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나의 아이를 업고 에스컬레이터에  서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밀려왔다. 고마움, 미안함, 회한.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언어를 초월해 있다. 언어는 기만과 착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듣고 있다고 여기게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세상에 내어 놓는 순간 부모와 아이는 오해와 상처 주고 받기를 시작한다.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좁아지다 만나려는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또 어긋나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삶은 온전히 내 입으로 이야기될 수 없고 오류없이 내 머리로 이해될 수 없으며 완벽하게 내 가슴으로 공감될 수 없다. 평범한 우리들은 부모의 입에서 얘기되는 당신들의 이야기로 재창작된 삶을 한 덩어리로 그저 오해하고 곡해해서 당신들을 일부나마 나누어 가진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지난 삶을 복기하는 과정은 더없이 건조하고 담담하다.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저자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삶과 아버지를 언어로 구조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거리 두기일까? 아버지의 세계와 딸이 이룩해 놓은 세계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노동자 아버지가 낳은 작가 딸은 아버지의 삶을 시처럼 추억할 수 없다. 서사화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편화되고 객관화되기 위하여 대기 중이다. 자식이 객관하려는 부모의 삶은 역설적으로 더 처절하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을 아니 에르노는 해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도 하고 전부 다 이해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기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p.47

 

 

여기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공유했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자리에서 딸은 걸어 나온다. 자식을 먹이고 가족을 혹독한 풍파에서 사수하려 버둥거렸던 분투 속에서도 그녀는 슬몃 다리를 뺀다. 반은 상인이고 반은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딸의 가방끈이 길어지고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반은 두렵게 반은 경의에 차서 지켜 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거나 아버지의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몸을 부여잡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습도 아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부럽기도 했고 그럴 수 없어서 안도도 됐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p.126,127

 

여기에서 그녀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 발을 담근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함으로써 아버지의 삶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준 딸. 당신들은 말한다. 네가 잘 살아야 네가 행복해야 그게 효도다. 나는 되뇌인다.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 살면 그거면 된다. 이 말에는 무수한 함정이 있다. 관계로 맺어야 하는 소통이 나의 삶으로 대치되어 버린다. 쉽기도 하고 낭패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런 말들의 눈속임일 지도 모른다. 나한테 와라. 내 손을 잡아 주어라. 나를 안아줘라. 내가 너를 낳고 키웠으니 그 정도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엄마 아빠가 제일 좋아. 하늘 만큼 땅 만큼. 노인이 되어도 작별을 하는 순간이 와도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하고 유치한 말이 때로는 가장 진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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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멋진 글에 첫 추천은 접니다 ^___^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사진 보고 또 깜짝 놀랐잖아요. 사진이 바뀔 때마다 이진님인가 하고 유심히 보고 그런갑다, 착각하고 그러는 단순한 저입니다.

하늘바람 2012-05-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추천은 언제나 힘이 나지요. 감사합니다.

cyrus 2012-05-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읽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
이틀 뒤면 어버이날이기도 하고요

blanca 2012-05-06 23:3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오늘 그래서 저도 효도하고 왔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아쉽고 후회되는 얘기들이 쌓이는 것 같아요.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요.

다락방 2012-05-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블랑카님이 인용해주신 이 문장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요.

blanca 2012-05-07 22:54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거의 감정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그런데 글의 갈피짬마다 왜이리 가슴이 스산해지고 슬퍼지는지요. 그냥 아버지 얘기를 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요. 예전 대학 동기들과 모인 자리에서 누가 한 명 그냥 아버지,라고 했는데 다 눈이 벌게졌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님은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합니다.

마녀고양이 2012-05-0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찌 부모님을 알 수 있겠어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요즘 깨달은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제 마음 속의 부모님과 화해하는거라는 겁니다. ^^

진짜 부모님과 제 내면의 부모님은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전,
둘 다 사랑합니다. 지금 화해 중이거든요,, 큭큭.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그죠, 마고님. 부모님 인생을 머리로 판단하고 옳다, 그르다, 그랬어야 한다는 등의 치기를 부렸던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냥 저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려 합니다.

후애(厚愛) 2012-05-08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이요~!! ㅎㅎ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
 

박진영이라는 뮤지션은 강해 보인다. 에너지도 넘치고 삶의 대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끌고 수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무기력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고 여기는 요즈음 <힐링캠프>에서 그의 극도로 엄격하고 절제된 일과를 보니 눈이 번쩍 뜨였다. 기상 시간, 조식 시간, 스트레칭, 발성 연습 등의 자기 자신만의 일정이 조금 엽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로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 사랑하는 음악을 팬들 앞에서 오래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관리란다. 이른 나이에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으니 더더욱 그의 앞에서 그의 삶은 통제 가능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유연하고 호의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 같았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자선을 행하고도 남는 그 1%의 결핍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찾아 헤매는 대목이 공교롭게도 읽고 있던 책과 겹쳤다.

