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를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흑백 사진. 단발 머리의 젊은 엄마와 어깨까지 닿는 금발머리의 사랑스러운 사내 아이는 코를 맞대고 웃고 있다. 가스 렌지의 손잡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장소는 부엌. 행복하고 안온하고 뭉클해 보이는 장면.

 

 

아이는 열여덟 살에 이러한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입밖에 내어 말한다. 이십오년여 동안 이 지극히 엄마다워보이는 엄마는 정신이 병들어 아들에게 엄마다운 엄마로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아들은 그러한 엄마가 죽어도 괜찮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엄마가 죽었다,는 전화 앞에서 전혀 괜찮지 않음을, 주먹으로 한 대 가격당한 듯한 아픔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들은 건강할 때에 부엌에서 아이들에게 엄마표 돼지갈비와 딸기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며 행복해했던 엄마의 모습을 찾아 직접 그 요리들을 재연한다.

 

아들은 이라크 침공현장, 예루살램 등의 그 살육의  현장에 직접 있었던 종군기자다. 그와 엄마와의 관계는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했다. 엄마는 술을 마셨고 환청을 들었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엘리자베스 데이비드의 요리책을 교본으로 부지런히 주방에서 아이들을 위한 요리를 했던 그 건강하고 활기찬 엄마의 모습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그 찰나 같았던 순간들 속에서 모자는 특별한 유대와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나머지의 그 파괴되어 가는 모습들이 엄마의 전체를 규정지을 수는 없었다. 애도의 길은 처음에는 곧고 평탄하다 이윽고 생의 가혹한 우연의 요철에 걸려 넘어진 엄마가 어떻게 가족에게서 멀어져 가는지를 더듬고 기억해 내야 하는 곳으로 닿아 있다.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는 사진이 너.무.나. 눈물겹도록 예쁘다. 일부러 포즈를 취한 듯한 작위성은 걸어나가고 그냥 그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었다. 광고 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뷰파인더에 담아 응고시킨 순간들은 그 자체로 이 슬픈 가족의 예쁜 일대기다.

 

 

 

 

아무리 해도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 같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여전히 거기 있을 것 같다. 인위적인 구획으로 나이와 시간을 재단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새 부모님은 늙어 있고 병들고 떠나고 나의 아이들은 어깨 높이만큼 자라 더이상 나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에 당도한다. 더 나아가면 내 옆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들, 모든 것은 꿈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하고 생에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자꾸 우울해진다. 아들은 엄마의 행복하지 못했던, 그래서 그 자신도 괴롭고 아팠던 반생을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아픔에서 조용히 걸어나간다.

 

오늘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지하철을 한 시간 가까이 타고 집에 왔다. 엄마가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주어 너무 좋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고 "친정 엄마가 반찬해 주니 좋다"고 표현했다. 엄마가 엄마다운 채로 그렇게 나도 엄마의 딸다운 대로 아주 아주 나중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나도 나다운 대로 그렇게 내 딸과도 떠올려도 괜찮을 정도의 작별의 순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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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도의 길이군요, 이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많은 면에서요.

blanca 2013-12-31 15: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리고 살면서 아직도 항상 배울 것들이 있다는 게 참 좋으면서도 지나고 나면 또 했던 실수들이 너무 부끄러워져서. 적어도 가족이든 타인이든 상처는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고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고님, 벌써 올해도 다 저물어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프레이야 2013-12-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엄마가 계시니 블랑카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저도 김치 담가주신 엄마가 건강히 계세요. 전 제 딸에게 가져갈 멸치볶음을 방금 만들었구요. ^^ 눈물나게 빛나는 책이군요. 한가족의 역사이기도 한 사진들까지.

