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5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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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껏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신 이런 감정을 가져본 일이 없었으나, 그는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에 틀림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더욱 글썽거리며,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死者> 중 

제임스 조이스의 초기작인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의 중하층 계급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덤덤하게 스케치한 열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만큼은 그도 살아날 희망이 없었다.'로 시작하여 역시 '그의 영혼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로 끝나는 이 단편집은 마치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문을 닫은 듯한 인상마저 준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택한 것은 이 작은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년시대, 사춘기, 성숙기, 노쇠기의 민중의 생활은 질벅거리고 침체되어 있으며 극적인 사건도 낭만적인 로맨스도 없다. 발전소 구경을 위해 학교를 빠지고 나룻배로 강을 건넌 소년들은 우연히 맞닥뜨린 노인의 삶의 체념을 들어주어야 했고, 하숙집 여주인이 딸과 맺어주려고 했던 손님은 비겁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맨다. 개인은행의 출납계원은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나 어설픈 로맨스를 만들어가다 짐짓 그 정열적인 움직임에 겁을 먹어 발을 뺐다 그녀의 부음기사를 읽고 외로움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인간 간의 소통 자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대변된다. 그는 모든 인연은 설움으로 이끄는 인연이라고 얘기하며 운명에 거슬려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강변한다. 그의 메시지가 메타포에 실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작품으로 엘리엇도 극찬한 <사자>는 이런 그의 소통에 대한 불신과 운명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사무치는 이해와 죽음에 대한 유리알 같은 통찰이 돌올하게 빛난다. 나머지 단조로운 단편들이 줬던 나른함은 이 작품 앞에서 서곡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이해될 정도로 경이롭기까지 한 작품이었다.  

어셔스 아일랜드의 어두컴컴하고 초라한 집에서 늙은 모컨의 자매와 그녀들의 조카가 함께 연 댄스파티의 흥청거리면서도 아늑한 생동감들은 그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의 아내가 우연히 <오그림의 처녀>라는 민요를 듣고 황홀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에게 아내의 가치와 그녀와 엮은 추억들에 대한 영롱한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게 해줌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들과 기대는 하나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아내는 소녀시절 가스공장 소년공에게서 그 노래를 들었고, 고향을 떠나던 날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비를 맞으며 창문에 돌을 맞혀 자신이 왔음을 알렸던 추억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소년은 죽고만다. 아내는 첫사랑의 애달픈 추억으로 울먹인다. 가브리엘은 지금은 늙어버린 아내가 한때는 한 소년을 죽게까지 한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찰나에 절절하게 스며 시간의 괴력 앞에서 스러지고 만다. 결국 시간의 횡포 앞에서 인간들은 모두 저마다의 오해와 착각을 품고 죽음의 장막 뒤로 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결국 다 그림자가 될 것이고 이런 인식을 하는 나마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자각은 삶 앞에서 몸을 떨게 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재력, 권력, 사랑 등 세속적인 기준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레빈이 그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찰나에 지나지 않으며 다 스러지고 말것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인식하는 대목이 결말을 장식한 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그것과 절묘하게 맞물리고 있다. 가브리엘은 아내의 사랑의 추억에 질투를 느꼈다기 보다는 비를 맞으며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를 기다리는 장면을 떠올리고 옆에 누워 있는, 이제는 결코 젊고 아름다워 그 때 그 소년의 사랑과 동경을 복원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아내의 모습을 서글프게 느끼며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덮이고 있는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얘기하며 이 오묘한 대구를 완벽하게 형상화해낸 작가에게 경외를 느끼며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마음에도 그런 절절한 추억이, 사무치는 사랑의 기억이 있나 싶어 들여다 보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는 없다,는 작가의 얘기는 내 자신을 덜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젊은 날의 맹목적 믿음이 허무하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회상 속의 사랑은 언제나 박제되어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잡힐 듯 한데 이미 나는 그 때의 모습도 그 때의 투명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이 깨달음을 주렁주렁 달고 늙어가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조금 쓸쓸하다. <사자>를 읽기 위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펼쳐 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 쓸쓸함과 잃어버린 순수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추체험이 오롯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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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5-0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느끼기에 알라딘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작가 중의 한 분인 블랑카님, 잠시 잠깐 들러 보는 것만으로도 저를 흥분케하는 님~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런 재능(어쩌면 노력일수도...)을 선물 받았을꼬... 봄밤 없는 봄날씨를 탓하며 부러워해 봅니다.

blanca 2010-05-07 14:3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님의 과찬은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이 칭찬 먹고 오후를 행복하게 보내렵니다.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05-12 09:46   좋아요 0 | URL
느와르님 말씀에 백배동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노이에자이트 2010-05-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나도 알라딘에서 글 잘쓰는 사람이란 평을 받아보고 싶어...블랑카님.부러워라...요즘은 제 서재에 댓글 달러 오는 사람도 없답니다.