 

 

 

이 책은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대형 서점에서 이제 막 집으로 가려던 참에 들춰 보고 돌아섰다 다시 돌아가 손에 쥐었다. 육아서라면 꼬맹이가 자고 먹고 하던 시절 줄까지 그어가며 정독했던 기억에 물렸던 와중이었다. 육아서를 읽는 순간 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나'의 개인적인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가능하다. 세상에 하나의 인간, 하나의 삶을 온전히 선물하는 일이 양육이라고 포장한다면. 하지만 양육은 온전하게 자신과 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어른도 불가하지만) 작고 무기력한 생명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고 자는 게 힘들어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버둥거리며 들썩거리는 아이를 잠까지 인내하고 안내해야 하고 밤에 열이라도 나면 밤을 꼬박 새우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고 해열제를 먹이다 여차하면 병원까지 업고 뛸 수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힘듦에는 달콤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아이를 세심히 보살피고 최선을 다해도 어느 날 아이는 갑자기 중병에 걸려 나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사춘기의 아이가 '엄마가 대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갈 수도 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인간이 삶을 통제할 수 있고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찬란한 기만이었는 지를 뼈아프게 깨달아 가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가 격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이유는, 엄마로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살아가면서 언제든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아찔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p.73

 

네 아이의 엄마이자 소아과 의사인 저자 메그 미커는 이제 동양에서 보는 기준으로라면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육아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나이에 접어들어 삶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놀라웠다. 육아서 안에서 삶에 대한 통찰과 위안을 얻는 일은 드물고도 기쁜 일이다. 내가 요새 자꾸 느끼게 되는 나의 무기력함이 비단 나의 '엄마'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자 좀 덜 의기소침해졌다. 항상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특히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삶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통제감을 느끼는지. 박진영은 세속적인 기준에서라면 성공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로 그러한 일들을 이루었다. 무언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젖혀 둘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삶에 있어서 철학적이고도 근원적인 고민을 화두로 던지고 싶어한다. 진행진들은 난감해한다. 예능 방송이 무거워지는 건 부담스럽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는 일인가 보다. 괘념치 않고 혼자 도취되어 자못 철학 강연처럼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그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뒤돌아 보면 나의 계획대로 된 일들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풀리고 나의 좌표가 바뀐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예증이기도 하고 박진영 말마따나 그러니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특히 자식과 관련된 일에서는 더더욱. 아이는 나의 못다한 꿈의 대리만족을 위해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처를 기우기 위하여 동원되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아이의 꿈을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나는 무기력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된다는 것. 작은 것들을 통제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은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다. 이 책의 저자 메그 미커는 희망을 품는 일이 통제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역설 같기도 한 그녀의 얘기가 와 닿았다. 무언가를 다 나의 통제 권한 속에 몰아 넣기 시작하면 나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고등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나도 그 아이도 어떤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스무 살을 기다리던 열일곱은 이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말하고 들어주며 잠시 친구 하나면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쥐락펴락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의 느낌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세상이 주먹 안에 들어오는 작은 공만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삶과 시간들이 어찌 그때보다 더 폄하되고 있는지 슬프기도 하고 그것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무기력하게 느끼지도 않고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도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내가 어쩔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기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아, 살면 살수록 인생은 알 수도 없고 어렵기만 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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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5-0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그래요. 살수록 인생은 어렵고 알 수도 없고.
전 어제 박진영 볼까하다가 그만 sbs '안녕하세요'를 봤어요.
재밌더라구요.ㅎㅎ
어찌보면 누구나의 삶이든 들여다보면 일면 빚좋은개살구가 아닐까 싶어요.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비우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쉽지 않지만 노력하려구요.^^
엄마의자존감, 좋은 책 같아요.^^

blanca 2012-05-01 23: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원래 '힐링캠프' 잘 못 보는데 어젯밤은 정말 우연히 보게 되어 완전 몰입해서 봤어요. 제 집 앞에 바로 중학교가 있어 여러 풍경들을 많이 보게 되고 아이도 커가고 하니 참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아이 생각을 하다 보면 또 '나'는 어디로 간 건가 싶기도 하고요. 봄이 왔다고 좋아했더니 바로 여름 분위기라 좀 지치기도 했나 봐요.

cyrus 2012-05-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지나간 과거의 인생을 그리워하면서도 곧 다가올 미래의 인생 앞에서는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어요, 결국에는 블랑카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인터넷 기사에서 본 건데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균형잡힌 식단처럼
과거, 현실, 미래를 적절하면서도 충실하게 살아라고 하는군요.
너무 좋은 과거만 바라보는 것도 않 좋고,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고 즐기는 것도 좋지 않고,
그리고 너무 먼 미래에만 바라보는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시간 자체를 균형적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일리가 있는건 같아요. ^^

blanca 2012-05-01 23:09   좋아요 0 | URL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것들을 깨알 같이 알고 계셔서 부럽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앞으로만 달렸던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해요. 인용해 주신 기사 참 좋아요. 저는 요새 과거와 현재에 너무 끄달리고 있나 봅니다.

