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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평점 :
문제의식을 서사화하는 일은 도발적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명시적일 때 아이러니하게 실패한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욕이 이야기를 펼치는 일에 앞설 때 독자들은 물러선다. 제일 좋은 지점은 그 두 개가 우연인 것처럼 조우할 때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읽으며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절로 다가갈 수 있을 때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런 면에서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비교적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일곱 명의 여성 작가는 공통적으로 주류 문화, 지배 담론에 저항한다. 거기에서 소외되고 배척된 여성 퀴어들, 장애인, 독립영화 종사자들,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리멸렬하지 않다. 어떤 예상이나 기대를 배반하는 지점에서 생동하는 결기가 빛난다.
대상작인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첫문장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세상은 자명하게 반으로 나뉜다. 혼자 먹는 사람과 같이 먹는 사람.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혼자 먹는 둘은 만난다. 담배를 피면서. 연구소에서 나는 젊은 여자 사무보조 계약직이고 그는 연구자다. 그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나뉘고 둘은 그것을 기민하게 인식하지면 교묘하게 서로에게 은폐한다. 언뜻 나와 그의 이야기로 전개될 것 같았던 예상은 그가 연상시키는 대학시절의 강사 장 피에르와 그가 훈장처럼 달고 다녔던 나의 친구 연수의 그것으로 보기좋게 빗나간다. 장 피에르는 운동권이었지만 집안의 지원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학생들은 그를 숭배했다. 어리고 천진한 우리들은 그에게 보기좋게 이용당한다. 그것은 그립지만 역겨운 시절이었다. 이 시절의 기억의 포말은 모두를 뒤덮는다. 우리 모두 지금 돌이켜보면 도무지 아닌 것들을 동경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럴듯한 가짜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신분의 장점과 아우라를 영리하게 이용해서 그렇게나 스스로가 비판했던 기득권으로 들어가 연수 같은 수많은 젊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서른일곱의 나는 그의 서른일곱의 모습을 회고하며 그것이 유린한 스무 살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그 환멸이 그저 무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의식하는 행위를 다짐한다. 결말은 상투적일 수 있지만 여운은 길다.
김멜라의 <나뭇잎이 마르고>는 놀라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체가 그랬다. 체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심지어 자음 발음이 뭉개져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금방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뒤틀리고 뭉개진 발음과 몸을 가진 체는 우리가 예상하는 수동성이나 주눅든 모습이 아니다. 학교에서 제안한 홍보모델 일에 대고 큰 소리로 "옹사오 영예고 옹짜오 우여역을 행악 하이 마고 제애오 온을 지불해어!"(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우려먹을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해요!")라고 외칠 수 있는 여성이다. 김멜라는 체의 대사를 발음이 뭉개지면 뭉개지는 대로 그대로 쓰는데 이게 또 묘한 게 점점 이야기에 몰입할 수록 마치 그 얘기들이 모두 정상인이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장애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성정체성도 당당하게 오픈하는 체의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이런 모습이 결국 우리가 우리와 서로 다르다고 의식하게 되는 성적 소수자들이나 장애인들과 소통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 익숙해지는 것, 가치 판단이나 위계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것.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박서련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열두 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당신'으로 하는 이야기는 게임을 잘 못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당신이 직접 게임 과외를 받아 아이에게 가르치려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신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당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는 보상받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의식하며 아이를 사랑한다.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찔린다. 많이. 열다섯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한 것. 그것을 혹시 지금 여기 아이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박서련의 '당신'처럼 반드시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깨달음은 거칠다. 아이들은 '엄마'를 욕처럼 금칙어로 사용한다. 나는 아이를 플레이어로 게임하지만 그 캐릭터마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설정은 도발적이고 과감하게 우리가 아이를 키우며 놓치는 부분을 가격한다. 아이를 키우는 많은 엄마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는 영화를 꿈꾸는 영화를 만드는 언젠가는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건 영화를 상영하고 싶어했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시네필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송가다. 생존과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꿈을 유예하고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우리들이 노인이 되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한 할머니의 모습과 만나 어떤 흐릿하지만 아름다운 전망을 만날 때 이야기의 마침표는 빛난다. 대단한 서사나 드라마틱한 반전 없이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모든 이야기가 나름의 색깔과 결을 가지고 저마다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잘 읽히고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다만 남성 작가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균형감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여성의 시선, 여성의 서사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한 결로 결속될 때 의도치 않게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우리의 세계는 반드시 남성, 여성으로 양분되어 이야기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의 이야기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