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을 때 당신이 녹음해 준 그 편지를 듣곤 하지. 당신은 참 친절한 여자야. 그 친절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데 당신 그것 알아요? 요새 나한테 썰어주는 고기가 너무 큰 것 말이야. 점점 나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인데..." 

그녀는 절대로 그가 볼 수 없는, 하지만 기억은 할 지 모를 사랑스럽지만 서글픈 눈웃음을 지으며 이미 몸의 반쪽이 마비되고
눈마저 멀어버린 이 지성의 권화 같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더듬거리며 흘리며 그녀가 잘라주는 음식을 되는 대로 집어넣고 까페의 배경음악과 걸맞지 않아 한없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그 경련들까지 동반한 그의 쇠락한 모습이 그녀의 그에 대한 오마주를 전혀 침범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1년이 채 안 되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그 기괴한 노인과 젊은 금발의 총명하고 도발적인 이 여인의 기묘한 저녁식사를 열흘마다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수군댔다. 

"아무래도 사르트르가 노망이 든 것 같아요. 저번에는 글쎄 클로즈리 데 릴라에서 음식을 질질 흘리며 아기처럼 손으로 사강이 잘라준 고기를 먹으면서 큰 소리로 웃고 있더라니까요."  

                                                                                                          용서하세요! 사르트르와 사강! 이 졸저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흠뻑 빠져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 경의를 바치는 장면에 배석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오마주를 받은 그 누군가를 궁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이기도 하지만 나도 그에게 사로잡힐 수 있을까, 하는 재미있는 시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한 나는 그들에게 붙어다니니라. 붙잡을 수 없고 이름없는 그 존재로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현존하리라. - 사르트르의 <말> 중

이 세상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산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내. 장 폴 사르트르. 오늘날 그를 얘기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을 논하기란, 지성인의 행동과 사회참여를 주장하기란 분명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우리는 그를 읽고 그를 말하면서 그가 언어로 변환되어 영생하는 그 길목에 서 있다. 그가 그렇게나 기다렸던 내일, 독자들의 눈과 귀와 입 속에 자신이 현현하기를 바랐던 순간은 그가 얘기했던 2013년이 훨씬 안되어서 실현되었다.  

 <말>은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자마자 바로 거부하고 또한 문학과의 고별식을 거행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던 작품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의 하나로 공인된다는 이 작품은 사르트르가 읽고 쓰는 데 있어 유물론자이자 서사석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연원을 유년시절을 복기하며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 순례는 우려와는 달리 그의 의외의 발랄한 기지와 투명한 관조로 더없이 유쾌하고 인상적이고 반짝이는 도정이었다. 유년시절의 삽화들은 하나의 흥미로운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자기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그가 사람이 제게 차지하는 자연스러운 자리를 결정하는 유년시절에 천착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유년에서 출발하여 생애 전반을 좌우한 긴 그림자는 생후 1년이 안 돼 죽어버린 아버지의 부재와 그를 대신하여 허약하면서도 세속적인 문인의 위임장을 쥐어주었던 외할아버지의 권능이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법칙이다. <...>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효도의 예시로 인용)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서 미처 내 아버지 노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p.22 

그는 스스로에게 초자아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가 권력이라는 암에 걸리지 않은 것도 기실은 부자 관계에서 복종을 강요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알맞게 죽어주었다고 표현하는 그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경멸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그리움은 가족 관계에서 체험되는 그 오류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위계에 대한 그의 감정과 같다. 싫지만 경멸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가정에서 습득한 원시적인 그 양식들과 의례들에 집착한다. 그것이 없어서 그가 훌륭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고독하게 파고들었는 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비교적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귀재였다고 자인한다. 우리는 안다. 아이 만큼 사랑받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또 기억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남용하기도 했음을. 누구나 어른들의 기호에 맞는 그 역겹지만 무용하지 않았던 연극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과도한 남에 보여지는 타자적 자아에 대한 인식이 유년시절부터 있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요조도 연극에 빠진다. 어른들을 웃겨주기 위하여 익살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것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통과의례인 성장의 관문이 되겠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남에게 보여지는 자기를 의식하며 연극 배우가 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반부의 '읽기'와 후반부의 '쓰기'로 나뉘어진 이 책의 구성이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로 유년시절 외가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살아가며 외가의 그 허식적이고 모순된 가풍에 어떻게 적응해 갔는지의 얘기와 성전처럼 보였던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미친듯이 읽고 쓰며 언어로 사물을 포획하는 일에 매료되었던 작은 사내애의 생활들에 대한 반추다.  그 반추는 우리의 유년을 같이 짚어가는 것으로 병행된다. 사르트르가 할아버지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가 안기고 보봐리 부인의 마지막 장들을 씹어넣다시피 하며 정독하고 온갖 영웅소설을 짜집기해 그 환타지의 주인공에 자신을 싣고 달리는 모습들은 또 우리의 유년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자연과 사물을 직접 체험하기 전에 언어로 그것들을 둘러싸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이 오류가 지배하는 관념론적 인식의 습관에서 탈피하기 힘들었다는 고백에서 우리와 조금 다른 기차를 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랬기에 그가 뱉어낸 그 수많은 언어들이 우리의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언어들과는 다른 우월한 위계에 안착하게 된 것일테지만 말이다. 