Jeanne_Hebuterne 2012-05-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어제 고등학교 때 벗을 만났어요. 둘이서 카페에 앉아 허니 브레드를 먹으며 `우리의 신세한탄도 엄밀히 말하면 반가사유에 들지 않겠니'라고 자조했는데, 이런 말을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 누구도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거란 건 몰랐을걸.'
전 언젠가 그녀에게 `너 지금 교복 입고 나 만나러 나오면 백만원 준다' 라고 말했고 스무살의 그녀는 나에게 `미쳤어'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걸 할 수 있대요. 오히려 멀어진 지금, 시차가 생긴 시각.
'돈 필요하냐'라는 나의 물음에는 깔깔 웃으며, 둘이서 문제는 늘 결핍에서 오는 것. 이란 말을 했어요. 이렇게 보면 늘 나란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무엇을 하여도 아무 상관 없이 나의 결핍에서만 모든 게 생겨나는 것 같아서요.
블랑카님의 이 글을 읽으니, 통제와 풀어짐의 경계에 계신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죔쇠를 더 조일까. 조인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 이런 느낌이오.

어차피 저는 하루하루를 굉장히 열심히 살았으되 인생 전체를 막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 어떤 답도 들은 적이 없으니, 블랑카님의 마지막 글의 바램-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면-에 있어서 더한 1인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셔요! 쓰고 나니 전혀 자랑도 아닌데 자랑스러워하는 실수를!

blanca 2012-05-01 23:15   좋아요 0 | URL
쥬드님 ㅋㅋ 하루하루를 굉장히 열심히 살되 인생 전체를 막 살고 계시다는 말이 왜 이리 부러운지요 ㅋㅋ 쥬드님도 어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셨군요! 교복이 갑자기 그리워집니다. 맞아요. 객관적인 조언도 결국은 나의 결핍을 가장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완전해지거나 놓아버리지 않으면 항상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저의 이 우울함이 일정한 주기를 가진 것인가, 아니면 나이 탓인가, 어떤 상황 때문인가,를 전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0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을 통해 나의 못다이룬 꿈을 이루게 해야겠다며 무리수를 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제가 아는 50대 초반의 남성은 부모가 강요해서 자신은 원치도 않은 대학의 학과를 나왔는데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할 때 한을 품고 해요.50이 넘었는데도...어찌 그 분 뿐이겠습니까...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아직도 동반자살이라고 쓰는 기자들도 있고요...자식을 소유물로 보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만연되었나를 보여주는 예입니다.뭔가 깨어있을 것 같은 고학력의 젊은 부부들도 자식성향 무시하고 사교육폭탄을 안겨주는 사람들도 많고요...

blanca 2012-05-02 23:15   좋아요 0 | URL
노자님,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요. 자식은 분명 세상에 나왔을 때 나와 분리된 존재인데 자꾸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의 연장인 것처럼 느껴져서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어 독립해도 품 안의 자식으로 여기는 정서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쿨하고 너그러운 부모가 되고 싶은데 정말 어려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jamanta 2012-05-02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를 읽고 나니 어서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이제 주문하러 갑니다~

blanca 2012-05-02 23:17   좋아요 0 | URL
jamanta님 안녕하세요. 이 책은 육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누군가가 곁에 앉아 공감해 주고 치유해 주려는 다정다감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다만 말미에 이르러 약간 종교적인 색채가 있어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저한테는 참 좋은 책이었답니다. jamanta님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2012-05-0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2-05-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진영이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려고, 하니까,, 진행자들이 난감해했다는 부분 보고 ㅋㅋ 프로보면서 그런 맥락도 읽으시는군요 ^^
엄마의 자존감을 서점을 나서려다 다시 돌아가 쥐고 왔다는 부분도 ㅎㅎ 상당히 극적인 만남인 거 같아요. 그런 책들이 있더라고요. 지천명이면 50살인가요? 그 작가의 연륜을 몹시 듣고 싶기도 하네요 ^^

2012-05-0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2-05-06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인생은 살아갈수록 어렵고 힘들고.... 가끔 왜 나에게만? 하는 원망도 생기고요. 특히 아이들이 클수록 고민꺼리도 늘어갑니다. 엄마의 자존감, 아이들의 자존감 키우기 어려워요. ㅠ

blanca 2012-05-06 23:32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요? 저에게 세실님은 부러움의 대상인걸요. 가장 아름다운 직업, 사서님이시고 게다가 공부도 하시고 하루 하루 발전해 나가시는 세실님이잖아요. 아, 저는 여섯 살밖에 안된 딸 두고서도 키울수록 어렵다는 말 실감한답니다.^^ 어렸을 때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했는데 이제 커가며 여러 가지로 혼란이 오네요.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 또 어떤 과제들을 엄마한테 안겨 줄지. 한편으로 참 이쁘면서도 그 이쁜 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아요.
 
