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생명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특히 요양원과 중환자실에서 코로나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그들의 존재를. 어떤 것이든 드러내어 놓고 말하기 힘든 기준 아래 익명화되는 그 존재의 존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그것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언제까지나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그 나약함.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인간의 목숨보다 더 값진 것처럼 행동하죠."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가여운 이들.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하는 별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안 보뱅의 아버지는 마지막 1년을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서 보낸다. 보뱅이 요양원의 노인들을 보고 쓴 글은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편협함을 일깨운다. 자본주의의 눈먼 경쟁에서 밀려나 타인을 짓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는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가치에 대하여 보뱅은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음이 가지는 그 계량화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하여. 


코로나 시대에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을 이미 이야기한 작가들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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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5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blanca 2021-12-25 11:05   좋아요 1 | URL
오, 귀여운 토끼가. 스캇님도 메리크리스마스!

그레이스 2021-12-25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간비행!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다시 읽고픈 소설이예요.~♡

blanca 2021-12-26 09:59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라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이제서야 읽다니 하며 놀랐답니다.
 
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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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시 윌리엄 트레버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산하고 아름답다. 사십대, 오십대, 십대의 주인공들의 내면의 풍경이 다른 시공간을 넘어 읽는 이들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원형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쉽게 쓰여지지 않은 작품인만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휘리릭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다.


오랜 결혼 생활을 하고 이제는 망자가 된 남편의 시신이 아직 집에 있는 상태에서 방문객을 맞은 아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슬퍼하고 애도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그 수녀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남편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소유한 집을 보고 선택한 전력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면. <고인 곁에 앉다>는 그런 이야기다. 사랑했던 남편과의 작별을 슬퍼하는 아내가 아니라 계산적이고 자주 욱했던 고인의 곁에 앉은 담담한 아내. 그 아내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수녀자매. 


중년의 남녀가 일종의 소개 업체에서 만나 소개팅을 하는데 서로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데 그 점을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대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저녁 외출>은 엉뚱한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나는 꼭 차 있는 여자와 만나야 한다는 그 내밀하고 언뜻 저급해 보이는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는 여자와의 만남은 분명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구태여 애프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렇게 헤어져도 괜찮은 그런 만남에 대한 이야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난 남녀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소통하게 되는 흩어지지 않는 시간에 대한 기록.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며 주로 책에 관한 이야기만을 하며 맺게 되는 결혼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 어떤 죄책감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게 되는 작품이 <그라일리스의 유산>이다. 남자가 먼저 죽은 여자의 그녀의 유산을 거부함으로써 얻게 되는 윤리적 자긍심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로즈 울다>는 늙은 과외 선생에게서 수업을 받음으로써 의도치 않게 그 시간을 활용한 젊은 아내의 외도를 돕게 되는 소녀가 느끼는 비애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외도를 스승과 제자는 알아차리고 그 패배감, 배신감, 비애를 공유한다. 소녀는 그 사연을 친구들과의 가십거리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아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트레버는 소녀가 나이 든 남자의 무력함을 알아차리며 느끼게 되는 고통을 그녀의 성장통과 기민하게 연결시킨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동시에 느끼게 되는 슬픔의 지점은 각기 달랐지만 그것이 향해가는 것은 인간이 타인과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그 거리감에 대한 통찰에서 만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결국 기만당하고 현재는 언제나 과거를 좀먹는다. 그렇다고 거기 있었던 찬란했던 순간들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트레버식의 의미 부여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 우리가 원하거나 예상했던 대로 나아가지 않는 인생의 흐름이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이 거장이 언제나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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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1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에서 저도 <로즈 울다> 여러번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순간 그 장면을 음미 했습니다 트레버의 문장은 단 한문장이라도 지나칠 수 없죠.^^

blanca 2021-12-21 21:55   좋아요 1 | URL
스캇님, 이미 읽으셨군요! <로즈 울다> 참 좋죠. 이런 건 트레버밖에 못 쓸듯...트레버는 소녀, 중년 여자의 심리 묘사에 가장 탁월한 남자 작가인 듯해요. 보통 뛰어난 작가라도 이성의 묘사는 단편적이거나 단순한데 트레버는 그런 면에서 정말 놀라운 작가 같아요.

