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오래 살면서 소설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 사람, 사진 보면 완전히 할아버지잖아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놀랍습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니 충격이긴 하네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p.245>


인터뷰는 자신을 규정하거나 포장하거나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쉽다.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때로 과장이나 거짓이나 속단이 되어 버린다. 인터뷰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란 그래서 어렵다. 애초부터 작은 기대와 많은 한계를 감안하며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면 그냥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인터뷰의 대상은 하루키. 인터뷰를 하는 작가는 가와카미 미에코.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로 데뷔했다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루키의 팬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을 공들여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루키의 우물에 가닿는 그녀의 신공이 놀랍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진지하고 머뭇거리고 솔직하다. 이제 곧 일흔이 될 그는 자주 불러오는 삽십대 중반의 주인공의 감성과 직관과 개방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꼰대 마인드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의 그 성실함에 대한 언급은 하루키 작품 속 남자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진다. 꾸준히 성실히 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영감에 의존하여 일필휘지로 완성해 내는 작품과 하루키는 멀다. 언제나 성실히 열 장 가량 매일 쓴다. 열 번 이상 고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문장을, 문체의 정밀도를 높여 나간다. 결국 궁극의 문장을 향한 그의 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좁혀질 것이다. 


시스템이 양산해 내는 악에 대한 일침이 와닿는다.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악을 근원적으로 완벽하게 몰아내기도 힘들다,는 인식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악을 탐사하고 그 악을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의 우물이다. 그 이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얘기의 자리가 아쉽다. 그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 그 이상에 대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남자 인물들이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나 구도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에 대한 언급은 사실 항상 느꼈던 바라 궁금했다. 하루키의 대답은 싱겁고 사과는 빠르다. 자기는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의식하거나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의 해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해 준 가와카미 미에코와 그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인터뷰 내내 흐른다. 인터뷰의 내용은 그래서 쉽게 우회하거나 얄팍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쓰는 일에 대한 작업 비밀을 어떻게든 솔직히 알기쉽게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가 서 멈추지만 결국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가 요체가 될 것 같다. 가르칠 수 없지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후배 작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려는 그의 사려깊음이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결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꺼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처음 이 책은 사실 분량만 보고 지레 피했다.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대만인 엄마가 나보고 한국인이냐며 이 책을 읽어보았냐고 하며 다가워서 제목만 안다고 하니 갑자기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시작해서 당황스러웠다. 근현대사에 대하여 좀더 찬찬히 공부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소에 생각을 정리해 둬야 제대로 적절하게 의견을 얘기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대만은 중국과 얽힌 민감한 지정학적 사안이 있으니 어쩌면 더 우리나라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일로 <파친코>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흐름상 집중해서 한번에 쭈욱 읽어내려가면 좋으련만 그러지는 못하고 매일 조금씩 가슴 아파하며 읽고 있다. 일제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던적스러운 현실과 전적으로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게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것인지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 별 것 아닌 일로 일본에서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결국 온 몸이 상처로 뒤덮여 죽기 직전에야 집으로 기다시피 돌아와 가슴으로 품은 어린 아들을 만나는 이삭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잠시 책을 덮었다. 나는 지금 여기 있지만 저기 거기에 있었을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윤리적 가치와 내 생을 교환가치로 저울질하며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두렵고 아득하다. 한편 그럼에도 결코 타협하지 않은 가치로 지켜낸 나라에서 나는 오늘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그 분들의 용기와 희생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서 만든 역사의 그 엄중한 무게는 상기하지 않으면 자꾸만 잊혀지고 가벼워져 버린다.



 
















그런데 또 하필 하루키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그가 어떤 정치적 노선 표방이나 언사에 신중한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에 염증 반응을 보이는 것도. 특히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의 성실함과 조언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던지는 그의 무심하고 간결한 문장과는 다르게 심오하고 여운이 길다. 더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겠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의미나 과도한 그럴듯함에서 멀어지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더 신뢰가 간다고나 할까. 그는 과거에 일본의 주변국가에 대한 가해에 관련한 역사 청산에 대한 무책임함을 비판하고 성토한 적이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로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자기를 많은 사람이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초지일관이라 살짝 귀엽기까지... 소설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낙차가 큰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인칭은 점점 안 쓰게 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소설 속 삼십 대의 '나'와 육십 대의 그의 괴리를 담백하게 인정해 버린다.















