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와 류노스케의 생몰 연월일을 보니 세상에 나와 삼십오년을 살고 갔다. 그의 <귤>을 읽고 나니 이 짧은 생애에 다시 눈길이 간다. 열차 이등실에 앉아 우연히 보게 된 행색이 초라한 소녀에 대한 짧은 단상은 절창이다. 소녀의 남루한 행색에 대해 솔직히 느꼈던 반감과 혐오감이 어떻게 반전되는지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결고운 호소력 짙은 명문이다. 

















그때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애가 예의 부르튼 손을 쭉 뻗어 힘차게 좌우로 흔드는데, 맘이 들뜰 만큼 따스한 햇살에 물든 귤 대여섯 개가 배웅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이리저리 흩어져 내렸다. 나는 엉겁결에 숨이 멎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이해됐다. 이 아이는, 아마도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러 떠나는 이 아이는, 품속에 넣어온 몇 개의 귤을 창밖으로 던져 애써 건널목까지 배웅하러 나온 남동생들의 노고에 보답한 것이구나.

- 아쿠타와 류노스케 <귤>


터널 속에서 묵직한 차창을 어떻게든 들어올려 열려고 했던 시도를 거슬리게 느꼈던 아쿠타와 류노스케는 그 후에 나올 자기 집 개구쟁이 남동생들에게 귤을 던지는 소녀의 몸짓으로 인해 뜻밖의 경탄으로 숨이 멎는다..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던 소녀의 모습에는 이런 생기가 숨어 있었다.. 어떻게든 남동생들에게 품안의 귤을 던져주고 지나가고 싶었던 누이의 우애는 햇살 같은 귤로 몽글몽글 피어난다. 차갑고 무심했던 청년의 시선은 잠시 반짝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로 가 닿는다. 절망했던 그는 잠시 움찔한다. 대단한 교조적인 연설 없이도 생의 비의는 이렇게 순간의 찰나 같은 이야기로 드러나고 빛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중심에 있있다 일본 정부의 검거로 투옥 생활을 하게 된 소설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이야기는 정작 그 자신의 이야기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이름 모를 조선인 동료의 이야기가 뼈아프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외부에서 사식을 받지 못하는 감방수였다고 한다. 바깥의 소식도 감방에서의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 줄 그 어떤 물질적 지원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 동료에 대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백 년 가까이 지나 같은 땅의 후손이 듣기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다. 


1902년 영국 유학 생활 중 하숙집 아주머니의 권고로 억지로 배우다시피 한 자전거로 인한 각종 사고와 해프닝을 유쾌하게 그 린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거 이야기>부터 일본의 근대 이후의 작가들의 수필들을 모든 이 책은 역자가 직접 동경의 국립 도서관이 문을 열 시간부터 닫을 시간까지 상주하다시피 하며 발굴해 낸 이야기들이라 한다. 번역이라는 체를 통과했다는 의식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하면서도 일본 작가들 특유의 문체적 성격까지 충실히 살려 낸 이야기들이 잔잔하니 읽기에 보기에 듣기에 좋다. 유달리 요절한 작가들이 많고 그들의 시선은 청춘의 경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듯한데 시대의 질곡과 삶의 신산한 부침에 시달려 한 생애를 살아 낸 노인의 그것과 견주어 깊이에 부족함이 없어 보여 역설적으로 더 안타깝다. 구체적인 생활의 고난으로 한없이 절망할 듣도 한데 일상의 비일상성과 눈물 속의 해학을 길어 올리는 재주가 천상 작가들의 그것이다.


<슬픈 인간>은 슬프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자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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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판단이나 상황에 대한 순발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니 새로운, 낯선 환경에 노출되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좌뇌형 우뇌형 인간의 경직된 편가르기에 별로 편승하고 싶진 않지만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것과 거리가 먼 나의 우뇌는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좌뇌형 인간인가? 좌뇌형 인간은 수학을 잘 해야 하는데.. 흠, 이도 저도 아닌 것도 같고. 
