blanca 2010-05-10 13:13   좋아요 0 | URL
노자님.ㅋㅋㅋ 댓글 읽다 웃습니다. 제가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요^^;; 노자님의 박학다식은 어쩌구요? 노자님 서재에 가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5-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요즘엔 많이 안 읽히는 작가인데...그래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은 조금씩 팔리는 편이죠?

blanca 2010-05-10 13:15   좋아요 0 | URL
솔직히 재미는 없더라구요^^;; 더블린 사람들은 조이스 뒤의 단편작가들 대부분 모방한 것 같아요. 한 마을 사람들 모습을 연작형식으로.

노이에자이트 2010-05-10 16:17   좋아요 0 | URL
맞아요.우리나라에도 이문구<관촌수필><우리동네> 박영한<왕룽일가>가 있지요.<원미동 사람들>도 있군요.
 
[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하늘은 께느름한데 모처럼 가디건을 벗어던지고 싶다고 느꼈으니 날씨가 좋았다고 눙칠 수 있을 지경이다. 그 정도로 파란 하늘과 샤방샤방한 날씨는 이 해 들어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어린이날 전날 지독한 콧물 감기와 배려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하늘을 찔러 한 마디로 구린 하루였다. 예전에는 귀엽고 ㅋㅋㅋ 젊었으니 우울하다면 돌봐주는 사람도 몇 있었건만 나이들고 아줌마 되니 누구하나 내 우울에 관심 기울여 주는 이 없다.-..- 근처 대학교가  두 개나 있는데 그 아이들의 젊음을 보면 눈이 부시고 슬며시 질투가 난다. 아놔~이렇게 나이들어 가나 보다. 스무살 적 스물 아홉살을 보고 정말 절망적인 나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나이의 아줌마에 대한 기억은 없는 걸 보니 아예 사정권밖으로 치워버렸었나 보다. 그러니 10문 10답이나 하련다.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혼불>의 최명희를 만나고 싶다. 이미 이 생의 사람이 아닌 그녀가 미처 끝내고 가지 못한 <혼불>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못다한 얘기들이 매듭을 짓지 못하고 너덜거리는 듯한 느낌에 아연했다. 그 자체로도 경이롭고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살아 숨쉬는 듯하는 등장인물들의 뒷얘기를 알 수 없음에 목이 말랐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이 생에서는 결혼을 해봤으니 다음 생에서는 결혼을 안할테다.(비장한 어조로) 그런 의미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올리버 색스가 쓴 <색맹의 섬>을 읽고 이 팔자좋은 할아버지의 삶에 진심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이른이 훌쩍 넘은 나이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올리버는 때로는 자신이 심취한 양치식물을 탐사하기 위하여 혹은 풍토병을 연구하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미크로네시아섬에서 태평양이 보이는 옥상에서 저물녘 사카우를 마시고 만취하여 조이스의 "축축한 암청빛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별 가득한 하늘나무'를 봤다는 대목에는 절로 질투가 났다. 내가 저기 앉아 있어야 하는데--;; 참, 이건 그러니까 작가가 자신의 얘기를 쓴 것이니 등장 인물이라기 보다는 실제 인물이 되버려서 질문과 어긋난 것 같기도 하고.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낚인 책은 정말 많지만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솔직히 심미안이라고는 없기(미술은 항상 우미였음)에 표지를 논할 자신이 없다. 다만 도서출판 이후의 수전손택 시리즈는 그녀의 사진들을 활용하여 가장 그녀다운 표지를 만들어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세워서 꽂아 놓으면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 된다. 수전 손택의 얼굴로. 연인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의 작품들인 것 같은데(확실하진 않으나 확인하기 귀찮다--;;) 역시 불순한 감정이 담겨야 사진이 샤하게 나온다. 연인이 같은 여자였다는 것을 최근에 알고 조금 놀라긴 했다. 하지만 수전 그녀다웠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솔직히 학수고대하고 있지만 않지만 춘원 이광수의 책이 대부분 절판인 것은 의아하고 아쉽다. 중학교 때 참 좋아했었다. 힘들게 수집해 놓았는데 아버지가 딱 <흙> 한 권만 남기고 다 처분하셨더라. 왜 하필 <흙>이었는지.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동그라미를 친다. 왜 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만다. 많이 나오면 혼자 막 신경질 낸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사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이 아니라서. 어렸을때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문학전집은 다 매우 여러 번 읽은 것 같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계몽사의 소년소녀문학전집에 나왔던 책 대부분. <쿠오레>, <소공녀>, <소공자>, <작은아씨들>. 참, 그리고 로라 잉걸스의 초원의 집 시리즈는 미리 장만해 뒀다. 같이 읽고 싶은 책이다. 뒷심이 좀 부족한 책이긴 해도 정말 너무나 다사롭고 읽기만 해도 마구마구 행복한 책이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태백산맥> 10권. 시작할 때는 분량에 질렸지만 마칠 때는 아쉬웠다.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결국 좋은 책을 좋은 장정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자금력의 문제인 것 같다. 좋다는 의미는 여러 면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안 읽을 것 같은데도 좋은 책을 공들여 찍어낸 출판사는 그 어디라도 그 공력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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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5-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명희와 수전 손택이 눈에 띄네요.
블랑카님 휴일은 잘 보내셨어요?
전 그저 뒹굴거리며 잘 보내고 있어요.
저녁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나가서 자전거나 탈까싶기도 하고 그러고 있어요.^^

