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을 읽다가 최규문 씨가 "올린 정보에 대해서는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소셜네트워킹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덕률"이라고 조언한 대목에서
어제 테이크 아웃 커피를 텀블러도 없이 일회용 컵에 떡하니 마신 나로서는,
과연 이 책의 리뷰를 쓸 자격이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일도 아프리카 아이들이 원두를 따는 일에 동원되게 하고 농약을 살포하게 하는 착취에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마신다.
단화 한 켤례가 필요해서(사실 없다고 못 걸을 일은 아니다) 한 켤례를 사면 신발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동으로 한 켤례가 기증되는 신발을 샀다. 소비도 하고 자선도 한다는 환각에 취했다. 나는 때때로 적어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착각으로 버틴다. 나의 욕구와 편리, 타성, 시간을 희생하며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주 적당히 그럴듯하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취미로 고가의 우표 수집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세계는 자꾸만 산산조각나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록달록한 종잇조각이나 모으며 별 거리낌 없이 생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간 모은 우표를 팔아 기금을 모아 환경 및 인권상을 제정할 것을 노벨상 선정위원회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스스로 직접 재단을 만들어 바른생활상을 수여하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와 진보 자체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 바른 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 이 대안 노벨상의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노르웨이의 사회과학자, 칠레의 경제학자, 인도의 양자물리학자, 캐나다의 기술공학자, 스웨덴의 언어학자, 케냐의 생물학자, 이집트의 사업가, 핀란드의 마을 운동가 등 14인의 대표적인 수상자들의 이야기들은 비단 환경과 인권 분야 뿐만 아니라 삶, 인간, 진리에 대한 저마다의 깨달음과 천착, 지향점 등으로 확대되어 울림을 준다.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내가 거기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왕가리 마타이(케냐의 여성 생물학자)
따라서 살아 있음이란, 역학적으로 안정된 비안정성입니다. 이 운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걸을 때마다 항상 두 다리가 번갈아 우리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걷기란 원래 쓰러지는 일의 반복입니다.
-한스 페터 뒤르(독일의 양자물리학자)
신자유주의, 세계화, 녹색 혁명, 나노 공학 등 첨단과 진보의 색채를 이드르르하게 갈아 입고 나와 인간에게 무한정의 권능을 쥐었다는 환각과는 어긋나게 동시에 모든 것의 객체로 소외시키고 있는 눈먼 엔진들을 끄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경험은 모든 고정관념과 관성을 깨고 '살아 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것은 구태여 남보기에 그럴듯하고 고차원적인 좋은 삶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나의 아이들과 또 그 뒤를 걸어갈 많은 나의 후손들의 터전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한 시급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당장 어떤 성과를 보이지 않아도 불편을 감수해도 결국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삶을 더 유의미한 것으로 덧칠해 준다.
하지만 나는 카페인 금단 현상을 앓기 마련이며 아이의 물휴지로 방바닥을 닦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텀블러를 쇼핑몰에서 고르며 마치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싶어하는 인간이다. 뉴욕 한 복판에서 일 년 동안 환경에 영향을 주고 살지 않기를 표방하며 제일 먼저 한 일이 멋진 장바구니를 고르러 가는 것이었던 주인공에게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저자야 책을 쓰고 방송에 출연해야 한다는 부담이 감시망의 역할을 해 주었지만 감시망이라고는 스스로의 자책감 정도 뿐인 우리들로서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스로와 가족의 건강과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으로 출발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 부분은 기가 막히게도 환경 운동 부분과 절묘하게 만난다. 가까운 거리의 농부들과 직거래를 하는 것도 유전자 조작 음식을 거부하는 일도 집단 사육되는 육고기를 거부하는 것도 가장 이기적이면서도 가장 이타적일 수 있는 지점이다. '나'를 대우하고 사랑하는 일은 결국 '너'와 '우리'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제스처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마트료시카를 보면 인형 안에 인형이 계속 들어 있습니다. 마치 이 인형들처럼 지금 할머니 안에 엄마, 손녀가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포 차원에서는 삼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이 가능합니다. 이 순간에 당신이 먹는 음식이 부실하다면 당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딸의 건강, 손녀의 건강에게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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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트 니어링이 백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이웃 사람들의 깃발에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 쪽으로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