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폰의 최대 단점은 한 방에 훅간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싶었다. '한 방에 훅간다'는 표현을 정말이지 써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예기치 않게 전화를 걸면 안되는 사람(오 년동안 연락 한 번 없었던 사람, 전직장의 상사 같은)의 전화번호에 살짝 집게 손가락이 닿아 그 사람과 수인사를 나누고 되게 말아버리는 상황 같은 것이 생긴다. 통화음이 가기 시작하면 더욱더 정신이 없어져 종료 버튼을 어떻게 활성화시켜야하는 지 같은단순한 매뉴얼도 머얼리 떠나 버린다. 다른 사람이 구경좀 하자고 가져갔다 벌어지는 사단도 꼭 이런 것들이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지를 않나. 그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또 통화 버튼을 스치고 만다. 이 정도면 가히 미칠 지경이다. 화도 못 내고. 발신음이 두 번 가는 동안 상대의 기지국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고 마음대로 종료시켜 버린다. 설마 부재중 통화가 뜨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알 도리는 없다.  

이래저래 화가 나서 끓여 먹은 라면 세 젓가락에 가열차에 깨서 울어대는 아이 소리. 가까스로 다독여 놓고 나오니 밤 열 시 반에 갑자기 벨 눌러 주시는 택배 기사님. 이 책을 가지고.  괜시리 겁나 양 다리를 쫘악 늘여 여차하면 튈 기세로(아이를 나두고?)  받아들고 제목을 읽으니 더욱더 우울해진다.

김훈도 공지영도 신간을 내고 께작께작 읽는 하루키의 <먼 북소리>도 나쁘지 않은데 갑자기 책이 너무 많고 건성으로 너무 많이 읽었다,는 우울한 자각이 엄습한다. 11월인 게다. 올해도 나는 누구 엄마로 그것도 그다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엄마로 한 해를 보내고 만다. 잘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오리무중이다. 열심히 정성스럽게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고 싶은데 방법도 방향도 모르겠다. 되지 않을 꿈을 꾸는 일도 피곤하고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손 놓자니 사는 것 같잖고 정작 가장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소소한 재미들도 다 값없게 느껴지고 다만 카푸치노에 계피가루 뿌려 먹는 게 맛있다는 것만 알았고. 포도농사와 사과농사가 풍작이라 맛있다는 것밖에 모르겠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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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 고민을 소소하게 들어주고, 꼭 해야 할 말, 내가 꼭 기다리는 말을 잘 표현해 주는 진중한 사람이요.

새벽 세 시에 전화가 오지 뭡니까. 받아봤더니 어떤 낯선 나라의 지하철 소리가 들렸어요. 아무리 귀를 쫑긋, 해봐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지하철 소리요. 낯선 나라에 삽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지하철 소리를 감상했어요. 네가 모르는 일 분간,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라고 살짝 이야기하면서요.

새벽 세 시에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는 법이지요.

blanca 2010-11-03 13:28   좋아요 0 | URL
지하철소리...쥬드님 그 전환 실수가 아닌 표현일 것 같아요. 너 듣고 있지? 나 여기 있어. 널 생각하며...

마녀고양이 2010-11-0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웃느라. 미안.

1. 한방에 훅간다는 표현 너무 잼나죠? 이리저리 쓸 수 있는 정~말 쓸모있는 표현!
2.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샀어요? 나두 사놨는뎅, 아직 못 읽었어요.
지금 충분히 블랑카님 잘 하고 계시는데요, 분홍공주님 아직 어린데, 그 시간을 타서
많은 책들을 읽으시잖아요. 안 그래도 어제 지인과 블랑카님 리뷰는 나이(?)보다 더욱
깊이가 느껴져서 좋다, 그런 글 표현 재능은 타고나야 한다 부럽다.. 이런 얘기했는걸!