blanca 2010-05-06 12:5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근데 둘째 따님은 아직 어린이 아닌가요?^^;; 저는 집앞 공원에 가서 벤치에서 아이스크림 먹었답니다.ㅋㅋ 멀리는 못가고 근처 대학교 캠퍼스도 가구요. 덥기만 했지 하늘은 어찌나 꾸무룩하던지. 저는 자전거를 못타서 이런 얘기 들으면 너무 부러워요. 자전거 타며 바람가르고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0-05-0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오레... 이거 얼마만에 들어보는 제목인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모자를 아내로~> 못 읽었는데, 블랑카님 때문에 엄청 끌린네요.
오늘 외출하면서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혼불...... 보고 싶어라~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영.... ㅠㅠ

blanca 2010-05-06 12:51   좋아요 0 | URL
모자 책 있어요? 그럼 마녀 고양이님 꼬옥 읽어보세요. 저는 가수 호란 추천으로(이러면 꼭 친구 같지만 ㅋㅋㅋ) 읽게 되었는데 완전 빠져서 이 사람 책 다 샀답니다. 혼불은 다른 책 다 치우고 나서 그것만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요즘 갑자기 또 책욕심이 동해서 주문 대박입니다.--;;

비로그인 2010-05-2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명희, 조정래, 수전 손택에 눈길이 갑니다.

새로 나온 [혼불] 보다는 예전 한길사 표지가 더 끌리네요. 다행입니다. 그때 차곡차곡 사둬서 말이죠..

아마 제가 처음 이자리에 흔적을 남기려고 했던 건, 이 페이퍼를 보면서였을거예요. 그게 생각나 몇 마디 덧붙여 놓고 갑니다. ^^

주말. 얼마남지 않은 봄날.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빌겠습니다.

blanca 2010-05-29 14:45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그런데 바람결님 같이 말씀하시는 분이 또 있더라구요. 저는 글씨가 크게 잘 나왔다고 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이 신판이 나왔을 때 오호! 하며 질렀드랬죠. 예전 표지가 주는 또 묘미가 있군요. 그리고 아무래도 소장가치도 훨씬 더할 것 같네요.

하늘이 오늘은 또 꾸무럭하네요. 얼마남지 않은 봄날. 그래도 아직은 봄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바람결님도 행복하시기를.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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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있을 법한 것에는 끌리지 않는다.
오히려 믿기지 않는것, 불가능한 것에 그것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 페르난도 페소아 

열 여섯 살에는 모든 불가능한 것들에, 불온한 것들에 끌렸다. 스무 살에는 껍질이 달보드레한 것들에 중독되었다. 서른 살에는 물질의 권능에 사로잡혔다. 서른 중반. 나의 과거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나의 사후에도 나를 여전히 미치도록 사로잡는 것은 임을 수긍하게 되었다.  

책에 대한 책은 용모가 매력적인 이성을 알아가는 과정의 포문을 연다. 인간성까지 그럴듯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책에 대하여 썼다는 것만으로 책중독자들의 기본적인 호의는 깔고 가는 셈이다. 이 책의 저자 김이경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이 첫 소설집임을 고백하는 실책을 범한다. 첫소설. 무엇이든 그 서투름과 설익음을 광고하는 접두어 밑에서 솟아오르기란 쉽지 않다. 그래, 그러니까 이게 겨우 처음이다, 이거지. 누구나 마음속의 이러한 속삭임을 저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이라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이니까 이러저러할 것이다,라는 구획 안에 재빨리 구겨넣고 적당히 무시해주는 타성을 먼저 학습한다.  

그러나 이 책들에 관한 불온한 상상들을 선포한 저자의 이 첫소설집은 인간성까지 좋은 퀸카를 존재감없는 중매쟁이 덕택에 불시에 만난 듯한 환희를 선사한다. 시대와 지역을 종횡무진하며 책에 관한 역사와 숨은 얘기에 서사를 가미한 열 편의 얘기는 픽션의 형식을 띤 책에 관한 아담하고 내밀한 역사이다. 

