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유달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뒤편이 아니라 스무 살 고 언저리를 맴돈다. 올해들어 나의 기억, 누군가의 기억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참혹한 기억을 되뇌는 그녀에게 나는 그 기억이 한층 비극적인 것으로 윤색됐을 수도 있다고 정말 그런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올해들어 나는 고유 명사에서 번번히 미끄러진다. 어떤 얘기를 누군가에게 아주 그럴 듯하게 해주고 싶은데 고유 명사 부분에서 자꾸 주춤추줌하며 스타일을 구기게 되었다.
그.리.고. 삶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그 커다란 비실재적인 공간의 허무함과 집착에 놀라게 되었다. 나는 결국 지금 이곳에 만질 수 없는 것들이 허룩하게 뭉쳐진 덩어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삶 그자체를 불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기억만을 남긴다. 다 헛것이었어. 결국 삶은 기억의 덩어리, 추억으로 마침표를 찍고 마는 거야.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이 얇은 책은 기억의 그 매혹적인 오류와 부푼 부피감을 적시한다. 사례 중심의 평이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있던 스무 살 언저리의 그 기억의 돌연한 귀환에 대한 현상이 나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노년으로 갈수록 그들의 청춘 언저리의 기억들이 득달같이 뒤쫓아 오는 망각의 역현상에 대한 얘기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기억들은 그 근처에 머무는 것들이 아니라 더 먼 곳 아득한 곳에서 미숙함, 열정, 아쉬움 등으로 둘러싸인 채 도사리고 있던 이십 대의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은 채 그저 그 시기가 가장 기억하기 위한 최적의 메커니즘을 지닌 시기여서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은 떠올리지 못하는 스무 살의 기억들이 여든이 넘어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묘한 기대감을 갖게도 한다.
강남역 타워레코드 앞에서 그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달려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첫사랑의 가능성은 인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뚜욱뚝 끊기고 만다. 닭갈비를 먹으러 가서 어색하게 서로 웃었던 것도 같다. 그 공백은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듯 나의 주름 사이로 다시 차오를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타워레코드에서 뒤편의 닭갈비집으로 가면서 나누었을 그렇고 그런 호구조사나 안부교환의 사연을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
|
|
|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중략> 추억은 불러냄으로써 변화한다. |
|
|
|
 |
누군가를 호명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내 안에서 불러낸다. 정말 진짜 온전한 그를 그대로 내 앞으로 걸어오게 하는 대신 내가 이미지화하고 이상화하고 상상해 낸 나만의 그를 불러 세운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하고 그래서 끝나고야 만다.
이 책에서는 우리 생애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년이 가장 적은 기억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역설을 끄집어 낸다. 노인들은 자신의 중년 이후의 삶을 복기하는 대신 어리고 여렸던 그래서 끊임없이 넘어졌던 시간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서전 분량의 비대칭은 청춘 시기에서 비롯된다. 이 역설은 대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청춘을 상찬하고 상품화하는 메커니즘이 이러한 기억의 역설과 기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아연해지고 만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나 대신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지 전혀 몰랐던 어리숙한 나의 귀환을 나는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종착역이라는 것을 알 때 돌연 방향을 틀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참이나 걸어 강남역으로 가는 모습은 서글프고도 기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