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두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몇 주를 고생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찾아간 신경외과에서는 별일이야 없겠지만 이제 뇌 MRII를 한번쯤 찍어둘 나이가 됐다고 했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건가? 이후에 나의 짱구 머리 사진을 판독해 준 나보다 젊은 의사는 아직 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의 나이에 대한 이 상반된 해석은 결국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야기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해 준 셈이다. 언제나 많을 줄 알았던 머리숱의 급감과 노안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내 삶 전반에 끼친다. 아무리 영혼과 내면과 의지의 이야기를 해도 결국 나는 내 몸 안에 갇혀 존재의 환각을 느끼는 존재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 몸을 넘어서거나 이길 수 없다. 인정해야 한다.


이 소설은 19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화자가 딸에게 유산으로 남긴, 자신이 열두 살 때부터 여든여뎗 살 마지막 때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 쓴 일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연령에 따른 몸의 미묘한 변화와 성장, 각종 성가신 질환들, 노화,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적 형식의 보고서는 어떤 세대의 독자가 읽어도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육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한층 더 생생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내 나이 즈음의 일기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면 피로 속에 불안이 침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내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친 내 의식의 귀에다 대고 불안이 속삭이는 말들이다.

-pp.238

암울한 전망이다. 노안의 이야기도 있다. 사춘기 아들과의 대치에 관한 이야기도 심지어 갑자기 출몰하는 이명에 대한 충격도 있다. 얼마 전 나보다 두 살 어린 지인과의 통화에서 우리는 예고 없이 나타난 그 육체적 쇠락의 징후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놀라워했다. 거기에 이명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알고 보면 오십, 육십, 심지어 팔십에 이르기까지 아직 본격적인 노화의 관문에는 다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더 많은 더 어려운 성가신 것들의 전시가 주르륵 펼쳐진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애송이다. 결국 "왕관들을 빼앗기는 거다." 이미 쓴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몸이라는 극지에서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굉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늙는다는 건 이 해빙을 겪어내는 것이다.

pp.362


"늙는다는 건 이 해빙을 겪어내는 것이다." 절묘한 문장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새는 노인들이 다르게 보인다. 시간과 세월은 그저 지나가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몸은 늙고 그 안의 존재는 그 미미한 껍질을 붙잡고 분투하며 마지막까지 견뎌내야 하는 과업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승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을 나날이 견디는 중이니까. <몸의 일기>는 그러한 과정의 위대함을 가르쳐 준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2-18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페낙을 좋아하게 됐어요
~♡

blanca 2022-02-18 20:18   좋아요 0 | URL
<학교의 슬픔>도 참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찾아 보려고요.

stella.K 2022-02-18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그렇게 노화를 거침에도 불구하고
또 장수하며 지탱하고 버티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지금 내 몸을 생각하면 내가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데 그분들을 보면 나도 버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늙으면 어떻게 살까 싶은데도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22-02-18 20:18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저도 그렇게 느껴요.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어요.

coolcat329 2022-02-18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화 죽음...저도 거의 매일 생각하는 단어입니다.
두통이 얼마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저도 제 가족의 고통을 곁에서 봤었기에 조금만 머리가 아파도 가슴이 덜컥합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22-02-18 20:19   좋아요 1 | URL
저는 사실 두통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프니 너무 두렵더라고요. 통증이라는 게 한번 몸을 점령하면 그게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라로 2022-02-18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읽고 있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네요,,, 그나저나 노년은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인 것 같아요. 하아~

blanca 2022-02-18 20:21   좋아요 1 | URL
아, 그 책도 너무 좋죠. 신체가 차차 기능이 떨어지고 다들 나를 할머니로 생각하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요. 사실 지금의 제 모습도 낯설어요. 누가 아줌마, 그러면 ㅋㅋ 아줌마 맞는데 기분은 별로라니까요. ㅋ

기억의집 2022-02-18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통은 더 이상 없는 거죠!! 저도 두통이 있는 사람이라.. 어떨 땐 게보린 세개도 먹고 그랬거든요. 저도 검사해서크게 이상은 없다고 하니 한편으론 맘이 놓이는데… 블랑카님도 다행이예요 나이 들면… 그렇죠 저는 제 손을 볼 때마다 속상해요. 너무 쭈글쭈글해서… 다 노화의 과정이겠지만,, 이제 더하면 더 할테니 맘을 부여잡아야겠어요

blanca 2022-02-19 09:58   좋아요 1 | URL
지금은 괜찮은데 저는 두통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 여튼 앞으로 건강하게 잘 늙고 싶은데 늙는다는 것 자체가 몸이 허약해지는 거라 심란합니다.
 