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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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제목에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박공'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다. 원문 제목은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다. 게이블. 바로 <빨간머리 앤>의 아름다운 집, '그린 게이블즈'가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면 꼭 그들의 앤이 아니더라도 머슈 아저씨와 마릴라가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그 집도 이 '박공'과 관련이 있었다. 알고보니 가장 흔한 ㅅ자 지붕형태를 얘기하는 단어였다. 장소가 바로 제목이자 소재, 주제가 되는 책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붕이 일곱 개인 집이 잘 그려지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하니 실제 비슷한 모델의 집의 이미지가 있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집의 정경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 건물 자체가 마치 화려하고 음울한 회상들로 가득 찬, 자기 생명을 가진 거대한 인간의 심장과 같았다.
-p.39

 

친정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온 곳이다. 일곱 박공의 집처럼 두 세기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장소 이상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 집에서 매번 최대한 교통이 불편한 학교, 직장 등에 나갔다 어깨에 먼지떠께를 얹고 귀환하곤 했던 기억들은 구석 구석마다 먼지처럼 가라앉아 또르르 말려 있는 느낌이다. 벽마다 가족 구성원들의 추억, 회한들을 숨기고 이 집도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일곱 박공의 집'에는 쇠락한 귀족 핀천 가문의 후손인 헵지바가 숙부을 죽인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인 오빠 클리퍼드를 기다리며 그 집에 구멍 가게를 열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 노년의 오누이는 더없이 음침하고 비참하다. 하루 하루를 견뎌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련이자 고문이다.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기대도 없다. 그 집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청년 은판 사진사 홀그레이브에게 핀천 가문의 처녀 피비가 이 집에 온 것은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세례는 이 늙은 오누이에게도 미친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처럼 만연체의 연설을 늘어 놓던 작가 호손의 목소리가 갑자기 청랑해지는 것도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예쁜 묘사들.

 

그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듯이 피비를 읽었다. <중략> 그녀는 그에게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가 갖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에 아주 절실한 모든 것에 대한 통역이었다.
-p.191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서 갖지 못했지만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에 대한 통역이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언어들은 또 다른 차원의 감정을 고양한다.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체화하고 해석해 주는 존재로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자 희망. 그 극대점에는 비참하게도 살인 누면을 쓰고 감옥에서 젊음을 소진하고 풀려 난 클리퍼드가 있다.

 

평생 동안 그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비참해지는 법을 배워 왔다.
-p.202

 

고난은 언제나 사람을 각성시키고 상처의 생채기는 언제나 저릿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포기해도 비참해지는 법은 언제나 다른 경로를 통해 새롭게 학습된다. 손을 놓았다 다시 접하면 또다시 외국어 실력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호손은 예리하지만 잔인가히도 한 것 같다. 고딕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고통을 소환해 낸다. 핀천 대령과 땅의 소유권을 놓고 분란이 일어 마법사 누명을 쓰고 처형되는 매슈 몰이 단말마에 짜내었다는 예언은 만화경처럼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후손들에게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억측과 오해. 그 속에서 태어나는 희생양. 고색창연한 이 집은 딱딱해져가는 심장처럼 몰락의 징후를 예감하며 힘겹게 박동한다.

 

결말에서야 밝혀지는 무고한 클리퍼드를 감옥까지 가게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촌 핀천 판사의 묘사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 더없이 고상하고 인자한 존경받을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근접해서 보면 그의 모든 면은 탐욕과 위선에서 나온 일종의 타락한 연기다. 그 연기는 지역에서 사회에서 너무나 잘 먹힌다. 정계에까지 진출하려는 그의 의도는 무지한 대중 앞에서의 그럴듯한 연기로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다면 곧 현실화될 전망이었다. 그가 그의 선조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바로 그 의자에서 시들어 가고 있을 때 호손이 장황하게 그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면 행해졌을 일들을 늘어놓는 대목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잔인한 실체를 눈 앞에 그려주는 그의 명민함 때문이다. 핀천 판사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유형이면서도 가장 욕망하는 것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야망이 마법보다 무서운 부적'이라는 호손의 경구는 인간이 한 곳에 뿌리박고 앉아 대대 손손 부귀 영달을 누리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사실은 하나의 잘 변장한 야망의 또 다른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매가 '일곱 박공의 집'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떠나는 결말은 동화적이기도 하면서 호손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한 결말이기도 하다. 현실과 비현실, 시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그가 그려낸 스케치는 그가 삶에서 깨달은 남겨진 자들에게 해주고 떠나고 싶었던 애기인 것만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누구나에게도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도 같다. 상처도 후회도 회한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중략>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정당함을 찾을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끼워 넣을 마땅한 구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p.425

 

 

+ 작가의 문체는 때로 굉장히 장황하고 교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술이 지루함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캐릭터와 배경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능력과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의 힘이 매력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결말의 해피엔딩은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다. '그린 게이블즈'에 앤이 오지 않았더라면 마릴라와 머슈 남매가 핀천 남매처럼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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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까지 박공을 마음대로, 조개껍데기 비슷하게 생긴 무엇으로 상상하고 있었답니다...
블랑카님 때문에 이제 제대로된 상상을 하겠네요.... ㅋㅋ. 그런데, 옛날 러시아 동화 읽을 때 스프라든지 아니면 유럽 동화의 무슨 빵 이런거를 상상할 때 정말 가슴이 뛰었는데 실제 접하니.... 음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손은 주홍글씨 밖에 못 접해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황하고 교조적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오니 말이죠.
오랜만에 뵙는거 같은데, 잘 계시죠?

