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모성 동녘선서 102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 동녘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극심한 산고 속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나는 안도했다. 진통이 더이상 내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의 마침표를 함께 챙겨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엔딩.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한쪽 눈을 가까스로 뜨고 나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그 무력한, 그 속수무책의 생명체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진통의 와중에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나의 아기와 마주하며 지르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여기까지였나 보다. 딸내미가 돌까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안기지 않고
두 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깨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저력을 과시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모성애가 얼마나 허위적인 개념이고 얼마나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비교적 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성격이 얼마나 치사하고 다혈질인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 스스로가 모성애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압도되어 상대의 고통을
귀담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육아서적들. 한 권을 끝내는 그 동안 만큼은 참고 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육아서적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 삼사 년 간 어머니의 역할이 한 인간의 전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영유아기의 어머니는
자신의 그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지하고 그저 무조건 인내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니 나는 또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의 수면습관을 잡아 보겠다고 일지까지 기록해 가며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이 된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그 수많은 육아서들의 맹점이 기실은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
을. 유아기 때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주양육자의 희생의 강도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더 증대된다.
아이를 전업으로 돌보든,  조부모에게나 기관에 맡기든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아킬레스건은 다 있기 마련이다. 조기교육이
각광받고 유아기 때의 정서적 지적 자극에 대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음지는 어쩌면 결정론적인 사고를 조장하여 초중등 자녀를 둔 부모의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유아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파리 이공과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프랑스 전법무장관의 아내로 세 아이를 둔 어머니다. 그녀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상보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 책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에 대한 모성애의 강요가 어떤 허점과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프랑스의 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조망한다. 중상류증의 다른집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던 하층민 출신 유모들에 대한 얘기는 사교계의 장식품 역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그 유모들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은 상류층 부인들의 얘기와 맞물려 비감어리다. 특히나 에밀의 <루소>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여성성의 올가미를 만들고 집 안에 여성들을 유폐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어제는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박수받고 오늘은 <만들어진 모성>에서 비난받는 프로이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발자크의 문학작품들, 각종 사회통계 자료들을 적시에 인용하여 시대순으로 모성애에 대한 관념 및 풍조를 고찰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다만 팔십년 대에 초판이 나온 만큼 현 상황에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 부성애를 촉구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뒷심이 부족한 듯한 결론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져본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에 전적으로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다만 모성애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감정일 수 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양육의 책무와 결과론적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맡기지는 말아달라는 것. 또 나쁜 엄마, 혹은 무책임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재단하며 자신의 욕망을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것. 이런 전언들은 결국 나에게 가서 꽂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체오페르 2010-02-2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며 리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니의 위대함과 당신에 대한 미안함,고마움을 느낍니다.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 저를 더 감동시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니 완전 위로됩니다.^^
 

M의류몰. 길쯤한 팔다리에 마론인형처럼 요요하고 무심한 얼굴의 모델이 베이지색 가디건에 심하게 타이트한 스키니진을 입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고 있다.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설명은 하나의 첨언 같다. blanca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펑키하고 빈티지한 스키니진을 입고 만날 사람과 갈 장소가 있는지를. 단조로운 일상에서 사이다캔의 뚜껑을 따면 뿜어져 나올
탄산의 그 톡 쏘는 상큼한 첫맛을 그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스키니진은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이윽고 기다린다. 

무 엇 을. 택배 아저씨를.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특별한 설레임으로 채워진다. 그 스키니진은 blanca의 그 날이 그 날 같은
빈곤한 서사의 삶에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인터넷 쇼핑에서 얻은 주된 기쁨은 서사의 환각이다. 그 스키니진을 입는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통째로 개조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이야기로의
전진에 대한 기대로 그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생활들에 대한 선망을 포착해 낸 의류몰의 사진작가에게 포섭되고 만다. 
 

