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에......어디에 있소......
효원은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듯 강실이를 부른다.
그 온 몸에 눈물이 차오른다.
-<혼불> 10권 마지막 대목
여기.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못다한 얘기들과 아직도 들어야 할, 듣고 싶은 얘기들은 미완의 마침표를 찍는다.
미처 끝나지 않은 해원의 굿마당, 그 적요의 휘장을 걷고 나오는 길. 정령을 머금고 있는 말의 마력을 직시하고
그것을 조심스레 휘두른 작가가 숨결을 불어넣은 그 수많은 인물들이 지금이라도 누런 책의 표지를 뚫고
두레두레 앉아 두세두세 맛깔스런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낼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힌 나는 그 책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물건의 무서움. 혼을 건네서 묻히고 심는 것이라 했던 작가의 말은 그녀가 자신의 온 몸을 조금씩 덜어내어 쓴 이 책으로
체화되었다. 나는 그래서 <혼불>이라는 이 책을 무감하게 둘러볼 수 없고 어쩌면 조금은 두려운 경외의 심정에 사로잡혀
살아 생전 작가의 삶을 먹고 자란 이 책의 날숨에 아득하게 취할 수밖에 없다. 책이 살아 있는 그 느낌 속에 오련한 황색 표지 위에 임리하게 떠오른 <혼불>이라는 거친 표제가 애써 누르고 있는 그 수많은 이들의 혼과 삶은 어떻게든 비어져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편하게 앉아 그저 책장을 넘겨 보는 것이 미안하다.
작가 김영하가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그 시대의 명예시민이 되는 경험이라고 했던 얘기는 <혼불>을 읽는 독자가 되는
일이 그에 못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미안스럽게 고백하는 데에 차용할 수 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전북 매안 이씨 3대 종부를 중심으로 그 문중의 쇠락과 얽혀 거멍굴 상민들의 질곡어린 삶을 엮어낸 이야기들은 당시의 관혼상제, 세시풍속들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수많은 민담, 설화를 덧대어 잊혀진 과거의 완벽한 복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단지 이 작품이 소설로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전통문화의 보고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완벽에 가까운 고증들과 자료조사가 그 먼지의 더께를 떨어내고 삶의 결 속에 스며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있는 기록의 나열이하였다면 그토록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이 작품의 문화사적 성취에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가 일으켜 세워 숨결을 덜어넣는 작업은 가만히 앉아 완상하기에 미안할만치 처절한 노력과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혼불 하나면 족하다,고 했다던 작가의 얘기는 그녀가 미혼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까지 이 작품에 매달렸던 그 결곡한 투신의 가치를 대변한다.
혼불, 그리고 죽음
생의 유한성이 삶의 가치를 절하할 것인지 아니면 떠받쳐줄 것인지를 우리같은 범절한 이들은 알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회의하고 그럼에도 다짐하고 앞으로 밀고 나갈 뿐이다. 목숨만큼 화려한 것이 없다는 청암부인의 얘기와 살아 있어 미안하다는 손자 강모의 얘기에서 생 그자체의 응축된 지고의 가치를 걷어낼 수 있지만 최명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죽음의 체를 뚫고 면면히 나아가는 혼에 가 닿는다.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 육신을 내버리고 홀연히 떠오른다는 혼불은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무위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농밀하게 응축시키고 아집과 망집의 상흔을 치유하고 인연의 실오라기에 매달린 사람들에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소롯길을 보여준다.
이 혼과 넋의 이동의 관문의 예인 전통장례절차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설명을 듣는 일은 죽어있는 고루한 폐해로 폄하되던 각종 의식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어 그 전아한 속살을 가만히 느껴볼 수 있게 하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종부 청암부인이 혼인날 입은 장삼 족두리를 수의로 입고 그 때 가지고 온 혼서지를 신발로 신고 저승의 명부로 떠나는 의식에서는 황홀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고인을 우주의 순환 속으로 아무 걸릴 것 없이 돌려 보내려는 정신의 체화가 초상의 예인 것이다.
잊혀진, 잃어버린 역사의 복기
또한 마한, 후백제, 조선 왕조 발상지로서의 전주의 재조명은 승자의 칼 끝에 인각 왜곡된 패자의 잊혀진 역사를 낱낱이 복원하고 복기하여 살려내는 일이었다.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마침내 산화하여 버린 그네들의 잊혀진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존감을 일깨우게 된다. 꽃의심, 꽃의 힘, 꽃의 마음을 이고 역사 하나를 등에 지고 오늘도 우리의 숨결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땅 위에서 스러져간 그 사연들에 우리는 애잔한 기시감을 느끼며 돌아보게 된다. 잊혀지고 폄하된 어제를 듣는 일은 지워버리고 묻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과거 이야기들을 마찬가지로 살려내고 보듬어 주는 일이라 아프면서도 온전히 상처를 들어내어 치료하고 면역을 얻어내는 일로 승화된다.
