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회사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의 실체 자체가 거대한 사기에 불과하다면. 게다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미 기밀을 유지하기로 맹세를 했고 그 약속을 어길 경우 어마어마한 재정적 손실과 더불어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도 협박을 당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회사를 박차고 나오거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신변을 위협하는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취재한 용감한 저널리스트가 있었기에 이 일은 비로소 세상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증언해 준 수많은 내부 고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엽기적인 사기극은 현재진행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기업은 평범한 제도,도소매, 서비스 회사가 아니라 의료 기업이라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를 중퇴한 젊은 백인 금발 여성이 창업한 최첨단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는 자가 기기를 이용하면 간단한 손가락 끝의 채혈을 통해 수백 가지 질병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환상적인 서사 그 자체였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중년 남성 창업자들의 거대 신화를 흔든 엘리자베스 홈즈의 등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기술업계, 의료계, 정재계가 그 신화를 더 확장하고 심화시키는데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안에서는 그 신화의 기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 직원들의 동요가 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 낸 제품은 기본적인 검사 과정에서도 오작동했고 테라노스는 대신 타사의 제품을 상습적으로 몰래 이용하여 산출된 결과를 버젓이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기의 결정체에 루퍼트 머독,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의 거액이 투자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백전노장인 그들조차 완벽하게 속았다.
이 사기극과는 별개로 회사 내부에서 일어난 직원들의 착취의 수준 또한 심각했다. 엘리자베스의 숨겨진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도인 서니는 직원들을 수시로 감시하고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 했고 거기에 반항할 경우 모든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원에 의해 끌려 나가게 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화학자 출신의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직원은 테라노스에 일하면서 겪은 일들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내가 회사에 전한 부고는 함께 일했던 직원들한테 전달조차 되지 않는다. 테라노스는 직원들을 소모품 취급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진실을 궁금해하는 건 자사에 대한 도발로 간주됐다. 진실에 눈감고 아부하는 직원은 승진시켰다.
그런 기업이 수조의 가치를 지니고 21세기의 경이로운 성취로 언론에 회자됐다. 엘리자베스는 스티브 잡스처럼 검은 터틀넥을 입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중 앞에서 큰 눈을 깜박거리며 인도주의적인 청년 기업가처럼 행세했다. 정작 자신의 직원들의 존엄은 무참히 짓밟았던 그녀가 연기한 인본주의적 기업가의 모습에 모두가 속아 열광했다. 그 거대 집단의 믿음을 흔드는 일은 고독하고 위험한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직원 두 명의 활약은 놀라웠다. 특히 국무 장관을 몇 차례나 지낸 조지 슐츠의 손자 타일러 슐츠의 내부 고발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테라노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저자 존 캐리루에게 증언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척을 지고 테라노스의 무시무시한 협박,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기에 또 부유한 집 출신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그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집안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할아버지는 손자보다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를 더 믿고 싶어했다. 저자인 존 캐리루도 이 젊은이의 윤리의식에 깊이 감명 받았다고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에리카 청은 테라노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회사의 잘못된 실험 관행을 당국에 신고했다.
<배드 블러드>의 저자는 후반부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그 전까지 테라노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서술됨으로써 독자는 이 기묘한 사기극의 실체가 십 년 넘게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그 동인을 스스로 찾아나가게 된다. 모두가 바랐던 미래의 최첨단 진단 기술. 자극적이고 화려한 홍보술 이면에는 산업혁명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등에 걸머진 직원들은 침묵하거나 아프거나 나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의 단서를 놓지 않았던 몇몇의 사람들, 그들을 지지하고 믿어준 사람들, 의사로서 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의 본질을 기억했던 이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아내의 망부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거대한 허구 속의 실낱 같은 진실을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21세기,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일은 그래서 명암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인간은 어리석고 때로 악독해지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자정의 힘을 품고 있다. 악은 창궐하지만 그 안에서 선은 끝내 죽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이용하지만 존엄한 인간을 끝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