다음에는 어쩌면 그녀는 드레시한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 마론 인형 같은 모델에 또 굴복해 장바구니를 두둑하게 채울지도
모를 일이다. T.P.O에 맞는 의복을 입으라는 그 주문은 어쩌면 선후가 전복된 음모일 수도 있다. 먼저 옷을 소비하고
그 옷을 입고 갈 적소를 만들어 내라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젊은 여자들의 적소를 찾아내지
못한 그 옷들에는 언젠가는 그 거죽만으로 주인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그 헛된 망상 속에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리며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꿉꿉양은 매일 퇴근후 친구들 미니홈피들을 순례하며 그녀들이 업데이트한 사진들 밑에 의례적인 경탄을 두서없이 주워섬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데 로그아웃후 느끼는 그녀의 비애감과 새로운 욕망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남편이 사준 물품들을 하루 걸러 전시하는 것이 낙인 친구 나공주가 자랑했던 아이폰은 원래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난 김에 내일 점심시간에 질러야 겠다고 결심하고 나공주의 그닥 이쁘지 않은 사내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는 것을 보니 결혼 얘기를 무슨 금기어의 주변부에 있는 것 마냥 부담스러워하는 뚝뚝군에게 하루바삐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여기에 오니 갑자기 신경질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나공주는 나보다 얼굴도 못나고 공부도 뒤졌는데 치기로 지원한 과가 하필 미달이었던 바람에 쉽게 합격하고 난 그 다음에는 인생이 무슨 반전 드라마를 보여주려고 작심한 마냥 착착 풀려댄다. 분명 친구인 것은 맞는데 잘 되면 한마디로 심하게 배가 아프다. 어찌 됐든 꿉꿉양은 내일 아이폰을 사고 저녁에 뚝뚝군을
만나 신경을 긁어대는 것으로 지금의 불쾌감을 좀 희석시켜야 겠다고 결심하고 이런저런 상념의 아퀴를 짓는다.  

자, 이 모든 욕망들. 시기들. 이건 온전히 꿉꿉양의 것일까?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이 각자의 욕망의 기준을 따라 혹은 그것에 휩쓸려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어떻게 뒤틀려 가는지를 아버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기실 욕망의 스펙트럼은 아버지의 그것에 의해서도 뒤틀려 굴절된다.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으로 덧씌어진 미완의 동화를 아버지는 딸들을 통하여 완성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맞이하는 충격적인 결말이 남기는 그 지독한 공허를 채워주는 것은 뜻밖에도 해설이다. 말줄임표의 소설에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어주는 그 명쾌한 해설 안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구원처럼 날아와 앉는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인간 욕망은 많은 경우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는 우리의 욕망이 이처럼 모방된 가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욕망에 의해 구축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휘청거리는 오후> 정호웅의 해설 중  

철저하게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매달렸던 욕망마저 나만의 것이 아니라니.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서 복제해 온 가짜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시달리고 좌절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소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소통의 장과 내러티브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그 욕망의 발로에 이르기까지 그 허술한 착각과 환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나만의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찾아내었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도리질까지 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슬픈 마리오네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자명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진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2-16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2-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랑 상관없이, 요즘 TV나 잡지, 지하철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나랑 인종이 다른가 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다리는 그리 길고, 머리는 조그마할 수가 있는거죠? 공중 화장실 거울 너머로 내 머리 위에 조그마한 얼굴이 하나 쏙 보이면, 진짜 승질납니다... ㅎㅎ

blanca 2010-02-17 22: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보니까요. 요즘 태어나는 아기들부터가 두상이 작더라구요. 제 딸은 해당사항없지만-..-

마녀고양이 2010-02-17 22:29   좋아요 0 | URL
제 딸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요즘은 저보다 얼굴이 더 커염.. ㅠㅠ (울 딸이 이 댓글 볼라.. 그럼 저 한대 맞아여!)

blanca 2010-02-18 13:24   좋아요 0 | URL
ㅋㅋ 마녀 고양이님 따님은 몇 살이에요? 이 댓글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귀여워요^^ 저는 커가면서 작아지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0-02-18 14:33   좋아요 0 | URL
저희딸 11살이여,, 알거 다 아는 무서운 딸네미져! ^^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청거리는 오후>를 영화화했을 때 아버지 역의 최불암은 당시 마흔도 안 되었어요.정말 노인역 전문배우.드라마 전원일기도 사십대 초반에 시작했는데...

blanca 2010-02-17 18:17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어떻게 그런 영화랑 드라마를 다 기억하세요? 우와. 그러고 보니 박완서 작품은 대부분 영상화되었군요. 최불암 ㅋㅋㅋ 할아버지로 태어나신 분 같아요. 그래서 장수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2   좋아요 0 | URL
제가 직접 볼 수는 없겠죠.연령상...저는 팝송이나 가요,영화 뒷이야기 같은 걸 좋아해서 그런 걸 관심있게 기억하는 편이죠.그리고 인터넷에서 신기한 정보를 많이 구하지요.또 70년대 80년대 시사잡지나 주간지도 집에 있구요.