저승에서 저마다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한다는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 패설에 빠진 조선 사람들의 얘기인 상동야화, 분서의 역사, 인피(사람의 피부) 장정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일본 에도시대의 걸어다니는 책대여점 가시혼야를 두고 벌어지는 기담, 말하는 사람을 책으로 대여하는 얘기, 장서가들, 중세유럽의 도서문화, 책도둑, 표제작인 순례자의 책 등 애서광들을 달뜨게 할 매혹적인 책에 대한 얘기가 인문학적 해설과 함께 다채롭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애인의 어깨피부로 장정한 실제 사례를 통한 책의 몸에 관한 시선과  역으로 사람의 몸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 것에 대한 얘기는 문자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접촉 불가한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쉬고 호흡하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 확장되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전자책의 등장과 각종 영상매체들로 인한 문자텍스트에 대한 경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또한 살아나가는 일 그 자체가 삶으로 엮이고 그 삶이 하나의 텍스트로 치환되어 장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하나하나에 대한 존귀한 무게감을 실어주는 일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역사가 죽는 것이다. 누구나 등에 자신의 삶의 장서를 지고 다닌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나그네들에게 "말하소!"라고 외쳐대며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열망했던 것은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삶을 이야기화하려는 경향과 그것에 매혹당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보르헤스처럼 천국을 도서관으로 상상한다면 그리고 내가 과연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도서관의 사서를 꿈꿔본다.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힘이 오늘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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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겠다.. 이거 확 끌리네요.
당장 살펴보러 가야겠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나는 아침 식사 전에 불가능한 일 여섯가지를 상상하지.

blanca 2010-05-06 12:13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이 책 진짜 매혹적이에요. 픽션이라지만 책에 관한 역사에 작가가 상상력을 덧붙인 정도지 소설집이 아니라 책에 관한 소소한 얘기들을 풀어놓은 역사책 같답니다. 추천해요!

로드무비 2010-05-0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순례자의 책> 땡스투가 들어왔던데 혹시 blanca 님이 누르신 건가요?
아주 오래 전 '책에 관한 오브제전'이라는 전시회가 있었거든요.
이상하게 그 전시회가 가끔 생각납니다.
<순례자의 책>과도 통하는 부분인데, 님의 리뷰가 꽝 도장을 찍는군요.

blanca 2010-05-06 12:53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맞을 거예요^^ 책에 관한 오브제전이요? 아, 듣기만 해도 가보고 싶어지네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결말부를 조금 남겨두고는 옮겨탄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을 다 읽고 난 후 인터넷에 접속하자 천안함 사고는 북한의 소행이 거의 확실하다는 미고위관계자의 발언이 포탈 대문에떴다. 미국을 지배하는 , 아니 전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세력은 군수산업의 활황을 고대하며 사람들이 전쟁신드롬에 사로잡혀 있도록 세뇌한다. 그들은 공장의 가동이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 전시체제는 일반인들이 느끼는 생존과 안위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걱정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인 투기의 기회다.   

 

론 처노의 <부의 제국 록펠러>에서 그의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자본가적 면모보다는 고결하기까지 했던 자선제국에 경도되었던 시간들이 이 <제1권력> 앞에서는 고도의 치밀한 기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함을 가지게 한다. 물론 전자는 존 D. 록펠러 개인의 삶을 근접거리에서 촘촘히 복원해 낸 것이고 후자는 록펠러 개인 그 자체보다는 그 가문 전체가 모건 가문과 연합하여 어떻게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전체를 거대한 투기의 장으로 변질시켰는지에 대한 비판적 통찰의 프리즘을 통과한 해석이다. 또한 같은 미국인이 자국의 거부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의 심정을 바탕으로 중립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과, 바깥에서 일본의 반전운동가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로서의 전제를 바탕으로 그 탐욕스러움을 조망한 것은 분명 본질적인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 차이점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면 한 가문에 대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시선과 자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느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고도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제1권력>은 모건가록펠러가, 이 양대 자본가가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각료직에 자신의 충견들을 앉혀 암암리에 백악관을 두 집안의 하수인들로 채우고 수송, 자원, 과학, 기술, 식량, 정치, 군사, 사법, 보도, 오락 등 전분야들을 어떻게 좌지우지한 지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의 다양한 중대사건을 추려낸 후, 이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의 가계도를 작성하여 모건가와 록펠러가와의 은밀한 연결망을 들어냄으로써 역사의 진상을 모건-록펠러의 언어로 다시 써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결과는 소름끼치도록 경악스럽다. 1.2차 세계대전, 나치스, 매카시즘, 노벨상, 올림픽, 케네디 암살, 워터게이트, 한국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아카데미상 등 굵직한 사건들과 조직중 어느 하나 이 음험한 자본가들의 계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평화로운 중립국을 표방하며 유유자적하는 스위스의 바젤클럽, IBRD,IMF, UN  등도 기실은 모건과 록펠러들의 수족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수많은 대의들, 진실한 가치들은 하나의 기만과 연극으로 치환되고 오직 물적 지배력의 유지와 확장에 사로잡힌 탐욕의 전형들은 규벌을 형성하여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각계각층에 자신의 의붓자식들을 심어 놓는다.   