blanca 2013-12-31 15:0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건강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것 참 큰 힘인 것 같아요. 이사벨 아옌데는 어머니가 구순인데 정정하셔서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힘이 되준다는 글을 읽고 너무 부러웠어요. 김치, 저는 언젠가는 제가 김치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이렇게 받을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좋기도 해서 미루나 봐요. 멸치볶음은 언제나 스테디셀러죠 ㅋㅋㅋ 프레이야님, 오늘 한 해 마무리 따뜻하게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4-01-0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는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존재죠. 이제 나이 27인데도 엄마가 좋아요... 그렇다고 제가 마마보이 인증하는 건 아니랍니다. ㅋ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건강하세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애기도 함께... ^_^

blanca 2014-01-02 19:44   좋아요 0 | URL
cyrus님, 감사합니다. 님도 올해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잘 성취하시고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바라요.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심지어 할머니,할아버지가 되어도 언제나 좋고 보고싶은 그리운 존재이지요. 벌써 1월하고도 2일이 저물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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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어른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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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만난 지 얼마 안 되면서부터 소소한 부탁들을 해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러한 부탁의 경중이 지극히 주관적이라 헷갈렸다. 내가 너무 빡빡한가. 그 정도는 들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시작이 물꼬를 트고 이윽고 무리한 것들에 대한 요청이 조금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때로 내가 그녀에게 부탁하면 좋은 일들도 있었지만 이내 뒤로 물러서게 됐다. 그 부탁을 함으로써 더한 것들이 밀어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소심함이 나를 무르춤하게 했다. 그러니 관계에서 도타운 정대신 자꾸 불쾌함과 두려움이 끼어들었다. 단지 그녀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그녀와의 만남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을 만들었다. 혹시, 이 사람도 또?

 

옛날부터, 여성 친구에게 빚을 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녀들에게는 손톱만큼의 악의도 없지만 일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선물에 과도하게 감격하거나 별생각 없이 큰 희생을 치르기도 하고.

 그것은 때로는 미덕일 수 있지만 때로는 아주 난감한 일이다. 예를 들어 화분을 한 번 맡긴 일이, 알게 모르게 하나에서 열까지 도와주었다는 인상으로 바뀌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러한 망설임, 두려움에 대해 예리하게 표피를 벗겨낸다. 그런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녀는 유부녀지만 과거의 연인들을 한 명은 제외하고 다 남성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친화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의 불분명함이 없다는 것이 친구 남자들과의 관계의 강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다만 이 친구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피곤함은 절대 함께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배우자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고. 그녀 기준에서는 절대 그들과 불륜으로 나아갈 위험성은 없다는 것이다. 음, 작가이고 남편과 떨어져 살고 일본인인 그녀의 친구들과의 관계는 여기 한국에서 받아들여지기는 조금 힘들지만 여하튼 그녀의 솔직 담백한 고백들은 그녀의 투명하고 속살거리는 단문들로 감싸여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여자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랄까. 몰랐는데 바로 이거구나! 싶은 깨달음의 관문 역할. 무엇보다 그녀의 언어들은 쉽고 짧다. 호흡을 구태여 가다듬지 않아도 그녀의 이야기 전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외롭거나 심심할 때 부담없이 불러올 수 있는 친구. 게다가 그 친구는 아주 예의바르다.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정확히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조금 건조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스스로를 불량하고 사치스럽고 악의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선량함으로 한번 세상을 살아보고 싶다고 소망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에서 줄곧 살아 숨쉬는 그녀들의 그 투명한 매력들을 생각할 때 그녀들을 만들어 낸 에쿠니 가오리가 유독 불량하고 악의적일 것 같지는 않다. <워터멜론 슈가에서>에 나온다는 아이디아뜨 근처에 가보고 싶다고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 두렵다고 고백하고 욕조에서 매일 두 시간 동안 있다는 고백은 이 중년의 여인을 상당히 귀엽게 보이게 한다. 어린 시절 여동생과 방 한 곳에서 태풍을 맞아들이는 정경, 아버지와 가족 신문을 만드는 풍경은 동화책의 삽화처럼 사랑스럽다.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는 쉽게 쓰인 것 같고 그 만큼 쉽게 읽히지만 쉽게 가시지 않는 잔상이 있다. 누구나 그녀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그녀처럼 곧잘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딱 그녀처럼 쓸 수는 없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이다지도 솔직 담백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에세이'이라는 글의 장르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가식과 적당한 가면을 찾기 마련임에도 그러지 않는 도발이 있는 글들. 한밤중에 꼭 부부싸움을 하고는 밤새 열려 있는 북센터에 들어가 책냄새를 맡고 나와 자신이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앞에서 그때는 이런 날이 올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는 여자.

