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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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사십대의 내 앞에 이십대의 내가 나타난다면 아마도 나는 상대를 반쯤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십대에 나를 알았던 사람 그 누구도 지금 이 나이의 내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겁이 없었다. 추억 속의 나는 낯설다. 세월이라는 것은 신비롭다. 새로운 모든 걸 시도해보고 싶어했던 사람도 어느새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앤드루 포터가 돌아왔다. 텍사스 주에 사는 사십대 초반의 남자 화자로. 백인 중산층 남자. 서너 살의 아이가 있거나 없다. 결혼했다. 과거 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재회하거나 혹은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젊은 여자를 통해 이삼십 대의 과거와 만난다. 나는 무언가를 세월과 함께 잃어버렸다. 그건 나다움일 수도 있고 내가 두고 온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들이다. 언뜻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모든 이야기가 하나하나 다 새롭게 느껴진다. 앤드루 포터 특유의 섬세한 서정성은 내가 감각했지만 언어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명명한다. 바로 그거였다. 


어떠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오스틴>


첫작품에서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파티에서 우연히 주거침입을 했다 집주인의 정당방위로 살해당하게 된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일하게 아이를 낳은 '나'에게 친구들은 이 사건의 촌평을 요구한다. 나는 옳고 그름 그 너머에 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선명하게 경계를 그을 수 있다고 믿고 흥분했던 시절이 있다. 이제 나는 그런 것과는 멀어졌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나는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살면서 많은 실수를 했고 그 대부분이 내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의 잣대 너머에서 벌어졌다. 나는 이제 확신이 무섭고 그 주장이 때로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결국 친구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 그 사정을 공감한다.


<라인벡>이라는 작품은 특히 마음을 울렸다. 연인 사이에 낀 나. 이런 구도는 청춘의 친구들 사이에서 흔하다. 이상하게 그 시절은 그랬다. 연인은 꼭 교집합 친구를 부른다. 그들의 권태, 갈등의 접점에 그 친구를 동원한다. 그 시간은 아름답기도 하고 기만적이기도 하다. 이십 년이나 그런 구도 속에서 한 연인의 사랑, 권태, 이별, 재결합의 경로를 함께 통과한 내가 마침내 그들에게서 걸어나오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건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서글프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또 동원할 다른 수사가 없다. 공허한 아름다움이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히메나>


나와 내 아내 앞에 나타난 여대생 히메나. 그녀는 나와도 아내와도 어떤 묘한 관계를 맺는다. 부부는 각자 그 관계에 대해 함구한다. 어느 날 히메나가 사라지고 부부는 각성의 순간을 맞는다. 어쩌면 히메나는 그들의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히메나의 이야기는 항상 바뀐다."는 문장이 갖는 의미다. 살면서 다시 쓰게 되는 과거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다.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 내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함께 하게 된 마지막 삼십 분에 느끼는 그 묘한 환희와도 통하는 이야기다. 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건 불륜도 외도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이다. 앤드루 포터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등장하는 제3자를 통한 그 모호한 비밀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통점은 그들이 환기하는 내 과거의 시간이다. 내가 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을 일깨우는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내가 두고 온 그 무엇들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간. 


사라진 것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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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3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잠자냥 님에 이어 블랑카 님도 오별이라니!!

blanca 2024-01-23 09:32   좋아요 0 | URL
요새 아주 줄줄이네요. 이제 저는 미들마치로 갑니다.

잠자냥 2024-01-23 11:11   좋아요 1 | URL
다락방 님 우리 나이에.... ㅋㅋ 이거 오별 안 주기 어렵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4-01-23 11: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 나이 ㅋㅋ 정곡을 때리시네요. 이것은 마치 딱 우리 나이 남자 버전 이야기예요.

새파랑 2024-01-23 11:44   좋아요 1 | URL
40대를 위한 책인가요? ㅋ이번주에 서점가서 구매해야겠습니다~!!

blanca 2024-01-23 11:45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 앤드루 포터 만나보고 싶어집니다. 내가 느낀 개인적인 감정들이 실은 다 사십 대의 공통된 정서였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ㅋㅋ

감은빛 2024-01-24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만드는 글이네요. 조만간 서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제목이 [사라진 것들]이라서 더 와닿는 느낌이네요.

blanca 2024-01-24 11:4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그 나이듦이 주는 소외감, 상실감이 그냥 절창이에요. 왜 내가 기분이 안 좋았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그랬던 게 결국 그런 거였더라고요. 강추입니다.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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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까지 자라다 서울에 와서 줄곧 살았다. 부산의 바다를 보며 <레티파크>를 읽기로 했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일출과 일몰을 다 봤다. 언젠가 쏟아질 것 같던 별을 보고 감동 받았던 것처럼, 내가 늙고 죽는 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체념하는 순간을 다시 만났다. 