"깜깜해도 쓸 수 있을 거야." 어두운 방에서 끼적이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그가 던진 장난기 어린 장담은 슬픈 예언이 되고 만다. 그는 말년에 완전히 실명한다. 그리고 쓰지 못한다. 다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도 공기 중에 흩어져 갔던 바로 그 날. 사강은 되뇌인다. 정말 사랑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 정말 아픈 이별의  바로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말. 그를 만나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을 동정하면서도 부러워한다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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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얘기. 그런 얘기는 언제나 모래 바람이 남기고 간 입안의 서걱거림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역사 소설은 배경과 굵직한 사건들의 리얼리티의 기둥 사이로 잊혀진 우리들의 삶의 서사를 통과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얘기되어야 하는 것들과 얘기해야 하는 것들,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그것들의 얽힘과 때로는 저것들의 폐기의 지점이 실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검은 꽃>은 참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경영학 석사까지 마친 작가의 이력이 막상 소설 창작의 길로 내닫고 주요 문학상을 싹쓸이하고 10여개 국에 번역되어 나가는 성공까지 거두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이채로운 일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가끔 읽게 된 인터뷰 내용이나 에세이들까지 나는 그저 김영하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의 소설은 화장실에서 신문에서 연재되던 <퀴즈쇼>를 드문드문 읽은 게 전부였으면서도 나는 그의 보헤미안적 삶의 기행에 무조건 열광했고 무언가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는 그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를 아는 체하기 위해 <검은 꽃>을 읽겠다고 집에서 몇 정거장이나 떨어진 도서관에 돌도 안된 아기를 들쳐없고 받아 온 그의 책은 산산히 분해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돌적으로 이 책에 덤벼들었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너덜너덜해진 그 책의 갈라진 배 속에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그 수많은 속지들을 순서대로 추리면서 나는 그를 알기를 단념했다. 한마디로 내키지 않았다. 책을 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책을 정리했던, 혹은 꺼내주었던, 또 나에게 건네 주었던 그 사람들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돌보지 않은 그 의식적인 책에 대한 무관심과 무례함이 싫었다.  

그런 <검은 꽃>이 김영하의 컬렉션으로 재발간되어 왔다. 풍선처럼 부풀 대로 부푼 기대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경이로울 수 없다. 송곳처럼 까칠한 시선 앞에 그의 무미 무취한 캐릭터들과 소설적 비약들이 내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거슬렸다. 두툼한 분량도 아닌데 진도가 안나갔다. 그러나 조금씩 밀고 나가는 그의 이야기들이 마침내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작품이 이룬 성취에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지극히 소설적인 그의 목소리가 결국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님을 현실의 그 수많은 한계와 난관을 뛰어넘는 인간의 꿈꾸는 눈동자에 대한 사려깊은 응시임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1905년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 팔려나간 1032명의 그들의 이야기. 애니깽으로 회자되는 그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두드려 깨우고 그들의 꿈을 복기한 이야기. 언제나 잊혀진 역사 속 이야기들을 다시 듣는 일은 힘겨운 추체험이다. 역사 속 이름없는 민중들의 사소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부인 삶의 이야기가 훑고 간 자리. 심지어 남의 나라 혁명의 부속품으로까지 이용되고 버려진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하나의 의무 같다. 그게 남은 자의 최선이자 도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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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 이런 책이 좋은 책이며 한번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진짜 손이 안 간답니다. 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요. 읽은 이후 다가오는 질척한 상념이랄까 우울이랄까 현실 직시랄까 이런 것들을 이겨낼 용기가. 좋은 소설들은 더 마음을 울려놓잖아요.. ㅡㅡ;;

