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같던 중학교 친구가 집에서 아주 멀리, 멀리 기대하지 않았던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멘붕에 빠진 나를 다독이며 선물을 줬다. 나의 적응을 도와줄 친구를 연결해 준 거였다. 아주 이쁜 친구야. 나는 역시 우리 동네에서 뜬금 없이 아주 먼 동네에 함께 던져진 다른 친구와 함께 그 백설공주를 닮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삼총사가 됐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만났다. 사인방이 됐다. 우리는 이십대에도 심지어 삼십 대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다. 첫애를 낳고 방금 내 몸에 벌어진 사건으로 멘붕에 빠진 나를 제일 먼저 찾아준 것도 그 친구들이었다.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 친구들과의 시절을 떠올리게 됐다. 내가 왜 이 작가를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 그 시절에 내가 가졌던 생각들까지. 교집합이 많아서 뜨끔했다. 다른 점이라면, 박상영 작가는 자신의 꿈을 이뤘고 그 우정도 잘 지켜냈다는 점. 난 두 가지 다 하지 못했다. 슬프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내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지지는 여전히 지금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해로, 다툼으로 멀어진 친구, 지구편 반대끝으로 가버린 친구, 이제는 바빠서 어쩌다 한번씩밖에 얼굴을 볼 수 없는 친구. 모두 다 하찮은 자기변명이자 구실이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해산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밖에.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 맥도날드도 사라지고 없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가파도 레지던시에서 공동생활을 한 김연수 작가와의 에피소드는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생생해서 서정적인 단편 한 편을 읽는 느낌이었다. 박상영 작가는 언어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언어로 사람을 불러낸다. 정말이다!이를테면 이런 묘사. 김연수 작가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린다.


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왠지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 관광객들 보라고."

김연수 작가님께서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상영이는 의심이 많구나(음량1).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음량0.5)......"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무려 한 세대를 넘는 나이 차가 전복된 순간이다. 세상에 대한 냉소는 어린 상영 작가가, 그럼에도 긍정은 연수님이. 다 같이 밥을 나누어 먹자고 한 솥 가득 밥을 하는 김연수 작가, 또래 친구와 더 재미있게 가벼운 몸으로 놀라고 상영 작가의 짐까지 들고 먼저 사라지는 김연수 작가. 


그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건 나의 한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젊을 때 더 냉소적이었고 그게 제법 쿨한 건줄 알았다. 그런 나를 다독이고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주문한 건 의외로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선배님들이나 기성 세대였다. 내가 나이 들어보니 그런 따뜻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회사 다닐 때 나는 숱하게 난을 죽였다.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집에서 식물을 키우게 된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쉽다는 고무나무, 심지어 산세베리아도 내 손에서는 묘하게 말라 비틀어지거나 잎을 축 늘어뜨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는 또 새로운 나무를 들였다. 4년째 잘 크고 있는 아레카 야자도 사실 그리 잘 크고 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이상하게 한쪽으로 쏠리는 비대칭의 모습, 아무도 우리 집,내 눈에만 잘 크고 있는 나무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그 옆에 난이도 중이라는 바나나크로톤은 묘하다. 나는 절대 난이도 중급 이상의 식물을 키우지 못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죽을 듯 죽을 듯하며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 역시 예쁘게 잘 크지는 않는다. 멀리서 보면 살아 있는 게 분명한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좀 헷갈린다. 잎사귀가 적고 줄기 부분은 말라 있다. 죽어가는 중인가? 싶은게 1년이다.


김금희 작가는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다. 사실 뭘 키워도 잘 키우는 사람의 식물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싶었지만 역시 좋은 이야기를 많이 쓰는 작가의 사물, 생물에 대한 관찰은 삶과 일상에 대한 깊은 관조적 시선과 맞닿아 공명한다.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나이가 주는 공감대에서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에 대한 언어적 서사를 부여한다. 맞아, 이런 거였구나,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서 뭉클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그만 놓아줘야 하는 내가 내 자신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뤘던 한 시절에 대한 정리.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그 열심이 더 나의 평안을 훼방했던 고였던 시절에 대한 갈무리. 


