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가 선로 위에서 무릎을 꿇고 달려오는 차량을 맞는 장면은 <안나 카레니나>의 엔딩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여느 작가와 달리 가지는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던 사랑의 당사자가 죽음을 맞고도 이 이야기는 도약할 구석을 찾아 튀어 오른다. 사건의 대단원은 안나가 아닌, 그녀의 주변 인물이자 톨스토이의 분신인 레빈의 머릿속을 오고 가는 각종 상념들 속으로 슬며시 가라 앉는다. 이 대목은 지리멸렬하지도 사변적이지도 않게 삶 그 자체의 심원한 의문들과 한계들을 자문하며 독자의 가슴과 머리를 쥐고 사정없이 흔들어 댄다. 생각하는 나, 내가 보고 있는 생동하는 모든 것들도 결국은 이 순간을 지나면 다 스러져 갈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 톨스토이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을 얼마쯤은 꼭 서글프게 한다. 결국 모두 다 끝나고 만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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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가정생활은 개인적으로 비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나 그가 말년에 저작권 문제로 아내와 일으킨 분란은 마치 그가 탐욕스러운 악처를 만나 파멸에 이른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내 소피아와 보낸 결혼 전반기 십오년은 그 스스로무척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1862~1877) 그는 필생의 대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낳았다. 임종도 못 지키게 할 만큼 경멸하고 미워했던 아내와 함께 일구었던 가정이 한때 그의 창작의 자양분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사랑했던 여인이 아이를 낳고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은 그의 작품 속 여인들에게 종종 투영된다.
<전쟁과 평화>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세 귀족 가문의 영락과 성쇠를 그리고 있다. 베주호프, 볼콘스키, 로스토프 가는 실제 톨스토이의 모계와 부계 가문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 가문 출신의 안드레이 공작, 피에르 백작, 니콜라이 등이 전쟁에 참전하여 경험하게 되는 전장의 모습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역사 속에서의 '전쟁'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과감하게 이야기에 개입하여 죽고 죽이는 살육을 일으키는 힘, 언어로 압축되고 마는 전장의 허구, 그 안의 필연적이고도 허무한 죽음을 저미고 헤치고 벗겨 낸다.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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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장난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더러운 사업이야. <중략>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거야. 전쟁의 도구는 간첩, 반역의 장려, 주민의 황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강탈과 절도, 전략이라는 이름이 붙은 속임수와 거짓말이야.
-4권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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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그리는 전장은 사령관이 내린 명령하에 병사들이 일치단결하여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곳이 아니다. 명령은 정작 제대로 전달되지도 해석되지도 실행되지도 않는다. 전장에 남는 것은 무용한 언어들의 편린이 지워진 그곳에서 포탄과 유탄의 틈 속에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생의 의지들이다. 이 의지들은 산발적이고 비논리적이다. 1812년, 병사들과 그 병사들을 지휘했던 총사령관 개개의 의식적인 의지는 전인류적인 목적과 역사의 흐름 속에 녹아 뭉그러졌다. 이 어처구니 없는 거대한 살육의 현장은 그럼에도 반성없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더러운 사업, 톨스토이식의 전쟁의 명명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무기대신 전장을 점령한 것은 공허한 명분과 연극이다. 전쟁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하고 추잡스러운 사업에 불과하다.
영웅은 없다.
<전쟁과 평화>에서 영웅 나폴레옹은 없다. 그는 저열하고 어리석고 모순적인 존재로 발가벗겨진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그곳의 풍부한 식량을 활용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퇴각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한참 떨어져 있다. 톨스토이식으로 보자면, 우리들은 '나폴레옹'을 만들기 위하여 '나폴레옹'을 지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위인, 영웅이 견인하는 역사를 수긍하지 않는다.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전체 민중의 의지와 열정, 의도의 총화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전장의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냉소적, 방어적 태세가 부정적으로 폄하되지 않은 것은 언어로 명분으로 치장된 영웅이 전두지휘하는 '전쟁' 그 자체의 허구를 신랄하게 지목한 것이다. '그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다. 권력은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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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에게는 이 인물이 생활의 온갖 면에서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된다. 다만 인간들이 존재해야 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몇 마디의 말>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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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치워 낸 자리에는 러시아의 민중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그 민중이 발산하는 정기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 속 사건들의 그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채운다. 털외투로 몸을 감싸고 포장마차를 탄 황제나 대공 대신 이름없이 얼어죽고 타죽어간 수백만의 병사들, 주어진 삶의 여건과 비극마저 불평없이 수용하고 묵묵히 살아나간 익명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행동과 숨결이 가지는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대로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합류한다. 영웅은 죽고 민중은 부활한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인간적인 것이다. 역사의 서술이 놓치고 가는 이삭들을 하나 하나 주워 그 결을 쓰다듬는 일은 언제나 예술가가 자원해야 할 가장 긴요한 임무다.