그래서 맨날 읽는 책이 일반 교양(과학, 심리, 역사)와 경제와 자기 경영 여행, 그리고 현실 도피적인 추리 소설과 환타지를 왔다 갔다 한답니다. 블랑카님 대단해여!

blanca 2010-03-09 14:2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런 책들의 한계는 그냥 결말을 열어놓아서 허무하다는 거예요. 지금 한창 소설에 조금 질려서 저도 마녀고양이님처럼 일반 교양 분야로 넘어가려 합니다. 소설은 약간 집중이 안되는 경향도 있고 어릴 때의 그 몰입되는 순간도 이제는 없더라구요. 슬퍼요, 흑흑.

순오기 2010-03-1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책은 하나도 안 읽어서 몰라요.ㅜㅜ

blanca 2010-03-10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읽고도 김영하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재능이 많은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저랑 완전히 코드가 맞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요^^;;

저절로 2010-03-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혈이 심해 그래,이젠 도서관이야. 괜히 대출이란 게 있겠어? 하며 도서관으로 달려가면,
쩝~ 꼴들이 말이 아닙디다. 성질같아선 그 너절한 책들 확 바닥에 패대기쳐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구입 희망도서란에다 '웬만하면 새로들 장만하시죠' 소심하게 적어놓고 도망치듯 나옵니다. 끙.


blanca 2010-03-10 13:35   좋아요 0 | URL
그죠? 진짜 너무 심한 책들이 있어요. 읽다가 절로 불쾌해지는.... 도서관도 멀고 불쾌한 경험도 좀 하고 나니 점점 멀어지네요. 중고샵을 많이 이용해 보려고 해는데 사실 그것도 책을 계속 늘리는 일이니 서재에 대한 로망만 계속 커지고... 그래서 답은 책을 최대한 천천히 보기로 했어요^^;;

꿈꾸는섬 2010-03-1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알라딘 김영하 컬렉션 광고는 봤는데 클릭을 안해봤거든요. 검은꽃이 개정판으로 나왔군요.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네요.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blanca 2010-03-11 14:34   좋아요 0 | URL
책은 실물이 참 이쁘더라구요. 이렇게라도 뒤늦게 읽어보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꼭 읽고 싶었었거든요^^
 

평소 관심 있었던 강의의 강사 프로필을 확인하다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꽤 친밀했다
어떤 계기로 너무나 멀어져 버린, 과 동기였다. 

내가 그 강의를 듣게 되면 그녀가 나를 보며 강의를 하고 나를 평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배철수가 언젠가부터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면서 행복해졌다는 얘기를 들먹이며 나도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오만하게
지껄여 댔던 그 지점에서 바로 얼어붙었다. 질투, 시기심, 자기비하, 열패감이 끈적끈적 들러붙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중 

  

마침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야금야금 읽고 있었다. 그래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결국 준거집단의 성공을 감내하기 힘든 그 치사한 심리는 인간의 본성인 것인가. 되짚어 보면 정말 예리한 지적이다. 왜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고 동창회만 다녀오면 설겆이를 전투하듯 하며 죄없는 그릇에 화풀이를 하고 항상 나무늘보처럼 게을렀던 우리의 모습을 유독 그날 더 발끈하며 못 참아내며 성토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하필 왜 그녀였음에 더 강한 심리적
충격과 열패감에 사로잡혔는지도 설명이 된다.  



보통의 책을 선물받은 사람이 다시 그 책을 나에게 줬었다. 아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였나 보다. 추측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안읽고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적인 것에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지루함, 사변적 분위기, 공감할 수 없는 부르주아 분위기 같은. 누군가 건네준 책을 고맙게 받고 잘 읽지 않는 묘한 습성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나에게 온 그것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애초 출발지인 그 사람마저 멀게 느끼게 될까봐 움찔하면서 피하게 된다. 역설이다. 책을 사랑하면서 책 선물받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대신 도서상품권으로 부탁하는 너절한 센스까지 가지고 있다. 

그의 책을 읽게 될 줄 몰랐다. 정말 우연하게 대형서점에서 소설가가 이런 '불안'이라는 정서에 천착한다는 게 놀라워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불안이라니. 나는 충분히 불안하니 읽을 명분이 대충 섰다. 