나는 다시 한번 아무도 이쁘다 해주지 않는 나의 식물 둘을 바라본다. 주광성을 고집하며 끈질기게 휘어가는 그들의 가지의 생명력을 본다.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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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다가 아 맞다 하면서 저의 화분들에 물주고 왔어요. ^^ 이번에 여행갔다오니까 몇녀석이 말라서 다 죽어가고 있더라는....ㅠ.ㅠ 박상영작가의 에세이는 여행에 대해서 저와 완전히 다르게 느끼는것 같아서 오히려 관심이 가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던 시절이 사실 우리 대부분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중요한건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거같아요.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나의 게으름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또 노력중인 이 아이러니.... ^^

blanca 2023-08-13 20:14   좋아요 1 | URL
여행 갈 때 식물 물 주는 일이 문제죠. 저는 그런데 대부분 과습으로 식물들을 죽였던 것 같아요. 요새는 좀 게으르게 했더니 더 잘 자라는 것도 같아요. 저 같은 경우 어떤 시절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잊혀졌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잘 갈무리 해야 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3-08-1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김연수 작가의 등장하는 그 부분은 무척 궁금합니다. ㅎㅎ
식물은 식물이 주는 기쁨만큼 사랑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blanca 2023-08-16 16:3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이 에세이에서 김연수 작가 분량이 꽤 많아요. 그 묘사가 너무 좋아 하나의 단편 같고요. 우리가 생각한 딱 바로 그 캐릭터 대로 움직입니다.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요. 박상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와 세대를 넘어서 정말 좋아하고 교감한다는 느낌이고요.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연수 작가 모델로 소설도 쓸 생각이라 하더라고요. 여튼 둘의 묘한 어우러짐이 정말 좋아서 계속 얘기해줬으면 싶겠다 싶을 정도였고요. 박상영 작가 친구들이 김연수 작가 팬이 많더라고요. 이 부분 얘기도 재미있어요. 여튼 두 작가 다 너무 좋아요.
 
에세이즘
브라이언 딜런 지음, 김정아 옮김 / 카라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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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에 대한 에세이를 표방(글쎄, 작가 자신의 표현은 아니다.)한 이 하얀 표지의 작은 책자는 에세이라는 장르에 대한 천착이라기보다는 온갖 편린이 부유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울프와 몽테뉴, 바르트, 손택, 디디온을 읽고 직접 우리의 글을 쓴다는 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단상에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그 단상들은 언뜻 겉으로는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친연성을 가지고 조합되어 하나의 매력적인 인생의 풍경화와 저자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저자 브라이언 딜런은 시종일관 모든 것에 회의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 자신이 에세이라는 이 천대 받은 장르를 탐구함으로써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가진 아름다운 에세이집을 만들어 냈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글. 형식, 스타일, 표면적 짜임새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이로써(누군가는 "이로써"에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글. 

-pp.16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는 인생에 대한 것처럼 들린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고.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것. 그건 우리 개개인 앞에 놓인 삶과 다름 아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나 집착하는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도 비단 에세이만이 아닌 인생 그 자체에 적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허무와 싸우는 것. 무질서와 무의미한 세상에서 어떤 자세를, 어떤 노선을 뽑아내는 것." 내가 오늘 어떤 형식과 스타일에 달라붙어 그것이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부풀린다면 그건 생래적 허무와 싸우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결국 흩어지고 해체되고 무용해질 것임을 알고 있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는 데 스타일보다 더 좋은 대안이 있을까? 본질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고 그것에 열정을 쏟는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가련해 보일까?


십대 시절 양친 부모를 모두 잃고도 침대에서 여전히 읽는 일을 하며 그 상실을 견뎌냈던 브라이언 딜런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렇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을 이 유서깊은 장르로 치환해서 받아들인다. 언어로 지은 이 에세이라는 집은 허무와 재난과 싸우려 하지만 결국 질 것이고 그 지는 순간 그 자체를 형상화며 붕괴한다. 그 불안정함과 위태로움이 에세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자 강점이다. 