뜨겁다. 그런데 이 뜨거움이 가는 것도 애달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8-08-06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인터뷰집은 앞부분을 조금 읽었어요. 제가 읽었던 부분까지는 내용이 좀 두루뭉슬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읽고 싶기는 한데, 최신 유행으로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궁금하고 읽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또 찾아 읽게 됩니다. 그게 하루키의 힘일까요?

덥네요, blanca님~~ ㅠㅠ

blanca 2018-08-07 03:52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는 하루키 픽션보다 <언더그라운드> 같은 논픽션이 더 와닿아요.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 신중한 판단의 유보 같은 게 저는 좋더라고요. 나이들면 뭐랄까 좀 단정짓고 자기만 맞다,고 하고 싶어지는 경향성이 있잖아요. 제가 하루키 작품을 다 읽은 게 아니라 종합적인 판단은 못 내리겠고 소설은 아직 뭐랄까 조금 저랑 안 맞는 불편한 부분이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하루키 나이가 저희 친정 아버지랑 같은데 병원에 한번도 입원한 적도 없고 감기도 4~5년에 한번 걸릴까 말까 한다,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어요. 더우니 지치고 오후만 되면 체력이 완전히 떨어지는데 글 쓰는 능력보다 그 체력이 더 부러울 지경입니다.

레삭매냐 2018-08-06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친코>는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물감 때문에 읽으면서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우리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blanca 2018-08-07 03:55   좋아요 0 | URL
아, 레삭매냐님, 저는 지금 한 반 정도 읽은 상태이고 아무래도 작가가 한국에서 쭉 자란 사람이 아니니 한국적 정서에 대한 어떤 이해나 시야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지점은 제가 아무래도 다 읽어봐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 <데미안>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다. 교양국어 시간이었나? 같은 학번 친구가 자신이 먼저 읽고 나에게 <데미안>을 빌려주었다. 세상에, 무려 수십년 전에 나온 세로쓰기 책이었다.  갈색의 등은 갈라지고 있었고 활자는 때로 겹치거나 흐릿해서 가독성만 놓고 보자면 참으로 곤란한 책이었다. 나는 그때 활자로 된 건 뭐든지 다 거부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이 <데미안>을 읽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러워 집워치워 버리고 싶어졌다. 특히 세로쓰기는 끊임없이 길을 잃게 했다. 한 손으로는 자를 잡고 줄을 안 놓치려 분투하다 나는 <데미안>을 던져버렸다. 간 크게 아마 과제조차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제대로 정말 진심을 다해 <데미안>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사뭇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거의 일 년 내내 책이라곤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으며 방황했고 그 여파를 수습하는 데 꽤 많은 시간과 공력을 후에 들여야 했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그 때를 생각한다. 내가 고작 읽은 건 머리말인지 혹은 해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소녀가 죽어가며 자신의 관에 <데미안>을 넣어달라 했던 일화였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2014; 정여울의 <대면: 내 안의 '내면아이'와 만나는 시간, Axt 재인용>


Axt에서 다시 만난 정여울의 글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이 문장을 과연 스무 살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제서야 나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정말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 나이듦의 과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배운다. 저만치 별처럼 떠 있는 선구자들, 위인들, 유명 인사들이 지향점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과정을 사회의 용인되는 틀 안에서 전개해 나가는 게 사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책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 그 친구와 소원해지며 <데미안>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 친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책을 빌렸다는 것도 같았는데 그렇게 몇 순배를 돌던 데미안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제대로 찾지 못했지만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고 싶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지도 미완으로 끝날지 모르는 이 지난한 과정에서 이제 제대로 가로쓰기가 된 잘 읽히는 잘 읽을 수 있는 <데미안>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re is no reason for life  and life has no meaning. We are here, inhabitants for a little while of a small planet, revolving round a minor star which in its turn is a member of one of unnumbered galaxies.

