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도 더 전에 조그만 대리점을 경영하시는 사장님이 그랬다. 예전의 번듯한 직장을 나오니 자신은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변해버렸더라고. 그리고 나도 직장을 나가면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어떤 조직 경계 안과 바깥의 내가 같은 사람인데 단지 그 조직을 나가는 것만으로 내가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어렵고 추상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것을 다소 섭섭해하는 그 감정은 무엇인지도 뭐라 특정할 수 없었다. 결국 누구도 조직에서 대우 받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지 갑을 관계의 지배구조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리라.


흔히 어떤 사람의 직업은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한다. 그 조직 안에서의 위계는 심지어 평생을 따라다닌다. 상사는 영원한 상사라는 인식, 부하 직원은 회사 바깥에서도 마주친 그와의 위계를 실감한다. 서로가 다 잊어야 함에도 그렇다. 그것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다. 때로는 폭력적이다.


















편혜영의 소설집의 <홀리데이 홈>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이것은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군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나온 이진수는 아내 장소령의 시선으로 묘사된다. 그 둘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모든 것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다. 아내에게 다정한 남편도 바깥에서는 천하의 몹쓸 놈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부하 병사들에게 가혹했다. 권위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그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수준이 아니라 더 큰 역할을 하고 눈을 감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진수에게 돌아온다. 


"그는 권위와 위계를 칭찬으로 여겼다."가 이진수를 묘사하는 말이라면 "나는 부하가 아니잖아요."라고 외친 그들은 대척점에 놓여 있다. 이 사이의 긴장감의 밀도가 높다. 이것은 군이라는 설정으로 극대화되어 있지만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내리누르는 그 위계는 때로는 너무나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어 잘 정비된 조직의 체계로 오인된다. 그것을 자각하는 자는 위험한 존재다. 무비판적으로 순응해야 해야 조직은 쉽게 굴러간다. 불편하고 느리고 곤란한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편혜영은 그것을 기민하게 인식해서 그린다. 특정 상황은 그러나 이질적이지 않고 반드시 그와 유사한 어떤 공통점을 지닌 각자의 경험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분명 큰 힘이다.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거대하지만 허룩한 힘이다. 인간에게는 이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 사람도 상황도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지배욕으로 비틀어진다. 거기에서 적절하게 제대로 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자신의 삶과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는 힘도 그렇다. 그것은 반드시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절망적일지라도 그렇다.


편혜영을 읽으며 그러한 일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잘 읽히고 여전히 긴장감을 잃지 않는 이야기는 삶과 닮아 있어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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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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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가까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미래지향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놀라운 책이었다. 일정한 서사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이 시종일관 몰입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이야기는 사실 제사에 이미 이야기의 방향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존 밀턴의 <실낙원>의 선과 악의 불가분성, 콘래드의 "걸어서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들, 패배자들의 투쟁과 깊은 절망의 끔찍함...", 그리고 제목이 된 '토성의 고리'에 대한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설명의 인용.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 그러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묻어둔 희생자들과 패배자들의 서사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 될 것이다.


어쩌면 제발트 자신일지도 모를 화자는 1992년 여름도 끝나갈 무렵, 거대한 작업을 끝낸 뒤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주 도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17세기 노리치 의사인 토머스 브라운이 두개골이 보관된 병원 박물관을 이야기하며 때로 토머스 브라운의 목소리를 빌려 시간과 삶의 덧없음과 비참함을 상기한다. 우리가 소위 역사로 서술하는 것들이 얼마나 취사 선택적인 조작적 시선하에 가공되는지 그 틈새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얼마나 실재에 가까운지 그 충격적인 왜곡을 담담하게 차분하게 서술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아이러니의 극치다. 


나는 이런 고도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가 끔찍하리만큼 분명해지다는 생각을 한다.-pp.112


코로나 시국에 제발트가 화자가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본 문명의 잔해들을 통해 한 생각들을 일상에서 깨닫고 있다. 이전에 우리가 일상이라고 누렸던 것들의 기조에는 분명 눈부신 문명의 진보가 있었다. 비판 없이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소비하고 온갖 쓰레기와 오염 물질과 잔해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붙인 채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 이것의 끝은 무한하리라고 믿고 아이를 낳고 교육시키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 모든 것들을 더 많이 누리라고 추동했다. 그러나 인간이 제압할 수 없는 이 작디작은 바이러스의 무한 증식 앞에서 우리들은 우리가 누린 것들의 대가를 고스란히 우리가 믿었던 미래를 저당잡고 낳았던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마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교실 안에서는 KF94 마스크를 쓰고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앉고 그것을 어기고 손을 잡는 행위가 마치 이적 행위처럼 간주되는 나날들에서 과연 제대로 된 사랑과 인간 간의 접촉이 주는 따뜻함의 정서를 배워나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적과 결말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자는 역사 속에서 죽임 당했다. 1916년 런던에서 반역죄로 처형당한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는 비통하다. 그의 반역은 바로 아프리카 식민정책을 비판한 영국의 영사로서의 직무 유기였다. 마땅히 그는 제국주의의 식민정치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해야 했다. 그러지 않았기에 그는 처형 당했다. 태평청국의 난 또한 그렇다. 제발트는 이 모든 것에 결국 인간의 문명을 가장한 무비판적인 탐욕의 견인이 있었음을 간파한다. 삼림이 파괴되고 심지어 인간이 인간을 집단으로 살육하고 우리는 눈부신 진보와 문명을 이루어냈다고 우리의 오늘이 영원한 내일을 낳을 것처럼 서로를 기만하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우리가 고안해낸 기계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pp.199


