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소설전집 4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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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맏며느리는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해... (친한 언니가 했던 얘기)

아들이야,딸이야? 딸이라구? 시어머니 싫어하시지? 에이, 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야~ 
(고등학교 동창이. 지금 생각해도 얄미운 넘)

 

1980년, 치매의 시모를 임종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고도 말기암 친정엄마를 모셔오는 것에 결코 당당할 수 없었던,
 외도를 하고도 되레 당당한 남편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에 호된 질책을 받아야 했던 여인의 얘기가 

2010년 오늘에도 유의미한 것은 결국 위의 두 대화에 함축되어 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페미니즘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치마정장에 아이라인까지 그리고 나가 정작 험한 고객은 힘센 남자직원들한테 미루면서
나는 내가 비겁하게 여성성을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중요부서로 옮기고 아주 그럴듯한 일을 할 줄 알고 잔뜩 부푼 마음이
양념 시다바리 역할인 것을 느끼고 쪼그라들었을 때 역설적으로 나의 성정체성을 재확인했다.
나는 여자구나. 정말 여자였구나. 
그리고 피곤한 저항대신 안온한 순응을 꼬리로 도망쳤다. 

나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나인가, 남이 어떻게 느끼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나에
비위맞추기 위한 나인가?
  p.34 

산후조리원에서 아이를 낳고 땡땡 부은 얼굴을 하고도 여인들은 시어머니에게 느낀 섭섭함들을 풀어냈다.
산후의 부기는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들에 대한 그 충족되지 않는 미진한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헤쳐내지 않으면
빠지지 않을 것처럼 와글와글댔다. 

남의 어머니한테 효성이 우러난다는 건 거짓말이고요. 그렇지만 효도말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엔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축복스럽게도...... 남자들이 효도라는 걸로 억압하지만 않았어도 세상 고부간은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졌을걸.
p.183 

여성의 삶이 남성 앞에서 가지는 그 수많은 또다른 의미들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떻게 재점화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작품이다. 결국 여주인공은 적극적인 타개도 그렇다고 순응도 아닌 냉소로 마침표를 찍는다.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다시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들이 문득 마음을 산란하게도 하지만
그 질문들 그 자체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겹겹이 입은 거추장스러운 겉옷들을 들추어 내고 싶은
욕망을 건드릴만치 도발적이다. 당연한 답이 있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그 태생적 한계 속에서
문득 스산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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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에 뒤뚱거리며 집근처 도서관에 출근도장찍던 시절.
박완서의 책을 들고 근처 백화점 지하식당에서 배식을ㅋㅋ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 풀썩 자리를 튼 50대의 아주머니가 그 책에 안광을 철하고 있었다.
자못 민망해져 갈 찰나 아주머니는 "저, 책좀 볼까요? 제가 박완서를 좋아해서." 하며 나에게서 책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앞표지 뒷표지도 검사하고 책 속도 한 번 후루룩 넘겨보고 아쉬운 듯 다시 그 책을 돌려주었다. 

본론은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 배경음악 같은 웅성거림을 뚫고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식당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포효하면서 펼쳐졌다. 그 는 아이란 다 그런거지,라고 용인하고 보아넘겨 줄 수준을 훌쩍 넘는 것이었다. 모두가 너무 놀라서 그 뒹굴면서 파닥거리는 그 어린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할 만한 강도였다.
엄마는 그 아이를 통제하지 못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이를 대면할 시간을 얼마 안 남긴 나로서는
그 아이가 아주 유난히 버릇이 잘못 든 극단적인 경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내 배 속에서는 아주 예쁜 순둥이가 귀여운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있을 거라고 안위하며 이기적인 구경꾼을 자처했다.
문학적 감성을 잃지 않았다는 듯 책에 안광을 철하던 그녀의 안광은 그 아이와 젊은 엄마를 두루두루 성찰한 후
이윽고 나에게 다시 와 꽂혔다. 입술근육을 실룩거리며 "왜저래? 왜 저렇게 냅둬? 참나!"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은 타인의 곤란한 상황에 대한 철저한 변경의 냉랭함으로 이미 치환되어 있었다.
그녀의 강한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그 장면은 나의 기억 뒤켠으로 스며갔다. 

나의 아이가 그 여자아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의 외식후 식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주차된 차가 비집고 나올 틈을 기다려야 하는 이상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나의 아이는 갑자기 부츠를 신고 대기실 의자로 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나의 저지는 약효가 없었고 아이의 비명은 더욱 강도를 더해갔다.
울고 싶어질 찰나. 내 옆에서 잔잔하고 근엄한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흘러나왔다. 