실제 뇌신경과학자인 저자가 서른 일곱 살에 좌뇌쪽 뇌출혈을 겪으며 완벽히 회복하기까지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실제 대상 환자가 되어 뇌출혈이 있던 그 날부터 개두술, 재활의 과정이 환자와 연구 학자의 시선이 어우러져 생생하게 묘사된다. 저자는 한동안 좌뇌 기능의 상실로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제대로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니르바나, 평정감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좌뇌가 가지고 오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경계감, 서열 의식 같은 우가 이 전장 같은 세계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체득하고 나온 기능들이 상실되면서 오히려 여기, 지금 이 순강에서 커다른 섭리와 접촉함으로써 느끼는 편안한 희열감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 숱한 불안감들은 참으로 쓰잘데기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뇌가 이 세계에서 우리를 지탱하기 위해 부여하는 고차원적인 의식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왔다는 깨달음은 놀라운 것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장애가 있어 불행해 보이는 저자의 모습이 사실 내면에서 충족된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 상태였다는 고백이 이채롭다. 심지어  좌뇌 기능을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가벼운 저항감마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미래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 등이 돌아올 경우 지금 이 상태보 더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한 반문. 그녀의 회복의 여정은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감동적인 서사다.


내가 느끼는 것들이 뇌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는 앎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스위치를 끄는 것처럼 이제 그만 비교하자, 그만 불안하자,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뇌형 인간이 못 되는 것은 불행의 단초 같기도 하다. 나와 이 세계가 접촉하는 지점을 의식하는 건 나의 자의식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사실 대단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의식하는 지점이 사실 명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의식하는 건 앎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사실 과잉이다. 그리고 거기에 '좌뇌'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영역도 여기에 있다는 점이다. 말을 잃어버리면 말로 경계지어지는 사물에 대한 감각도 둔해진다. 그렇게 되면 '나'는 유형의 생명이 아니라 일종의 무형질의 액체처럼 이 세계와 섞여 버리는 느낌이 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좌뇌형 인간에 우뇌형 감각을 적당량 덜어 잘 버무리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은데 이것은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나'를 인식하면서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니 말이다. '나'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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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10-05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개정판) 읽고 있는데요. 한 번 프레임에 사로잡히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하죠. 이성적 판단도 감정적인 판단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처럼 좌뇌/우뇌로 따질 건 아닌 거 같습니다.

blanca 2018-10-05 03:1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해요.
 

저녁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로 팟캐스트를 들으며 잠드는 일이 반복되곤 해서 그런지 귀가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뜬금없이 오른쪽 귀뒤편에서 진물이 나고 염증이 생겨버렸다. 아무는 데에 꼬박 2주는 걸린 것 같다. 듣고 보고 냄새 맡는 사소한 일의 무게감이 묵직하다. 아직 노안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의 예민함이 떨어지는 일은 한편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섭리인 것도 같다. 이제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상을 대면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일에서는 서서히 거기를 두기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와버린 것 같아 헛헛하다. 부정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이러한 젊음의 예민한 손끝에 대한 때늦은 자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때는 몰랐던 그 감각 기관들의 명민하고 섬세한 조응이 노건축가의 머릿속 구상들을 성공적으로 실제로 형상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자각이 뭉클하다. 이십 대에 동료들과 만든 정밀한 건축 모형을 중년이 되어 지켜보는 시선은 "틀림없는 젊음"에 대한 회한만은 아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은 항상 뒤늦게 오고야 만다. 이 정도 되면 '젊음'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돌아온다. '늙음'과는 다른 종류의 성취가 가능했던 영역에 대한 관조는 담담하다. 그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이런 느낌. 잔잔하고 평화롭다. '여름'은 청춘의 빛나던 그 열심이던 시절에 대한 아름답고 싱싱한 은유 같아 잔상이 길다. 왜 유독 그때는 여름에 많은 일이 있었는지... 가을에 겨울에 사랑하고 헤어져도 되는데 그 모든 것이 그 짧은 강렬한 여름이라는 계절 하나에 유독 우겨 넣어져 있었던 건지 모를 일이다. 마치 인생 전체의 모습과도 닮았다. 진하고 짧고 강렬한 것이 농축되어 있는 청춘의 경험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엉뚱한 소비욕과 만난다. 