blanca 2012-04-27 22:21   좋아요 1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박공이 무슨 목수 같은 직업을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ㅋㅋ 이런 뜻일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저는 <주홍글씨>를 어렸을 때 아마 계림문고판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참 신기한 건 이 책은 재미있답니다. 독특한 즐거움이 있는 책이라 간만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대체 왜 바쁜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항상 잠도 모자라고 그런 상태예요. 코알라양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이제 꼬맹이도 친구처럼 어디 데리고 다닐 수준이 되어 재미지기도 하고요. 마녀고양이님 생활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2012-04-2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헤밍웨이를 정주행하면서, 미국문학을 전공하며 헤밍웨이와 피츠제랄드와 포크너를 읽었어야 했는데...하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블랑카님 리뷰를 보니 그들 이전에 호손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네요. 큰바위 얼굴같은 동화도, 영 굿맨 브라운같은 단편도, 주홍글씨같은 청교도 사회를 그려낸 장편도 척척 써내는 호손인데, 게다가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라니... 이 사람 천재입니까!!!

blanca 2012-04-27 22:24   좋아요 1 | URL
브론테님, 헤밍웨이 정주행하고 계시는군요! 우아, 근사해요. 저는 브론테님이 얘기하신 책들 중 <큰 바위 얼굴>만 읽었어요. 이 책은 옮긴 이가 자칫 지루할 수 있다고 덧붙였는데 일단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동화 같은 느낌도 있는데 군데군데 호손의 이야기들이 삶의 경구들 같아서 철학책 같기도 해요. 천재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문학을 전공할 뻔했는데 영어가 너무 부족해서--;; 접혔어요.(접은 게 아닌고요--) 브론테님의 헤밍웨이 정주행 경과가 궁금해집니다. 간간이 올려주실거죠?

노이에자이트 2012-05-02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홍글씨 상당히 재미있어요.저는 서른 넘어서 읽었으니 그럴까요? 사실 어린이가 읽기엔 좀 어렵죠.성인이 된 지금 읽으시면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blanca 2012-05-02 23:19   좋아요 1 | URL
노자님, 그럴까요? 저는 참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른 넘었으니 이제 한 번 제대로 읽어볼까요?^^;; 호손의 문체가 만연체 및 약간 교조적인 면이 있는 게 참 재치있긴 하더라고요. 발자크도 생각나고요.

icaru 2012-06-1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표지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 나오는 그림인데 ㅎㅎ) 뒤늦은 딴소리 지송^^;;;

blanca 2012-06-15 22:15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 표지가 의외로 여기 저기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놀라고 그래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도 나왔군요!

saint236 2012-09-26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표지는 아내의 역사라는 책의 표지로도 사용된...

blanca 2012-09-27 10:07   좋아요 1 | URL
아, 저도 본 것 같아요!
 

독감은 감기와 고통의 차원이 달랐다. 일단 장염이 동반됐다. 열이 주기적으로 계속 오르는데 37도 정도부터 시작하더니 스멀스멀 39도까지 올라갔다. 속은 미식거리고 배는 부글거리고 콧물은 줄줄 흐르고 머리는 흔들리고 목은 따끔거리고 총체적 난국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자고 싶은데 도저히 잠도 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해도 빠지지 않던 체중이 하루에 1킬로씩 빠졌다.

 

이 정도 되면 만사가 귀찮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얄미워할 이유가 생긴다. 그 어떤 불행의 무게도 내가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 바이러스보다는 가볍게 보였다. 독감에 걸려 있는 '나'는 건강할 때의 너그러운 나를 아련하게 추억한다. 모든 미덕이 실종되고 시앗을 본 본처처럼 아들을 빼앗긴 며느리처럼 손톱을 세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없고 '상황'이 있는 것이라는 얘기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관용과 배려의 미덕을 가지기란 행복한 사람이 절망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얘기다.

 

독감이 낫고 체중은 우습게도 바로 원상복귀되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만난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정말 뒤늦게 만난 책.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신영복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자체 검열을 받고 세상에 나온 편지들은 그가 연루되었던 사건에 대한 해명도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정제된 멀끔한 고백들이다. 너무나 잘 닦인 말들. 나를 그 처지에 넣어 보면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넌 영원히 사회와 격절되어 닫힌 공간에서 있으라!, 고 사람이 사람인 나에게 명령하고 실제 그것을 집행한다면 과연 내일을 믿고 내년을 기약하고 여생을 상상하며 하루 하루 견뎌나갈 수 있을까? 20년 후 세상 밖으로 나온 그지만 그 속에서 그는 그럴 것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하루 하루는 진실했고 때로 경건하기까지 했다. 절망을 얘기하지 않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고 섣불리 희망에 기대지도 않고 그저 하루 하루를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새처럼 성실하게 지내며 내면에 세상 밖으로 뻗어나갈 나무 한 그루를 키워냈던 그의 나날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진정성 있는 희망이란 이런 곳에서 피어나는 것일게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p.150

 

