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이는 20미터의 인공호수 한가운데에 빛의 십자가는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십자가를 응시하며 결혼서약을 맺을 신랑 신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종교적 의미에서라면 그 십자가에는 젊은 예수가 지상의 인간들의 대속을 위하여 그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지점이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지상의 인간들은 유한의 존재에게서 무한의 가치를 기대하며 서로에게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악머구리 끓듯 울어대는 절창들이 약간은 음산한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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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수, 십자가, 그리고 신자석, 통로를 밝혀주는 촛불. 건축가 안도 다타오가
이것들을 통하여 말하고 싶어했을 것들과, 정작 우리가, 내가 느끼고 받아들였을 감흥들은
영원히 비껴갈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신성의 대목일 수도 있겠고, 삶과 인간에 대한 냉연한
관조나 응시일런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의 삶과 인공물의 순간적인 조응을 얘기하고 싶어했을 수도 있을까.
저 십자가 위에서는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인 몰락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몰락의 지점에서 바로 인간들의 삶이, 그 새로운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는 반전은
결국 진리의 중핵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해석은 맞다. 저 십자가를 응시하며
결혼서약을 하는 우리들의 행위는 이제 이해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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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가기 전까지 이 책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평론가 신형철이 온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지칭했을 때, 그 자신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라고 정의했을 때, 나는 비평이 창작에 대한 열등감을 고루하고 편협한 쪼개기와 버성긴 현학적 어휘와 빈약한 인용문의 짜집기로 호도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정말이지 놀랍다. 읽지 않은 소설들과 읽을 턱이 없는 시들일지라도 그러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영애와 수철이의 사연들일지라도 그들의 굴곡많은 서사를 해석까지 곁들여 전해주는 중간자덕에 그들을 온전하게 알아내고 나와 통하는 지점까지 가게 되는 마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단순히 문학작품들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의 소설적 시적인 것들을 건져내어 그것을 때로는 높은 곳에서 조망하고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안보이던 것들까지 세세하게 짚어주는 역할까지 덤으로 하고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부각될 정도다. 그의 평론을 읽는 일은 그래서 나의 삶의 비평을 읽는 일과도 같았다.
특히 사랑에 대한 통찰은 물론 라캉의 그것을 참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억해 둘만하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대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대상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즉 우리는 상대의 존재보다 더 큰 그 무엇을 길들이기 위하여 분투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명민한 평론가는 모든 명명은 어떤 실패의 흔적이라고 덧붙인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이 실패한 사랑으로서의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 존재를 초월해 확장해 나갈 수 그 어떤 것에 경도되는 것, 심지어 그것마저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얘기다. 모순 같지만 이끌리는 얘기다. 그에게는 그래서 작별한다,는 능동의 동사가 사랑 앞에서 가능하다.
"너는 안아도 안아도 다 안을 수 없어 너는 두근거리는 무한이야."(김혜순의 무한특보 중)
그에게 있어 타인, 자아는 실재가 아니다. 타인의 타자성은 종국에 나의 자아상을 비추고 확장하는 조력물로서 폄하된다. '나'의 근원적인 욕망과 충동에 집중하고 타인의 그것은 무시해 버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집요하게 걷어내는 관계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허를 찌르는 대목이다. 우리는 참혹하고 덜 아름다운 주체를 아프게 직시하고, 타인을 대상으로 소비하는 그 습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는 강변하고 있다. 사회가 부여하는 외재적 습속이 아니라 스스로가 낳은 내재적 윤리의 규준에 근거하여 세계를 스스로 열어야 하고, 바로 그 길목에 문학이 자리한다고 그는 얘기하고 있다. 타인의 자장을 감지하고 그 속의 고통에 연루되는 것을 책임으로 인식하는 그의 모습은 바로 문학을 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닮아야 하는 바로 그 부분이고 또 문학이 떠맡아야 할 가장 긴요한 책무를 보여준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주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는 얘기다. 주체 이전에 먼저 타자가 있고, 존재론 이전에 우선 윤리학이 있다.
-p.165
작품의 의미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비평 작업이 텍스트가 '창안'하고 있는 어떤 '삶'의 위상을 진단하는 작업과 결합해야 한다는 그의 비평론은 그래서 지극히 윤리적이다. 결국 우리가 얘기하게 되는 것은 '삶'이다. 또한 삶이라는 것 자체가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영위되는 한 그에 대한 얘기는 타자와의 엇갈림, 끌림, 어우러짐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래서 텍스트를 비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녹아든다.
삶의 좌표를 흔들고 몰락하여 새로운 장으로 뛰어드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문학은 시작된다. 그것은 삶으로 치환되어 해석되도 무방하다. 외형적으로 성공한 삶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성공한 인생으로 상찬되는 사회에서 그 이면을 들여다 보고 참혹하고 덜 아름다워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진리로 걸어들어가는 절절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실재와 진리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 얆은 막을 투과해 들어오는 것들에 시선을 돌리며 이 책을 안내서로 가지고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