 다른 그 누구의 공감하는 삶을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것의 매개의 중추에 놓여 있는 언어를 화해시키고 어우러지게 하는 일은 영원히 끝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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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0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페이퍼에요.
다음블로거특종으로 밀어요.^^

blanca 2010-01-02 22:58   좋아요 0 | URL
'멋지다'는 그 얘기를 순오기님한테 들으니 기분이 차암 좋아요^.....^

승주나무 2010-01-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와 그녀의 문장들 만큼이나 블랑카 님의 문장 역시 멋집니다. 제가 장담하죠. 앞으로는 원전이 아니라 원전의 해석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대가 올 겁니다. 저자가 아니라 리뷰어들의 네트워크가 사회적 파장을 더 줄 수 있는 것처럼. (아직 그 수준은 아니지만)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해서 자기 방식으로 퍼다 나르는 아마추어 활동가들이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가지세요. "창의력을 기르려면 책을, 특히나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사수의 충고가 몹시 고마워 보입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충고를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창의력이라고 하는 것은 창의력만 빼서 볼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 경제, 문화, 철학, 일상 등등과의 관계 속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모두 던져줄 수 있는 소설작품은 말씀하신 리스트가 견디기는 어렵고 고전소설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창의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떠받칠 수 있는 힘은 인문사회 자연과학 서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초면에 말이 무척 길고 가르치려고 한 점은 죄송합니다. 댓글도 달아주시고 글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오버를 좀 하고 갑니다^^

blanca 2010-01-03 22:4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님의 댓글을 두 번 읽었습니다. 승주나무님의 얘기가 구구절절이 와닿네요. 안그래도 소설에 편중된 독서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곁가지로 인문사회서적들을 읽지만 그 이해의 폭이 너무 협소합니다. 정작 다 읽고나도 승주나무님처럼 누군가에게 풀어 나의 해석, 감상과 설명이 도통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부분은 토론이나 공부의 형태로 병행이 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리뷰어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님의 장담은 저를 가슴뛰게 하네요^^ 무언가를 창조하지 못하고 해석 비판만 하는 것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승주나무 2010-01-0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워서 몇 자 더 적고 갑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읽는 것과 쓰는 것을 함께 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오랫동안 이 부분을 고민했어요. 책을 읽고 나면 모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 페이지를 넘겨 보게 되고 그러면 생각을 또 놓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독서메모장 같은 것을 끼워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저의 경우는 세 가지로 구분하죠. 검은색 볼펜은 내가 요약한 부분, 파란색은 직접인용한 부분, 빨간색은 나의 그때그때의 감상. A4를 반으로 접으면 책에 대충 들어가더군요. 독서에 시간은 좀 걸리지만 메모의 힘은 글을 쓸 때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해 주고 나름대로 독서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엑셀에 DB화를 하고 있어요. 2. 알라딘에서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강좌를 열었지요. 저는 알라딘 마을의 분위기라면 저마다 자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와서 발제를 모으는 식으로 서재지기 토론회 같은 것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앞으로 공부해보자는 분위기가 더 만들어지면 실제 성사도 가능할 듯해요. 이렇게 댓글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피드백은 블랑카 님의 개운치 않은 속을 해소해주는 강력한 효험이 있답니다^^

blanca 2010-01-03 23:35   좋아요 0 | URL
실시간입니다.^^ 책갈피 대신 승주나무님의 방법을 따라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옛날 읽는다는 것에만 집중하던 시절 읽어치워낸 책들은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도 심지어 읽었는 지도 모르는 책들이 한가득입니다. 이런 독서는 근시와 교묘하게 잘난 척 하는 기술만 키워준 것 같아요. 알라딘 마을에 와서 부쩍 크는 느낌이 소중합니다. 승주나무님께 종종 질문도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