제발트의 예언은 서글프게도 적중했다. 이제 우리의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다.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달릴 수 없다. 우리의 유한함과 우리의 생존이 빚을 지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황폐화되었는지를 직시할 수 있는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이후에는 분명 서서히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제발트는 절망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침잠하지 않는다. 그 위대함은 그의 대리 화자처럼 보이는 토머스 브라운의 이야기처럼  "침잠해 있는 세계의 건물 속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빛의 조각들"을 응시하는 신중함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것들에 대한 심원한 지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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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그간 읽어왔던 전형적인, 전통적인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존 버거가 화자를 빌려 유럽의 도시들을 테마로 한 그의 삶에서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 스승, 동창, 여자 친구에게 바치는 진혼곡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사선을 이미 지나와 과거가 된 현재를 살기도 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미래를 '그'의 곁에서 경험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갓 결혼한 친구 신혼 부부를 기다리며 요리를 한다. 사랑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찬란한 시간들이 결국 과거형이 되고 부서지게 될 거라는 것을 의식하는 그는 읽는 우리들의 저마다의 그 과거의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들의 현을 건드린다. 존 버거의 미덕은 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무용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냉소해버리는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것임을 알아도 여전히 그 연약하고 이내 잊혀질 것들을 향유하는 인간들의 그 무모한 시도, 희망, 꿈의 무게를 세심하게 조율하는 일, 그는 마치 극도로 신중하고 유능한 피아노 조율사 같다. 그가 맞춰 놓은 건반을 두드리며 공명하는 기억들, 사랑들은 절절하다.






인간의 특징들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부서지기 쉬움이다. 이게 없는 경우는 없다.

-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한국의 독자들에게 남긴 서문에서 그는 얘기한다.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있다고. 그 앎의 형상화가 이 거장의 언어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인용한 보르헤스를 깨닫는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소유가 된 것만을 줄 수 있다."는 그 자명한 진실을...어쩌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깨치기 위해 이 처절하고 연약하고 고단한 삶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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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카톡 친구의 프로필을 보면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든다. 나는 그를 차마 삭제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나의 카톡 친구 목록을 본다면 설마 이 친구가 이미 세상에 없다는 가정은 하기 힘들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의도치 않게 망자를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시켜 놓았다.

















심리학자 일레인 카스켓은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죽음에 대해 여러 사례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여기, 이 서재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자아는 이제 더 이상 내밀한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 인스타 등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지인들과의 대화의 족적은 수시로 메신저앱으로 남는다. 이 조각들은 다 한데 뭉쳐서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기를 멈추게 될 때 특별하고 번거로운 유산이 된다. 그것은 유족들에게 숙제로 남는다. 더 이상 손으로 쓴 편지, 사진 몇 장, 일기책 몇 권의 유물이 망자의 유산의 전부가 되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여전히 삭제되지 않은 페이스북 계정, 트위터, 이메일 계정에서 때로 적절한 마침표를 얻지 못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좀 섬뜩하기도 하다. 


매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마다, 당신은 죽은 뒤 남길 디지털 기념비에 벽돌 하나를 더 얹거나 자서전에 문장 하나를 더 추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레인 카스켓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자아의 접근성이 특히 가족에게 남기는 딜레마를 지적한다. 가족은 역설적으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의 친구가 아니다. 심지어 망자의 애도를 위해 모인 친구들의 사이트에 접근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판도라의 상자가 되기도 한다. 이미 죽은 자의 프라이버시는 자연인의 법률적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적 지점도 있다. 우리가 형성해 놓은 고인의 이미지가 때로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이것은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여전히 죽음 앞에서 제대로 된 합의나 충분한 숙고가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기업들도 유족들도 죽음과는 멀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눈부신 기술의 최첨단의 시대에 불멸의 환상을 자본주의적 욕망에 덧씌우지만 여전히 그것은 죽음에서 백전백패다. 


이 책이 그런 딜레마, 모순에 대한 방향이나 해법을 제시해주는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건 다시 여기 현재에서의 삶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깨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무도 감히 묻지 못했던 디지털 시대의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들은 유효적절하다. 내가 인터넷에 쓰는 댓글, 블로그에 올리는 글, 친구들과 주고받는 카톡 메시지들이 죽어서도 남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자세의 전환을 요구한다. 