아시마 2010-02-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페이퍼 진짜 최고예요.

blanca 2010-02-18 13:23   좋아요 0 | URL
이런 칭찬에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시마님, 저 박완서의 책 찔끔찔끔 사모으다 보니 결국 세계사에서 할인받아 전집 살걸,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드네요. 뒤늦게 완전 중독되서 읽었던 것도 또 읽고. 이제 여든이 되셨다니 새로운 장편은 기대할 수 없는 건지. 박완서샘 직접 꼭 뵙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18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보는 페이퍼, 휘청거리는 오후는 신문에 연재되는 걸 봤었죠.
드라마는 두어번 보고 안 봤던가 못 봤던가 그랬고요.
박완서샘은 평사리에 토지의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토지문학상 시상식에 박경리샘과 같이 오셔서 뵜어요.
정답게 사진도 찍었고요~ 자랑할 거 없으니 이거라도 자랑해야지.ㅋㅋ

2010-02-18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2-18 23:0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박완서샘이랑 사진까지 찍으셨다니요. 흑흑. 부럽습니다. 그리고 자랑할 거 많으시잖아요~ 삼남매, 그리고 문학적 조예, 구순한 이웃들, 게다가 아이들까지 가르치고 계시고. 쓰다 보니 한층 더 부러워집니다.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압도되었다.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면도날>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읽은 <달과 6펜스> 얘기다.
고갱을 모델로 한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 웅혼한 작품성에 완전히 압도되어 울었다.
눈이 멀고 문둥병까지 걸려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 사내의 그 무모한 열정과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치기가 속물 근성의
그 연약한 거죽을 통째로 벗겨 버린 듯한 착각. 이 한 권의 책이 서머싯 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절대적인
기반이 되었다.  

<면도날>을 읽고 나는 알라딘의 리뷰어들에게 감사했다. 칭찬일색의 그 리뷰들이 이 책을 챙기게 했고 오백여 페이지의
그 책을 다 읽고 난 새벽 한 시경 나는 예전 그 때와는 또다른 감동으로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서머싯 몸은
흔히 대중적인 작가로 불리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소설은 여하튼 재밌기 때문이다.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며
일으키는 그 가벼운 바람은 진중한 작품성도 왠지 가벼운 것으로 치환해 버린다. 재밌기 때문에 되레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사려깊은 성찰은 천덕꾸러기처럼 돼 버렸던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나도 진부한 칭찬으로
이 책의 지름신을 강림케 하련다.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설이니 얼른 읽으라고.  

1차 세계대전에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귀환한 래리 대럴이라는 젊은이가 삶과 신의
의미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여정을 중심으로 사교계의 노회한 신사이자 대단한 속물이지만
비열한 사람은 아니라고 몸이 변호한 엘리엇 템플턴, 그의 조카이자 래리의 약혼녀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물신주의에 경도되어 래리를 떠나 안온하고 부유한 결혼생활을 택하는 이사벨 등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작중 화자가 대놓고 서머싯 몸 자신임을 밝히고 등장인물들을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다둑이고 때로는 비난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논픽션인 것같은 효과와 더불어 서머싯 몸 자신의 이야기들도 다소 들어볼 수 있는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그는 못생긴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절대 익숙해지지 않으며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완성해 놓은 책을 독자는 이 세상이 하나도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아무 데나 놓아둔다는 생각에
몹시 우울해진단다.

주인공 래리 대럴이 사랑과 세속적인 부를 모두 놓아두고 떠나는 그 구도의 여정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대척점에 서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엘리엇의 얘기가 그것을 중화해 준다. 엘리엇은 지극히 리얼하고
지극히 유쾌하고 지극히 속물이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관심을 계속 기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 사람이다.
미국인으로서 프랑스의 상류층에 입성한 그는 파티를 숨구멍처럼 여기며 사교계를 그의 삶전체의 무대로 간주한다.
그런 그가 죽어가면서까지 공작 부인이 여는 가장 무도회에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에 격분하다 몸이 재치있게 공작부인의
비서를 사주해 만들어낸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무언가에
끝까지 전체를 걸 수 있는 그 순진하고 정열적인 무모함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언은 정말 귀엽지 않은가?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이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p.397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중략>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p.459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차 차창으로 뒷걸음치던 풍경마냥 자꾸만 스러져 가는 그 수많은 추억들의 덧없음과 비례하는
생생하고 절절한 기억들의 무게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우두망찰하는 요즈음 나에게 래리 대럴은 얘기한다.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고. 구도의 여정을 밤을 새워 들려주고 난 래리는 작중 화자이자 작가 서머싯 몸과 함께 아침에 갓 배달된 바삭바삭한 크루아상과 카페오레로 아침 식사를 한다. 래리의 얘기와
몸의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추임새가 엮어낸 하룻밤을 마감하는 그 아침의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그 아늑하고
그리운 냄새들이 나의 코앞에 와서 당도했다. 나도 그들과 밤을 지새운 듯한 피곤함과 또 래리의 구도의 여정 끝에
함께 당도한 듯한 그 아름다운 지향의 웅장한 아름다움(착각일지라도)이 뒤섞여 그 밤 나는 잠을 설쳤다.  