박완서 작가가 미군 PX에서 근무하던 시절, 가난한 무명의 화가 박수근을 만난 경험을 소재로 한 <나목>으로 마흔에 등단한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가의 사후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두고 벌이는 과열된 소동을 보고 생전 그가 받았던 대우, 겪었던 가난을 떠올리며 그를 제대로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다. 그 조용하고  성실하고 거창한 예술이 아닌 검박하고 처절한 생 그 자체에 복무했던 한 남자에 대하여 박완서 작가보다 더 생생하게 잘 그려낼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성싶다. 처음에는 논픽션으로 쓰려던 시도가 점차 소설로 확장되었고 이는 세상에 박완서라는 거장을 등장시키는 발판이 되어준다.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박수근 작가의 생전의 초상은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다. 스무 살 초입의 여대생과 중년의 화가의 만남은 그 둘이 이윽고 세상을 흔드는 소설가와 위대한 화가로 남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에 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후 극심한 가난과 자국 정부가 아닌 미군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그 위치를 공유해야 하는 처지에서 박수근은 화로 가득 차 있는 어린 여대생에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준다. 




















그럴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자애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일의 악착같음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낸 자애라는 게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갔을 때처럼 쾌적하게 스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퇴근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린 그냥 을지로 입구까지 같이 걸었다. 둘이 다 전차를 탔지만 방향이 달라서 거기서 헤어졌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죽은 오빠를 대신하여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박완서 작가와 줄줄이 식구가 딸린 가난한 간판장이였던 박수근 화가가 서로 이렇다할 말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을지로 입구까지 퇴근길에 걷는 그 풍경을 상상해 본다. 가난했고 때로 그 가난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둘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애'를 공유했다. 훗날 이 시대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될 그 둘의 퇴근길의 동행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뭉클하다. 이 풍경이 사라지지 않고 박완서 작가의 섬세하고 절묘한 언어로 다시 길어 올려져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기억 속에만 묻어두었더라면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비로소 부활한다. 


박수근 작가의 그림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은 전시회를 통해서 가까스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전집이 간행될 정도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끝내 재회하지 못한 그 둘에 남은 것은 그러나 여전히 그 시절의 풍경들일 것이다. 가난했고 무명이었고 그럼에도 꾸는 꿈들이 있었던. 무명의 화가는 항상 화가 나 있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화가들에게 잔소리와 조언을 남발하는 여대생에게 말없이 자신의 화집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여태껏의 익명성으로부터 돌출되어 자신을 박수근으로 봐주길 요구하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동류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모두를 싸잡아 집단화해서 보던 편견에서 그 여대생은 비로소 사람 하나하나를 개별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녀는 시대에 남을 작가로서의 소양을 키우게 된다. 


사진, 영상, SNS로 남을 이 시대의 부스러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이제 아무도 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하려거나 기록하려는 의지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동영상으로 채집하고 짧은 문구들로 갈음해 버리는 이 시대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남을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발언은 누군가에게 큰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억으로 복원될 수 있을까.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2-12 14: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쓰셨는데, 저는 감사히도 blanca님 페이퍼 통해서 [나목] 탄생 이면의 이야기를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대화하지 않고, 많은 대화 없이 함께 걸었던 을지로 도보...blanca 님께서 세세히 묘사하지 않으셔도 느낌이 풍성풍성~ 그 시절, 그 거리, 가난한 두 예술가의 모습 그림이 그려지네요. 역시 blanca님! 이달의 당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2-12 18:35   좋아요 3 | URL
알라알라님, 저는 그 풍경 그리니까 막 뭉클하고 울컥하고...온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여대생과 화가가 별 말 없이 조용히 을지로 입구까지 함께 걸어가는 풍경이요. 훗날 이 둘이 이렇게나 위대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로 남으리라고 그 당시 상상이나 했을까요? 막 날이 서 있는 어린 박완서에게 토닥토닥 박수근 화백이 줬던 위로와 그 자애로움이 막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결국 박수근 화가가 박완서 작가가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너무 놀라워요.

