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정말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이방인>의 뫼르소, <레베카>의 레베카, <혼불>의 강수. 작가들은 그런 인물들을 무에서 그저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작가에게 숙명적으로 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언어로 인물에 혼을 불어넣고 질감, 양감, 색감을 부여하여 독자 마음에 파고드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와 몰입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천하의 미시마 유키오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소설가이다. 책상에 앉아 있다.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를 합성해 어떤 약품을 만드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엇인가 원소를 추출해서 그것을 문장으로 고정한다. 이런 일을 벌써 십수 년 계속하는데도 아직 기술에 기복이 있어서, 쉽게 써질 때도 있고 쓰지 못할 때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 <문장독본>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의 밀도와 강도, 아름다움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문장독본>에는 일본 문학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의 문장의 특색과 장단점을 미시마 유키오의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 비교, 종합하여 문학 장르별로 이상적인 문장의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 특유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미문들만으로 충분히 읽는 재미가 있다. 흔히 떠올리는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편견은 그가 의외로 수많은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고 최대한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판단, 평가, 취합하려는 기본 자세에서 깨진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쓰기를 의심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발견도 놀랍다. 과거의 작품들을 부끄럽다고 자평하는 대목도 그렇다. 그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떼어 놓고 글쓰기 장인으로만 평가한다면 배울 점이 많은 작가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페르소나주>는 도저히 창조하지 않고는, 쓰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는 필연적으로 오고야 마는 그 소설 속 인물들 '페르소나주'의 숙명에 대한 명문이다. 그 인물들은 이미 작가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다 용암처럼 분출되고 만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작가는 무조건 써야 한다. 대단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책이다.
우리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각 등장인물은 이제 새롭게, 아니 전혀 다르게 태어나길 소망한다. 언어로 태어나기를, 언어로 펼쳐지기를, 언어로 호흡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스스로 표현되기.
그렇다. 텍스트의 생을 원하는 것이다.
-실비 제르맹 <페르소나주>
미시마 유키오가 <문장독본>에서 그런 인물들의 표현을 위한 문장 자체에 집중했다면 실비 제르맹은 이 인물들의 필연적인 탄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게 작가의 운명은 다분히 숙명적이다. 우리 안에 가라앉아 있는 페르소나주들은 결국 자기 표현의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들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간다. 그것은 특권이기도 하고 때로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이 '탄원자'들을 내칠 방도가 그들에게는 없다. '텍스트의 생'을 요구하는 '이방인'들에게 작가는 복종하고 복속한다.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가며 읽는다. 읽는 일은 종이 위에 누운 그 생을 줍는 일이다. 그렇게 사는 일은 입체적으로 확장된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단 하나의 생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여기와 저기를 아우르는 삶 속에서 우리를 통과하는 시간들. 그 안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