이북을 읽기 위해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나 보다. 눈 건강을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는 합리화를 열심히 하는 중. 나는 참으로 얄팍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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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0-03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오래 고민하고 크레마 구입했는데요. 구입의 결정적인 이유가 결국, 나중에 구입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구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요한 이유는, 커피 옆의 크레마 사진이 너무 근사해서요.
아주 자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이북(예를 들면 잭 리처) 여러 권 넣을 수 있어 좋구요 글자 크기도 조정할 수 있어 좋구요.
눈도 편하고요. 그리고 이쁘고요~~~~~^^

blanca 2018-10-03 08:22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지요. 이 고민하고 검색하는 시간을 좀더 즐기다 확 질러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요. ^^;;다락방님도 단발머리님도 좋다 하시니 기대가 커지네요.

psyche 2018-10-0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도서관에서 책 빌릴때도 먼저 이북이 있나부터 봐요. 전에는 도서관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랬다면 지금은 글자 사이즈 때문에... 미국 책 특히 페이퍼백은 글씨가 너무 작아요.ㅜㅜ

blanca 2018-10-03 11:07   좋아요 0 | URL
페이퍼백은 그냥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요. 킨들로도 한국책을 볼 수 있음 좋을텐데... 구글샵에서 사서 변환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종이책이 사실 좋은데 보관 문제도 있고 특히 한번 읽고 말 것 같은 책들은 되도록 이북으로 보려고 해요. 여하튼 이렇게 또 지름신이... 마음으로는 킨들 오아시스도 사고파요. 욕망만 높아져 갑니다. ^^
 

핑크 공주라 불리우며 깜찍한  공주 행세를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라는 진부한 표현은 뒤로 하고라도 벌써 아니 이제 딸은 사춘기 초입에 들어섰다.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아침에 머리를 빗으며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안풀릴 때마다 혼자 신경질을 내고 엄마에게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불평을 늘어놓거나 여섯 살 아래 남동생과 승산 없는 말싸움을 시작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흑, 정말이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때로 감정 절제가 안 된다. 아놔, 이런 풍경이 내 인생 속에 들어 있었을 줄이야. 사춘기 딸과 유치하게 말싸움 하는 엄마. 제3자가 본다면 저 엄마는 참으로 유치하고 옹졸하구나, 싶을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속을 삭이며 집을 나서는데 어떤 분이 북플에 기억도 가물가물한 나의 옛글에 '좋아요'를 해 주신 덕에 도저히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낯선 글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마치 지금 내가 읽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 것 같은 글의 기시감에 움찔했다. 



http://blog.aladin.co.kr/blanca98/7579867

















'시간'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삶' 속에서 어떻게 녹여내고 인식하고 쓸 것인가,에 대한 담론. 인생이 유한하다는 자각, 특히 아이의 양육, 아이와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구나, 싶게 만드는 깨달음. 당연한데 항상 잊어버리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수시로 상기시켜줘야 말들이 아름답게 단상처럼 담겨 있던 이 책이 내게 적시에 다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아직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열두 살이 이 아이를 상대하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나에게 여전히 남은 상처들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루하루는 8만 6천 초가 넘는 작은 영원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유념하고 난 여전히 질척거리겠지만 다시 마음을 되잡으려 한다. 넘어져도 또 다시 뒤도 돌아보고 삶의 지평선도 유념하며 걸어가야겠지. 결코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매몰되어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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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8-09-2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반 여자 애들도 대부분 사춘기에 돌입해서 정말 외모 가꾸기에 온정신을 쏟아 붓더군요. 남학생은 아직 사춘기 돌입한 애들이 몇 안 되는데... 여학생이 빨라요.

blanca 2018-10-03 06:4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외모 치장하느라 늦는 모습 보면 귀엽기도 하고 ㅋ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죠. 아직 또래 남자애들은 천진난만하더라고요. ^^
 

<길모어 걸즈>는 십대에 미혼모가 된 엄마 로렐라이가  딸 로리와 작은 마을에서 이웃사람들과 함께 좌충우돌 살아나가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가족 드라마다.  십대의 로리에게는 딘이라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는데 이 남자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상당량이 고전 문학에 할애되어 있어 흥미롭다. 로리는 책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자신이 읽어본 책 중 좋았던 것은 딘에게 강력하게 읽기를 권유한다. 딘은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 친구 로리를 기다리며 로리가 추천해 준 책을 읽곤 한다. 