오늘 좋은 일 가득 생길거예요!

blanca 2010-11-03 13:30   좋아요 0 | URL
마고님 따라한거잖아요 ㅋㅋ 고마워요. 정말. 격려가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프레이야 2010-11-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블랑카님이 무지하게 화가 났군요.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요.
화를 안 내는 것보다 내는 게 좋대요. 그러나 5분이상 화를 내고 있으면 내탓이라네요.
화를 내고 다스릴 줄 알아라는 말인데 블랑카님은 이런 멋지고 귀여운 글로 이미 잘 다스리고 있네요.
역시 사랑스러운 블랑카님.^^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우리 이렇게 말해주자구요, 정말.
너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 ㅎㅎㅎ

근데 왜 이런 글에 추천 세 번 안 눌러지는거얌 ㅋㅋ
화풀리라고 기합 대신 세 번 누르고 싶은데..
아니 이미 풀리신 거죠?^^

blanca 2010-11-03 13:32   좋아요 0 | URL
프야님이 주신. 에너지가 왔어요. 기분이 나아진 이유가 있었군요! 화도 나구 자학도 하고 그랬거든요--;;

like 2010-11-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간다는 내용 졸업학기 교양 심리학 강의에서 들었는데, 아예 책 한권으로 나오는 군요.(살 날도 줄어가는데 시간마저 빨리 가는것처럼 인식된다며 씁쓸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원인은 잊어버렸네요~)

아직 계피가루 뿌려먹는 카푸치노맛은 잘 모르겠지만,오늘 우유거품 잘내는 비법을 조금 알게됬다는...

blanca 2010-11-03 20:45   좋아요 0 | URL
아, 이런 강의를 들으셨어요? 카푸치노는 사먹는 카푸치노요^^;; 집에서 핸드드립해 먹다 넘 맛이 없어서 어쩌다 한 번씩 사먹고 있어요. like님은 우유거품까지 내실 수 있어요? 우아!

비로그인 2010-11-0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는 매일이 새로운데, 나이가 먹으면 매일이 똑같아서.
그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내가 마치 시계의 톱니, 아니 톱니를 잘 돌아가게 하는 흔해빠진 윤활유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blanca님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적당한 온도의 빈 방에, 약간의 먹을거리와 함께 나 홀로 있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네요.

잠시 책등이 다 휘어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을 손에 들어 봅니다. 좁은 방이지만 방을 거닐고 있는 시간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는, 딱 적당한 속도와 적당한 걸음걸이의 문장들이네요.

일상에서 blanca님의 속도에 맞는 뭔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시길요 ^^

blanca 2010-11-04 12:58   좋아요 0 | URL
아, 바람결님! 저 안그래도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에 관심이 있었어요. 나이가 먹으면 매일이 똑같다 는 말 동감가면서도 참 서글퍼져요. 저는 중년 이후에 더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너무 큰 꿈일까요? 바람결님, 그럼요. 무언가를 원할 때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여건이 때로는 참 큰 행복이자 사치일 수 있어요. 아이를 낳고 정말 여실히 느꼈답니다...

2010-11-0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4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1-04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좋아요. 삼년 전쯤 읽고 정말 좋아했던 책입니다.
그런데요, 전 지금 시간이 안가서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면서 시간 가는 게 또 너무 아까워요.
상대적으로 젊은 내 시간이 가는 게 슬퍼요.

blanca 2010-11-04 13:02   좋아요 0 | URL
쥬드님....저는요. 시간이 안가서 미친다,는 말 너무 슬퍼요. 그 느낌을 알아요. 경우도 달랐지만. 쥬드님 맞아요. 소중하고 이쁜 시간들이 흐르면서 정말 가야 하는 시간은 고여 있는 느낌. 쥬드님을 안아드리고 싶네요....

비로그인 2010-11-05 15:28   좋아요 0 | URL
조금이라도 젊을 때, 일도 더 많이 하고 싶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더 하고 싶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이런 일들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다리는 일들은 더디게 드문드문 찾아오죠.
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알아 주시는 블랑카 님. 고마워요.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은, 어긋나면 그걸로 끝이고 어긋남의 유무를 바로 알아챌 수 있는데 블랑카 님은 늘 제가 앞뒤를 뭉텅 잘라먹고 말해도 귀신같이 알아내어 주시곤 해요.
 

올해 들어 유달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뒤편이 아니라 스무 살 고 언저리를 맴돈다. 올해들어 나의 기억, 누군가의 기억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참혹한 기억을 되뇌는 그녀에게 나는 그 기억이 한층 비극적인 것으로 윤색됐을 수도 있다고 정말 그런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올해들어 나는 고유 명사에서 번번히 미끄러진다. 어떤 얘기를 누군가에게 아주 그럴 듯하게 해주고 싶은데 고유 명사 부분에서 자꾸 주춤추줌하며 스타일을 구기게 되었다.  

