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뒤통수가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수록 되레 뒤를 더 돌아보게 된다. 노년이 되면 추억으로
호흡할 지경까지 이른다. 가장 나다운 모습, 혹은 가장 나답지 않은 모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과거를 들추다 보면
아슴푸레한 유년기 추억이 비죽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가끔 울게 된다. 너무 그리워서. 너무 아쉬워서.
성장소설은 일종의 대리체험을 통한 치유다. 우리는 되감기할 수 없는 어린 나의 편린들을 작품 속에서 발견하고
나의 기억을 교차시킨다. 그 접점에서 우리는 세상을 마음대로 오해하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었던 그 특권 속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오해하고 왜곡해도 되는 권한은 이제 영영 주어질 일이 없으니 말이다.
성장 소설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암팡지고 성에 대해서도 비교적 일찍 눈뜨고 어른들 세계에의 개입도 빈번하다.
유순하고 아이다운 캐릭터는 그닥 인기가 없다. 어쩌면 아이답다,는 것은 어른들이 설정해 놓은 역겨운 특일지도 모른다.
그 틀 속에서 빠져나온 악동들이 춤추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
일단 이 악동들이 그려내는 서사들은 무조건 재미는 기본적으로 보장한다. 지루할 틈이 없다.
소설에 거부감이 있거나 책읽는 것에 흥미를 못느끼는 사람들이 성장소설로 시작하는 것이 괜찮은 이유다.
적어도 잘된 성장소설을 읽다 던져버리는 일은 그리 자주 마주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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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모든 성장소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 첫 장면에서 진하게 화장을 하고 외출준비를 하는 엄마 옆에서 중학생 오빠가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로 화내듯 외쳐대던 "홧 아 유 두잉?"은 전후세대들의 아픈 곳을 찌르르하게 한다. 전쟁중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장 노릇은 오빠의 동생 매질과 영어 공부에의 집착, 엄마의 밤외출로 이어진다. 노랑눈이(나)는 밤에 오줌을 싸고 엄마 밥을, 엄마 돈을 훔쳐내며 위로를 받는다.
재미도 재미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쓰인 그 수많은 아름다운 어휘들과 묘사들이 엮어내는 직조물은 보는 것만으로 그저 눈부시다. 한 번 읽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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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은 두툼하지만 정말 빨리 읽을 수 있다. 중견 작가인 은희경이 초짜 신인일때 내어놓은 이 작품은 문학동네소설상 심사위원들도 너무 재미있다고 탄복했다고 할 정도였다.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추었다고 주장하는 여자애의 당돌한 선언 속에서 펼쳐지는 그 이야기의 향연들에 빠져들다 보면 갑자기 시간의 축지법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지영의 자전적 얘기인 <봉순이 언니> 식모 봉순이 언니와 다섯 살 짱아가 엮어나가는 6,70년대의 그 슬픈 여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관찰은 가슴을 아릿하게 한다.
무조건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었다. 그 때 리뷰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이 작품은 정말 우연하게 왔다. 그리고 나는 이공계 석사까지 마친 심윤경 작가에게 진심으로 경탄을 보내게 됐다.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이 난독증을 앓는 동구라는 사내아이가 욕쟁이 친할머니와 할머니한테 핍박받는 (동구의 시선) 엄마, 방관자인 아빠, 그런 동구를 품어주는 박선생과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너무 익살스럽고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사랑하면서 질투했던 어린 여동생이 죽고 마는 대목(스포일러)에서는 어린 시절들의 방비벽이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아프다. 나도 하나의 기억을 얹으며 잠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심윤경 작가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중 가장 많이 팔렸다는 바로 그 책. 정말 못생긴 여자들은 세상살기 힘들다고 너무 불쌍하다고 읊조리는 열 여섯살의 콜필드. 가수 소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큰 제스추어로 한참을 마치 곁에 있는 친구처럼 얘기했던 그에 대한 얘기를 읽는 데 너무 늦은 순간은 없다.
사람들이 하도 입에 붙이고 다녀 진부해 보였던 콜필드가 정작 되고 싶었던 것은 절벽 위의 아이들을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의 동심을 지켜주는 파수꾼의 역할이었다.
그 파수꾼은 영원히 어린아이로 성장을 멈추고 싶어했던 피터팬의 이야기만큼 허황되지만 우리가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의 역할이다. 우리는 때로는 지켜주고 싶고 때로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싶다. 그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시간들을.
처음 에밀 아자르가 로맹가리라고 했을 때 이름값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문학의 무슨 브랜드 마냥 로맹가리 타령이 이어졌을 때 그 타령조만으로도 충분히 지루한 책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성장소설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창녀의 아들. 아랍아이 모모. 그리고 그 자신 창녀였다 창녀의 아이들을 거두게 된 로자 아줌마. 성장소설의 평범한 도식인 되바라진 아이와 물렁한 어른의 구도가 어떻게 성취의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장 하나 하나에 덧칠한 노작가의 능수능란한 익살과 삶에 대한 비관적이지만 정감어린 통찰은 왜 로맹가리 타령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지를 보여준다.
슬픈 결말이지만 모모가 결국 어딘가로 도약하며 사랑을 삶의 키워드로 추려 내었을 때 우리는 그 결말에 감사하게 된다. 어느 누군가가 인터넷을 배회하며 꼭 이것같은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에 또 어느 익명의 누군가가 로맹가리에게서 이것 같은 책은 더이상 찾을 수 없으며 차라리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읽어보라는 말을 덧붙인 대목에서 나는 우리 세 사람이 한데 만났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