유디트 헤르만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글(이 글 또한 정말 아름답다. 그냥 형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고뇌와 고민과 정성을 가득 들인 흔적이 역력한 선물처럼)을 다시 읽으니 이 짧은 열일곱 편의 시 같은 이야기들이 의도했던 바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을 읽으며 사는 건 이런 거구나, 정말 이런 미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눈물겹구나, 했다. 


모든 이야기가 다 골고루 좋았고 마음의 현을 건드렸지만 특히 좋았던 이야기를 꼽아보고 싶다.


<페티시>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엘라의 이야기. 그 여자는 남자가 피워두고 떠난 모닥불을 다시 피우는데 유독 그 크기에 연연한다. "그녀는 불이 너무 커지면 누가 와서 자리를 함께할까 봐 두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떠난 남자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듯 그녀의 곁을 차지한 사람은 놀랍게도 조그마한 아이다.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작으니까, 남자가 떠난 자리를 다 채우지 않으면서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남긴다. 그러나 아이도 결국 떠나야 하는 날이 오고 만다. 아이는 떠나며 외친다. "우린 출발해요." 떠나는 어른은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별에서 출발을 연상하지 않는다. 거기에 아이가 온다. 기다리는 일에 등장한 이 꼬마 손님의 반전이 아름답다. 끝과 작별에 파고드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 


실제 유디트 헤르만의 아버지와의 사연이 투영되어 있다는 <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둔 우리 모두에게 호소하는 서정시다. 화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쳤다". 그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한다. 나는 아주 가끔 그런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가 좋아하는 자두 케이크를 사들고. 

당시 그는 시를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시를 읽으면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에게 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말해야겠다. 우리는 함께 그걸 연습했다. 그 병원에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 일은 그것 외에 많지 않았으니까.

-<시>

 

어쩌면 가장 무용한 시를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함께 연습했을까. 사위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붙잡고 딸은 함께 시를 읽는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아버지의 존엄을 찾기 위해. 그 마지막 보루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시였다. 모든 무의미와 부조리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그 헛된 사랑의 힘. 그건 시였다.


<포플러 꽃가루>에서 모든 안정적으로 보이던 사랑은 붕괴한다. 시누이 관계였던 두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남자를 모두 잃는다. 그리고 그 둘만 남는다. 자연발화한 포플러 꽃가루. 사랑은 그런 거였을 거라고 마침내 체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생각마저 언젠가 버리게 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인물을 만든 작가의 머뭇거림이 너무나 좋다. 유디트 헤르만은 모든 각성의 순간을 잠정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완벽한, 완전한 깨달음은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안다. 


<꿈>에서 같은 정신분석의를 공유했던 친밀했던 친구 사이는 끝나고, 굽타 박사라 불리는 그 의사와 테레자만 남는다.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 않고, 거의 모든 질문을 열린 채로 놔둔다. 마치 단 하나의 질문에도 유효한 답은 없으며 어떤 결정에도 정말 타당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꿈>

그는 환자의 뒤에 서 있다. 조언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유디트 헤르만의 작가로서의 페르소나도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독자의 뒤에 서 있다. 그런데 굽타 박사가 테레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존재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는 것,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은 중요하다. 흐린 형체임에도 확고한 크기를 가진 존재로서."


<교차로>에서 난동을 부리는 십대 세입자를 함부로 신고하고 내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타인의 삶 전부를 타자화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 안에서 나의 과거를, 오늘을,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머니>에서 나의 어머니가 단짝 친구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고 심지어 그의 조카의 부고까지 챙기는 그 마음과도 통할 것이다. 그 오지랖은 생존의 치트키다. 나만의 것은 없다. 삶이란 그렇게 지탱할 수가 없다.