나뭇잎처럼 2021-12-23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윌리엄 트레버 신간인가요? 저 진짜 윌리엄 트레버 좋아하는데. 넘 좋아서 낭독해서 읽기도 하고, 필사도 하고. 국내에 나온 건 다 읽고, 원서도 많이 찾아 읽었죠. 윌리엄 트레버 좋아하시는 분 만나니 넘 반가운데요? 파리 리뷰에 나왔던 윌리엄 트레버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그렇게 좋은데 우리나라엔 많이 안 알려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왜 좋냐고 물으면... 음. 참 딱 말하기 어렵지만. 깨닫지 않고서는 저런 글을 쓸 수 없다, 는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날씨가 아주 침착한 날, 다시 꺼내들어야겠어요. ^^

blanca 2021-12-23 11:10   좋아요 2 | URL
나뭇잎처럼님 반갑습니다. 저도 엄청난 팬입니다. 윌리엄 트레버는 대가죠.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강력한 울림과 깊이를 지니고 있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작가 중의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펠리시아의 여정> 같은 작품은 정말 살떨릴 정도로 좋았어요. 서구 사회의 백인 나이든 남자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처절하고 아름답게 이름 없이 죽어간 소녀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하나의 애도를 이야기로 할 수 있을까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신간 단편집인데 사실 번역이 늦은 거고 시기상으로는 이미 읽으셨을 가능성도 높겠습니다.
 

올해 갑자기 노안이 왔다. 그 탓에 한동안 책도 보기 싫고 글도 쓰기 싫어졌다. 뭔가 이런 행위를 할 때마다 너는 이제 늙었다,고 확인사살당하는 심정에 절로 우울해졌다. 노안이 오기 전의 내가 그리웠다. 깨알같은 글씨로 그날그날 있었던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메모했던 나날들이 낯설었다. 나이든 얼굴도 새치도 노안만큼 나이듦의 현타를 주지는 않는다. 노안이 온 순간 이제 엄마로만 생각했던 어떤 중년의 여인의 모습이 내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이 왔다. 

















미켈란젤로가 72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사실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이다. 그는 만년에 그 걸작의 책임을 떠안았다. 심지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큰 프로젝트였는데도 그는 기꺼이 떠안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착공부터 완공까지 미켈란젤로가 전담한 것은 아니다. 착공은 이미 브라만테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것을 미켈란젤로가 인수하여 시공상의 결점을 보완하고 윤곽을 확정지어 후대의 잔로렌초 베르니니가 완공하기까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군가에게 노년에 그런 일을 떠맡긴다면 골칫거리로 여기고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시작도 마무리도 할 수 없는 일, 분명 많은 착오와 허점을 수정, 보완해야 하는 머리 아픈 일을 이제는 모두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쉴 나이에 타향에서 만년의 17년을 온전히 헌신하여 완수해 낸 것이다. 


저자 월리스는 세계적인 미켈란젤로 권위자로 그 자신이 예순이 넘고 나서야 미켈란젤로의 이 만년의 프로젝트를 탐사한 이야기를 집필할 결심을 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예술 작품들 뿐만 아니라 방대한 기록 자료를 남긴 사람이라 한다. 이 문서 자료들을 통해 구축한 거장의 만년의 서사는 그 자체로 감동적인 이야기로 와닿는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은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로 출발하여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의 장대한 여정에 관한 보고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것을 명령하고 뒷짐만 지고 있는 유형의 건축가는 분명 아니었지만 노령에 접어들며 어디까지 자신이 관여하고 어디부터 위임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인식한 실행가였다. 그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여러 조수들의 군단을 직접 조직했고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건축 프로젝트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 스승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 스승의 정신이 구현되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후계자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의 설계, 그의 조직이 체계성과 핵심적 가치 덕분일 것이다. 이는 온갖 정보를 한 사람이 독식하고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이나 아랫사람에 대한 적절한 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초심의 가치와 정신이 무화되는 여러 프로젝트나 심지어 정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던 우정들,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던 하인과의 눈물겨운 작별 에피소드들은 두고두고 여운이 길다. 동시대 사람들보다 거의 배는 살아서 장수했던 거장은 그만큼 수많은 인연들과 예기치 않은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했다. 그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조물주에게서 주어진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라는 주변인들의 요청에도 결국 로마에 남아 여든이 훌쩍 넘어서까지 버틴 것은 그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 그 자체로 향한 길이기도 하다는 그 자신의 믿음과도 통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고 그래서 아쉽게도 "나의 백발과 나의 고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고 시작했던 이 예술가의 걸작의 스카이라인을 보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보고 싶다. 그 앞에서 고작 그의 나이의 반 정도를 살고 노안으로 투덜거렸던 나의 이 나약함을 반성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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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1-12-06 14: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신문에서 신간소개된 걸 보고 보관함에 넣었는데 blanca님은 벌써 완독 후 리뷰까지@_@;;; 저도 노안 와서 슬퍼요ㅠㅠ;;;;