또한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미국 자본과의 결탁은 추잡스럽기까지 하다. 기실은 히틀러를 용인하고 그의 자금력을 키워주었다는 얘기다. 평화주의자 근절을 위하여 파시스트 전술을 택한다게 논리로 작용했다. 돈 앞에서 가치사전은 분서되어야 할 모양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한국과 미국이 군사협정을 이미 맺은 터였고, 51년~53년 네바다주에서 무려 30회나 핵실험을 하다 휴전 한 달전 갑자기 중단했다는 얘기는 록펠러가와 모건가가 개전 날짜와 종전 날짜를 정확하게 인지했었다는 얘기와 맞물려 전쟁 촉발의 중추를 짐작케 한다.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 새벽의 그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점 갑자기 북한이 남침하였다는 그 도발의 서사는 하나의 우스꽝스런 내러티브로 전락한다. 한참후에야 그것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막상 그 전말을 일본인 저자의 입으로 듣게 되다니 아이러니하다. 다카시는 이 전쟁이 원.수폭 예산을 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저들이 우려한 휴전으로 인한 군수경기침체가 현실화되지 않아 만족해한 모습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쓰는 역사라는 것이 과연 가능은 한것인가에 대한 무력한 절망감마저 자아낸다. 아니, 과연 우리라는 주어를 동원하는 것이 하나의 기만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휴전 이후 베트남 전쟁을 개시한 것에 대한 저들의 주도면밀함도 결국은 전장이 아닌 하나의 투기장을 예비하고 무고한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동원한 잔인함인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아홉살 오스카는 수많은 각본과 각종 낭설과 추측이 난무한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는다. 오스카는 일본에서 미국의 원폭투하로 딸아이를 잃은 엄마의 인터뷰 내용을 반아이들 앞에서 틀어준다. 정작 버섯구름을 목격하지는 못한 그녀는 상처에서 구더기가 끓는 채 죽어가는 딸아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죽고 싶지 않다, 고 절규하던 모습. 인간에게는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살고 싶고 숨쉬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이런 기본적인 일들이 거대한 탐욕과 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음모 앞에서는 자질구레하고 짓밟아도 되는 것으로 전락한다. <제1권력>을 읽으면서 오스카가 떠올랐고, 러브 어페어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오버랩됐다. 수많은 연인들의 기다림과 만남의 낭만의 상징인 그곳이 이 음험한 세력들중 하나로 백인극우세력인 K.K.K를 지원한 듀폰의 부사장이었던 이의 작품이라는 대목은 그 낭만마저 퇴색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랑을 얘기하고 진실의 아름다움에 기대는 모습이 유치하고 설익고 심지어 무지한 것으로 전락하는 시대를 경멸해도 될까. 그래도 결국 역사에는 자정능력이 있고 생명이 숨결에는 향내가 스며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도 괜찮을까.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 더이상 슬픈 일이 아닌 시간들을 살고 싶어진다. 

P.S. <제1권력>에서는 할리우드의 진진한 뒷얘기와 스타들의 정치권과의 결탁에 관한 얘기도 맛볼 수 있다. 젊은 남자에게는 매력을 못느낀다는 케서린 제타 존스의 남편 마이클 더글러스의 용기있는 행보가 인상적이다. 그의 엄청난 재력과 능력에 대한 열변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GE의 사원이 원자로 사고 위험성 경고한 행동에 제인폰다와 함께 용기있는 지지를 보여주었단다. 그의 아버지들 커크 더글라스와 헨리 포드가 할리우드 빨갱이 사냥시절 역시 용기있고 결단력 있는 태도를 보여줬던 것과 연결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거의 유일한 진실의 편에 선 사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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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1권력, 사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도저히 소화를 못 할거 같아서 포기했는데, 블랑카 님이 리뷰를 올려주셨네요... 참, 저번에 제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같은 책은 평생 안 읽을거 같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블랑카 님의 (의식하지 못한) 엄청난 영향력에 의해서, 주문을 했답니다. 아하하.. 읽어야 하는데. 끄응. 책이 하두 밀려서~

blanca 2010-05-04 09: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는 요새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답니다. 다 읽고 주문하기. 이거 정말 힘들더라구요. 읽고 싶은 책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생각해 보고 주문하려고 애 쓰고 있구요. 엄청나게~는 끝부분을 못읽었어요. 제1권력은 강추입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지금 책 주문하고 빠뜨린 책 생각나서 추가로 하려했더니 출고되어 가슴아픕니다.