섣불리 가능한 아름다운 결말 대신 진한 여운을 남기는 모호한 말줄임표를 찍는 작가의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그렇게 여러 날이 반복되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일출과 일몰의 약속처럼 약동하는 이야기들이 빛난다. 정말 진실한 이야기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략된 지점은 독자의 몫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그냥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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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7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특히 <페티시>의 모닥불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입니다.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4-01-17 11:4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진짜 좋아하실 거예요. 오랜만에 참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정말 독특한데 잘 읽히더라고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거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작가는 그걸 제대로 해냈더라고요.

다락방 2024-01-17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투 드렸습니다. 부자되세요.

2024-02-01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아노로 돌아가다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필립 케니콧 지음, 정영목 옮김 / 위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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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골드베르크 협주곡 리사이틀을 직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흐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내가 피아노를 결정적으로 그만두게 된 계기가 '바흐인벤션'이기 때문에 바흐를 원망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음악을 들으면 설명하기 힘든 치유력을 느끼기에 그 점은 내가 또 바흐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골드베르크 협주곡은 이미 굴드의 해석으로 여러 번 들었지만 제대로 그 음악을 알고 있다기엔 부족한 채로 인터미션 없는 한 시간 삼십분 가량의 연주를 들었다. 큰 기대도 정보도 없이 들어 그런지 중간은 약간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피아니스트가 이 다성부의 정교한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자신만의 그것으로 재정의했는지 그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 여실히 그대로 전해져 올 정도로 압도적인 연주였다. 귀에 익은 아리아에서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과정, 그 중간 휴지기 관객석의 엄청난 침묵은 그 감동에 모두가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 모두 이제 출발한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공명했다. 그건 마치 인생의 은유 같았다. 우리는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건 처음과 같은 끝의 반복이 아니다. 그 엄청난 여정의 끝에 우리는 변화한 모습으로 안착한다. 그리고 그건 비극적인 종점,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을 그 연주 전에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척 아쉽게 만들 만큼 정말 압도적으로 좋은 책이었다. <피아노로 돌아가다>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 필립 케이콧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자신이 직접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피아노로 연습하며 어머니의 애도 과정, 중년의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 책을 요약한다면 이 책의 반의 반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책은 지금도 수십 권이 매해 나온다. 부모의 죽음의 애도 과정에 얽힌 나의 유년, 나의 지금에 대한 사적 고백. 그런 사적인 이야기들은 피곤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은 부모와의 작별이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가 왜 갑자기 오십이 넘어 다시 바흐의 골드베르크로 하필 돌아와 그것을 피아노로 연습하는데 골몰하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가,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여정은 그것을 읽는 이들 모두를 끌어들이고 기꺼이 공명하게 한다. 심지어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골드베르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한번 이 바흐의 역작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걸 들으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이 좀 잠재워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특이하다. 모성애가 풍부하거나 한없는 그리움을 일으키는 그런 전형적 어머니상이 아니다. 통제적이고 변덕이 심하고 자신이 어머니인 것을 싫어했다. 겉으로 보이면 모두 잘 자란 네 자녀의 어머니였고, 경제적 빈곤을 경험한 적도 없는 이 여인은 내도록 불행했고 또 불행한 채로 죽는다. 자신이 그만둬버린 바이올린 대신 저자인 아들의 피아노 레슨에 열성이었던 그녀는 생애 내내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를 강론한다. 이런 어머니의 강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양육으로 고통 받았던 저자는 다행히 진정한 스승 조를 만난다. 그가 어린 시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이 사십년 전 스승이 유일하다. 조가 다른 교사들과 달랐던 점은 제자가 스스로가 되어 나아갈 자유를 줬기 때문이다. 


너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 할 일을 해라.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 너 자신이 되어라.

-pp.261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주는 제언이기도 하다. 저자의 기획은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애도이자 삶을 재발견하고 죽음을 재정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의미한 종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해보이리지라도 결국 움직여 전진해야 함을 몸으로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중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다시 제대로 친다고 해도 그게 과연 무슨 거대한 의미를 창출하겠는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삶의 커다란 비의를 각성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될 자유를 다시 재확인하며 우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미친 기획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 허무하고 겸손한 결론은 그것을 넘어서는 울림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일 그 자체가 삶이라는 것. 그 도돌이표 앞에서 다시 바흐로 돌아오는 저자의 여정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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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1-02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바흐 너무 재미없어서 피아노칠때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ㅋㅋㅋㅋ그래서 지금도 싫어요ㅜㅜ근데 이 책은 읽고싶어요^^

blanca 2024-01-02 19:35   좋아요 1 | URL
저는 바흐를 치면서 난 안되는구나, 이만 접자, 필이 딱 왔어요. ㅋㅋ 피아니스트들 보니 왼손 타건 힘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평범한 저 같은 사람과의 경계가 딱 드러나는 게 왼손의 힘인 것 같아요. 바흐인벤션 집어 던지고 제 피아노 교습은 끝났던 기억이 나네요. ^^ 아, 이 책 완전 강추드립니다.