그.리.고. 삶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그 커다란 비실재적인 공간의 허무함과 집착에 놀라게 되었다. 나는 결국 지금 이곳에 만질 수 없는 것들이 허룩하게 뭉쳐진 덩어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삶 그자체를 불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기억만을 남긴다. 다 헛것이었어. 결국 삶은 기억의 덩어리, 추억으로 마침표를 찍고 마는 거야.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이 얇은 책은 기억의 그 매혹적인 오류와 부푼 부피감을 적시한다. 사례 중심의 평이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있던 스무 살 언저리의 그 기억의 돌연한 귀환에 대한 현상이 나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노년으로 갈수록 그들의 청춘 언저리의 기억들이 득달같이 뒤쫓아 오는 망각의 역현상에 대한 얘기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기억들은 그 근처에 머무는 것들이 아니라 더 먼 곳 아득한 곳에서 미숙함, 열정, 아쉬움 등으로 둘러싸인 채 도사리고 있던 이십 대의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은 채 그저 그 시기가 가장 기억하기 위한 최적의 메커니즘을 지닌 시기여서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은 떠올리지 못하는 스무 살의 기억들이 여든이 넘어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묘한 기대감을 갖게도 한다.  

강남역 타워레코드 앞에서 그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달려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첫사랑의 가능성은 인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뚜욱뚝 끊기고 만다. 닭갈비를 먹으러 가서 어색하게 서로 웃었던 것도 같다. 그 공백은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듯 나의 주름 사이로 다시 차오를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타워레코드에서 뒤편의 닭갈비집으로 가면서 나누었을 그렇고 그런 호구조사나 안부교환의 사연을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중략> 추억은 불러냄으로써 변화한다.  
   

 

누군가를 호명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내 안에서 불러낸다. 정말 진짜 온전한 그를 그대로 내 앞으로 걸어오게 하는 대신 내가 이미지화하고 이상화하고 상상해 낸 나만의 그를 불러 세운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하고 그래서 끝나고야 만다.  

이 책에서는 우리 생애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년이 가장 적은 기억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역설을 끄집어 낸다. 노인들은 자신의 중년 이후의 삶을 복기하는 대신 어리고 여렸던 그래서 끊임없이 넘어졌던 시간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서전 분량의 비대칭은 청춘 시기에서 비롯된다. 이 역설은 대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청춘을 상찬하고 상품화하는 메커니즘이 이러한 기억의 역설과 기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아연해지고 만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나 대신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지 전혀 몰랐던 어리숙한 나의 귀환을 나는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종착역이라는 것을 알 때 돌연 방향을 틀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참이나 걸어 강남역으로 가는 모습은 서글프고도 기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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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30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쏭달쏭.

물음표와 마침표.
네. blanca님 딱 저는 그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만을 떠올릴 수밖에(그 선까지 밖에 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가 봐요.

blanca 2010-10-31 21:54   좋아요 0 | URL
제 해석이 맞다면 사이라는 건 항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잖아요. 바람결님이 계신 곳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철나무꾼 2010-10-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재밌는게요~
남자들은 노인이 되면 김영감,이영감...이렇게 부르는데,
여자들은 영자야,순이야...이렇게 이름을 부르잖아요.

추억을 끄집어 내게 되는 글,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0-10-31 21:5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벌써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을 좀 드물게 만나게 됩니다. 누구 엄마로 불리게 되구요. 노인이 되면 다시 제 이름이 돌아오는 건가요....

2010-10-3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1-03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은 그래서 참 좋아...
내 거 잖아요.
형편없던 나에 대한 추억은 망각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더욱 아름답게, 그는 더욱 왕자답게, 그렇게 윤색할 수 있잖아요.