이 책에서의 불안은 사회에서의 지위의 위계의 틀 안에서 넘치는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그 불안을 얘기한다. 즉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드리워지는 그 불쾌한 패배감이다.  세상의 눈은 물론 속물근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속물근성에도 재미있는 유례를 덧붙인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옥스퍼스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 옆에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은 관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sine nobilitate)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이 속물이란다. 명쾌하고 씁쓸한 정의다. 

불안이 결국 현대의 야망의 하녀라는 고찰은 예술이 삶의 비평을 통해 그것을 수정 보완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결국 보통은 자기가 쓰는 소설을 옹호하고 싶었지 않나 싶게 조금 뻔한 결론이 김빠지기는 했어도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에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든 그의 예리한 기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런 추상적이고도 지루하기 십상인 재료를 가지고 이다지도 흥미롭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그도 분명 속물근성의 기준에서 보면 성공한 축에 속에 속할 것같다.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들과 그림이 흑백이라 그다지 내용의 이해에 큰 도움이 안되어서 아쉬웠지만(원서는 어떤지 궁금하다), 그가 제시한 각종 도표와 상징화된 도식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로 보였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p.268 

보통의 얘기를 빌리자면 우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향수에 휩싸여 장성해서도 세상이 주는 사랑을 찾아간다. 두번째 사랑은 그 사랑의 기준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은밀하고 부끄럽다. 돈과 명예, 권력을 탐하는 것도 결국은 세상이 돌려주는 기립박수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애정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얘기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나의 얘기로. 그 강사는 그녀가 아니었다는 조금은 안심되는 얘기를 들었고 (동명이인) 그럼에도 사회적 잣대로 성공한 수많은 그녀들을 단지 더 친밀했고 나와 더 비슷했기 때문에 때로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나의 옹졸함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숙명이라는 데에 많이 절망했으며 체념하게 됐다. 안그러려면 욕망을 줄이고 속물근성을 떨어낼 도리밖에 없는데
지난하고 요원한 과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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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글이네요.
인간의 속물근성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blanca 2010-03-04 13:43   좋아요 0 | URL
그죠? 그래도 좀 덜 속물적이려는 노력은 계속 해보려구요^^

프레이야 2010-03-0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절한 질투에 너절한 센스요? 아뇨. 전혀 너절해보이지 않아요^^
질투도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말을 배우 이미숙이 했던가요.
비슷한 준거집단에서 일어나는 감정, 질투에서 보통의 불안까지, 마음에 와닿는 페이퍼에요.
질투가 긍정의 에너지로 소모되는 그날까지, 아자!

blanca 2010-03-04 13: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의 낭독의 의미를 깨닫고 지금 감동받았습니다. 아...너무 아름다운 일이다. 나도 흉내좀 내야겠다고 결심도 해보고요^^ 저는 앉아서 부러워하고 질투만 하다 세월 다 갈 것 같아요. 정신좀 차려야 겠어요--;;

저절로 2010-03-0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언제나 저를 쏘옥 빨아당기는 군요^^.
보통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다,여기서 맞딱드리네요..저 파리한 눈빛으로 '불안'을 얘기했다니, 음..궁금해지는군요.

blanca 2010-03-04 22:15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 저도 괜히 피해다녔는데 이 책은 재미도 있고 소장가치도 있고 여러 모로 마음에 들더라구요. 다만 여기서 반값행사하는 것도 모르고 사 버린게 쓰릴 뿐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소설가라 그런지 박학다식하면서도 센스도 있고 그렇더라구요.

루체오페르 2010-03-0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생활 속의 철학적이고 느낌있는 글 정말 좋습니다.^^

blanca 2010-03-04 22:16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감사합니다. 사실 철학은 잘 모릅니다.-..- 철학적이고 싶어할 뿐이지요.
 

영어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꾸준히 한 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보습학원에서 당시 영어입문자들에게 필수였던
동아컬러사전을 끼고 새로운 언어의 그 달콤하고 보드레한 어감이 좋아 신나게 시작했던 영어는
대학교 때 취업전장에 뛰어들기 위한 무장의 일환으로 변모했다. 