순오기 2010-05-04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는 님이 존경스러워요.
어려운 책을 못 읽는 나는 그냥 올려주는 리뷰로 만족할래요.^^

blanca 2010-05-04 09:06   좋아요 0 | URL
만족하실 만한 리뷰를 써야 할텐데요^^;; 봄감기가 아주 매워요--;; 순오기님도 조심하세요!

마노아 2010-05-0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서 다음 책 주문하기! 늘 새겨보지만 절대로 안 되고 있는 부분이에요. 이 글을 읽고 나니 이 책도 꼭 읽고 싶어졌어요. 아, 그치만 주문은 다음으로 미룰래요..ㅜ.ㅜ

blanca 2010-05-05 17:42   좋아요 0 | URL
거짓말한 셈이 되어버렸어요^^;;지금 서점 구경갔다 또 왕창 주문했어요 ㅋㅋㅋ 그러니 마노아님께 다 읽고서 주문하기 운운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pw0607 2010-05-20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제1권력>은 히로세 다카시의 다음책을 기다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blanca 2010-05-20 13:43   좋아요 0 | URL
이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계획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 책도 사실 꽤 된 책이라는 데 놀랐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lkj0850 2010-06-24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전 딴지 리뷰보고 제가사는 동네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서 황급히 읽어 보았습니다.. 한 2년 전인가 인터넷에 떠돌던 영상과 흡사하던데... 그 영화제목을 잊어버리고 말았네여.. 영화내용과 책의 내용이 넘 흡사해서..이번주에 겨우 다 읽긴했는데
시일을 두고 다시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드네여.. 과연 그 많은 전쟁은 뭘 위해서 필요했던것인지... 많은 의문을 갖게하는 책이었습니다..허리우드의 빨갱이 사냥도 그렇고,핵개발도 그렇고...

blanca 2010-06-24 15:44   좋아요 0 | URL
lkj0850님 반갑습니다.^^ 아..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딴지 리뷰도 한 번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예전 글을 읽어 주시니 괜시리 고맙습니다.^^
 

역사가 존 D. 록펠러에게 최후의 평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마땅히 그가 의학 연구에 기부한 행위가 인류의 진보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이어야 한다. 과학은 처음으로 머리를 얻었다. 보다 장기적인 대규모 실험이 가능해졌고,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재정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이 교황과 군주들의 후원에 힘입었던 만큼이나, 오늘날 과학은 관대하고 통찰력 있는 부자들에 빚지고 있다. 이러한 부자들 가운데 존 D. 록펠러는 가장 훌륭한 전형이다.
                                                                                                                                                -윈스턴 처칠
                                                                                                     

는 떠돌이 난봉꾼에 아내 몰래 다른 여인과 중혼한 아버지의 가장 역할을 대신하여 열 여섯 살에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찌는 듯한 8월의 찜통더위속  6주 동안 매일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노동 끝에 마침내 위탁판매회사의 보조장부계원으로 취직한 9월 26일을 그는 평생 취직기념일로 기억하게 된다. 

소년 시절부터 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돈의 주인이 되기를 갈망했고 빨간 장부A에 수입과 지출을 기록해 나가며 십만 달러 부자의 꿈을 꾸었던 존 D. 록펠러평범한 대중들이 갈망하는 물질적 부의 성취와 고결한 삶의 지향을 몸소 구현한 모순적 존재이다. 그는 미친듯이 벌고 미친듯이 저축해 폭포수처럼 자선을 베풀고 삶의 장막 뒤로 퇴장했다. 록펠러는 치졸한 거부의 전형과 위대한 자선의 전범을 동시에 구현하였기에 드러난 행적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과 비밀스런 삶에 대한 각종 추측들과 억측들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딜레마를 가진 인물이다.  

누군가의 삶을 대물렌즈로 들여다 보는 일은 어느 정도 염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까. 어떤 측면으로든 위대하다고 평가받은 이의 삶은 한층 더 그러할 수 있다. 성취의 길목에서 불현듯 마주치는 수많은 유혹들에 대한 타협과 굴복은 더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의 삶을 조준하는 일은 그의 삶 전체를 주변인들과 시대적 배경과 치밀하게 직조해 낸 하나의 커다란 밑그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려깊게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 전기를 쓰는 일은 그래서 애증의 작업이다. 드라마틱한 삶의 서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픽션적 감동의 잠재태다. 이 소중한 자료를 얼기설기 엮다 보면 그 과정에서 빈약함과 허술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고 더없이 위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론 처노는 이 모든 것을 해냈다. 완벽에 가깝게. 금융전문가로서 19세기의 자본주의의 태동의 그 정열적이고 무모한 과정을 섬세하고도 사려깊게 재현해 냈고 그 속을 종횡무진 누비며 최초의 다국적 기업을 건설해 냈던 록펠러의 열정어리고 때로는 치기어린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인생의 황혼에서 자신의 부의 제국을 자선의 제국으로 치환해 나가는 그 드라마틱하고도 예술적이기까지 한 고결한 모습을 우아하게 그려냈다. 또한 유려하고 깔끔한 번역으로 론 처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복원해 낸 번역자들에게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 사기꾼 아버지와 독실한 침례교도의 어머니 사이에서 