믿지못할 기억이지만, 기억 왜곡이 가능한 점은 어쩌면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blanca 2010-11-03 20:46   좋아요 0 | URL
마고님, 그렇죠? 기냥 맘대로 기억하고 다 좋았다궁 그랬다고 나한테 얘기할래요....신이 주신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정말.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찰리 채플린 지음, 류현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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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든 후천적인 노력에서라고 주장하든 선택받은 소수의 얘기는 언제나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서사가 된다. 우리는 그럴 법한 얘기보다는 그랬던 얘기에 허풍을 곁들였을 때 흔히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미 완결된 얘기의 내밀한 속내를 들추어 내는 그 은밀한 즐거움과 누군가의 삶을 편하게 앉아 조망하고 판단하는 그 권력의 맛은 평전과 자서전의 식지 않는 인기의 한 대목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은 사실 모든 흥행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배우였던 부모님, 처절할 정도의 빈곤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희극배우로서 무성영화시대의 아이콘으로까지 부상한 드라마틱한 성공의 여정, 네 번의 결혼, 공산주의자로 몰려 끝내 할리우드에서 추방되다시피한 이력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막힌 삶의 굴곡들이 그의 입에서 더없이 무감하고 건조하게 뚜욱뚝 단속적으로 끊어져 나온다. 그 어떤 과장도 해명도 덧댐도 없이 그저 있었던 사실들을 성실하게 나열하고 갑자기 다른 기억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이런 정직한 면면이 사실 이 자서전의 한계점이기도 하고 매력이기도 하다. 융이 살아 생전에 출판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자서전이 나올 수 없다고 했던 얘기가 사실 찰리 앞에서는 조금 김 빠지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투박하고 정직하고 꾸밈없는 자서전은 낯선 만큼 독특한 이끌림을 가지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산 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고 가끔 꺼내 펼쳐보지만 이내 덮게 된다는 고백을 우리는 쉽게 친구에게 할 수는 있지만 자서전을 쓸 위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윤색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솔직하게 얘기하게 되긴 쉽지 않다. 찰리 채플린의 이런 고백들은 군데군데 불쑥불쑥 튀어 나와 듣는 이를 난감하게도 하고 또 안도하게도 한다. 이 자서전은 위대한 사람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희극영화를 미치듯이 사랑했던 영화인의 솔직담백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담에 더 가깝다. 뭉툭한 그 끝이 예리하지 않아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셈이다. 

그가 정치적인 배우로 인식되다시피 한 것도 그가 구태여 정치 현장에 대한 심오한 의식과 강렬한 투쟁 의지를 가졌기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인 우연에 더욱 가깝다. 사실 스스로가 영국인으로서의 긍지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고 애국심이라는 것 자체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단지 그는 전체주의에 대한 당연한 알레르기를 솔직하게 고백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당연한 모습이 쉽게 용인되는 사회는 언제나 조금씩 먼 발치로 밀려 나가기 마련이라 그의 이런 모습은 수시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에의 동조로 치부되는 그 뻔하고 치졸한 색깔입히기는 그 시대에도 횡행했다. 어느 순간 그는 갑자기 정치적인 배우가 되어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영국 국적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는 모습은 그 시절에도 끊임없이 안티를 양산했나 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미국을 부랴부랴 떠나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스무 살이 넘게 차이나는 유진 오닐의 딸 우나와 재혼하여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안정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게 되는 그의 모습으로 자서전은 대미를 장식한다. 찰리 채플린이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가 행복하다고 되뇌는 대목도 사실 그가 희극배우로서 눈부신 성공을 구가했던 나날들이 아니라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의 궤적들을 되짚어 오면서 결국 '사랑'을 얘기한다. 칼 융이 하나의 화두처럼 희미하게 던지고 간 바로 그 사랑이 이 위대한 영화인의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는 묘한 우연의 일치가 신기했다. 자신의 인생은 하나의 투쟁이었다고 평가하며 그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고백한다.  

구질구질한 다락방을 벗어나기 위해 친구집에 놀러갔다 돌아온 소년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점심밥 대신 "너의 엄마 미쳤대!"라는 말이었다. 영양실조로 반쯤 정신이 나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연탄재를 나눠준 엄마 앞에서 울먹이던 아이는 그럼에도 삶의 황혼기에 서서 인생의 아름다운 의미와 사랑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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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별이 세개인 것을 보니 그 재미가 채플린의 재미가 아니라 블랑카님의 글맛 때문인가봅니다?

blanca 2010-10-28 21:01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제가 요새 책에 집중이 좀 안되어서 제대로 못 읽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자꾸 각종 사념이 들어서, 큰일입니다.