그리고 구정 전날 제사 일손을 거들면서 어머님의 주름 속에 알알이 박힌 그 수많은 추억들과 고단함에 진정한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아주 짧은 시간만 유효한 사이비 약발일지라도 나는 몸에게 숭배를, 감사를 바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고장에 가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정보국의 무리한 비밀 첩보 임무를 맡았다는 그런 사람에게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0-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몸 작품 중 못 읽은 책이네요... 서머샛 몸 작품 무척 좋아하는데. 캡쳐하신 글 와닸네요. 찰나와 영원. 영원한 기쁨은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찰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blanca 2010-02-16 14:0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명절 잘 치르셨는지요? 이 책은 피곤한 와중에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무엇보다 몸 책은 재미있으니까요. 분량이 좀 있어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금방금방 넘어가더라구요. 다음에는 '인생의 베일'을 읽어볼까 하고 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모옴의 중단편집도 재미있으니 하나하나 독파해 보세요.그런데 계속 읽다 보면 모파상의 인물묘사를 연상케 하지요.모옴도 모파상의 작품을 좋아했으니까요.결국은 읽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어요.그런 걸 극복하지 않으면 독서가 독이 될 수도 있죠.

blanca 2010-02-17 18:19   좋아요 0 | URL
모옴의 중단편집이 재미있군요. 그런데 모옴은 어떤 이상적인 인간을 꼭 대척점에 놓아 두는 것 같아요. 이게 조금 작위적이기는 한데. 맞아요. 박완서. 모파상. 모옴. 인간 속의 잔인하고 절망적인 속성을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츱츱해지는 단점이 있더라구요. 노자님의 고언을 들어야 이들의 독서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0   좋아요 0 | URL
하긴 박완서도 우리 마음 속 누구나가 갖고 있는 속물근성을 잘 끄집어 내지요.특히 모옴의 성격묘사를 보면 아주 악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착한 사람이 남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당하는 이야기를 통쾌하다는 듯이 그리거든요.달과 6펜스에도 그런 인물이 나오죠.마누라를 뺏기는...
 
만들어진 우울증 -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레인 지음, 이문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생리 하루 전 우울감은 바닥을 쳤다. 체호프의 <슬픔>에서 그 단어만을 우울로 치환하면 나의 얘기였다. 나의 가슴을 찢고 그 우울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온 세상이 잠길 정도였다. 우울은 분노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얘기를 체현하듯 사람마다 분노를 자아내는 그 자질구레한 역겨운 구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무언가가 흐르면서 갑자기 그 우울감도 바닥에 가라앉고 다시 예의 그 단순한 나의 감수성이 되살아나 즐거워할 구실을 찾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월경전불쾌증후군 아니, 이 책에서는 불쾌장애라고 시니컬하게 명명되어지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울감의  벼리는 바로 무서운 고독감이다. 소통을 갈구하는, 아니 소통을 갈구하라고 내모는 사회에서 다 웃고 있는데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은 그 소외감은 치명적인 고통스러움을 동반한다.  

<만들어진 우울증>수줍음 같은 일상적 감정을 심리적 갈등이나 사회적 긴장이 아니라 뇌의 화학적 불균형이나 신경전달물질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약물치료라는 단순하고 근시안적 해결책에 집중하는 미국의 정신의학계와 또 그것과 필연적으로 유착되어 있는 다국적제약회사들의 상업적 흑심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개성에 대한 억압이 사회 전체의 규범 강요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짚어주고 있다.  