무식하게 했다. 하루종일 영어 방송을 틀어놓고 생각도 영어로, 꿈도 영어로 꾸려고 애썼고 영어채팅도 해보려고 했다.
결과는 종이와 연필로 치르는 계량화된 시험 점수는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받았지만 실제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만나게 되면 아주 과묵하고 이따금 던지는 어설픈 조크가 시덥잖은 반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수준이상을 갈 수 없었다.
 

어설프고 나름대로의 치기를 덧씌워 나름대로 굴린 문장보다 콩글리쉬처럼 텁텁하게 내뱉는 단어만으로 더 무리없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정작 취업했을 때는 영어 무장을 완전 해제하고 오히려 다시 한글,숫자들과 씨름해야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때 그 때의 충격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영어에 퍼부은 그 수많은 시간들과 비용들이 고작 소피 킨셀러의 <쇼퍼홀릭>을 사전 좀 덜 찾고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가는 길이었다는 깨달음이 남기는 그 불쾌하고 쓰디쓴 뒷맛이란. 결론은 주입식 교육 운운하는 그 진부함이 아니라
나의 영어 공부의 스타트가 지나치게 늦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만 열두 살의 겨울 새로운 언어를 모국어 위에
다시 프로그래밍하겠다는 그 옛날(지금은 많이 빨라졌으나)의 출발은 언어교육의 적기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물론 그럼에도 네이티브 만큼은 아닐지라도 영어로 유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절친 한 명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보편적 범주가 아닌 예외적 특출함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므로 계속 외국어 교육의 적기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밀고 나가련다. 

 

옹알이도 국적에 따라 다르다는 흥미로운 얘기부터 외국어 학습의 적기에 관한 논의까지 꼭 육아의 측면뿐만 아니라 사람이 언어를 습득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신선하고 명쾌한 실례들로 가득한 책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외국어 학습의 적기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바이 링구얼에 대해 흔히 그런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이 두 가지 언어습득 모두에 지연을 보인다는 사실을 많이 거론한다. 그것까지 아니라고 단정짓지는 못한다. 지인의 28개월 아이도 현재 그런 상황인 것을 보면 초기 지연은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인 것도 같다.  하지만 결국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게 된 사람들의 사고력과 추리력이 더 뛰어나단다.

이 책에 제시된 한 연구에서는 미국에서 산 햇수는 악센트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고 살기 시작한 나이가 네이티브와 얼마나 유사한 발음을 구사하느냐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3~7살에 영어에 노출되어야 유창하게 영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외국어습득의 적기로 흔히 거론되었던 12살과 대단한 차이가 나는 연령이다. 물론 유창하게 영어를 한다는 그 목표 지점에 대한 설정과 과연 외국어를 모국어마냥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론과 맞부딪치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일각에서는 싱가폴 영어, 인도 영어, 스페인 영어로 각자의 억양과 발음, 문화와 적절히 버무려진 특수한 내재화가 대세라는 의견도 있다. 꼭 정통 미국식 영국식 영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결국 소통이 목표라면 적당한 제스추어와 추측 등이 어우러져 공통의 이해의 지점에만 도달하면 된다. 하지만 얘기하고 싶은 대목은 영어에 들이는 비용과 노력이 아무래도 적기에 투입된다면 더 절감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효율성의 측면이다. 

아이들은 희한하게 두 언어를 분리할 수 있고 언어의 문법의 내재화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도 24~36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외국어의 학습은 이 시기가 적기라는 얘기다. 한글도 모르는 아이한테 영어비디오를 틀어주는 모습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그 시기에도 영어 교육은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모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을 때 영어를 배우게 해 주겠다고 당당하게 외치고 다녔던 콩글리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엄마는 갑자기 숙연해진다. 사실 나름대로의 교육적 소신 때문이 아니라 귀찮고 게을러서였기 때문에 다시 내 아이에게 나의 그 지난한 외국어 공부의 시행착오를 답습하게 하지나 않게 될런지 걱정이다. 

                                                                               

부지런한 엄마들의 얘기는 단순히 극성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만한 것 이상의 가르침이 분명 있다.  

영어 그림책, 각종 영상자료들을 통한 홈스쿨링의 경로를 그려주는 그녀들을 따라가다 보면 적어도 나중에 나 같은 고비용 저효율의 비극을 피해갈 가능성이 는다. 