2022-02-14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4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2-15 1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목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작가가 마흔 살에 등단해서 예전 우리 문학 지망생들에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었었지요. 우리도 늦지 않았어, 하면서...ㅋㅋ
요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흡인력 있어요.
소설도 산문에서도 참 훌륭한 작가입니다.

blanca 2022-02-16 09:03   좋아요 2 | URL
페크님, 저도 요새 간간이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 소설을 다시 읽기 하고 있는데 정말 명문이에요. 위대한 작가란 이런 거구나, 끊임없이 다시 읽어도 새롭게 읽히는...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scott 2022-02-17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작가님이 남기신 모든 작품은 잊혀진 지난 시절의 한국의 풍경, 전쟁, 피난, 가난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담긴 귀한 사료집 처럼 읽혀집니다

이번에 출판사에서 특별판을 출간 해도 이전과 똑같은 가격이여서
박작가님 자손들이 엄마가 남기신 작품에 큰 욕심을 부리시지 않은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훈훈 ^ㅅ^

blanca 2022-02-18 09:08   좋아요 2 | URL
증언의 욕구로 소설을 쓰셨다는데 그게 그저 증언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시대의 정리과 성찰로 나아갔다는 게 박완서 작가의 위대한 점인 것 같아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간 대학교 강연에서 몸이 안 좋으셨는데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학생들 사인공세와 사진 촬영에 다 응해주셨다는 에피소드가 참 뭉클하더라고요.

mini74 2022-03-08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와 박수근 ~ ㅠㅠㅠ정말 박수근 그림은 넘사벽 가격이지요. 당선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3-08 21:15   좋아요 1 | URL
미니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2-03-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2-03-08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잊지 않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서니데이 2022-03-08 1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3-08 21:17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적인 에세이가 마치 수많은 퇴고를 거쳐 마침내 가장 빛나는 언어들만 오롯이 남겨 놓은 시처럼 읽힌다. 에세이마저 누구나 함부로 적을 수 없는 글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처절함이 솟아나는 글들. 특히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글은 언젠가 내가 맞을 그날까지 가슴 안에 묻어두고 싶은 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22-01-26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인터뷰 보셨나요?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1/2010112101107.html

blanca 2022-01-26 16:2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었던 것 같아요. 지금 하이드님 링크 타고 다시 읽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벌써 십 년 지났는데 병원에 계신다고 하니 이후로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회사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의 실체 자체가 거대한 사기에 불과하다면. 게다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미 기밀을 유지하기로 맹세를 했고 그 약속을 어길 경우 어마어마한 재정적 손실과 더불어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도 협박을 당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회사를 박차고 나오거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신변을 위협하는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취재한 용감한 저널리스트가 있었기에 이 일은 비로소 세상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증언해 준 수많은 내부 고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엽기적인 사기극은 현재진행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기업은 평범한 제도,도소매, 서비스 회사가 아니라 의료 기업이라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를 중퇴한 젊은 백인 금발 여성이 창업한 최첨단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는 자가 기기를 이용하면 간단한 손가락 끝의 채혈을 통해 수백 가지 질병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환상적인 서사 그 자체였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중년 남성 창업자들의 거대 신화를 흔든 엘리자베스 홈즈의 등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기술업계, 의료계, 정재계가 그 신화를 더 확장하고 심화시키는데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안에서는 그 신화의 기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 직원들의 동요가 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 낸 제품은 기본적인 검사 과정에서도 오작동했고  테라노스는 대신 타사의 제품을 상습적으로 몰래 이용하여 산출된 결과를 버젓이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기의 결정체에 루퍼트 머독,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의 거액이 투자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백전노장인 그들조차 완벽하게 속았다. 


이 사기극과는 별개로 회사 내부에서 일어난 직원들의 착취의 수준 또한 심각했다. 엘리자베스의 숨겨진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도인 서니는 직원들을 수시로 감시하고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 했고 거기에 반항할 경우 모든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원에 의해 끌려 나가게 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화학자 출신의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직원은 테라노스에 일하면서 겪은 일들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내가 회사에 전한 부고는 함께 일했던 직원들한테 전달조차 되지 않는다. 테라노스는 직원들을 소모품 취급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진실을 궁금해하는 건 자사에 대한 도발로 간주됐다. 진실에 눈감고 아부하는 직원은 승진시켰다. 


