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들이 칠십 대를 넘어서니 이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 이 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감각이 더 가까이 왔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리 작별 연습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연습한다고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 더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인생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자꾸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라앉는다.
시인 이제니의 <새벽과 음악>을 읽으니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지만 이전에 그녀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 유명한 시인이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인 줄만 알았다. 언젠가 이 젊은 시인의 시를 나도 읽어봐야지, 했다. 그러나 이 산문집을 읽으며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훨씬 많은 상실을 이미 겪었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시인의 산문집은 그녀가 직접 겪은 사고와 상실들과 시를 쓰는 과정의 그 지난한 여정과 그 과정의 감각과 느낌과 앎에 대한 산문시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벼리고 또 버리고 건져내고 닦아낸 한글 어휘들의 명징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은 아름답다고도 어렵다고도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놀라운 마주침과 각성의 순간들의 연장이다.
시인이 시베리아로 떠났다 겪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극한까지 갔었던 체험과 그곳에서 마주친 고려인 여성이 몸에 새긴 그 문구의 대목으로 여는 이야기들은 보고만 있어도 그리웠던 어머니의 죽음과 그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남은,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에 대한 글과 그 플레이리스트로 이어진다. 그 플레이리스트의 큐알코드를 찍어 음악을 듣는 과정 자체도 이 이야기의 일환이다.
인생은 짧은 것.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더욱 짧은 것. 그러니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꿈을 꾸고 타인의 인정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제 존재의 타고난 빛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낱 보잘것없는 먼지와도 같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슬프거나 아쉽지 않게.
-<새벽과 음악> 이제니
이제니 시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이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슬프거나 아쉽지 않게." 잘할 자신은 여전히 생기지 않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