 

그게 에쿠니 가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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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4-01-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그녀처럼 생각할수도, 곧잘 이야기할수도 있겠지만, 딱 그녀처럼 쓸수없다는 말에 크게 공감해요~
참 쉽게 쓰고 쉽게 읽히는 듯 한데, 잔상 또한 오래 남기는 걸 보면, 깨끗하고 따뜻하고 배부르면, 행복하다는 통찰을 굳이 잘 포장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베어나오게 쓰는 작가 같달까요~
그 지점 때문에, 아싸 가오리 씨가 매력적이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하고,,, 이중적인 감정을 느껴요~

아,, 블랑카님의 문체로 가오리 씨를 해석해 보니, 아삼삼 멋지네요~

blanca 2014-01-03 16:46   좋아요 0 | URL
에쿠니 가오릭 지나치게 얕다,고 생각하는 의견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무언가, 좀 무겁지 않은 그녀만의 그 단문들이 편안해요.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젠체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꾸준히 읽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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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서툴 정도로 솔직하고 자주 멈칫거리며 어떤 경계에서 머뭇거리던 젊은 배우 이성재를 기억한다. 이제 이성재는 내년에 대학교에 진학하는 딸을 둔 중년의 남자이다. 그는 루게릭병에 걸린 아버지의 볼에 뽀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도 스킨쉽이 거의 없었던 부자는 이제서야 볼에 입을 맞추는 사이가 됐다. 그는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티비 앞에서 밤 열두 시가 넘어 나도 운다.

 

 

사회역사학자 로널드 블라이스는 말했다. '노인들에게는 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키스와 포옹이 필요한 인생 단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의사 외에는 누구도 그들을 만지지 않는다. <중략>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으면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울고 또 운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중

 

 

 

 

저자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97세다. 데이비드 실즈는 이성재보다 나이를 다섯 살 정도 더 먹었다. 그도 아버지를 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성재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뽀뽀를 얌전히 받는 대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흐느껴 울기까지 한다. 아들은 에너자이저 토끼 같았던 아버지가 이제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깨닫는다. 나이듦을 이해하는 것이 죽음과 화해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을 저도 모르게 저어한다.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는 경구를 인용하며 삶의 단계는 의학적으로 통계적으로 경험적으로 설명되고 고백된다. 이 책은 저자의 인터뷰 내용처럼 '파괴적 논픽션'이자 통렬한 자서전이다. '나이듦'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아프게 더듬는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죽어 사라진다. 이 당연한 명제를 이다지도 길게 이다지도 와닿게 듣다 보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몽환적인 낭만성은 허무한 사기극처럼 다가온다. 인간의 삶의 몰락성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구태여 멀리 찾지 않아도 된다. 슬프게도 그것은 우리의 부모님에게서 뼈아프게 배워야 한다.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에게 이겼지만 결국은 질 것이고 데이비드도 그러하다,고 서글프게 고백한다. '죽음'과 '시간'은 언제나 우리 위에서 걸어간다. 백전백승이다. '지금' , '여기'를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마도 백 년 이상의 시간차는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내 의지대로 살았다고 믿었는데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나는 결국 어머니 손바닥 위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은 나이를 먹는가 보다.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

 

 

 

 