눈물어린 신분제도의 질곡 그것이 남긴 숙제
시간으로는 비록 새해가 되어 축시라 하지만 다른 때라면 짐승도 잠이 드는 오밤중에, 기둥에 걸린 등롱의 붉은 불빛을 희미하게 받으며 검은 마당에 웅긋중긋 줄줄이 늘어서서, 사랑채 누마루 제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에 덩실하니 나와 앉은 상전 이기채에게, 일제히 엎드리어 절을 하는 종들의 등허리는, 시꺼먼 그림자를 길고 어둡게 드리우고 있었다. -5권 p.32
새벽 세 시도 안된 그 어둠 속에서 집안의 웃어른을 제쳐 두고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어쩌면 자신보다 어릴 수도 있는 상전을 높은 마루 위에 세워두고 문중의 종들이 일제히 흙바닥에 엎드려 새배를 올리는 그 장면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똑같이 세상을 향해 일성을 내지르며 태어났으나 그 배가 어디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숙명적 신분의 틀 안에서 누구는 누구를 동등하고 존중하여 줄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품마냥 수족마냥 부릴 수 있다. 이 공고한 차별의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중의 차이만이 있을 뿐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서서 그들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모두 악착을 부리며 내 앞에서 자기의 열심을 보이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안나 카레니나> 중
매안 이씨 문중과 그들에 기생하여 먹고 사는 팔천 동네 거멍굴의 병치는 인간이 만들어 내었지만 결국 그 안에 결박당해 버린 역설이 가지는 중층적 의미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극복 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 청암부인의 손자 강모와 사촌 강실 간의의 금기된 사랑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강실이 거멍굴 춘복이의 씨를 받게 되는 것과 그의 가시버시를 자처하는 옹구네가 피를 섞어 버리라며 절규하던 그 극단의 증오어린 저항은 하나의 비애로 치부된다. 이 비애가 단순히 감정의 배출과 복수로 마감되지 않고 중화될 수 있었던 지점에는 거멍굴의 상처받은 상민들을 보듬어 안으려 하고 그 옹이와 아집을 풀어버리려 시도했던 대안적인 인물 강모의 사촌형 강호가 있다. 작가는 어둠을 뚫고 나가는 그 지하의 만월 그믐밤의 그 가치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강호에게 정성스럽게 깎은 화병을 선물하고 돌아서는 백정 택주와 그를 돌아보며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그것의 중추적 의미를 가슴에 인각하는 강호의 모습은 상생과 공생의 방증 같다.
결코 순탄치 않은 시대와 역사, 진부한 인습, 억울한 관념의 편벽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오히려 저마다 제 몸으로 깎은 화병 하나, 삶의 중심에서 빚어 낸다면, 그 몸에 어리는 무늬들은 이윽고 이 세상에 새로운 풍경을 이루어 드리울 것이니.
-8권 p.252
그리고 혼불이 나에게 남긴 것들
눈빛에 꽃빛은 도장의 인주처럼 선명하게 지문을 찍는다. 그 꽃빛은 사람한테 한 번 묻으면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넋을 홀리어 흔들며 사로잡는다.-10권 p.276
<혼불>은 나에게 꽃빛 같다. 나의 눈빛에 나의 마음빛에 작가는 선명한 지문을 찍고 지하의 만월로 떠오른다. 그 흔적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온전하게 이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거멍굴에서 강실이가 부른 배를 움켜잡고 손톱 밑에 앓는 이름 강모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고 그 옆에는 있지만 그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오유끼가 문 앞의 노루발 밑에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몸으로 맞아내고 있고, 더더군다나 그의 아내지만 그를 증오하며 강실이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을 아내 효원이 온 몸에 차오르는 눈물을 속수무책으로 닦아내지도 못하고 흘려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 나도 <혼불>을 닫고 나오며 어둠을 믿게 되었다고. 지상의 만월보다 지하의 만월인 그믐밤 더 몸을 뒤척이며 땅 속에 버리듯이 내 소원의 씨앗들을 뿌리겠다고 다짐하여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