존 던의 인용은 저자의 메시지의 결정체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무덤을 찾기 위함"이라는 17세기 시인의 설교에 대한 이야기다. <에세이즘>은 죽음, 허무, 붕괴에 대한 이야기면서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빛의 먼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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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8-01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7월말 8월초는 늘 더운 시기이긴 하지만, 올해 많이 더운 것 같아요.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8-02 08:48   좋아요 1 | URL
오늘 새벽에 바람결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이제 곧 시원해지겠죠.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유난히 철학적인 소설가가 있다. 엄청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작가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왠지 그 미로에서 헤매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다. 꼭 출구로 향하는 지름길을 찾지 못해도 그 혼란, 불안에서 학습되는 것이 있고 그 여운은 읽기 행위를 사소하지 않은 것으로 승화시킨다. 나에게는 카프카와 보르헤스가 유난히 그렇다. 특히 보르헤스에게는, 특별히 그가 천착한 시간, 미로, 거울, 죽음에 대한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은 언제나 다시 회귀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일상의 분주함에서 대부분 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한한 우리가 이 불합리한 삶, 이 모든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너지를 짜내어 무언가를 향해 노력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하여 보르헤스는 직설적인 대답 대신 가장 훌륭한 질문과 고민의 시간을 선물한다.

















<죽지 않는 사람>에는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 군관 사령관인 '나'는 그 도시에서 그러나 나를 포함한 그 모두를 발견한다. 역사 속 과거의 인물도, 이윽고 과거가 될 나도, 미래가 될 나도 혼재되어 모든 무한한 것이 됨으로써 유한함은 종식되지만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죽음은 인간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환영적인 조건, 즉 그들이 행하는 각각의 행동은 마지막 행동이 될 수 있고 꿈속의 얼굴처럼 희미해져서 지워지지 않을 얼굴은 하나도 없다는 것 때문에 동요한다. 그렇게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정한 가치를 지닌다.

-<죽지 않는 사람> 보르헤스


인간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만드는 장치는 놀랍게도 '죽음'이었다. 이 존재가 영원하고 무한 반복된다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도발적인 질문이다. 


그는 하나의 운명이 다른 운명보다 더 나을 게 없지만,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품고 다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의 전기> 보르헤스


보르헤스에게 모든 추상적인 삶은 각각의 개별적인 삶으로 구체화되지만 그것은 경쟁할 것도 비교할 거리도 아니다. 다만 개개인이 받아들이고 감내하여야 할 저마다의 몫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구획으로 이것이 한정되기는 하지만 결국 더 큰 영원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 차원의 불멸은 믿지 않지만 우주적 차원의 그것은 믿는다고 한다.


















벨그라노 대학에서의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강연을 모아놓은 책이다. 시간, 영원, 불교, 죽음, 단테의 신곡 등에 대한 그의 말은 글만큼이나 아름답고 청중, 독자 중심적이다. 현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무수한 예시와 보르헤스 특유의 심오한 통찰이 버무려진 그의 강연은 그가 만들어 낸 그 숱한 철학적 이야기들의 약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의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이해가 쉽다. 


항상 나는 내 운명이 무엇보다도 문학이란 걸 느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게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나리란 걸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모든 것, 특히 나쁜 일들이 장기적으로 글로 변하리란 것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다른 것으로 변화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보르헤스


그의 운명에 대한 태도에 숙연해졌다. 나는 내 인생에 수많은 좋은 일 정도가 아니라 좋은 일만이 일어나기만을 바라지 않았나,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나.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나고 그 나쁜 일들마저 내가 소명의 과정에 있다는 깨달음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일 알레프를 볼 때 오늘 나의 미소, 눈물 한 방울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과거, 미래의 그것들과 섞이지 않겠지만 극히 미소할 것이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거기 여전히 남아 떨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보르헤스가 말하는 영원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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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류진의 <연수>를 읽으며 기시감이 들었다. 나에게 도로 연수를 해줬던 오십대 여자 강사와 너무나 닮은 인물의 모습에. 벌써 면허를 땄지만 겁보라 혼자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맘 카페에서 소개 받은 노련한 그녀는 열 시간의 연수를 마친 후 바로 나를 매정하게 독립시켰다. 