2010-10-28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8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10-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이 세 개 밖에 안 되네요.
오래 전에 그의 전기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전기 영화는 잘 만들어 봤자 본전치기라고는 하지만
전 그 영화 나름 재밌게 봤어요. 지금은 별로 기억엔 그다지 남아 있는 게 없지만...ㅜ
이거 대따 두꺼운 책인데 완독했네요. 축하해요!^^

blanca 2010-10-28 21:04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대따 두꺼운 책 읽었으니 칭찬받아도 되는 거죠? ^^ 전기 영화는 보지 못했어요. 이제 두꺼운 책은 안읽을랍니다.^^;; 삼백 페이지 이하인지 확인하게 됩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멋진데, 별셋이라...
음,, 가로로 인쇄된 이상한 책을 읽은 영향일까요, 아니면 책 자체가 그냥그냥했나요?
나는 자서전이라면 홀랑 넘어가기 때문에, 무지하게 궁금해여.

blanca 2010-10-28 21:04   좋아요 0 | URL
ㅋㅋ 마고님, 이 자서전 리뷰들 보면 극찬 일색이에요. 제가 오독했을 수도 있는데 재미가 좀--;; 표지를 뒤집어 읽어서 그런 걸까요?

마녀고양이 2010-10-28 21:45   좋아요 0 | URL
음,, 추후 제가 읽어보고 판단해서 말씀드릴게요.
만일 제가 좋다하면, 제대로 된 책으로 다시 읽으셔여... 크크크.

양철나무꾼 2010-10-2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반품하세요~
읽으신 연후니까,제대로 된 책으로 가지고 계셔야죠~^^

전 책이 어떻든,찰리 채플린을 아주 애정해서 말이죠.

blanca 2010-10-29 15: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ㅋㅋㅋ 비밀글로 하셨어야 그렇게 하죠 ㅋㅋㅋ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시는군요. 이 책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름대로의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꽂아두기로 했어요. 할머니가 되어 이 거꾸로 된 책을 보면 기분이 묘해질 것 같아요..

2010-10-29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표지와 가름끈이 거꾸로 되어 있는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을 데면데면하게 읽고 있다. 교환할까 생각하다 워낙 게을러 터져 보내고 받는 그 절차가 번거로워 가름끈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괴이한 행동을 하며 생각보다 안 넘어가는 책장을 꾸역꾸역 넘기고 있다. 처절할 정도로 빈곤했던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 잭팟이 터지듯 재능이 시의적절하게 발화하고 톡톡한 보상을 받는 그 대목들을 넘기면서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닌데 하필 이 사람이 그럴 수 있었던 동인이 뭔가 반문하게 된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다.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중

 
   

 

그건 정말 찰리가 다른 누구보다 더한 극한 상황에서 몇 배의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까? 동시대의 궁핍과 특출난 재능이 그만을 조준할 걸까? 설사 그랬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대가로 보상받게 된 필연성을 지녔을까? 이런 식의 의아함들을 품고 누군가의 드라마틱한 성공 여정을 따라가는 것은 자서전의 바람직한 독자의 태도가 아닌 것 같다. 한 마디로 몹시 비딱하게 책표지까지 거꾸로 들고 줄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리며 하는 요즘 나의 독서는 나의 마음 같기도 하다. 

십여 년을 들락날락하는 까페에서 누군가가 심하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됐다. 닉네임으로 통용되는 그녀의 그 상처를 주기 십상이라는 댓글을 나는 사실 기억하지 못했다. 우르르 나도 상처 받았다,고 호응하는 과거의 기억 들추기 댓글들에서 슬며시 나도 그녀가 다른 사람한테 단 어떤 댓글로 간접적으로 상처받았었다,는 기억을 끄집어 내게 되었다. 이유는 원글이의 경험이 나와의 것과 흡사했고 그녀는 그것을 한 마디로 아주 부정적인 것으로 단정짓는 심판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면 그것에 맞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것에 심하게 화르륵 하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그 뼈아픈 독소에 데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을 그녀는 용케도 집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그녀의 댓글이 아팠다고 댓글 하나로 이미지화한 그녀 전체를 매도하는 모습도 섬뜩했다. 누군가를 지목해서 한꺼번에 욕하기는 너무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대열에 참여하는 것도.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나도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은 내가 그 누군가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비겁한 안도 밑으로 슬몃 가라 앉고 만다. 사이버 공간은 그래서 자판을 치며 튕겨나갈 칼날을 벼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원래 소심한 성격이 직장 생활도 따악 그런 분야로 가서 더 소심해지고 나이가 들어 켜켜이 얹어지는 소심증까지 한꺼번에 엉켜 나중에 살아서 행동하고 말하는 그런 생명체가 아니라 남 눈치만 보다 구둣점 하나로 오그라들지나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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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10-2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너무나 멀고도 가까워요. 우리는 외롭고 상처받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해주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술을 마시면 중2가 되는 거 같아요)