이 책을 아버지 이름 앞으로 배달하고 선물 메모를 넣었다. 과거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판하기도 하고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들을 쏟아낸 적도 있다. 지금 막내 남동생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노모를 봉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아버지의 손을 이제 잡아드리고 싶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부딪히게 되는 각종 한계 상황들 앞에서 어쩌다 한번씩 한 실수로 부모의 전체 역할을 폄하하고 심판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일이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그 상처 위로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은 작별이다. 마침내 '나'도 사라진다. 그 다음 우리는 서로 안을 수도 입을 맞출 수도 사과할 수도 고마워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그보다는 더 많이 표현할 일이다. 데이비드 실즈가 알려 준 것.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생의 첫30년은 사는 데 쓰이고, 이후 40년은 삶을 이해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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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12-2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으면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울고 또 운다.
- 엄마한테 스킨십은커녕 전화도 잘 안 드렸는데, 이 문장보고 몸이 떨리네요. 누구나 늙는 것을...
글 잘쓰는 블랑카님, 메리크리스마스^^

blanca 2013-12-26 12:06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어요? 저도 정작 아버지,어머지 손을 잡았던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지금도 잡을 수 있을까, 안아드릴 수 있을까, 괜히 부끄럽게 느껴져요. 내년에는 부디 더욱 더 아쉬움이 남지 않는 표현하는 딸들이 되어 보아요^^

프레이야 2013-12-2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전 오늘 큰딸이랑 갈등을 빚으며 설왕설래 하다가 제가 그랬네요, 니가 뭘알겠냐고, 니가 무슨 내속 엄마속을 알겠냐고, 지적질 해댔던 옛날의 나를 돌이켜보며 어머니의 삶, 나아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더 살아가고 있나보다 끄덕이게 되네요. 즐거운 성탄 보내셨지요!

blanca 2013-12-26 12: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제가 부모님한테 했던 언행들 생각하면 --;; 그런데 참 사람이라는 게 딱 나이에서 고만큼의 앎과 시야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런 실수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이제는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할 수 있을지...

저는 아직 산타를 믿는 딸의 선물을 택배 아저씨께서 딸과 함께 있을 때 배달해 주시는 기염을 토하셔서 ㅋㅋ 후다닥 숨기느라 쇼좀 했어요. ^6^ 크리스마스 낭만적으로 잘 보내셨죠!

마태우스 2013-12-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라는 단어, 저한테는 좀 더 의미가 크죠.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한 채 보내야 했으니깐요. 엊그제가 아버지의 12주기 제사였답니다.... 암튼 그건 그거구요, 블랑카님 글은 언제나 감탄이 나오게 만드네요. 서재달인이란 타이틀이 정말 당연해 보이는 글솜씨....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다

blanca 2013-12-26 12:10   좋아요 0 | URL
아....... 어떤 댓글을 달 수 있을런지....
마태우스님은 엊그저께도 티비에서 뵈서 너무 반가웠어요.
그런데 피부 및 외모가 계속 너무 일취월장이에요. 정말 카메라 마사지라는 게 있는 걸까요?^^;;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죠?

마태우스 2013-12-27 22:52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솔직히 별루였어요 ㅠㅠ 그냥 뭐, 일했죠...ㅠㅠ 아내와도 사이좋게 못지냈어요 흑흑. 제 좁아터진 소견머리 땜시...

마녀고양이 2013-12-2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께서는 부모님께 손을 내미시는군요.
저는 부모님과 밥도 먹고, 김치도 얻어오고, 수다도 떨지만
여전히 제 감정을 활짝 열어보이기가 어렵답니다. 마지막 문구, 좀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는.... 징 울리네요.