그리고 자세의 문제다. 정말 아이에게 영혼의 자유와 여유로움을 선물하기 위해 조기교육을 염증스러워하는지 자신이 게으르고 쏟아낼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런지 자문해 볼 일이다.(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임)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발달장애인지는 모르고 돌 전부터 영어비디오를 틀어주었다며 슬픈 자책을 했던 엄마의 얘기. 다른 부모들은 다 바깥에서 기다리는데 겉옷도 없이 추운 실내 빙상장까지 들어와 연습하는 딸을 함께 떨면서 기다렸다는 엄마의 얘기. 극성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닌가 보다. 적절하고 진정한 극성은 아이에게 독이 되지 않는다. 극성엄마를 맹렬하게 비난해 댔던 내 자신이 실은 극성 엄마의 딸이 아니었던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나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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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3-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어를 포함한 언어 조기 교육에 대한 장점,단점 찬성,반대 여러 학론,의견이 있지만...제가 봐온봐론 찬성,장점쪽이 더 큰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런데 복잡하게 이론 따질거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돈도 있고 능력도 다 되는데 그래도 안 보내실건가요?'
대부분은 아이에게 조기유학,교육을 시키고 싶을겁니다. 학론, 애국심 뭐 그런건 일단 나중 아닐까 싶네요. 평생 어차피 외국어를 벗어날수는 없는거니까 효율성의 측면에서라도 말이죠. 제 의견은 그렇습니다.^^;
공감가는 의견이 많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3-02 22:18   좋아요 0 | URL
제가 영어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해서 성격상으로는 극성, 조기유학 이런 거 반대하고픈데 ㅋㅋㅋ 외국어 학습 만큼은 예외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부분이 또 물질적 지원 여력과 관련이 있어서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루체오페르님 말씀처럼 누군들 안 그러고 싶겠어요.

꿈꾸는섬 2010-03-03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경험을 함께 읽으니 훨씬 공감이 가네요. 사실 전 아이들 영어조기교육 반대입장이었거든요. 하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세요. 저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추천 꾹 누르고 가요.^^

blanca 2010-03-03 14:16   좋아요 0 | URL
^^ 저도 완전 반대하고 있었는데 언어 부분에 있어서는 물론 아이가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는 않되지만 적절하게 노출하여 줄 필요가 있더라구요. 그래도 역시 귀찮아요 ㅋㅋㅋ

후애(厚愛) 2010-03-0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어보다는 우리나라 말이 무척이나 그리워요~ ^^
한인마트에 가면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많이 보는데요. 거의 우리나라 말을 안 하고 영어로 이야기를 해요.
전 영어보다 우리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지요.ㅋㅋㅋ

blanca 2010-03-03 22:1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인마트에서도요? 안그래도 제 친구도 한국말 맘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너무 그리워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3-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20년 후에는 부착용 언어 통역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상대방이 어떤 언어를 쓰든 저는 알아들을 수 있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그리고 10-20년 후에는 자동 운전 자동차가 나오지 않을까요? 전 그리 믿고 운전도 안 하고, 영어도 제대로 안 하고 버팁니다. 히히

blanca 2010-03-03 22:1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운전-..- 연수까지 받고도 무서워서 못하고 있잖아요. 안그래도 맨날 궁리하는데. 자동운전되는 차 안나오나 하면서요.ㅋㅋㅋ 너무나 슬프게도 하반기에는 강제로라도 해야 될 것 같아요. 저 잠 못자게 생겼어요. 연수받는 날 넘 무서워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잖아요.

프레이야 2010-03-0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부분에선 전혀 극성스럽지 않은 엄마랑 살았지요.
그리고 저도 우리딸들에게 전혀 극성스럽게 안 하구요.
그런데 님의 말씀에 공감이 많이 되어요.
좀 극성스러울 필요가 있는 게 또 이런 분야인 것 같아요.
요즘 6학년 작은딸이 영어학원을 가끔 안 가려고 해서 오늘도 달래서 보냈어요.
좀 어려운 교재로 올라갈 때마다 그러더라구요.
발전하기 위한 고개라고 포기하지 말고 넘어보자고 달랬어요.
빵이랑 타코야끼 사줘가면서요.ㅎㅎ (먹는 거에 약한 ㅋ)

blanca 2010-03-03 22:13   좋아요 0 | URL
빵이랑 타코야끼 ㅋㅋㅋ 갑자기 그 풍경이 연상되요. 귀여운 모녀의 모습. 뭔들 안그러겠냐마는 특히 영어는 조금 빨리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그런 말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요-..- 한글 책도 열심히 안읽어 주고 있어서요--;;
 