하이드 2010-10-26 03:52   좋아요 0 | URL
중2병

blanca 2010-10-26 20:02   좋아요 0 | URL
poptrash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음주 댓글인거죠 ㅋㅋㅋ 중2정도면 아주 준수한 수준이 아닌가 싶네요^^;; 유아 수준이 되는 분들도 있잖아요.

마녀고양이 2010-10-26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버 공간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니, 더 경솔해지고 더 무책임해지고 더 극단적으로 나가는거 같아요. 배려가 부족해지기 쉽상이죠. 저 역시 그렇지만, 글과 사람이 같다고 보기는 어렵죠. 글은 실제 보는 모습보다 훨씬 포장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많은 생각과 많은 반성과 많은 희망, 가을에 어울리지 않나요?
블랑카님,, 힘내요. 지인이 제게 한 말 중에 "타인은 생각보다 당신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충고해주었는데
그게 묘하게 안심과 위안을 가져다주고 있어요.... 위축된 나를 다독이게 되더라구요.

blanca 2010-10-26 20:10   좋아요 0 | URL
그 분의 충고는 제가 유념해야 될 얘기인 것 같아요. 날씨도 갑자기 추워지고 연말도 다가오고 하니 괜시리 더 위축되는 것 같아요--;;

2010-10-26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6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2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품 그거 몬 할거더라구요.
저는 한 10쪽이 잘못 된 책 한권 교환하기 위해 10여일을 허비하고 있는걸요~ㅠ.ㅠ

blanca 2010-10-26 20:1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 한 저가 잘한 거겠죠?^^;; 하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좀 뭣하기는 해요. 가름끈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다 보니 무언가 아주 기묘한 행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열흘이나 걸리는군요. 저는 반품, 교환 이런 거 웬만하면 피하려고 해요.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너무 게을서러서요--;;

프레이야 2010-10-2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상의 소통만이 아닐 거에요.
일상의 소통도 얼마나 허무한지요.
오해, 몰이해, 과대망상, 이기심, 지나친 나르시즘, 이런 것들이 관계를 망치고 있어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문득 소심해져요, 저도. 평소 대담하다 생각했는데..

blanca 2010-10-26 20:1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요새 스산한 날씨에 맞추어 인간 관계에 참 저 자신을 포함해서 고민이 많이 되네요. 요새는 모든 게 너무 허무하게 느껴져요. 어릴 때는 몰랐던 관계에 들어가는 그 사악한 조종의도, 질투, 나르시즘 이런 거가 자꾸 느껴지고 보이고 저도 그런 것 같고. 그냥 푹 엎어져서 내 살이 네 살인지도 모르는 그런 편한 관계에 겁없이 묻혀가고 싶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힘들어집니다. 제 자신도 그런걸요.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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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 타협과 체념과 친해진다. 가장 비극적인 타협은 무의미와 하는 악수다. 내가 유한한 존재이고 나의 삶이 역사책의 주석 한 줄에도 끼이지 못하고 그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를 담담하게 읽어 낼 수도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악의 현존도 수긍하고 감내해야 한다.  

감히 삶의 의미, 본질 따위를 논할 수 있는 오만은 예술작품과 종교들이 떠맡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전부인 마냥 오도방정을 떠는 드라마에 중독되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자문하는 문학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착각일지라도 나의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단지 그냥 어쩌다 뻗어나온 잔챙이 정도로 나와 나의 삶이 폄하되는 것을 맨정신으로 견딜 자신은 잘 서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냥 취해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우리보다 질기다. 우리보다 세다. 우리가 죽고도 남는 것들은 쉼보르스크의 말처럼 박물관에 갈 것이다.  