"아, 조금만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혼자 아직은 무서운데."

"됐어. 이제 혼자 할 수 있다니까. 혼자 해요. 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그녀가 둥지 위에서 새끼 새를 날리듯 나를 떨어뜨리고 난 후 며칠 뒤 다리를 덜덜 떨며 나는 난생 처음 혼자 운전을 하게 되고 바로 그날 사고를 내는 기염을 토하고 만다. 이 사고 이야기는 또 너무 길어져서 생략하기로 하고. 여하튼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운전대를 잡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주연이 마침내 그 연수 강사에게서 독립해서 홀로 운전대를 잡고 나가는 장면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울컥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을 거둔 주연은 어머니에게서 또 적절한 연령에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서 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 연수를 통해 마침내 홀로 도로에 나서게 된다. 뒤에서는 주연을 든든히 지켜주는 강사가 따른다. 사실 운전 연수가 아니라면 연령대도 종사하는 분야도 전혀 다른 두 여성이 만나 이렇게 교감을 나눌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주연이 비로소 자신을 옭아매던 그 모든 속박과 사회적 통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지점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모처럼 통쾌했다. 장류진 작가는 우리가 그냥 꼭꼭 묻어두고 사는 답답한 지점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로 해소하는 장점이 있는 작가다. 더운 여름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땀이 식는다. 







언제까지 청춘일 것처럼 보였던 작가 김연수는 이제 오십대가 됐다. 그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에 길어 올린 어떤 깨달음들은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가 예고했던 사십대의 그 계곡 같은 고통의 지점도 그러했고 이제는 반추의 양이 더 많아진 오십대의 삶의 긍정에 대한 전환도 그러할 것 같다.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은 그가 겪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음과 작별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 뉴욕제과의 막내 아들이었던 그가 복기하는 어머니와의 아련한 추억들과 코로나 시국에 겪은 어머니와의 작별까지 따라 읽다 보면 자꾸 책장을 덮고 한숨을 쉬게 한다. 그건 복습과도 같고 예습과도 같아서. 그가 이야기하는 생의 정경들이 얼마나 핍진한지 나는 그것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 속으로 툭툭 떨어진다. 이 짦은 이야기들을 어느 서점에서 독자들에게 낭독해 들려줬었다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고독을 주제로 스물두 명의 작가가 쓴 에세이집이다. 사실 어떤 것을 테마로 여러 작가가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것에 개인적으로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초등학교 시간 과제로 했던 특정 단어를 넣어 만들어야 했던 짧은 글 짓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서 였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미리 다 숙고했던 것처럼 단 한 편의 글도 가볍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삶의 한 대목에서 가장 고독했던 그 지점을 신중하게 길어올린다. 아, 이래서 작가구나, 싶을 정도로 마치 잘 정제된 단편처럼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외로웠던, 고독했던 그 정경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제프리 레너드 앨런의 <어머니의 지혜>가 감동적이었다. 싱글맘의 노동과 사랑에 기대어 컸던 어린 시절과 이제는 노쇠해져버린 어머니와의 관계의 역전에 대한 묘사가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들을 고통에서 구해낼 도리가 없는 바로 그 가장 고독한 지점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상기가 마음을 울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장 고독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인생의 가장 황폐하고 잔인한 대목이다.




뜨거운데 춥다. 그런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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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3 1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라디오에서 <연수> 소개를
해주더라구요.