특히 저자 크리스토퍼 레인은 미정신의학협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하 DSM) 개정작업을 주도한 로버트 L.스피처 박사가 환자들이 호소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적응행동을 정신질환으로 범주화하는 데에 골몰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DSM의 진단 매뉴얼에는 인터넷 중독, 강박적 구매장애, 폭식 장애, 월경전불쾌장애를 추가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이 매뉴얼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과반수가 정신장애를 앓고 있어 시급히 SSRI류의 약물을 투여받아야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사실 이 책은 미국의 약물만능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실정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기분의 불균형에 대한 시급한 치유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의 문화는 우울하다,거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는 감정의 발로 자체에만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감정이 휘몰아치는 불균형 상태도 병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부정적 기질이나 불운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도 정신의학계 의 미국의 진단매뉴얼 도입과 다국적제약회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등으로 가파르게 그들의 약물신화에 경도되어 가고 있다. 비근한 예로 남발되는 ADHD 진단과 그에 따른 빈번한 약물투여만 봐도 그렇다. 이제 우리는 공공장소를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내아이들을 활발한 기질이나 훈육의 부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아픈 아이로 보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전적으로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든 과하게 닮고 치우치는 경향성은 위험을 담보하고 있다.  

약을 팔기 전에 병을 팔아라! 다국적 회사의 항우울제 마케팅의 그 교묘하고 은밀한 공격성은 경악스러웠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우울감을 장애로, 질환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나면 그 진단 사이클은 자체 순환하게 되어 있다는 얘기.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울증 자가진단 매뉴얼을 쉽게 접하고 거기에 체크해 가며 스스로를 우울증 환자로 자가진단하는 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광고는 마치 공익 광고같다. 수줍어하는 아가씨와 직장 업무에서 좌절하는 젊은 남자의 좌절감을 쓰다듬어주고 마법의 신효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가만히 이 광고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은 일상적 감정이 아니라 장애라고 속삭이고 스미스클라인의 팍실이라는 약물을 투여받을 것을 교묘하게 설득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미에 조너선 프란젠의 <교정>의 인용은 웅변적이다. 

"정신 '건강'이란 소비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야. ....... 돈을 소비하려는 욕망의 부재는 값비싼 약물치료가 요구되는 질환의 한 증상이라고." -p.289 

저자가 현 미국의 약물투여가 성형 정신약리학으로까지 변질되었고 이 약물들이 인격조작이라는 극단의 환상까지 키워가고 있다고 성토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구성원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적 기질을 용인해 낼 수 없는 국가의 전체주의적 강요와도 맞물려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 책은 단순히 프로이트와 이별한 미국의 정신의학계의 기계적인 정신질환 분류표 작성과 제약회사의 상업적 흑심만을 비판하는 그렇고 그런 대안없는 욕쟁이 할멈이 아니다. 환자 개개인의 고통의 그 심층적인 심연에 대한 이해 대신 쉽고 간편하게 매뉴얼에 그 환자의 증상을 귀속시킴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치료 풍토와 사회적 규범의 틀 안에서 그것의 내재화에 순응하지 않는 수많은 외톨이들에 대한 강박적 따돌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으로 나아간 그 지점에서 저자의 인간애의 지평은 확대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몸이 아픈 사람과 같이 배려받고 치료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극렬히 동의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특이한 기질을 가졌거나 조직에 융화될 수 없는 몇 몇의 특별한 사람을 내치는 데에 둔감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개인들이 느끼면 사회는 휘청거린다,는 올더스 헉슬리 소설 속 얘기처럼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2-1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n't. I just can't.

제가 저 광고와 저 구절을 얼마나 연속적으로 많이 떠올렸는지! 그런데 이런 것이었는지!

blanca 2010-02-12 09:47   좋아요 0 | URL
Jude님 저 광고 어디서 보셨어요? 저는 처음으로 봤는데 그게 항우울제 광고라는게 참 충격적이더라구요. 알고 계셨다면 더 놀라셨을 것 같아요. 광고 자체만 놓고 보면 더없이 뭐랄까 상업광고가 아니라 공익광고 같은 느낌이라서요.

마녀고양이 2010-02-12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샀는데, 아직 못 읽었어여..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때, 우리나라는 심리 상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져. 외국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더 약으로 해결을 보려해여,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 약들은 호르몬제잖아여? 그래서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빨리 읽어야지

blanca 2010-02-12 16:5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댓글에 쓰려다가 상담대학교 합격 정말 축하드려요! 약물 치료가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또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사려깊게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이라 뭐라고 말하기는 참 망설여지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Kitty 2010-02-1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단순한 O형 인간이지만 이 분야에는 좀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뺐다하고 있는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blanca 2010-02-17 12:2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대부분이 O형인데. 저는 악명높은 ㅋㅋㅋ B형이랍니다. 키티님, 이 책 저도 오래 망설이다 하이드님 서재에서 보고 자꾸 눈에 밟혀 사고 말았답니다. 한 권쯤 두고 읽어도 괜찮을 만큼 내용이 좋더라구요.
 