나는 그러지 못했다. 햇볕의 한 조각은 의당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지개를 만들 만한 상상력의 배포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화창한 5월 한 뼘은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리곤 했던 것이다. 신영복은 감옥 안에서 계절의 순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옥 안에서 무더위,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될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그 염려를 염려하며 자신도 극한의 더위와 추위 사이 사이 아름다운 절기들을 만끽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호한에서는 동료 죄수들의 체온으로 서로를 덥힐 수 있고 더위가 성한 여름에는 이름모를 동료가 잠도 자지 않고 가운데에서 부치는 부채 바람으로 허락된 시원함으로 너끈히 견디는 그의 모습은 난방과 에어콘 바람으로 계절의 단련을 거치지 않고 1년을 보내어 버리는 우리들의 빈곤함을 부끄럽게 한다. 자연이 주는 시련을 일종의 연대로 이겨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 시련마저 기계의 힘으로 거부해 버리고 나날이 더 외로워지고 더 말라가는 우리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p.155

 

그가 갇힌 곳은 내가 자유로운 이곳보다 더 열려 있었다. 내가 온전하게 잡고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상들보다 그의 일상은 더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나는 점점 더 객관의 지평을 잃어가는데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의 자리에서는 객관의 지평이 한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더 깊숙이 발목을 박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들을 더 간절하게 원하고 더 가까이 안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가 봉재공장에서 미싱 땜방 일을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추락한 위상과 처지를 떠올리는 대신 땀을 흘리며 손으로 붙잡고 하는 노동이 주는 기쁨에 겨워했다. 이것이 객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방끈이 긴 인텔리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혀 밖에서라면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을 밑바닥의 인생들과 부대끼며 견뎌야 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그가 발을 헛디딘 곳에서 그는 더 큰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만나지 말자며 묵은 사람이 떠나고 나면 자기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체험을 등에 지고 새 사람이 문 열고 들어옵니다.-p.164

 

떠나고 들어오는 수인들에 대한 그의 묘사가 눈물 한 방울을 부른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욕설이 태반이 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삶에 대한 그의 존중과 이해가 뭉클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를 등에 지고 저마다의 삶과 희망과 꿈을 오롯이 몸에 채우고 타인을 대면한다. 사회에서는 그들 속에 있는 그 귀중한 추억과 지향을 무시한 채 그들이 세속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들을 성취했는 지를 놓고 그들을 평가하고 재단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만남이 이 곳에서는 절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작 독감 하나로 내가 불행해질 이유를 수십 가지 만들어 내고 내가 사람을 미워할 이유를 꼽아 보던 어제가 몸서리나게 부끄러워졌다. 신영복도 나라는 생각은 '나'와 '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했지만 처지만으로 내 삶을 규정하고 나의 감정을 합리화해버리는 습관은 고질적인 비겁증이다. 모든 사회와의 연대가 깨어지고 모든 자유를 속박당하고 모든 미래의 약속과 꿈을 저당잡혀 버려야 하는 수형 생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성장해 나가며 수감 생활이 주는 함정도 단속했던 그의 삶을 대하는 그 경건한 자세에서 인간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추한 인간을 얘기하고 비감한 인생론을 설파하기 쉬운 자리에서 인간의 연대를 믿고 대중의 선량함을 확신하는 그의 모습은 삶의 의미의 현현이었다.

 

나는 아직은 달팽이의 보수와 칩거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P.180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그의 바람은 나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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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코, 독감에 걸렸다 오셨군요.
요새 감기는 참 힘들덥디다. 저도 거의 한달간 끊이지 않는 기침과, 감기 첫주는 빠질 듯한 어깨 담과 썩어 문드러진 듯한 목의 느낌과 아픔, 누런 콧물과 위가 나올듯한 기침... 아 생각만 해도 힘이 들어옵니다.
체중은 보란듯이 늘고 있구요. 그래도 나으셨으니 다행입니다!

blanca 2012-04-16 09:0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걸렸어요. 감기는 삼사 일 바짝 앓으면 낫는데 독감은 정말 차원이 다른 고통이--;; 소이진님도 힘드셨겠어요. 고마워요. 오늘 보니 또 다시 독감이 유행한대요. 게다가 또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일교차가 크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프레이야 2012-04-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글이 요즘 더디 보여 들렸어요.
열흘이네요.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신가요? 제 서재 댓글 반가웠어요.^^
신영복님의 마지막 저 문장, 날선 청년의 정신이네요.
저 책을 다시 꺼내봐야겠어요.

blanca 2012-04-27 09:3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기 낫고 나서 밀린 일들을 하려니 이래 저래 정신이 없네요. 게다가 날씨도 너무 좋아서^^ 퍼지려는 차도 고치고 그러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요. 세상에서 젤 무서운 게 독감이에요--;;이제 정말 완연한 봄이지요? 파란 귀한 하늘을 보면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이 봄을 많이 보고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소년이 둘 있다. 한 소년은 범죄의 피해자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고 다른 한 소년은 범죄의 가해자를 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둘은 살아남았다. 가족이 산산조각으로 바스라지고 살아남은 자는 생존 자체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는다. 설명해 봐! 네가 살아남은 이유를. 네가 보아버린 것들을.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내처 읽어버린 이야기 속 두 주인공 소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응시하다 손을 잡는다. 기막힌 우연이다. 작가들은 서로의 소년들을 알고 있었을까. 언젠가 독자들이 그 두 소년을 함께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을 예감했을까, 싶었다.