의자에 올라가려면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지.
너 참 예쁘구나.(빈말이겠지만 ㅋㅋ)
당근과 채찍의 이 절묘한 조화라니. 그는 분명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분명하다.
 

그 두 마디에 딸아이는 갑자기 온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냥 멀찌거니 구경하지도, 그렇다고 배려없는 참견도 아닌 그의 따뜻한 개입은 뭉클했고
무언가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치유되지 않은 외상까지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때의 냉랭한 구경꾼이자 공모자였던 아줌마와 나를 기억하게 된다.
거창한 연대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비난받을 만한 연대를 한 셈이 됐지만
그 자리에서 침묵하고 그 곤란한 상황을 관망하고 심지어 약간 즐기기도 했을 우리들과
떼쓰는 아이를 저지해 보려 너그러운 개입을 시도한 그 남자의 차이가 주는 간극이 나를 가르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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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솔직히 <롤리타>를 아주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 참 이상한게 읽고 나서 계속 생각난다.
끈적끈적한 잔상 때문이 아니라 괜히 마음이 처연해진다고나 할까. 네이넘에 로리타를 키인하면
당장 19금 인증을 받아야 한다. 다시 롤리타라고 치면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도미니크 스웨인 주연의 영화인데 호평 일색이다.
책보다 낫다는 얘기까지 있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직비디오 같다나. 실제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만든 경력이 있단다. 

그런데 98년도 영화를 어둠의 경로로 찾아 보려 했던 눈물나는 시도는 좌절을 거듭했다.
일단 롤리타, 롤 리 타, 심지어 lolita, 롤리, 어둠의 망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것을 향해
암호를 해독하듯 이리저리 설레발을 쳐봤지만 야동 목록만 뜬다. 저작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나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린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서광을 만났다. 열심히 다운받았다. 

그런데 일이 너무 쉽다 생각해서 중간 정지하고 play 해보니 고색창연한 흑백화면이 뜨더라.
큐브릭 오빠가 60년대에 롤리타까지 손댄 지는 몰랐다.  

언덕 위 집에서 빵사먹으러 아기랑 내려가는 길은 고행이었다.
다시 내가 롤리타를 빌리러 그 전혀 친절하지 않은 대여점 아저씨한테 가서 롤리타를 발음해야 하나? 
나보코프 아저씨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이라 했던 그 롤리타가
그 나른한 아저씨 앞에서는 분명 젊은 애엄마가 이 추운데 애까지 데리고 나와 볼만치 화끈한 것으로 둔갑할 것이
분명한데.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은 더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당장 롤리타를 그 제레미 아이언스의 시원하면서도 아득한 눈빛이 연기하는 험버트를 보지 못하면
안될 것 같은 절박감에 아니면 사서라도 봐야 겠다고 결심한 와중에... 

롤리타는 요기에 있었다. 그것도 대여료만한 가격에.
문제는 오늘 주문해 버린 안나 카레니나에 추가 주문을 해 보려 했는데 이미 출고 작업중이어서 안된다는 것.
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알아버렸다. 내가 요즘 실제 세상에서 격리되니 그런 간접 경험들에 집착하게 되버렸다는 걸.
경험한 것은 적고 읽은 것은 많았다,는 보르헤스가 왜 그런지 알아 버렸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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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탄 지하철 안 붐비는 사람들을 등지고 펼쳐든 한겨레21에서 무척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표제는 악마라는 '종족'은 태어나는가
기사 링크는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380.html 
희대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를 다루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언급되어 있었다. 

전직 경찰이었던 앤 룰이라는 여성이 봉사활동 단체에서 테드 번디라는 젊은 심리학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암으로 시한부선고를 받은 남편과의 이혼을 고민하고 있었고
결단을 내리도록 친근하게 조언해 준 그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이 당시부터 번디는 젊은 여성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첫사랑의 실패 이후 시작된 이 연쇄살인은
결국 번디의 사형으로 막을 내리지만 경찰도 대체 그가 몇 명의 여성을 살해했는지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하고
3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니 그 극악무도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종족. 언제든 우리의 평화를 깨고 우리의 당연한 가치들을 파괴할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가 적나라하게 해부된 작품. 노벨상 수삭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그렇게 왔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소설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두 남녀가 빅토리아풍 대저책에 건설한 그들만의 대가족이 어떻게 그들의 꿈을 기만할 수 있는지 낱낱이 지적해 준다. 