록펠러는 야누스적 인물의 전형이다. 탐욕적 자본가와 고결한 자선가가 공존하는 그의 모습은 사기꾼 의사로 행세하며 떠돌아 다니다 마침내 가족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중혼을 한 아버지 빅빌과 그런 남편을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며 여섯 아이를 키워낸 어머니 엘리자가 빚어낸 조합이었다. 그는 평생 독실한 침례교도로서 극도의 절제와 절약으로 돈에 대한 색정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잔상을 지워내려 애썼다. 걸핏하면 집을 떠나 남은 가족들이 외상을 깔며 생활하게 만들다 불시에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처럼 나타나 그 외상을 자랑스럽게 갚아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록펠러가 돈에 대한 하나의 착각어린 맹목적 애정을 가지게 된 하나의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돈을 불확실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자 가족적 안정의 중추점에 놓인 것으로 이해했다. 청소년기 일하던 사무실 금고에서 사천달러 수표를 몇 번이고 꺼내보며 황홀해 했던 그의 모습은 잃어버린 부정에 대한 하나의 대체물로서 그것이 자리매김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돈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항상 돈과 함께 나타나 가족을 안심시켰으므로.   

# 현대의 자본주의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언들

19세기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의 모습은 21세기 한국의 삼성과 닮아 있다. 스탠더드 오일은 수많은 자회사를 간부위원회하에 통제하고 소유하였으며 노조의 합법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경쟁적 위치에 있는 정유회사들을 파멸키시거나 사들이며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여 업계를 장악하였다. 당시 석유수송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철도회사와는 비밀리에 카르텔을 맺어 독점적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였다. 정계에는 반독점 법안을 결렬시키고 거대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추진을 펼칠 의붓자식들을 심기 위하여 비자금을 살포하였다. 수많은 비리와 독점행위에 대한 소송에는 뻔뻔하고 거만하고 무책임하게 대응하여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의 거대 기업과는 달랐던 점이 있다. 물론 이후의 행보를 지켜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는 경영권을 제3자에게 넘겼고 기업의 이윤을 공공의 재산으로 간주했다. 이윤의 착취 과정의 논란과 노조에 대한 인식의 편협함에서는 그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결국 결과론적 이윤의 상당 부분을 공공의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공적 책임을 방기하지 않았다. 또한 아들 주니어 록펠러가 결국 노동자들의 파업을 중재하고 그들의 처우개선과 노조의 결성을 인정함으로써 가장 아픈 상처를 들어내는 용기있는 결단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모습은 후손들의 유전자에도 각인되어 흘러내려 오고 있다. 거대 독점 기업이 해체되고 그 후신으로 남은 엑슨 모빌의 주주로서 경영의 합리와와 환경친화적인 주주 결의안을 내어 놓은 그들의 모습은 현재가 과거로 화석화되는 것만이 아님을 방증한다. 우리의 모습은 결국 미래 후손들의 예고와 다름아니다.  

또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거대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과감하게 해체하며 반독점법을 천명하는 대목은 오늘날 우리 시장 경제에서 정부가 해야 하는 역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 경제적 이권과 맞물려 있는 거대 자본과의 손쉬운 결탁대신 그 재벌을 상대로 외로운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시장질서 구현을 위해 분투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돌올하다. 정치잡종이라 불렸던 그가 스스로가 내세운 자본주의의 윤리적 대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우리의 주인공인 록펠러를 잠시 뒤로 밀어놓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 자선 제국의 건설, 그 아름답고 합리적인 도정

록펠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의 도덕적 뼈대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베푸는 법에 대하여 고민했다. 그의 자선은 즉흥적이거나 과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퇴임후 하루에 한 시간씩 자선을 위해 일했던 그의 자선은 체계적이었고 미래지향적이었으며 겸손했다.  거액을 기부한 대학이나 설립에 참여한 기관에도 교수 임용이나 표현의 자유에 결코 간섭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 선행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자선은 과거의 탐욕스러운 자본을 기반으로 한 악업에 대한 회개의 개념도 아니었다. 십대 시절 1달러를 벌 때도 10센트를 기부하고 그만의 '장부A'에 기록해 둔 전례를 봐도 그의 자선은 신앙으로 체화되어 성장했던 것 같다. 양면적인 의미로 그는 돈에 대한 확실한 지배 개념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돈을 제압하고 마침내 거기에서 자유를 얻었다.  