제기랄, 그 후에도 그가 사후에 누리는 고가의 그림값과 정당한 예술적 평가와 존경에 접할 때마다 그 소리가 나왔다. 
                                                                                                         -『우리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중 

박수근이다. 박완서가 『나목』이 여성월간지 소설 모집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 것도 결국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가난한 화가 박수근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수룩하게 덩치만 큰 화가는 미군들이나 그들의 연인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단돈 4달러를 받아 생활했다. 그의 <빨래터>가 최근 사십오억 이천만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감탄과 더불어 비감어린 씁쓸함을 꼬리처럼 달게 된다. 그가 생전 반도호텔 화랑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그림 팔렸어요?"를 외쳐댔던 것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호텔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구실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얘기를 고등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고 대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 순간 박수근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예술가의 신산한 삶 전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참 먹먹했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애잔한 슬픔을 느낀다. 죽고 나서 수많은 위작 논란에 시달릴 만큼 또 미술품 경매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는 뉴스의 중심에 설 만큼 경외받고 있는 그의 현재가 과연 그의 소외당한 삶 전체를 위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나도 박완서의 '제기랄'에 동조할 수밖에.  

 박수근 <빨래터>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전혀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중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언제나 그것을 완전하게 화폭에 담아내기를 소망했던 사내. 결국 그 별로 직접 가 닿고 싶었던 그. 삶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죽음까지 내맡겼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바로 이 대목.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테오는 시대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필요없다고 오기어린 대거리를 내던지듯 답장한다. 반 고흐는 미술계에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자리잡은 화가다. 우리는 반 고흐를 모르거나 그의 그림을 부정하는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에게 반 고흐는 예술에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불편한 강박마저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생전에는 경제적 고충에 너무 치여 물감과 종이마저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비참한 나날들을 보냈음은 주지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생계까지 해결해 주었던 테오마저 그의 사후의 명성과 보상을 누리지 못하고 형을 따라 몇 개월 안 되어 죽어버린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그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그를 탄핵한 글과 재판기록만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을 우려한 대목은 다산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이 가지는 미래적 의미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생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자찬묘지명 중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반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들의 예술적 학문적 성과의 탑은 드디어 우리를 굽어 내려다볼만치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탑을 삶의 고충들과 악전고투하여 만들어 낸 당사자들은 비참하게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이제서야 환호작약하는 우리들. 화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건넨다는 고흐의 자기암시적인 얘기도 언제나 한 발 늦는 우리의 심미안의 그 허술함을 감싸주지는 못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붓을 잡을 수 있게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온 몸으로 지지해 주고 온 맘으로 후원해 줄 수 있을 터인데.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오고 후회는 언제나 절절하기 마련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0-02-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타까운 일이죠. 시대가 이해해주지 않았던 이들이 어찌 고흐와 다산 뿐이겠습니까마는...
40세의 박완서를 등단시킨 '나목'을 읽는 내내 박수근 화백이 가슴 아팠지요.

blanca 2010-02-08 22:31   좋아요 0 | URL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순오기님 말씀처럼 사후에야 겨우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현재진행형일거구요. 그런데 유독 저 세 사람은 더 짠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일 것 같아요^^;;

잘잘라 2010-02-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얘긴지는 몰라도..
제가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서 늘 하는 말,
"와우~ 정말 대단하다. 그 시대에 어떻게 저런 노래를!!!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흠.. 그런데먈야. 난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에,
김추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김추자는 그냥 가수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
님의 글을 읽으니 또 김추자 노래를 듣고싶네요.

blanca 2010-02-09 13:59   좋아요 0 | URL
바닷가식당님 안녕하세요. 배경의 꽃과 예쁜 소녀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맞아요. 어쩌면 다 그 시대에 태어나 그런 노래를 부르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쓴게 나름대로 운명이고 또 결핍들이 그것들에 녹아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추자는 그 멋진 춤솜씨만 기억하고 노래는 안들어봐서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들어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보다 정약용은 더 행복한 남자였죠.정조 집권기 때는 젊은 관리로서 위세도 꽤나 부렸지 않습니까?

blanca 2010-02-10 23:01   좋아요 0 | URL
예.그건 그런 것 같아요. 고흐는 단 한 번도 전성기라는 걸 가져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18년 간의 유배 생활,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더 많았던 것. 정약용도 말년이 참 비참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라...(이렇게 얘기하면 꼭 친밀한 지인처럼 들리지만^^;;) 좀 편향됐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