blanca 2013-12-27 11:1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아직도 저는 멀었지만 그래도 퇴보하지 않고 나날이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자꾸 예전에 했던 실수들이 생각나서 곱씹을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서 나중에는 오늘을 생각할 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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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앤 스콧 지음, 강경이 옮김, 이정호 그림, 안지미 아트디렉터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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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아이의 책장에는 화려한 채색삽화와 이야기가 가득한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와 그 아이의 책을 구경하고 우리집으로 올라가던 길 나는 처음으로 '부러움'과 '시새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의 무게를 느꼈다. 엄마가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그 전집을 사주었는 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책이 고프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아들 둘을 다 서울대에 보낸 아저씨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책 세 권 정도를 살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고르고 재면 뒤통수가 괜시리 따가웠다. 엄마가 한번씩 들러 아저씨의 아들 자랑과 공부 노하우를 들어줘야 조금 더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다고 느꼈었다. 조금 더 커서 대형서점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오랜 시간 책을 고르며 고뇌하고 즐거워하고 초조해하는 즐거움을 덜 눈치를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만 원 안짝으로 몇 권의 책을 안고 나오는 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한 친구는 커서 이 문고 사장 아들과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연히 재회한 그 친구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게 되어 되려 책과 자신의 과거 소망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책의 저자 앤 스콧과 책의 만남은 유년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펭귄문고를 한 권씩 사모으던 오빠와 우연히 식료풍 가게의 빈 오렌지 상자를 들고 와 책장으로 쓰면서 오렌지 향으로 시작된다. 첫 책, 오렌지 향. 그리고 그녀는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밀한 이야기를 품은 서점들과 조우하며 제가끔의 사연을 가지게 된다. 런던,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뉴욕, 옥스퍼드, 아일랜드. 그녀의 서점은 단순히 서점 주인과 손님이 만나 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였던 젊은이가 미래의 위대한 시를 낳게 되는 산실이자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명사가 만나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가게 되는 곳이자 그녀 자신 청춘의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고 시든 곳이기도 하다. 마치 유서깊은 가문의 인장 같은 서점의 상징 도안이 나부끼고 그 서점의 탄생과 성장,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러나 넘치지 않게 복원되는 한 장 한 장은 그 자체로 하나로 완결된 유현한 이야기 같아 호흡을 잠시 멈추고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궁금한 작가에 대해 물으면 거의 세미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서점 직원들이 있었던 컴펜디언 서점. 16세기, 에든버러에 국립출판사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구체적으로 실현했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던 체프먼과 밀러의 출판사가 있었던 곳. 길 건너 아마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로버트 번스가 시인이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템플턴스 서점, 위대하고 또 위대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언어로 눈부시게 그려낸 <새뮤얼 존슨의 생애>를 가능하게 했던 보즈웰과 새뮤얼 존슨이 만남을 가진 토머스 데이비스 서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초판을 팔았던 패럿서점, 그녀의 사랑이 태동했던 바우어마이스터스 서점.

 

태양이 고운 금빛으로 쏟아져내렸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p.169

 

그녀는 이 서점에서 아일랜드 출신 시인 루이스 맥니스의 시집 ,<가을 일기>를 사서 읽어주며 사랑 고백을 했던 '그'와의 아름다운, 나날이 뒷걸음질하거나 머물지 않고 성실하게 성장했던 사랑을 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와의 만남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사랑이 시작되고 자라나고 마침내 스러져 가는 그 길목에 있었던 서점은 그녀의 눈부시고 무모하고 찰나 같았던 청춘을 소중하게 머금고 익어간다.

 

살아남은 곳도 찰나의 역사들과 추억들만을 머금고 덧없이 사라져간 곳들도 그러나 제가끔의 사연들을 충실히 이야기하고 총총히 걸어나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앤스콧의 '나만의 서점' 그녀는 책에 대한 은근한 도취와 집착의 주관과 그 책들을 껴안고 있는 곳의 객관적 사실들이 정확히 만나는 지점에서 신중하게 멈춘다. 그곳으로 가만히 다가가는 일. 참으로 유쾌하고 저릿하고 근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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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2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
- 좋은 문장이네요.

시내 교보문고에 애들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이라서
대형 서점을 보고 놀랐지요.
"세상엔 읽을 책이 이렇게 많단다."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성공했지요.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지만 애들과 한 번씩 그런 데서 책을 사는 재미는 여전히 있어요.

blanca 2013-12-24 08:31   좋아요 0 | URL
pek님, 저도 여전히 교보문고 가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제 딸은 매번 자꾸 팬시용품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졸라대서^^;; 그나마도 둘째가 태어나고서는 못가게 되어 버렸지만요. 아이들한테 너무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들이 많은 세상이라 저희들 어렸을 때 느꼈던 책에 대한 감동은 저만치 물러난 것 같아 참 아쉬워요...