# 거부의 가난했던 자녀들

여덟살 때까지도 이 거부의 외동 아들은 누나들의 원피스를 물려 입어야 했다. 실제 그는 성장과정중 자신이 부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록펠러는 집안에 모의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아이들에게 회계장부를 꼼꼼하게 기록하게 했다. 아이들은 집안일을 해서 용돈을 벌었고 자전거를 한 대 사서 네 명이 돌려타며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자녀들은 장성해서 배우자 문제, 혹은 칼 융의 정신분석에의 지나친 경도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기도 했지만 예술가와 가난한 자들을 자신이 가진 것들로 도와주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5대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록펠러가가 다른 재벌가들과는 달리 후손들의 사치, 향락, 방탕한 사생활들로 회자되지 않을 수 있었던 연유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극도의 억압적 가풍은 자손들의 신경질환으로 발현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는 절약은 해야 될 때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등유 포장 깡통의 납땜 한 방울을 절약할 것을 권고하여 수십만 달러를 절약한 사례를 위시하여 그의 구두쇠 근성은 여러 곳에서 에피소드를 낳았다. 그는 돈이 적절하게 쓰이지 않는 것을 못 견뎌 했다.  

 

# 거인 평온하게 눈을 감다 

백 살까지 사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애버뉴 침례교회의 융자금 전액을 대신 갚아주고 바로 그 날 새벽 잠든 상태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98번째 생일을 6주 앞둔 날이었다. 론 처노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커다란 악의 세계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선함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록펠러는 그 자신이 기대하고 확신했던 하나님의 마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며 덧붙인다. 록펠러가 죽은 뒤 아들 록펠러 주니어는 자신의 이름 뒤에 주니어(2세)라는 표현을 없애지 않기로 했다. "존 D. 록펠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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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4-2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 리뷰입니다.
록펠러는 진짜 현대 사회에서 추구하는 인물의 전형 같아요.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베푸는. 그리고 정말 미국적인 인물이죠. 감탄은 하면서도, 저는 왠지 정은 안 가여. 너무 완벽해서 그럴까요? 록펠러 전기를 저번에 사시더니 다 읽으셨네요.... 저는 요즘 융의 자서전 읽는 중 이랍니다.

blanca 2010-04-28 16:3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융 자서전도 있어요? 우아! 안그래도 여기에 록펠러 딸이 융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며 따라다니거든요. 그런데 또 프로이트가 융을 그렇게 싫어했다면서요. 그런 얘기들이 나오더라구요. 꼭 리뷰 써주세요. 저는 히틀러랑 융의 리뷰를 기다릴게요. 부담 막 드리고 있죠?^^;;

반딧불이 2010-04-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름만 듣던 록펠러에 대해 조금이나 알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blanca 2010-04-28 16:30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의 소세키에 대한 섬세한 리뷰는 제 독서를 돌아보게 합니다. 제가 더 고맙죠.

루체오페르 2010-04-2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한권을 함께 읽은 기분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잘 봤습니다.^^
ps : 칼 융 자서전의 제목은 '기억 꿈 사상' 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4-28 20:20   좋아요 0 | URL
루체님.. 오홋... 저는 지금 읽는 중이면서도 제목이 기억 안 났는데요.. ㅋㄷㅋㄷ
아..... 존경스러워라~

blanca 2010-04-28 23:16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감사합니다. 당장 찾아 보았답니다.

루체오페르 2010-04-29 00:53   좋아요 0 | URL
마녀님, blanca님 두분 다 제가 영광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록펠러도 록펠러지만 이런 평전을 지을 수 있는 저술가들이 있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가까운 일본만 해도 전기작가들이 많이 활동하더군요.

blanca 2010-04-29 15:05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기작가들은 한 인물과 시대를 재평가하는 중책을 맡게 되는건데. 이게 결국 역사관과 각종 정치 경제 정책들에도 전범이 되거나 반면교사로 역할을 할테니까요.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좀 삼천포로 빠지자면 국사가 수능에서 빠진다는 얘기듣고 정말 충격받았답니다.--;;

후애(厚愛) 2010-05-01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구요.^^

blanca 2010-05-01 23:00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요! 이미 행복하게 보내고 계시겠죠?

순오기 2010-05-0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쓴 부자였군요.
자식들이 부자라는 걸 느끼지 못하게 키웠다는 것도 대단하네요.

blanca 2010-05-01 23:01   좋아요 0 | URL
오늘 딸아이가 사달하는 구두, 펜, 다 사주면서 록펠러 생각했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