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처음 마신 게 언제지? 아마 재수 시절 교실 앞 자판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아, 이후로 난 부단히 믹스커피를 마셔왔다. 출장 다닐 때는 하루에 네 잔도 마셨다. 잠을 깨려고 기분이 나빠서 혹은 기분이 좋아서 친구를 만나서, 심지어를 아이를 낳은 날 임신 기간 참았던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바로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대체로 빈 속에 잠을 깨고자 바로 마시곤 했다.
결과는 당연히 만성 위염이다. 그리고 지난 이 주에 걸쳐 나는 카페인의 노예에서 탈출하기 위해 커피를 완전히 끊었다. 첫날은 충격적인 금단 증상이 덮쳤다. 두통이 두통이. 심지어 근육통에 입에 신 물까지 올라오고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삼사일은 보통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커피 끊기 프로젝트에 돌입한 이들을 찾아 온라인을 순례하니 많은 이들이 그 과정을 겪으며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보통 일주가 고비인 듯. 증상도 거의 비슷했다. 커피를 끊기 위해 두통약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으면 무언가의 노예가 되기 싫다,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단지 속이 쓰려서다.
커피를 끊으면 속은 편안해진다. 반대급부는 우울감이다. 낙이 없다. 모닝커피를 위해 기상하던 나로서는 일어나면 맛없는 차가 기다리고 있다. 종일 다운되어 있다. 에너지도 없다. 두통은 덤이다. 숙면은 기대 이상이다. 단 한번도 안 깬다. 불면증에 커피 끊기는 반드시 권장되어야 한다는 앎이다. 그런데 이런 게 사는 건가? 싶다. 누군가 아무리 힘들어도 라떼를 마실 수 있으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 그럴 수 없으니...
심지어 지난 주말엔 나를 약올리듯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라는 노래까지 나오더라. 좀 웃긴 얘기지만 누군가 커피 얘기를 쓰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하게 된다. 몸이 아주 건강해서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속이 쓰리지 않은 사람은 정말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
박경리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문장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하여 언어를 끌고 오는 사람이다. 서사력이 대단하다. 김약국의 네 딸의 처절한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끌고 갈 수 없는 그 시대 여성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통영의 풍경과 함께 모자이크처럼 직조되어 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진로를 개척할 수 없는 시대, 주관적인 선택이 심판거리가 되는 삶의 무게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들의 삶과 완전 대척점에 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빌 헤이스는 올리버 색스의 만년의 반려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이 작가이자 사진 작가로 이미 입지를 굳힌 사람이다. 킨들로 읽은 그의 글도 올리버 색스 만큼 좋다. 코로나 이후의 뉴욕의 달라진 풍경을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함께 이야기한다. 벌써 환갑이 가까워온다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전세계적으로 함께 겪고 있는 거리두기의 풍경에 공감이 많이 갔다. 중간 중간 올리버 색스가 했던 이야기를 실어 놓았는데 반갑다. 그의 애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오늘 생일 기념으로 바닐라 라떼를 나에게 줬다. ㅋㅋ 아, 카페인의 위력은 놀랍다.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잘 견뎌왔다,는 자뻑에 취한다. 가을 공기가 바삭거리고.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