독특한 자서전이었다. 태어나 살고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집착하는 것 같은 외연적인 풍경은 희미한 자서전. 오히려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인식의 성숙에 초점이 맞추어져 독자를 아리송하고 난감하게 하는 약간은 불친절한 자서전이었다. 자신의 생애가 외적인 경험면에서 빈약하다,는 프롤로그에서의 그의 엄중한 경고를 명심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자서전이 출간되지 않는 조건으로 제자이자 비서에게 이 자서전의 내용을 구술하게 된다. 여든이 넘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는 사실 좀 난감했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꿈의 얘기, 연금술에 대한 천착, 신비주의적인 태도가 낯선 이물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이물감은 어느덧 하나의 감동과 경탄의 감정 속에 녹아 버렸다. 어쩌면 불편한 낯섦이 나의 무의식의 원형으로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위해 뚫어야 했던 투박한 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융 자신도 대부분의 사람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칸막이벽'들이 투명하여 그 뒤의 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공간을 초월해 더욱더 큰 본질적인 것, 의미로운 것들과의 연결 속에서 자기를 응시하는 자아의 모습이 결국 융이 얘기하고자 하는 궁극의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의 기억들을 조각조각 이미지로 떠올리며 마치 꿈같다,고 느끼고 지금 집착하고 경험하는 것들이 순간 순간 무의미하다고 되새김질할 때 단편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실재이다. 그러니까 나는 안다. 지금의 것들이 언젠가는 다 무너지고 스러지고 마침내 '내'가 '나'라고 느끼는 이 절대적일 것만 같은 존재의 주체감마저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 허무의 지점에서 그 두껍고 무거운 철책을 더 밀고 나가 마침내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 역사들, 신화들의 거대한 원형의 흐름 속에 그 허무를 싣고 장려한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 것이 그의 위업이다. 결국 융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는, 나는, 태어나 마땅했고 숨쉬고 꿈꾸고 사랑하며 어떤 더 큰 뿌리와 의미로 내달아 가도록 되어있는 숙명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가 얘기하는 숙명은 비극적이고 허무한 의미의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론적 진동과 닿아 있는 그것이다. 그의 유신론이 교화적인 것이 아닌 지점과도 겹친다.  

다름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것을 홀로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실로 고독했다.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고 그럼에도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음에 때로 두려워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그의 절망은 아집이나 오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던 고백은 그의 노년에서도 유효했다. 그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이 너무나 큰 것이 때문에.  

인생과 인간을 무한히 크고 의미있는 것으로 세우는 일이 이 시대에는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현세의 욕구충족과 악의 현신에 걸치적거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수단화하고 기계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욕망에 비끄러 매는 것은 사실 삶과 존재의 의미를 흐리멍덩한 것으로 지워 버려야 가능한 일들이다. 생떼같은 젊은이들이 산재로 스러진 얼룩은 이미 우리가 터치하는 액정스크린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미와 다름 아니다.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매트릭스 안에 우리는 오늘도 갇혀 그 안을 자유의지로 활보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견딘다. 

그의 자서전은 의외의 마침표를 가지고 온다. 뭉클했다. 위대한 노심리학자, 의사는 어리광처럼 덧붙인다.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 <중략>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린도전서> 13:7).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결국 사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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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도 이 책 읽으셨네요.
이 책 너무 어렵지 않아요? 나는 정리를 해내기 힘들었어요.
지금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며, 아 그렇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독특한 자서전이라는 점에 동감해요~

blanca 2010-10-19 19:07   좋아요 0 | URL
마고님 따라 읽은 거예요. 마고님 리뷰 읽고...저도 생각보다 너무 안 읽혀서 왜 별점이 그렇게 높나 했어요^^;; 정말 독특했어요. 너무. 후반부로 가니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이 책을 좋아했나, 수긍이 가더라구요...그런 의미에서 마고님 고마워요...

