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까지 자라다 서울에 와서 줄곧 살았다. 부산의 바다를 보며 <레티파크>를 읽기로 했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일출과 일몰을 다 봤다. 언젠가 쏟아질 것 같던 별을 보고 감동 받았던 것처럼, 내가 늙고 죽는 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체념하는 순간을 다시 만났다.
유디트 헤르만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글(이 글 또한 정말 아름답다. 그냥 형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고뇌와 고민과 정성을 가득 들인 흔적이 역력한 선물처럼)을 다시 읽으니 이 짧은 열일곱 편의 시 같은 이야기들이 의도했던 바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을 읽으며 사는 건 이런 거구나, 정말 이런 미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눈물겹구나, 했다.
모든 이야기가 다 골고루 좋았고 마음의 현을 건드렸지만 특히 좋았던 이야기를 꼽아보고 싶다.
<페티시>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엘라의 이야기. 그 여자는 남자가 피워두고 떠난 모닥불을 다시 피우는데 유독 그 크기에 연연한다. "그녀는 불이 너무 커지면 누가 와서 자리를 함께할까 봐 두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떠난 남자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듯 그녀의 곁을 차지한 사람은 놀랍게도 조그마한 아이다.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작으니까, 남자가 떠난 자리를 다 채우지 않으면서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남긴다. 그러나 아이도 결국 떠나야 하는 날이 오고 만다. 아이는 떠나며 외친다. "우린 출발해요." 떠나는 어른은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별에서 출발을 연상하지 않는다. 거기에 아이가 온다. 기다리는 일에 등장한 이 꼬마 손님의 반전이 아름답다. 끝과 작별에 파고드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
실제 유디트 헤르만의 아버지와의 사연이 투영되어 있다는 <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둔 우리 모두에게 호소하는 서정시다. 화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쳤다". 그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한다. 나는 아주 가끔 그런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가 좋아하는 자두 케이크를 사들고.
당시 그는 시를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시를 읽으면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에게 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말해야겠다. 우리는 함께 그걸 연습했다. 그 병원에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 일은 그것 외에 많지 않았으니까.
-<시>
어쩌면 가장 무용한 시를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함께 연습했을까. 사위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붙잡고 딸은 함께 시를 읽는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아버지의 존엄을 찾기 위해. 그 마지막 보루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시였다. 모든 무의미와 부조리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그 헛된 사랑의 힘. 그건 시였다.
<포플러 꽃가루>에서 모든 안정적으로 보이던 사랑은 붕괴한다. 시누이 관계였던 두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남자를 모두 잃는다. 그리고 그 둘만 남는다. 자연발화한 포플러 꽃가루. 사랑은 그런 거였을 거라고 마침내 체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생각마저 언젠가 버리게 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인물을 만든 작가의 머뭇거림이 너무나 좋다. 유디트 헤르만은 모든 각성의 순간을 잠정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완벽한, 완전한 깨달음은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안다.
<꿈>에서 같은 정신분석의를 공유했던 친밀했던 친구 사이는 끝나고, 굽타 박사라 불리는 그 의사와 테레자만 남는다.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 않고, 거의 모든 질문을 열린 채로 놔둔다. 마치 단 하나의 질문에도 유효한 답은 없으며 어떤 결정에도 정말 타당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꿈>
그는 환자의 뒤에 서 있다. 조언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유디트 헤르만의 작가로서의 페르소나도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독자의 뒤에 서 있다. 그런데 굽타 박사가 테레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존재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는 것,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은 중요하다. 흐린 형체임에도 확고한 크기를 가진 존재로서."
<교차로>에서 난동을 부리는 십대 세입자를 함부로 신고하고 내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타인의 삶 전부를 타자화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 안에서 나의 과거를, 오늘을,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머니>에서 나의 어머니가 단짝 친구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고 심지어 그의 조카의 부고까지 챙기는 그 마음과도 통할 것이다. 그 오지랖은 생존의 치트키다. 나만의 것은 없다. 삶이란 그렇게 지탱할 수가 없다.
섣불리 가능한 아름다운 결말 대신 진한 여운을 남기는 모호한 말줄임표를 찍는 작가의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그렇게 여러 날이 반복되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일출과 일몰의 약속처럼 약동하는 이야기들이 빛난다. 정말 진실한 이야기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략된 지점은 독자의 몫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그냥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