moonnight 2013-12-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적 제 부모님은 책이란 잠시 스쳐가는 것이지 간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셨죠. 지금 이렇게 게걸스럽게 책을 사모으는 이유가 어렸을 적 사무쳤던 갈증 때문일까 가끔 생각하게 되어요.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고 ㅠ_ㅠ

블랑카님의 리뷰 덕분에 또 한 권의 책을 더 사게 됩니다. 빨리 읽게 될 것 같아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3-12-24 08:32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밤님! 저도 어렸을 때 책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갈증이 지금 책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고등학교 땐가 서점에서 나중에 읽고 싶은 책 다 사리라,고 결심했던 그 기억이 나네요.

icaru 2014-01-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란, 자신의 의미 있는 경험과 결합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 같다는 생각을 또 하네요~ ㅎ 덕분에 또 즐거운 리뷰 읽기랍니다~~!!

blanca 2014-01-03 16:45   좋아요 0 | URL
icaru님 댓글을 읽으니 정말 그런 것같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snow2959 2014-02-0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보고 저도 한권 더 사야겠네요^^ 아! 집에 읽을 책도 많은데 또 한권 지르게되었네요 ㅎㅎ

blanca 2014-02-09 16:33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요새 책을 너무 많이 가진 게 아닌가 싶어 하나 하나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도 다 가지고 있을 이유만 잔뜩 있네요.

칸츄리 2014-02-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댓글에동감합니다. 흐음.

blanca 2014-02-09 16:34   좋아요 0 | URL
^^ 저도 딴 건 다 포기가 되는데 참 책 욕심은 나날이 늘어만 가네요. 이것도 하나의 집착이자 소유욕인 듯도 싶고 그래요.
댓글저장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많이 울었다. 업어 키우다시피 한 남동생을 잃은 어느 누나의 글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그 누나의 글에 댓글을 썼다 아침에 지워버렸다. 나와는 다른 고통의 층위. 이해한다고 나도 안다고 마치 고통의 경중을 겨루듯 적은 나의 글이 불편하고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라는 주어가 들어가면 최악의 상황은 예외가 될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한없이 안전하고 안온하게 그렇게 심심하지만 부드러운 삶을 주문한다. 하지만 삶의 응답은 때로 가혹하다. 평균적인 평범한 그러한 수식어로 둘러싸인 안전망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외란 없는 것임을 깨달으며 늙고 죽어간다. 그게 또 삶의 또다른 단면이다. 애써 부정하고 돌아서면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작가. 그녀는 영어를 쓰지만 미국도 영국 출신도 아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게다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젖을 수 있는 장편이 아닌 단편작가다. 단편은 때로 숨이 차고 때로 흩어지는 집중력으로 귀기울이기 힘들다. 그래서 아주 잘 쓸 수 없다면, 아주 잘 읽힐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 대신 딴 생각을 할 구석을 남겨둔다.

 

구석에 다림질을 할 수 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를 두었다.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다리며 때로 드라마를 본다. 그때 기분은 아주 묘하다. 정말 주부가 된 느낌.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느낌. 다림질이 훑고 간 자리에도 남는 주름은 나의 무능력과 나의 열패감 같다. 나른하게 행복하기도 하고 뼈아프게 슬프기도 하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작업실> 중

 

앨리스 먼로는 분명 남편의 셔츠를 정기적으로 다림질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업실>의 그녀가 하필 다림질을 하다 습작 작가로서 '작업실'을 얻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대목.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라는 말.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대체로 옷을 다려주지 않는다. 남자에게 보호받으며 대신 얽매여 지내야 했던 것들에 대한 고찰. 그녀는 작업실을 얻었지만 기묘한 임대인의 귀찮은 관심권 안에 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남편대신 그녀에게 사소한 관심들과 억압과 권력을 암암리에 행사하려 한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방을 빼게 된다. 다시 그녀는 남편의 셔츠를 다림질하던 그 자리로 돌아왔을까.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어떠한가. 화자는 어린 소녀. 아버지는 소위 온갖 것을 파는 만물 외판원이다. 우리나라의 약장수 같은. 어느 날 아버지는 소녀와 동생을 데리고 약을 팔러 떠나고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한 여인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와 추억하는 것들. '나'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아버지의 현재의 삶의 풍경을 관조하며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깨닫는다.