그런 기업이 수조의 가치를 지니고 21세기의 경이로운 성취로 언론에 회자됐다. 엘리자베스는 스티브 잡스처럼 검은 터틀넥을 입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중 앞에서 큰 눈을 깜박거리며 인도주의적인 청년 기업가처럼 행세했다. 정작 자신의 직원들의 존엄은 무참히 짓밟았던 그녀가 연기한 인본주의적 기업가의 모습에 모두가 속아 열광했다. 그 거대 집단의 믿음을 흔드는 일은 고독하고 위험한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직원 두 명의 활약은 놀라웠다. 특히 국무 장관을 몇 차례나 지낸 조지 슐츠의 손자 타일러 슐츠의 내부 고발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테라노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저자 존 캐리루에게 증언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척을 지고 테라노스의 무시무시한 협박,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기에 또 부유한 집 출신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그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집안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할아버지는 손자보다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를 더 믿고 싶어했다. 저자인 존 캐리루도 이 젊은이의 윤리의식에 깊이 감명 받았다고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에리카 청은 테라노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회사의 잘못된 실험 관행을 당국에 신고했다. 


<배드 블러드>의 저자는 후반부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그 전까지 테라노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서술됨으로써 독자는 이 기묘한 사기극의 실체가 십 년 넘게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그 동인을 스스로 찾아나가게 된다. 모두가 바랐던 미래의 최첨단 진단 기술. 자극적이고 화려한 홍보술 이면에는 산업혁명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등에 걸머진 직원들은 침묵하거나 아프거나 나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의 단서를 놓지 않았던 몇몇의 사람들, 그들을 지지하고 믿어준 사람들, 의사로서 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의 본질을 기억했던 이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아내의 망부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거대한 허구 속의 실낱 같은 진실을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21세기,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일은 그래서 명암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인간은 어리석고 때로 악독해지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자정의 힘을 품고 있다. 악은 창궐하지만 그 안에서 선은 끝내 죽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이용하지만 존엄한 인간을 끝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2-01-26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의적절한 독서를 하셨네요! ^^

blanca 2022-01-26 14:08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2-01-26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가 너무 좋아서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왜 항상 다른 사람들이 읽는 책은 재미있어 보이고 꼭 읽어야할 것 같고 그럴까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오늘 열 권 주문한 사람이...)

blanca 2022-01-26 14:11   좋아요 0 | URL
열...권이요? ㅋㅋ 그거 도착하면 인증샷 꼭 올려주세요. 대리만족 하게요. 저 이번 달은 이제 못 사요. 이북과 도서관 대여로 해결하자고 결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무너졌습니다.

하이드 2022-01-26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믿기지가 않죠? 뭐에(탐욕에) 눈이 씌워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대단합니다. 엘리자베스 동영상 찾아보면 검은 목폴라에 목소리 저음 내는 것 나와요. 정말 이 세대의 전무후무한 스캔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제니퍼 로렌스 주연 영화로 나오는데,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blanca 2022-01-26 14:12   좋아요 1 | URL
오, 영화로 나오는군요. 이 책 자체가 영화 같아요. 너무 놀라운 게 이런 사기극이 일이 년 지속되었다 해도 놀랄 텐데 자그마치 십 년 넘게 유지됐다는 것 자체가 엽기적이에요. 게다가 엘리자베스 소송 중에 재벌남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고 해서 또 놀랐어요.

레삭매냐 2022-01-26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김지윤 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배드 블러드>의
주인공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기억
이 나네요.

증권거래 주작질 혐의는 유죄지만
혈액 검사로 환자들을 농락한 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명이 났다는 점이
정말...

노친네들이 돈에 눈이 멀어 희대의
사기꾼을 비호하는 장면은 상상이
가질 않네요.

blanca 2022-01-26 14: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봤어요. 자살한 직원도 있는데...어떻게 그런 판결이...오히려 환자들 혈액 검사로 그런 사기를 친 거에 대해서 더 중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테라노스 근무 환경 묘사해 놓은 거 읽으니 정말 부글부글 끓더라고요. 지옥 같았어요. 생계를 위해 참고 다녀야 했던 사람들 생각하면...