blanca 2021-12-06 16:10   좋아요 1 | URL
헉, 달밤님마저...알라딘에서는 노안이 가장 슬픈 화두죠.

다락방 2021-12-06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 급격한 시력 저하로 토요일에 안과를 갔었는데요 건조증과 노안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노안이라는 거 알고 갔지만 막상 닥터가 ‘버티세요‘ 라고 하니까 우울하더라고요. 이미 시작된 노안은 영양제로 잡을수도 늦출 수도 없고 앞으로 더 진행될 일만 있으니 버티다가 안되겠을 때 돋보기 맞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몸이 노화를 실감하는 일은 이래저래 우울하지만 눈에 있어서는 더 우울했어요. 저는 책을 봐야 하는데요. 책을 봐야하는데 노안이라뇨. 닥터는 눈을 좀 덜 쓸 것을, 보는 일을 좀 덜 할것을 권유했는데요 그렇다면 제가 줄여야 할 것은 폰이겠구나 싶었어요. 무언가 줄여야 한다면 책 보다는 폰이 나을것 같아요.

노안도 저와 같이 겪는 블랑카님. 사실 저는 노안온지 좀 됐답니다 ㅠㅠ

blanca 2021-12-06 16:1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도 최근에 안과가셨군요. 저도 미루다미루다 간 거였거든요. 저보다 훌쩍 젊은 여자 의사가 사십 대에는 정밀 검진을 요합니다. 이렇게 확인사살을 ㅋㅋㅋ 흑, 노안은 저는 아주 머나먼 정말 할머니가 되면 갑자기 짠 오는 건 줄 알았어요. 이렇게 사십대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건지 몰랐잖아요. 아, 폰을 줄여야겠군요! 근데 지금 너무 우울해하면 더 나이들면 또 후회할 것 같아서 최대한 빨리 길고 두꺼운 책들을 독파하기로 마음 먹었어요.ㅋㅋㅋ 나이들면 힘드니까요.

북극곰 2021-12-06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흰머리와 주름살은 그러려니 싶은데 노안은 심리적인 충격이 크죠? 근시 때문에 안경까지 쓰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불편해요. 근시 시력도 나빠졌는데 그에 맞춰 도수를 올리면 책 볼 때 어질어질 촛점이 안 맞아서 아예 책을 보기 힘들더라고요. 슬픕니다. ㅠㅠ

blanca 2021-12-06 16:14   좋아요 0 | URL
한동안 너무 우울해서 책이 꼴도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지금은 넘어가긴 했는데...그래도 우울감이 있어요. 노안이란 게 참...사람을 침울하게 만들더라고요. 내가 이십대에 쓴 자그마한 글씨를 내가 보고 놀란다니까요.보이지도 않네, 이러면서...