"나 우울해." 딘이 로리를 만나며 한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가 선로에 몸을 던진 대목을 읽은 직후였다. 딘은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지 않았지만  톨스토이의 이 만만치 않은 이야기가 자기가 완독하기에 역부족이라고 느끼며 로리에게 불평한다. 자기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로리는 그런 딘을 재치 있게 격려한다. 톨스토이의 이 이야기는 대단한 천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촌절살인이다. 딘에게 끝까지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로리가 <안나 카레니나>를 남자친구에게 권유하던 그 나이에 나는 로리의 한국인 친구 레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가끔은 한국인 가정의 과열된 교육열이나 한국인 엄마의 융통성 없는 경직된 사고가 때로 지나치게 전형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감이 있지만, 이 지극히 미국적인 드라마에서 로리의 친구역으로 묘사한 한국 소녀의 모습은 생생하고 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지근거리에서 한국인 가정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형상화해낼 수 없는 부분들이 실제 작가의 학창 시절 한국인 단짝 친구의 모습을 그려낸 거라는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여하튼 <안나 카레니나>는 딘과 로리의 말처럼 지나치게 길고 진지하고 거창한 것처럼 인식되지만 그 누구에게라도 조금만 참고 계속해 보라고 응원하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모든 삶의 총체적 경험과 깨달음과 그럼에도 끝내야 남고 마는 생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배우고 마침내 확립한 위대한 작가의 생의 말년의 철학적 사고가 톨스토이의 정점에 이른 창작력과 문장력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끝까지  러시아인들의 그 이름이 그 이름 같고, 그리고 종종 축약으로 갑자기 변형되는 이름으로 인해 등장 인물들이 심히 헷갈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로리의 말처럼 절대 후회하지 않을 독서의 여정이 될 거라 장담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정작 안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스포일러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선로에 몸을 던져 생을 을 끝내고도 딘이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한참 더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야 했던 안나의 이야기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은 톨스토이의 저의는 그 자신이 많이 투영된 레빈에게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로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결론도 이야기 자체로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완성하거나 절대적인 것에 기대어 삶을 서술하려는 만용을 접었다. 수많은 물음표들과 의문, 불확실성, 절망, 실패에서 나아가는 생을 담은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그래서 인내를 가지고 들을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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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9-18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길모어 걸즈가 이런 내용이군요! 책을 좋아하는 소녀와 좋아하는 친구 덕에 책을 읽는 소년이 나오는 이야기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에요. 게다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 정말 좋은 권유의 글 써주셨어요, 블랑카님. 덕분에 안나도 다시 읽고 싶고 미뤄뒀던 전쟁과 평화도 읽고 싶어졌어요.

blanca 2018-09-18 06:27   좋아요 0 | URL
아, 게다가 소년, 소녀는 얼마나 근사하게요. 보는 것만으로 막 마음이...안나 카레니나는 저도 알라딘 서재분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아, 다 읽고 주변에 별로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 어쩔줄 몰랐던 기억이 나네요. ‘전쟁과 평화’도 대작이지요. 저도 중간 중간 시험에 들긴 했어요. ^^;;

비로그인 2018-09-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길모어걸스... 저도 예전에 너무 재밌게 본 시리즈예요! 로리와 딘 사이에 저런 분위기가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그 책이 안나 카레니나였군요-
저도 딘처럼 읽다가 말았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톨스토이 작품은 다 좋은데 너무 길어서 완독에 장애물을 만나면 다시 시도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네요ㅠㅠ (전쟁과 평화는 5권짜리 책에서 4권까지 읽고 멈춘지 5년...;; 진퇴양난이란 이런 거죠ㅠ)

blanca 2018-09-19 02: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전쟁과 평화>는 엄청난 분량이지요. 4권까지 읽으셨다니 거의 다 오셨는데 언제라도 다시 멈춘 부분에서 다시 시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톨스토이는 한번씩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어 장광설을... 이 부분은 인내가 필요하더라고요. 저도 <전쟁과 평화>는 읽다 말다 해서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저는 최근에 ‘길모어 걸스‘를 보기 시작해서 흠뻑 빠져 있답니다. 뭐랄까, 크게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잔잔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