지치지 않는 화두, 죽음
톨스토이는 그의 저작에서 죽음에 대한 일관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 단지 생의 종결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향한 도약의 통로로서 재정의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일시에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순간 타올랐다 사그라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도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안나도 죽음의 순간 묘한 각성의 체험과 환희를 느낀다. 안드레이 공작이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맞게 되는 최후의 묘사는 장엄하고 아름답기 조차하다. 그리고 우리가 이 다음에도 무언가를 더 기대하게 한다. 죽음을 통해 조망된 생의 파노라마는 덧없지만 아름답고, 죽음을 향해 내딛는 일보는 개개의 절절한 삶과 소망, 생의 역사를 더 크고 심원한 전체로 통합하는 도정이 된다. 안드레이가 자신을 배신했던 약혼녀 나타쉬아 곁에서 생과 죽음 가운데의 문을 힘겹게 잡고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는 것으료 묘사되는 죽음, 그래서 어느 순간 열리고야 만 문을 통해 들어온 죽음이라는 '그'를 맞아들이는 최후의 묘사는 생에 끄달리며 죽음을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는 모든 인간의 비극적 최후를 구체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것을 수긍해야 하는 숙명을 비장하게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톨스토이가 하는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는 생에 맞닿아 있어 더 울림이 크다.
생...
귀족의 서자였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등장인물 피에르에게는 유독 톨스토이의 진지한 질문들이 많이 녹아 들어가 있다. 세속의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고도 남고야 마는 그 허무감 속에 그는 드디어 생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때로는 영적이고 고결하고 자기희생적인 삶에, 때로는 아무 의문없이 현생의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생에 경도되어 가며 그는 포로생활 중에 만난 하층민 카라타이예프의 순박하고 순정한 생의 긍정에서 답의 실마리를 끄집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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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익숙한 생활궤도에서 내던져지면 이젠 만사가 글렀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기서에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좋은 것이 시작되는 겁니다. 목숨이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습니다. 앞길엔 많은 것이,정말로 많은 것이 있습니다.
-5권 p.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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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필연과 자유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절대적인 자유도 절대적인 필연, 이성도 없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나에게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것의 기억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절망할 필요도, 내가 더 나은 것들을 택할 수도 있었다고 후회하며 자학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주무를 수도 없지만 그 어떤 것이 전적으로 나를 주무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길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그 무한한 가능성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무기력함도 생 전체를 포박할 수는 없다. 어떤 한계에 부딪혀 전체를, 어떤 의미를 갈망할 때 우리는 톨스토이와 만난다.
여든둘의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었고 위대한 것들을 이루어 냈던 대문호는 스스로 초라한 객사를 택한다. 그가 숨결을 불어넣었던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는 1812년의 광대한 밤하늘에서 사금을 뿌려 놓은 듯한 별들에 둘러싸여, 다른 것보다 지구에 가깝고 눈에 띄는 찬란한 혜성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그 둘을 함께 지켜보는 우리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스러져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된다. 말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의 그 한계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말해질 수 있는 최대치의 것들을 뽑아 내어 우리 앞에 펼쳐 놓는 이 작가의 깨달음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가슴 한켠을 저릿하게 한다.
p.s. 오타와 파본이 종종 눈에 띈다. 박형규의 번역 그 자체는 읽히는 데에 무리가 없다. 전쟁 장면의 묘사의 실감이 놀랍다. 1권을 조금만 인내하면 다음부터 상당히 재미있다. 다만 톨스토이가 불쑥불쑥 치고 들어와 이따금씩 했던 얘기를 또하고 또하는 부분은 눈이 감긴다. 러시아 병사들과 농노들의 생생한 생활상의 묘사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생각나게 하고, 노장 쿠투조프 사령관이 승전을 일구고도 끊임없는 모함과 배척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올랐다. 톨스토이가 어찌하여 동시대 차르에 버금가는 사람들의 지지와 주목을 받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