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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젖먹이 남동생을 잃은 아홉 살의 나는 진정으로 위로가 필요했다. 슬픔의 당사자들인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더군다나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아홉살의 누나가 땅거미가 걸어들어 오는 그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방바닥에 엎드려 동생 때문에 운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거창한 위로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너의 슬픔을 죄책감으로 덜어내지 말라고 얘기해 줬으면 됐을 것을.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중
여덟살 생일을 맞는 스코티의 행성이 그려져 있는 케잌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들을 생일날 교통 사고로 잃게 된 부부는 주문한 생일케이크를 찾아 가지 않는다고 여러 번의 괴전화를 건 빵집 주인을 찾아간다. 큰 외상 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아들의 죽음 앞 뒤엉킨 슬픔과 충격, 배려받지 못한 아픔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그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막상 그들 부부의 사연을 알고 난 빵집 주인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따뜻한 계피롤빵을 내어주며 자신의 소외된 삶을 고백하고 부부의 상실감을 다독거려주자 그 기묘한 만남은 밤을 지새우게 되고 다사로운 햇살 같은 것이 된다.
자식을 가져보지 못한 빵집 주인은 그들 부부의 슬픔을 예단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위로의 계명 같다. 상대의 슬픔을 어떻게 속속들이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기대나 단정은 치워버리고 시작할 일이다. 그저 슬퍼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슬픔이 풀어 헤쳐져 저절로 흐를 수 있게 자그마한 통로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위로에 현란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모르고 덥석 그것을 거머지고 휘두르려 하면서 상대를 은근하게 조종하려 하지 않았던가? 혹은 위로가 필요함을 알면서도 무심코 눈감아버리는 무의식적 방기를 습관화하지는 않았는지. 위로는 카버의 얘기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것같다.
그리고 표제작 <대성당>. 이미 김연수가 <<세상의 끝 여자친구>>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로 노골적인 오마주를 바친 작품이다. 아내의 친구를 카버는 맹인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으로 설정하였고 카버는 그 불의의 방문객과 화자(남편)가 대성당을 함께 그리는 것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이 그린 코끼리 그림으로 소통의 절정을 형상화한다.
맹인과 정상시력을 가진 사람이 함께 눈을 감고 손을 겹쳐 대성당을 그린다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는 카버를 읽을 이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실제 그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더듬을 수 없는 지점 벼락 같은 것이 쾅 쳤다. 사람의 감정의 파고를 언어로 온전하게 가두어 둘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로 그럴 정도로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소통의 장벽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의 현현을 보여주는 그 지점, 화자는 외친다. "It's really something"
하루키와 김연수의 뜨거운 오마주를 한 몸에 받는 카버는 체호프와 닮아 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단편소설의 성취를 판단하는 준거점에 떡 버티고 있는 체호프(정말 극렬하게 동의한다!)에 비견되었던 그의 단편소설집을 받아들고 난 감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하나 다 흥미롭고 훌륭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드라마틱한 재미도 오헨리 같은 기가 막힌 반전도 없이 조곤조곤 얘기해 나가는 그의 사람 간의 소통에 대한 희구의 체현들이 어쩌면 취향에 안맞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두편은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한 만큼 이 두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게 큰 빚을 진 것 같다. 그러니 리뷰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인 별점을 찍는 순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야박한 별점과 이 두 작품에 고작 다섯 개의 별점밖에 주지 못할 그 통탄 사이에서 망설여졌다.
김연수의 번역은 의외로 직역이었다. 말미에 밝혀 둔대로 카버의 문체를 살리고 싶었던 탓이었다고 한다. 어색한 부분의 번역투 문장들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지만 잘 읽히는 유려한 의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번역자의 색깔이 불거지고 매끄러운 의역이 좋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집해 버릴 위험을 고려한다면 직역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읽는 입장에서 번역은 언제나 아쉬운 여지를 남기지만 그 지난한 노고의 과정 그 자체로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소통을 갈구한다. 고독의 향유도 결국은 소통의 열망에 대한 고독한 위장에 불과하다. 일면식 없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이와 어느 순간의 전부를 공유하며 감정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카버가 우리의 소망을 대변한다.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늦어버렸지만. 혼자라도 시나몬롤빵 탐사를 떠나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