 

 

 

 

 

 

 

 

 

 

 

 

 

 

 

 

 

사실과 진실....

 

"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
-<모방범>2권 p.493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7년의 밤> p.25

 

 

<모방범>은 학창 시절 아이들의 선망을 샀던 소년 둘이 자라서 연쇄 살인범이 되는 이야기다. <7년의 밤>은 소녀를 살해하여 시신까지 유기하고 댐의 수문을 열어 마을 전체를 물 속에 잠기게 한 전직 야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와 정유정은 천인공노할 범죄 사실의 이면의 진실을 하나 하나 채집하여 내어 놓는다. 어머니 앞에서 처음 걸음마를 내딛던 날 한없는 찬사와 경탄을 받았을 평범한 그들이 어떻게 생명들을 꺼지게 하고 그 생명들을 둘러 싼 삶들을 패대기치는지 그 과정을 복기한 것은 이해와 공감을 바라는 시선이 아니라 정유정 작가의 말처럼 사실과 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그러나'를 수긍하는 과정이다. 구역질나지만, 두렵지만 삶의 전장은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꾸미던 꽃밭이 아닌 것을. 때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갑자기 폭주해서 밀려오는 경험이었다.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그 미약한 가능성도 삶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외모도 출중했던 소년들은 그 언저리에 있었던 소년들 만큼이나 때로 의외의 진로를 택한다. 늦은 비행에 어떤 논리적 필연적 연유를 갖다 대고 찾아 낼 수 있을 만큼 삶은 도식적이지 않다. 왜곡된 자아상은 엉뚱한 출구로 자존감을 회복하려 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찾으려 했던 '그러나'는 이 소년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 소년들 앞에서 무너질 것 같으면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는 피해자들의 '그러나'에 대한 이야기다. 잔혹한 소년들이 끝내 파멸시키지 못한 '그러나'를 건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자 우리가 오늘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다.

 

<7년의 밤>에서는 평범한 가장의 우연한 실수로 시작된 파멸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사회 앞에서, 힘의 헤게모니 앞에서 무력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범죄로 내몰린다.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시작된 그의 범죄는 마침내 자신의 가정마저 해체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수몰되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소년은 흉악범의 자식이 되어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소년이 아버지의 사실과 진실 사이에 놓인 '그러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다. 이해와 수긍과 용서는 엄연한 간극이 있다. 그 간극에 애써 작가는 참견하지 않는다. 그 편안함 속에는 어떤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다. 정유정 작가의 매력인 것 같다.

 

 

가족이란...

 

두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딸을, 손녀를, 부모를 흉악범죄로 잃고도 살아나가야 하는 가족. 피해자임에도 정작 가해자가 되어 버린 오빠를, 아들을,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는 가족. 제대로 된 사랑과 교감을 받지 못한 채 엇나가 버린 아들들이 흉악범죄자가 되어 버린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 다른 가족을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가정만은 지키려고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은 정작 그 지키려 했던 것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했던가,에 대한 아픈 회의와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가족은 마치 '나'를 길게 늘여 촉수만 붙인 것 같다. 우리는 때로 '나'와 '가족'의 경계를 잊는다. 그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족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이 한 순간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 이후.

 

<모방범>의 가족을 잃은 소년은 손녀을 연쇄 살인범의 손에 잃은 할아버지와 손을 잡는다. <7년의 밤>의 사형수 아버지를 둔 소년은 보이는 '사실'이 아니라  이면의 '진실'을 찾아 헤맸던 아저씨와 끌어안는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결속 안에 있다 그것이 끊어지고 걸어 나온 그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어깨에 기댄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가족은 또다른 '나'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소통과 유대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그 환각에서 깨어난 지점에 타인이 걸어들어올 여지를 남겨둔 것은 인간 사이에는 포기할 수 없는 소통과 지지와 신뢰, 애정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의 몰이해를 묘사하고도 끝내 이것들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들 본인들의 희망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P.S.

왜 인간에 대하여 선보다는 악에 대한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갖는 것일까? 더 할 얘기가 많은 것일까? 더 많은 이끌림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성악설도 원죄설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손치더라도 무력한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게 무참하게 느껴지는 삶의 우연성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조합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 때문일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미리 맷집을 키우는 일일까. 이러한 책들은 항상 말줄임표로 끝나고 만다.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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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3-2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부터 미미여사 작품이 대단한 인기더군요.도서관에서도 늘 대출 중이고...요즘은 남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여자는 미야베 미유키가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일 겁니다.우리나라는 워낙 추리작가의 지위가 낮으니 원...

blanca 2012-03-30 21:2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뒷북을 친 것 같아요^^;;아, 히가시노 게이고는 접해보지 못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책은 <화차>를 보고 반해서 또 다시 시도해 본 건데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 이런 장르물을 읽으면 무서워서--;; 그만 읽으려고 합니다. 추리작가가 선정적이고 원색적인 자극물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심연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경우 같은 경우는 단순히 장르물로 한정될 수준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그런 작가도 나오고 인식도 많이 달라지기를 바라 봅니다.