마침 도서관에 가는 길이라 빌리
려고 했는데, 신간이라 이미 대출
중이더라구요. 아마 읽어 보려면
시간이 마이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만나
면 좋겠으련만.

blanca 2023-07-04 07:49   좋아요 1 | URL
아, 라디오에 소개됐군요. 저는 <연수>만 따로 문예지 발표되었을 때 읽어서 사실 이 단편은 두 번 읽게 된 거였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마지막 대목은 뭉클하더라고요.

2023-07-0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4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십 대였다. 남들이 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이었지만 나는 이 일들이 꼭 해결되지 않더라도 시간과 함께 스러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다. 출근길이었고 신입사원이었고 나는 전공과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을 다 배우기도 전에 가장 일이 밀려드는 시기, 같은 팀 가장 큰 역할을 하던 사수가 예정된 연수에 들어갔다. 일은 해도 해도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사람들은 자기 것부터 해달라고 전화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억지로 에너지를 짜내려고 하루에 네 잔씩 마시는 커피로 위는 너덜너덜해졌다. 같이 일하는 차장님이 먼저 이러다 어쩌면 자기가 과로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고, 나는 그의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민폐가 되는 존재처럼 느껴져서 차장님의 얘기가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하철이 승강구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회사에 죽기보다 가기 싫은데 가야 했다. 내가 이 직장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지는 거니까. 배제되는 거니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그러나 나는 무사히 지하철을 탔다. 끝이 안 보이는 갱도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을 누구한테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남자 동기는 우리가 군대에 왔다고 생각하자고 했지만 나는 군대에 가보지 않아서 그 고통과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 그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나는 잘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옥 속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살고 싶었다. 죽으면 게임에서 배제된다는 뜻이었다. 게임의 규칙이 아무리 모호하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더라도, 모두가 게임에서 계속 살아남고 싶었다.

-돈 길모어 <강물 아래, 동생에게>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돈 길모어에게는 괴짜 동생 데이비드가 있었다. 방랑벽이 있었고 밴드 활동을 했고 이따금씩 마약도 했지만 결국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는 듯 보였던 시기에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는다. 혼란스럽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였던 날에 동생은 사라져버린다. 돈 길모어는 그러한 동생과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역사를 재건하면서 자신의 사적 경험을 공적인 것으로 치환한다. 바로 중년의 위기다. 죽음에 대한 이끌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다. 


모든 경험은 이처럼 아름다운 선율과 좋은 화음, 리드미컬한 흐름 같은 것을 유지한다. 그렇게 한순간 앞선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녹아들어 계속 선율이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은 선율을 듣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떨어진 음만 듣는다. 

-돈 길모어 <강물 아래, 동생에게>


지금, 현재의 순간에 매몰되는 건 여러 의미를 갖는다. 행복한 순간과는 다르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닥치면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의 착시 현상에 사로잡힌다. 즉, 지금 이 고통이 나의 전부를 덮치고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도 미래의 밝은 희망도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기이한 순간에 대한 이해를 나는 이제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고통과 고난의 시간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전망을 반드시 가져야 견딜 수 있다. 그건 자연사로 가기 위한 통찰이다. 누구나 결국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중년이 된 지금 이 시기를 지나 마침내 노년이 되어 그 쇠락과 퇴락을 감당하며 자연이 주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영웅적 서사다. 


이제야 알겠다.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던 과거의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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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2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블랑카 님, 이 글이 참 묵직하고 좋습니다.

다락방 2023-06-12 1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땡투 두 건 들어올겁니다. 접니다.

blanca 2023-06-12 12:31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덕분에 월요일 오전 기분 좋게 출발하네요,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6-12 2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옛날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블랑카 님의 리뷰는 명문입니다.
그래서 놓치기 힘들어 친구 신청 했었어요.^^
잘 읽고 고이 담아 갑니다.

blanca 2023-06-13 10:12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3-06-13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입니다. 마음이 먹먹해지다가도 잔잔해지네요.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blanca 2023-06-13 21:04   좋아요 1 | URL
고맙긴요^^ 시간 내서 읽어주시니 더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