 

<휘황찬란한 집>은 어떤 집일까. 달걀장수 노파가 엉버티고 살아가는 퇴락하고 흉물스런 집 앞에서 선량하고 아이들을 더 잘 키워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그 노파를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를 아이들의 생일파티에서 공모한다. 이미 '우리들'보다 훨씬도 전에 그곳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노파의 무게는 간곳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을 그저 비난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 무심코 타인이 가진 것들을 침해한 적은 없는지. 삶은 가끔 누군가를 딛고 진행될 때가 있다.

 

그 간극은 <태워줘서 고마워>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장갑공장에 다니는 소녀를 잠깐 태워주고 사랑을 느껴버린 '나'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여우의 먹이가 되어버릴 찰나 말이 도망갈 수 있게 울타리 대문을 닫지 않은 계집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계집아이가 되기를 강요당하며 느낀 좌절감이 온 곳이기도 하다.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에 오히려 속박당하며 무거운 철책을 사이에 두고 건너갈 수 없는 이야기들을 독백처럼 쏘아보내고 다시 튕겨져 나오는 그것들을 주워담는 일.

 

이 이야기들에는 저돌적이고 도전적이고 낙천적인 사람들 대신 때로 순응하고 체념하고 무력해지는 우리들에 대한 흔적이 있다. 앨리스 먼로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허울좋은 거짓말로 휘황찬란한 모조품을 만드는 대신 솔직 담백하지만 한없이 그리워지는 우리들의 유년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 살기 때문에 저곳을 돌아보지 않는 의도된 무관심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때로 불편하고 때로 너무 가슴 아프다. 한때 외면했던, 이제는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상처들의 속살거림 속에서 당신은 흐느껴 울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설픈 소통대신 완벽한 고독을 택하는 그녀 앞에서 알은 체 하지 않고도 딱 그 정도에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약간의 눈물을 훔치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삶의 뒤안길,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 퇴락해 버리고 잊혀져 버린 것들, 그러한 그림자들을 딛고 선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은 조각조각 모여 삶의 거대한 하나의 은유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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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입을 꽉 다물고, 울면 다 무너질까봐 버티고 묻어버리고 억압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요...

블랑카님 글을 보면서,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나에게는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던 일들이 숱하게 현실이더라는,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더라는, 현실은 실제로 더욱 참혹하더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니까요. 그게 간혹 저를 휘청거리게 합니다만....

그러나 다림질하면서 블랑카님이 느꼈던 슬픔과 행복, 동시에 다가와서 살만합니다.
좋은 페이퍼네요,,, 쪼옥~

blanca 2013-12-18 20:3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겠군요. 너무 큰 상실과 고통을 안고 가는 사람들. 누구나 아픔이 있겠지만 삶이란 게 참 가혹하구나, 싶을 때도 있어요... 이제 또 연말이라 그럴까요. 한 살 더 먹고 인생의 반 정도를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은 잡힐 것 같은데 참, 싱숭생숭해요.

그래도 순간 순간 맛난 커피, 좋은 책, 좋은 사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요, 우리.

페크pek0501 2013-12-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벌써 이 책을 읽으시고 리뷰가지 쓰셨네요.
저는 이 책을 사 놓고만 있습니다. 내년에나 읽겠지요. (내년이 꽤 먼 것 같네요. 바로 코 앞인데...ㅋ)
이야기가 끊어져서 단편보단 장편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읽어 볼 만하겠지요.
도대체 얼마나 잘 써야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인지, 궁금해요.
님 덕분에 미리 리뷰를 읽으니 좋습니다. 책이란 정보를 갖고 읽으면 더 좋은 법이니...

blanca 2013-12-20 10:22   좋아요 0 | URL
페크님, 꼭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사실 노벨 문학상으로 갑자기 조명되는 작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신이 있는데 이 작가 작품은 딱 한 권 읽었는데도 그래서 탄 거구나, 싶더라고요. <디어 라이프>도 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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