hnine 2024-01-0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바흐를 재미있어 하며 친 기억 가지고 있는 사람 있을까요? 바흐 인벤션에 이어 3성, 4성, 조곡...
어른이 되어서도 잘 모르겠더니, 바흐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과 다른 차원에서 사람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느낀 날이 있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blanca 2024-01-02 19:36   좋아요 0 | URL
아, 이 작가가 정확히 그 지점을 간파했더라고요. 대충이 통하지 않는 지점에 바흐가 있다는...너무 좋아서 소장하기로 했어요. 퓰리처상 타는 작가는 사적 에세이도 공적으로 승화시키는 지점을 기가 막히게 아는 것 같아요. 정말 문장이 말도 못하게 탁월하더라고요.
 
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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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향기가 묻은 피츠제럴드. 하루키가 선택하고 하루키가 해설했다. 왜 하필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 그 설득력은 이미 획득된 작품들을 이제는 내가 읽고 느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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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12-12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신건가요? 하루키 팬이라 읽고 싶은 책이네요ㅎ

blanca 2023-12-13 12:06   좋아요 2 | URL
읽었어요. 피츠제럴드 편차가 있는 작품들이 모여 있더라고요. 아주 좋은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어요. 하루키 해설이 좋았어요. 짧아 아쉬웠어요. 저도 하루키 팬이라서요.

루피닷 2024-01-01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24-01-02 11: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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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과학 관련으로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가볍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권하겠다. 그는 주로 시간과 양자 이론에 관련한 책들을 집필했고 그의 저작 대부분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자기 연구에 소흘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카를로 로벨리는 아마 양자역학 연구의 최전선에 서서 그것을 가장 깊이 넓게 이해한 학자가 아닌가 한다.


스물세 살, 하이델베르크의 새벽 세 시의 발견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에르빈 슈뢰딩거의 확률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세계의 입자성, 양자의 중첩을 지나 결국 불확정성으로 귀결된다.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실재는 결국 실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고전 물리학과 실재의 확실성은 해체되고 결국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관계의 맥락'이다. 의심하고 회의하고 삭제하고 다시 수정하고 재정립하고 또 해체하는 과정이 삶이듯이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론 또한 그러하다. 양자역학이 삶의 역학을 재현하는 듯한 환각이 드는 것은 결국 우리가 탐구하고 희구하는 그 어떤 결정적인 사물의 실재가 부재하는 그곳에 남는 나와 너의 관계의 매듭이 묶이고 풀어지는 현장이 생명이자 삶의 터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벨리가 2,3 세기의 나가르주나를 데리고 오고 불교의 공사상을 대입한 것은 어쩌면 이런 양자역학의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얘야, 너 몹시 심란한 얼굴이구나,

당황했나 보구나. 자, 기울 차려라.

여흥은 이제 끝났어. 여기 있는 배우들은

이미 말했듯, 모두 요정이었고

공기 속으로, 옅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지.

그리고 주춧돌도 없이 지어진 환영처런

구름 걸린 탑도, 화려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거대한 지구 그 자체도

그래, 그 안의 모든 것도 녹아내려

이 실체 없는 광경이 사라지듯, 

구름 한 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꿈을 만드는 재료, 우리 짧은 인생은

잠으로 끝맺는 것.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 4막 1장의 대사를 인용하며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대여정은 막을 내린다. 결국 실재를 찾아, 나를 찾아 헤매는 그 긴 여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내가 그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나라는 존재가 홀로 고고하게 우뚝 설 수 있다는 오만의 벽을 해체하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남는 것은 서로의 얽힘과 서로를 반영하며 확인했던 이미지의 환각일 뿐이다. 양자역학을 읽으며 무너지는 확신과 진리의 해체가 무의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서로의 관계의 맥락에 대한 재점화 때문일 것이다. 


허무하지만 그 허무로 뻗은 길에 기꺼이 오르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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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5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