디지털은 우리가 원하지 않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족적을 남긴다. 그것은 영원할 것 같지만 허무하게 삭제되어 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다. 때로는 편항적인 왜곡으로 선별 편집될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때로 남은 자들은 그 흔적에서 때로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서 통제할 도리는 없다.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한계이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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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저는 어제도 먼 다리 건너 어떤 분의 죽음을 추모하며 저녁 내내 죽음을 이야기했는데,
죽음 후의 디지털 영생은 생각지 못해본 부분이네요.

blanca님 친구분의 카톡을 지우지 못하신 마음, 확 옵니다..

Black Mirror에서 이런 내용 다룬 에피소드가 있는지 기억을 뒤지고 있어요.

blanca 2021-03-05 13:36   좋아요 1 | URL
아, 북사랑님 안 그래도 그 드라마 얘기 여기에 나와요. 제가 그래서 넷플릭스 찾아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감은빛 2021-03-06 0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용하는 SNS 중에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계정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어요. 그 계정이 돌아가신 후 그대로 멈춰있는 경우도 있고, 이후에 가족이 그 계정에 글을 남기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어쩌다 그의 기일에 글이 올라오면 오늘이 그 날이었구나 깨닫게 되기도 하구요.

가끔 아이들이 내 디지털 기록들을 찾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져요. 큰 아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 페이스북과 인스타계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가 아주 가끔 올리는 일상을 다 체크하고 있고, 작은 아이도 최근에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하더니 제가 몇 년간 올린 모든 게시물에 죄다 ‘좋아요‘를 찍더라구요.

그런데 아이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블로그를 이용해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어요. 예전에 주로 썼던 다른 블로그는 서비스가 종료되어 이제는 없어졌고, 이 알라딘 서재도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이 서재를 발견하고 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궁금해요. ㅎㅎ

아참, [블랙 미러] 시리즈는 정말 잘 만들었어요. 한 편 한 편 담고 있는 문제의식과 풍자가 정말 좋았어요. 대부분 마치 영화처럼 짜임새가 좋고, 익숙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볼 수도 있구요.

blanca 2021-03-06 13:50   좋아요 0 | URL
아빠 SNS에 ‘좋아요‘를 누르는 아이 모습이 상상되어 귀엽네요.^^
저는 아직 사실 잘 모르겠어요. 죽음과 글, 남기고 가는 것. 아직은 더 시간이 지나서 좀 초연하고 거리두기가 되 어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블랙 미러>그렇게 얘기하시니 한번 봐야겠네요.
 

어떤 책은 그 책으로 가는 다리가 된다. 그렇다고 그 '어떤 책'이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 책'은 이제 그 '어떤 책' 없이 떠올릴 수 없게 된다. 

















남의 소설을 읽지 않는  소설가들이 있다. 남의 글을 읽지 않는 작가들처럼 나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쓸 수는 없을지언정 읽지 않는 사람이 자기 아집이나 편견에 갇히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슐러 르 귄의 서평은 그러한 면에서 대단히 놀랍다. 그는 대단한 작가이기에 앞서 성실하고 열정적인 독자다. 그의 서평들은 놀랍다. 전문적인 비평과 독서를 즐기는 평범한 독자 사이의 균형감이 빛난다. 모두가 열광하는 작가나 이야기에 대한 결정적인 취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그런 그가 끝까지 사랑하고 경의를 표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어슐러 K.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그 작가는 주제 사라마구다. 르 귄은 그를 극찬한다. 아니, 이 작가를 사랑한다. 그 사랑과 열광이 너무 절절하게 전해져 와서 이 대목을 읽고 사라마구의 그 뭐라도 다시 찾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노벨 문학상을 탄 팔십이 훌쩍 넘은 노작가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럴 듯하게 윤색하는 대다수의 다른 이들이 걷게 되는 그 길과 거꾸로 걸어간다. <작은 기억들>은 포르투칼 소년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이웃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짐짓 시치미를 떼는 사춘기 소년의 고백들은 절로 킥킥 웃게 하고 때로 아슬아슬해서 식은땀을 흘리게 하고 애잔해서 자주 눈물 짓게 한다. 그러나 전 생애를 회고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 소년기의 이야기가 위대한 노작가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사라마구가 팔순이 될 때까지의 자신의 전 생애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곱절은 더. 이 익살맞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치밀하게 직조한 작품을 써 낼 작가의 탄생을 예감하게 된다.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거라."

-[훈계의 책]에서


그가 자랐던 아지냐가 마을의 눈부신 풍광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조부모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절창이다. 


아흔 살 인생의 평정심과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소녀 시절의 불꽃으로.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단다. 그래서 죽는 것이 너무도 슬프단다.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발랑 까진 소년기의 에피소드를 고백하며 "그랬다. 그때는 참으로 순수한 시절이었다."라고 짐짓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르 귄이 왜 유독 이 작가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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