마녀고양이 2010-10-19 19:17   좋아요 0 | URL
근데 말이죠.........
나 블랑카님이 추천한 <사도세자의 고백> 읽는 중인데,
이 슬픔을 어쩌면 좋을거냐 말이죠! 자자, 책임져요!

blanca 2010-10-19 19:37   좋아요 0 | URL
지금 여기서 놀아요. 공주님께서 늦은 낮잠 중이라 오늘 밤 어떻게 될지--;; <사도세자의 고백> 마지막에 영조가 정조한테 왕위이양할 때 완전 대박눈물나요. 저 콧물,눈물 다 뺐잖아요. 오늘밤 읽으시면 너무 슬프실텐데요.. 낮에 읽으세요^^

프레이야 2010-10-1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또 장바구니행이에요.^^
일목요연하면서도 정곡이 읽히는 리뷰, 감동적으로 가슴 울리는 한 점, 고마워요.^^
무의미와의 악수를 오늘도 하나 더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존재의 의미론적 진동과 닿아있는 숙명, 그런 값진 생과 인간으로서 나는 소중하고,
그 소중함이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나만 가치있고 명석하다고 생각하는 현대판 나르시스들에 비해 노자나 융의 말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blanca 2010-10-19 19:3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를 너무 띄워 주십니다.^^;; 꼬옥 소장하고 천천히 읽어 볼만한 책인 것 같아요. 사실 초반부에 좀 지루해서 덮어버리고 싶은 욕구도 좀 있었지만 역시 많은 리뷰어들의 극찬이 맞더라구요. 프레이야님, 언제나 저의 서재를 방문하셔서 소중한 댓글 달아주시니 고마워요. 저 그 이쁜 사진 보고 말았잖아요^^;;

2010-10-19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0-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융의 이런 면이 있었군요.

<인간과 상징> 에서만 그를 만났었는데.. 말이죠. 올려주신 글을 읽으니, 그의 눈길이 느껴집니다.

blanca 2010-10-20 21:41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융이 솔직히 비호감이었는데 대략 그의 무게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구요. 이렇게 내면에 줄곧 전 생애를 걸고 천착하는 것, 아무나 못하는 거잖아요...<인간과 상징>은 못 읽어봤어요. 정작 그의 저작은 읽어 보지도 못하고 아는 체 한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양철나무꾼 2010-10-20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융은 융만으로 읽히지 않고,프로이트와 묶어 세트로 인식 돼요.
그래서 일까요?
그의 외로움이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들고,그가 말하는 사랑이 가식 같아서 말이죠~

그런데,이렇게 따뜻한 시선의 페이퍼라니...저도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걸요~^^

blanca 2010-10-20 21:44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그래도 프로이트와 지지고 볶는 얘기도 나오더라구요. 프로이트가 성이론을 마치 신앙적 교리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다 마침내 그와 결별하고 마는 얘기. 융이 프로이트에 아버지를 투사했다고 고백하더라구요. 솔직히 저도 이 둘은 약간 비호감이었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 무지,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노년이라니...이런 모습은 참 낯설고 대단한 것으로 뵈더라구요. 사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미화하고 윤색하고 자신의 이론,주장을 합리화하고 싶어지잖아요. 그걸 뛰어넘은 모습이 감동적으로 느껴졌어요.

2010-10-20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10-2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제가 알기론 유럽쪽에선 프로이드나 융의 심리학은 이제 폐기처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프로이드 이론이 융 이론보다 그런 대접을 더 받고 있긴하지만 융 또한 이제는 그렇게 예전처럼 대접 받지 못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저 말,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다는 말은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본 듯해요.^^

blanca 2010-10-21 20:43   좋아요 0 | URL
제가 융의 이론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융의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자신의 꿈을 지나치게 예지몽처럼 과장하는 대목은 저도 상당히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정신과 치료에서 약물치료와 프로이트식 상담은 절충점을 찾아야 하는 대목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기억의집 2010-10-22 09:29   좋아요 0 | URL
물론 저야 심리학에 대해선 개뿔도 몰라서 잘 모르겠지만.
제 친구중에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랑 무지 친했어요. 고등학교 내내 붙어다녔으니깐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 가서 지금 미국 산지가 20년이 넘고 20년동안 한국에 종종 나오면 꼭 저랑 붙어다니다가 미국 가는 친구인데.

그 친구랑 이번에 어떡하다가 연락이 끊어졌어요. 이제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그제 연락이 왔더라구요. 그 친구도 저랑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한국에 있는 자기 남동생한테 부탁하고 어쩌고 해서 제 핸폰으로 연락을 했어요.

2010-10-22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