다복한 가정의 틀처럼 그들이 계획한 다산은 폭력적이고 일상에 적응이 불가능한 다섯째 아니 벤이 태어남으로써 결렬된다. 다섯째 아이는 잉태부터가 불길했고 물고기의 유영처럼 아름답고 간지러운 그 태동이 끔찍하게 여겨져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유별났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 집단보호시설에 보내졌다 껍질뿐인 모성애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각종 사고에 상상으로 연루되는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해리엇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어쩌면 그 외계의 아이보다 더 타락해 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자기 구역 안에 그 애가 목을 디밀까 전전 긍긍하며 위장된 무심함 밑에 도피한다.  

변경의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는 도리스 레싱은 이 부적합한 가족 구성원인 다섯째 아이보다는 그 나머지 가족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집단적 위악, 때로는 위선에서 고립되는 나머지 한 명에 대한 비참함에 대한 절제된 연민이 돋보인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의 본질을 보는 일을 거부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를 가장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성선론을 믿고 싶어하는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대목이다.  

 

가족주의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박완서는 구순하게 인간 간의   정서를 풀어나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만큼 인간 본성에 대한 그 교묘한 위선과 위장술, 자기 합리화의 부패를 여실하게 드러낸 작가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대체로 굉장히 리얼하게 사악하고 위선적이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절망스럽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고 그것을 합리화해나가는 그 여정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결말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은 거두지 않고 있다. 도리스 레싱과 닮은 부분이다. 박완서가 그 위선과 위악에서 소외된 이를 가족과 여성주의 안에서 가두는 한계를 보였다면, 도리스 레싱은 사회의 전체적 틀에서 고립된 이탈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보 전진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지나치게 건조하고 생략된 터치로 독자를 좀 망연하게 한다면, 박완서는 그 세심하고 성찰어린 필력으로 독자들이 철저하게 추체험을 하게 한다는 데에 또 우위에 있다. 

 

가족의 틀 안에서마저 소외되는 이가 있다. 상징적 장치라 해도 결국 집단적 사고의 구획 밖으로 내처지는 이탈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물론, 도덕의 절대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댈 때 분명 용서받지 못할 사악한 자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의 탈선에도 분명 매듭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그들의 본질을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안온한 일상에 파문을 던질 지도 모를 그 불가항력이 두려워서. 연쇄 살인범 번디도 사형집행 전날 엄마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 안에는 엄마가 기억하는 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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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0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20여년 전 드라마로 나왔지요.남자 주인공은 임성민 여자주인공에 나영희,김도연이 맡았습니다.도리스 레싱과 비교하시니 더 읽어보고 싶군요.<그해 겨울~>은 읽은지가 꽤 되었어요.
<휘청거리는 오후> 초판을 헌책방에서 본적이 있어요.세로줄에 굉장히 두툼하더군요.결국 구입은 못했어요.요즘 박완서 전집에는 나와있더군요.

blanca 2010-01-09 15:1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어렸을 때 김도연이 나오는 드라마를 엄마랑 같이 봤던 기억이 나서... 남자 주인공이 임성민이었군요 ㅋㅋㅋ 나영희가 언니였겠죠? 읽어 보니까 어렸을 때 본 드라마 기억은 어떻게 하나도 안나더라구요.도리스 레싱은 고작 이 책 한 권 읽었는데 해설만 읽고 후덜덜 했습니다. 공상과학소설부터 완전 손안댄 분야가 없더라구요. 완전 파파할머니인데 지금도 블로그 운영을 혼자 한다고 하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0-01-0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레싱의 노익장은 대단하죠.
70년대 초의 박완서 초기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는 읽어보셨나요? 자료에 보니 영화로도 나왔고 최불암이 나왔네요.

blanca 2010-01-09 23:01   좋아요 0 | URL
한창 읽기만 하고 정리를 전혀 안하던 시절 몰아 읽었던 작가가 박완서에요. 그래서 제가 대체 어떤 작품을 읽고 어떤 작품을 안읽었나도 모를 정도랍니다. 그 시절의 독서는 하나의 공백 같네요. 영화화된 작품이 있군요. 최불암 ㅋㅋ <휘청거리는 오후>를 한 번 찾아봐야 겠어요. 노자님은 모르는 분야가 없군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박완서 소설전집 9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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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재미와 인간의 비열한 위선에 대한 통찰이 어우러진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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