"손 젖잖아요. 이리 줘요. 내가 할테니."
한 때는 참 예뻤을 그러나 지금은 삶의 고충들이 가득 괴인 눈매의 청소부 아주머니는 나의 우산을 낚아챘다.
그 축축한 우산을 꼼꼼히 잘 접어 비닐봉지에 넣어 건네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나는 눈을 맞추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괜히 뭉클했다. 아주머니가 너무 예뻐서 너무 친절해서. 게다가 빗방울이라니.
모든 사물을 모든 현상을 어리어리하게 그 테두리를 묘하게 번지게 해서 보여주는 빗방울이라니. 
젖어도 괜찮은 손이 있다니. 젖으면 안되는 고운 손이라도 가진 것처럼 나를 우쭐하게 해주다니.

가난한 대학생이 개구쟁이 초등학생과 투닥거리며 벌어놓은 돈에서 어버이날 선물을 택할 폭은 넓지 않았다.
삼만 원짜리 가판대 넥타이. 게다가 너희들은 구석진 곳에 삶의 신산함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하필 바로 또다른
고운 아주머니 옆에 누워있었다. 어슬렁대는 나를 아주머니는 불렀다.
"손님, 선물 고르세요?" 손님이라니. 내가 그 가판대에서 넥타이를 몇 개 헤집어 볼 명분으로 충분하다.
"네. 아빠 선물 고르려구요."
"아버님이 사람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일이 많으신가요? 아니면..."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 정성껏 몇 개의 넥타이를 자신의 옷 위에 대보며 어리버리한 대학생을 최고 고객으로 대우해 주었다.
아주머니와 내가 벌인 소박한 패션쇼의 끝에 낙찰된 그 황금빛 넥타이.
그 삼만 원짜리 넥타이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행사에
행운의 부적처럼 아버지와 동행한다.
 

소위 감정노동을 오년 간 하고 퇴직하면서 가장 많이 남은 아쉬움은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감정을
인위적인 틀 안에 구겨 넣어 억지로 끄집어 빼는 듯한 그 껄쩍지근한 과정에 대한 염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더 친절하지 못했음이었다.
나는 조금 더 친절해도 괜찮았다. 이 역설 앞에서 이 설명할 수 없는 회한은 내가 때로 무례함을 응징하고자 했던
과욕을 부렸음에도 결국 남은 것은 통쾌함이 아니라 항상  어쩌면 내가 무의식중에 먼저 건드렸을 수도 있을
상대의 허점에 대한 하지 못한 사과였다.  참 이상했다.
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이 항상 더 해대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라 
가장 무례했던 사람한테조차
넘치게 베풀지 못한 친절함에 대한 아쉬움일까.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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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0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더 친절하자, 좋은 글 감사해요.
3월! 비온 후라 날이 좀 흐리지만 상쾌하게 시작해요^^

blanca 2010-03-02 13:45   좋아요 0 | URL
제가 그렇게 못하니까 다짐하려고 썼어요.^^우중충한 날씨지민 프레이야님도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셨으면 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3-0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에게 가능하면 방긋 웃고 친절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르게도 생각합니다. 가끔 누군가에게 좀더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이 저를 짓눌어요.
너무 가까운 누군가, 조금 멀어진 누군가에게는 조금더 무심해도 좋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blanca 2010-03-02 13:47   좋아요 0 | URL
착한 사람 콤플렉스 저도 있어요. 사실 이 안에 친절에 대한 강박도 포함되는데 사실 저 친절했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이것의 일환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너무 무례한 사람한테는 대응하지 않는게 나을 수도 있더라구요. 어려워요-..-

저절로 2010-03-0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의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타주의를 다윈주의적 실수,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라고 한 구절이 떠 오릅니다. 자연이 양육강식의 정글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타'를 인간의 유전적 경험속에 남겨둔 것은 분명 기쁘게 빗나간 실수가 아닌 '까닭' 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생존이유 말입니다.

blanca 2010-03-02 13:48   좋아요 0 | URL
아....다윈주의적 실수.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 이 용어가 참 좋네요.

꿈꾸는섬 2010-03-0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중한 말이에요.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자. 기억해두겠습니다.^^

blanca 2010-03-03 14:17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은 글만 봐도 친절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