stella.K 2021-12-0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인간은 한때 낙심할 수 있어도 좌절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노안이 왔을 때 다소 의기소침했는데 또 그냥 살아지더군요. 오늘 아침 배우 송승환이 나왔는데 시력을 거의 상실했는데 그래도 무대에 오른다고 하더군요. 대사는 소리로 외우고 동선 익히면 어렵지 않다며 긍정적이었어요. 우린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어느덧 60대 중반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응원해 주고 싶더라구요. 그냥 응원해 주자구요.^^

blanca 2021-12-06 19:10   좋아요 1 | URL
송승환님 예전에 강연으로 실제 뵌 적이 있는데 최근 소식 듣고 많이 놀라고 안타까웠어요. 다시 연기하고 계신다니 참으로 반갑고 다행입니다. 네, 스텔라님 말씀 감사합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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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리뷰>에서 열다섯 명의 작가에게 <파리 리뷰>가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그 이유를 함께 얘기해 달라 요청해서 만든 단편선집이다. 열다섯 명의 각자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들의 문체들과 서사의 구현 방식에 끊임없이 적응했다 나오는 건 정신적으로 품이 드는 일이었지만 좋은 작품들이 많아 기쁨으로 울렁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인정 받은 소설가로서 인정 받은 작가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을 선정했으니 그 작품의 수준이 어떨지 짐작할 만하다. 특히 좋았던 작품들은


<궁전 도둑> 이선 캐닌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던 사립학교의 역사 교사로 퇴직한 화자가 정계의 거물이 된 45년 전 자신이 가르쳤던 문제아 제자와의 재회를 그린 작품이다. 자신이 은근히 반감을 가졌던 제자의 거대한 기만극에 의도치 않게 동참하게 되는 삶의 잔인한 역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언뜻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의 회고가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이 역시 구도는 다르지만 주인에게 충성한 세월이 결국 거대한 기만극의 일부였던 것으로 드러나는 결말을 지니고 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 스티븐 밀하우저

유년의 여름에 대한 그 끝날 것 같지 않은 막막한 아름다운 정조가 이야기 전반에 스며 있어 추억을 곱씹으며 읽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는 유년 시절의 그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환상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과 닮아 있다. 주인공이 그 양탄자를 더 이상 타지 않고 구석에 넣어 놓게 됐을 때 우리는 아쉽지만 그가 어른의 세계로 가파르게 진입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눈부시게 구현된 작품이다. 감각의 향연은 불가능한 세계를 마치 눈앞에 놓인 것처럼 완벽하게 재현한다.


<늙은 새들> 버나드 쿠퍼

도입부부터 눈길을 확 끌었던 작품이라 흠뻑 빠져 읽었다. 언뜻 보면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것 같은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그 내밀한 여운에 마음이 한동안 슬퍼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오후, 건축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장례식 예약을 해두었냐고 묻는 아버지. 그게 아버지의 것인지 아들의 것인지 묻는 아들에게 우리 둘 다가 될 거라고 단정 짓는 아버지...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주변 사람에게 묻지 않고는 알아차릴 수 없는 늙은 아버지. 그 아버지의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의 끝을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건축가 아들의 건물 청사진은 그런 '늙은 새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댈러스 위브

엽기적이고 잔혹한데 아름답다. 놀라운 작품이다. 문학적 성취, 세속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하나씩 차례로 포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지만 나의 몸은 절단 난다. 이것은 거대한 은유다. 비단 문학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체를 포기해서 언어로 남기는 이야기. "우리는 산산이 분해되어 단어로, 문장으로, 단락으로, 서사로 들어간다."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세세하게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일반화와 추상화에 실패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보르헤스는 역시 천재다. 그것이 결코 본질이 될 수 없음을 간파했다. 결국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것들로 인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색깔들의 이야기가 빛나는 대목은 겹친다. 내가 미처 언어화할 수 없었던 내가 살며 느꼈던 그 감정들. 나 혼자만의 것이라 여기며 고독하게 여몄던 슬픔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곤 하는 그 어두운 체념들. 이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는 그 기민함. 문학은 이 지대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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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07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ㅅ^

blanca 2022-01-08 08: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제 궁금증도 해결해주시고 감사합니다.

mini74 2022-01-0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도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1-08 08:49   좋아요 1 | URL
미니님 정말 감사드려요.