-The Summing Up by W. Somerset Maughm


인생에는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다. 우리는 여기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계 중 작디작은 별 주위를 도는 자그만 행성의 단기 거주자로 여기에 있다.- 서머싯 몸의 <서밍업> 중



















요며칠 그 분의 죽음을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기득권 층이 될 수 있었던 위치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향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양보했던 그 분의 선의와 노력이 비로소 죽음 후에야 각광을 받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분의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남는 자들에게 계속 전진하기를 당부하는 마지막 이야기의 무게를 떠올린다. 여기에서 서머싯 몸이 이야기했던 우리의 삶의 무의미함을 그 가벼움을 또 가져온다. 인생무상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와 이상을 떠올렸던 당신의 결곡한 의지 앞에서 날아간다.  말과 글은 남는다. 생과 삶은 끝나지만 그것의 궤적이 품고 있었던 것들은 그럼에도 쟁쟁거린다. 서머싯 몸도 자신의 생과 자신의 글이 후세에 남아 이렇게 읽힐 것이라 예감하지 못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칠십 대 노건축가의 국립도서관 계획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 한 여름, 건축 사무소 직원 전체가 꿈꾸었던 미래는 정교한 모형 하나로 축소되어 남는다. 이십구 년이 흐른 뒤, 그 '여름 별장'에 장년이 되어 다시 돌아 온 '그 청년'은 좌절된 꿈을 조용히 응시한다. 당시는 한없이 안타깝게 애석하게 흩어졌던 구상이 하나 하나 돌아오는 환상 속에서 그는 가만히 수긍하게 된다. 현실화되지 못한 것들이 가지는 그 무언의 가치에 대하여. 무수히 상상하고 계획하고 추구하고 꿈꾸었던 그것들 자체의 질긴 생명력에 대해서. 온갖 무형의 것들을 제대로 애도하는 이야기가 오늘은 위로가 된다고 믿고 싶다. 당신의 죽음이 당신이 추구했던 가치와 이상의 끝이 아니라고... 당신의 삶 전체를 어떻게 이 하나의 비극적 마침표에 압축하여 넣어버릴 수 있을까. 노. 회. 찬. 의원님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8-08-04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의 가치가 죽음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는 느낌에 동강감합니다.
노대통령의 죽음이 연결되는 안타까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 삶은 참 견디기 힘들겠지요....


blanca 2018-08-04 07:27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했던 분이라 더 그래요. 그 분이 그런 선택을 한 마음을 상상하고 이해해 보려 하지만 역시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막 선택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산 자의 책무도 돌아보게 되고요. 산다는 건 때로 참 너무 어려워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월 6일부터 19일까지 조금씩 읽었다. 되도록 천천히 제대로 음미하며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이야기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스물셋의 건축학도 사카니시 도오루처럼 이십대여도 그의 스승격인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 같은 노년이어도, 아니 이 모든 현재진행형 이야기가 사실은 과거의 회상이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의 시점인 오십대인 중년이어도 다 같이 공감하고 느끼고 배울 것이 있는 진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눈부신 청춘의 매력과 그것의 의미를 가까스로 짚어가게 되는 중년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노년의 광활한 시계가 눈부시게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어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인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이 아름다운 건축 사무소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영역들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언뜻 덧없어보이지만 그 현장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의 저마다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엿보는 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끝내는 것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황당할 정도로" 젊지만 그 손끝을 만들어 낸 노련한 선생의 삶의 완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다. 표고 1,000m가 넘는 고요한 숲 속, 설계 사무소의 아침을 깨우는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소리, 커피를 내리는 냄새 등에 대한 묘사의 생생함은 모든 감각을 일시에 깨우며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마저 이 설계 사무소가 이미 칠십 대 중반에 접어든 건축가 무라이를 중심으로 참가하게 된 국립도서관 설계 경연에 어떻게 사력을 다해, 진심을 쏟아붓는지,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에 대해 가슴을 두근거리며 엿보는 심경이 되는 것이다. 중간중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아스플룬드 같은 불멸이 된 건축가들의 일화들은 곁가지 같으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적 주제인 인간과 건축의 접점이 어떻게 조율되고 진화하고 마침내 퇴장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예증이 되어주어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이 잠시 기거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그 정성과 진심이 인간과 인간의 삶과 주고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생과 사와 시간과 그것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흔적들이 가지는 의미에 가만히 다가간다.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하나의 문장은 모든 덧없는 것들, 스러진 것들, 끝내 이기지 못한 것들에 대한 충실한 진혼이 될 것이다. 문득 내 삶이 너무 덧없다 느껴질 때, 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고 이 모든 헛됨이 나를 진력나게 할 때, 이 청년이 지켜보고 증언한 한 평범하지만 어떤 숭고한 결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노년의 시가 공명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의 힘은 우리 말의 그 건축과도 닮은 정치한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매해 돌아오는 여름이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억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