cyrus 2012-03-2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어느 책에서 봤는데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대요.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기억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대요. 서로 다른 소설을 읽다가 우연히 서로 유사하다거나
이어지게 되는 관점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이 무척 새롭죠 ^^

blanca 2012-03-30 21: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7년의 밤>은 찬사를 많이 들어서 내용 자체를 아예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스릴러물 같은 분위기도 있어서 사실 많이 놀랐어요. 연달아 읽어서 그런지 공통점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2012-03-3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극단적인 비극을 그려내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사실은 희망에 관심있는, 희망을 찾는 사람들 같아요. 화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여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2-04-01 21:42   좋아요 0 | URL
섬님, 맞아요. 힘들다, 슬프다,고 호소하는 와중에는 그래도 살만한거야,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을 찾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예리하십니다.^^

마태우스 2012-03-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 읽은지가 5년이 넘으니,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요. ㅠㅠ 역시 책도 젊을 때 읽어야 한다니깐요. 글구 7년의 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볼게요.

blanca 2012-04-01 21:4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7년의 밤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사실 읽으면서 서사의 힘, 문장력 등이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싶어 내심 놀랐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4-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다 살지 않아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라고 추측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일이 그 중 하나였어요. 이렇게 밀도가 있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놓고 있게 되다니, 생각하다가, 새털같다, 라고 느끼는 부분들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저 책들이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런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 듯 아프게 써내려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쁘면서도 좋고 좋으면서도 나쁜 것들이 있다, 고 소설가 양귀자가 모순에서 말한 것 처럼요.
인간에 대해서는 부정이 긍정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아마도 행복할 때엔 일기를 잘 쓰지 않는 것과(그런 경우가 있다면요)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blanca 2012-04-01 21:45   좋아요 0 | URL
쥬드님의 새로운 네임이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쥬드님이라고 줄창 부르기로 했어요.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도 삶도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더 넘쳤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김훈이 인터뷰한 것 보니까 삶에 대한 너무 어두운 시각을 가지고 있어 돌연 겁나기도 하더라고요. 저보다 더 많이 살고 느끼고 체험한 사람이 하는 얘기란 항상 더한 무게를 가지잖아요. 거짓말 같을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체념보다는 긍정,희망을 더 늘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기가 더 쉬우니까요.

Jeanne_Hebuterne 2012-04-02 12:49   좋아요 0 | URL
히힛 제 닉, 잔 에뷔테른이에요. 저도 저 글씨를 찍질 못해서 구글에서 고스란히 복사해서 붙였습니다만, 무엇으로 불러도 장미이듯이(비유가...죄송해요) 무엇으로 불러도 이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김훈의 그 시각,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라고 비유할 때 부터 떠올렸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큼만 강하고, 살아남기 좋을 만큼 어두운 글이었어요. 블랑카 님에게서는 일말의 밝음이 늘 있어요.

순오기 2012-04-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은 안 읽어서 모르지만, 7년의 밤은 굉장하지요. 정유정 작가를 만나고 싶을 만큼...

blanca 2012-04-04 21:34   좋아요 0 | URL
영화화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이런 작가가 지금 한국에 있다니, 이런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문장력도 얼마나 좋은지 소설의 부흥도 가능하겠다 싶고요.

후애(厚愛) 2012-04-0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모방범을 선물 받아 놓고 아직도 못 읽었어요.
선물 주신 분께 너무 죄송해서... 읽어야하는데...

독감은 좀 어떠세요? 입 맛이 없더라면 챙겨 드셔야 합니다.

blanca 2012-04-04 21:35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자리 털고 일어났는데 또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예, 억지로라도 몸에 좋은 것 먹으며 회복하려고 합니다. 후애님도 어서 건강해지시기를...

icaru 2012-04-0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이 책은 5년을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이라던데, 이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다는 걸 반증한다 싶어요.. 사실 저도 읽은지 오래되어서 줄거리랄게 세세하게 생각은 안 나는데, 얼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서 유사한 설정이다 라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물론 모방범 쪽이 악랄하다면 악랄하고, 미디어를 역이용하여 쇼맨쉽을 발휘는 하는 정신착란 모습에 기함을 토했지만요.

추신에 덧붙인 말씀처럼, 왜 사람은 악에 대한 이야기에 더 쉽게 설득당하는지... 에 대한 말에도 블랑카 님다운 통찰이 느껴져요. 맷집을 키운다 라니 ㅎㅎㅎ.. 또 그건 이런 장르의 작품이 건재하고도 승승장구하는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blanca 2012-04-04 21:37   좋아요 0 | URL
icaru님, 제가 겁이 많아서 밤에 이 책을 읽다 보니 자꾸 무서워서 2권, 3권은 안 읽고 처분하려는 생각까지 했잖아요 ㅋㅋ 그러면서 또 읽고 막 괴로워하고. 너무 악랄한 인간상을 보니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도 어두워지고 부작용이 있더라고요. 당분간 밝은 책들 위주로 읽어 보려고 한답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