새파랑 2022-01-07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당선 축하드려요. 이책은 제목도 너무 멋있는거 같아요 ^^

blanca 2022-01-08 08:4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그렇죠?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1-07 2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blanca 2022-01-08 08:49   좋아요 1 | URL
덕분에 좋은 주말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1-07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축하드려요

blanca 2022-01-08 08:4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드려요.

서니데이 2022-01-07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blanca 2022-01-08 08:5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잊지 않고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주말 되기를...

하나의책장 2022-01-08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1-12 12:38   좋아요 0 | URL
감사드립니다.
 
대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4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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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 신봉자였다. 어떤 상황이라도 고정 불변의 자아가 있고 선한 사람은 일관되게 선한 결정을, 악인은 모든 분야에서 나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의에 앞장서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습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복잡다단하고 욕망에 취약하다. 어떤 상황은 사람을 망친다. 이 기본 전제를 알지 못하면 인간사를 읽을 수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그 사람의 가장 이기적인 본성을 끌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당신도 모두 어떤 극한 상황에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문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작가로 나는 에밀 졸라를 꼽는다. 에밀 졸라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극한을 뚫고 더 나아간다. 그는 이상주의를 비웃는다. 아름다운 정서적 교감, 인간에 대한 신뢰는 에밀 졸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가 구현하는 세계 속 인간 군상은 욕망 앞에서 나약하고 잔인하다. 돈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 형제에게 낫을 휘두른다. 


펄벅의 <대지>와 같은 제목의 이야기는 그것과는 결과 차원 자체가 다르다. 에밀 졸라의 대지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혼재되어 있다. 인간은 그것의 생명성과 위대함에 기꺼이 굴복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고 그것을 물화하여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없이 휘둘리는 비극적 재화로 축소 치환해버리기도 한다. 13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부동산에 대하여 가지는 모순적 욕망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푸앙 가문의 땅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삶의 그 비루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애착과 얽혀 거대한 인간들의 욕망의 지형도로 완성된다. 


<대지>의 출발은 가볍고 상쾌하다. 우르두캥의 농장의 목수로 일하는 젊은이 장이 푸앙가의 소녀 프랑소아즈의 암소의 교미를 돕는 에로틱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윽고 푸앙 영감의 재산 분배를 둘러싼 세 남매의 갈등의 장면으로 나아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그리는 일상적 풍경과 다르다. 남매는 아버지와 자신들이 받아낼 유산을 분리하지 못한다. 부자, 부녀 관계는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이는 역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노인은 짐짝처럼 자녀들 집을 옮겨다니며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둘도 없는 자매로 서로 허리를 감싸 안고 다녔던 자매 리즈와 프랑소아즈의 관계도 푸앙가의 탐욕스러운 뷔토를 가운데 두고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에밀 졸라는 그를 둘러싼 자매의 연적 관계를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린다. 가족 간의 사랑이나 신뢰는 마치 개나 줘버려, 하는 졸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정신없이 타작 일과 그 소리에 빠져 더 힘차게 두들겼다. 바로 그때 저녁 외출 허가를 받고 방문한 장이 그들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를 느꼈고, 마치 불륜 현장을 적발한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열기를 뿜으며 헝클어진 모습으로 제때에 제자리에 주거니 받거니 도리깨질을 하면서 그 뜨거운 일을 함께 하는 두 사람은 밀 타작을 한다기보다 차라리 아이를 만드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pp.351


형부와 처제의 밀 타작 장면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농염한 색깔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면서도 성적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곳곳에 드러나는 각종 근친상간적인 장면들은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인데 19세기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고전이 가지는 경직성과 구태의연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 책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다. <대지>를 보면 에밀졸라가 통속적 재미와 작품의 깊이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보기 드문 작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푸앙 영감의 비극적 종말은 그가 하려던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었다. 


흩날린 씨앗들이 파종꾼들의 손에서 벗어나 금빛으로 주변에 떠도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다 파종꾼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면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씨앗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파종꾼들을 에워싼 모습이 멀리서 빛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pp.633


지독한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는 작가라니...끔찍한 파멸 뒤에 떨리는 빛을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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