persona 2022-01-26 1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시당초에 피 한방울로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술 있다고 해서 한참 이해를 못했던 기억이 있네요. 일본에서 만능세포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어이없었어요. 둘다 어린 여성이 나와서 세상을 들썩이길래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정작 황우석 박사님 이야기는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거 같아요. ㅎㅎㅎ 에휴. 저는 돈 관련 부분 보다도 더 나쁜 게 직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기술에 희망을 걸었던 환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점 같아요. 그런데 요즘도 마이크로칩 음모론 이런 거 들어보면 참 얼마나 사람이 호도되기 쉬운 건가 싶어져요. 아무리 초소형을 개발하려고 해도 더이상 불가능한 사이즈라는 게 있거든요. 피에 포함되는 정보도 한계가 있을테고요.
예전에 읽었던 카길에 대한 책이나 삼성을 생각한다, 버거의 상징도 떠올라요. 진실을 좇는 행위를 막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걸텐데요.
리뷰 진짜 멋져요. 많이 공감되고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ㅎㅎㅎ

blanca 2022-01-26 14:20   좋아요 2 | URL
여러가지가 연상됐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속아줬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그 와중에도 협박 받으면서도 끝까지 양보하지 않은 내부 고발자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정해보게 되더라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ersona 2022-01-26 14:31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기꺼이 속아줬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되게 절박한 사람들이었을텐데. ㅠㅠ
 

남고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산 적이 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만 되면 시계처럼 남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거의 포효 수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바깥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운동장에 드러눕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무슨 대단한 축제라도 벌어진 양 비명을 지르고 엎어지고 웃고...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이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구나.


그런데 어제의 눈은 다르게 다가왔다.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다,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면 골절이다, 라는 이 재미없는 명제에 집착해서 조심조심 땅을 딛고 가느라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됐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의 낭만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춥고 힘들다,는 생각만 가지고 더듬더듬 길 위를 다니는 내 모습이 참.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싶었다. 눈이 오면 신나서 막 환호성을 지르던 시간은 벌써 저만치 물러가고. 
















소설가 이상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정지돈 작가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인데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2011년 <중추완월>이라는 작품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고 나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전형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설의 방식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대단한 작품이었다,라는 게 중론이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단편과도 달랐고 압도적으로 좋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잉여와 부족함을 모두 발라 본질만 남긴 것처럼 명료하다. 장소도 시간도 특정되지 않은 곳에서 살인과 시체의 처분이 일어난다. 과거의 기억과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박탈 당한 주인공이 '손'과 나누는 교감은 경악스럽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다. 읽기 편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 불편함이 단순히 자극적인 말초적 감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여운이 길다.


"어차피 우리는 갈 곳이 없잖아."라는 주인공의 독백, 대화에 절로 숨이 멈춰졌다. 중추절, 갈 곳도 불러주는 곳도 없는 그 틈새에서 타인의 손과 나누는 유대라니...

















카렐 차페크의 인생은 길지 않았다. 그는 노년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앎은 그래서 중년에서 머물렀을까? 아니면 그 너머로 더 빨리 단시간에 뻗었을까. 후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막연하게 자주 생각했던 한 인간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하여 다각도로 다면적으로 접근한 이야기. 평범하고 성실한 한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군상들이 모여 있는지 형상화한 대목들. 애거서 크리스티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늘의 의인이 내일의 좀도둑이 될 수도 있는 게 인간이라고.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쉽게 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생은 결코 정합적이고 일관된 스토리라인으로 구성할 수 있는 손쉬운 글감이 될 수 없다. 그 모순과 어그러짐 자체가 생명의 역동성이다. 
















철학자 존 캐그가 윌리엄 제임스의 "실존적 생명 구조법"을 알려주고자 한 책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로서의 제임스의 이야기들은 제임스의 삶과 저자 캐그의 삶과 독자의 삶을 한데 모아 비로소 이해된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집은 대리석으로 지은 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거주하면서 세계와 만나는 장소다.

-존 캐드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


나의 경험의 틀 안에서 실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실재는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나 무용한 것이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제 경험하며 정립한 나만의 그것은 오늘 기꺼이 다른 경험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그 가변적인 지점을 인정할 때 삶은 무의미에서 벗어난다. 내가 진리라 믿었던 것들이 붕괴된다고 해서 바로 무의미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제임스도 캐그도 예기치 않았던 삶의 난관을 통과하며 그들 자신의 절대적이었던 가치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나아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신선하다. 나날이 개선된다. 그 믿음이야말로 윌리엄 제임스가 시종일관 잃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낙관이다. 


그러니 내리는 눈은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꼭 눈싸움을 하거나 거기 위에서 구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희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02-10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2-02-11 08:47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