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네 권의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게 좋다. 지금 나를 뒤흔드는 좋은 책보다 더더 계속해서 좋은 책이 나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절대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절대반지 같은 책들이 있다. 고전 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신호탄 같은 책이 운좋게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문학동네가 2009년 12월 흑백의 모던한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1권으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이를 낳은 지 만 이 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한동안 육아로 지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안나 카레니나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자살이 결말일 거라 여기며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투영된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한 인물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톨스토이가 가장 천착했던 주제인 생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자비함이 끌고 가는 이야기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주제를 장대하고 아름답고 떡밥 많은 스토리로 끌고 가는 힘은 톨스토이 정도의 거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어려운 수많은 인물들은 제각각 성격도 가치관도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수많은 모순적 충돌을 일으키는 탐욕, 무모함, 현명함, 쩨쩨함, 비겁함, 용기, 선의를 섬세하게 인생의 파도와 엮어 낸다. 그의 인물 중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안쓰럽지 않은 인물도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거리두기가 힘든 독서의 체험을 준다.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러나 이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지는 체험을 선사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라는 절대적인 부사어를 붙일 일이 가히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시간 그 자체가 견인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프루스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체험 그 자체가 독자의 인생 그 자체가 되기를 바랐다. 10년간 총 5704쪽의 이야기를 번역해 낸 역자의 시간은 원작자의 그것에 감히 비견될 만하다. 마르셀이 젊은 시절 그렇게 선망해마지 않았던 귀족들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자신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매달렸던 사랑도 스러지는 정경은 쓸쓸하지만 거기에서 건져낸 미학의 미덕은 울림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에 감동하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이것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길고 또 길어야 마땅하다. 


하루키의 1Q84를 나는 작년에야 읽었다. 아오마메가 하늘에서 두 개의 달을 보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도 하늘에서 또 하나의 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흔적을 찾아 헤맸다. 이 평행 우주적 세계 안의 환상적 이야기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세계는 이대로 합당한가? 비단 이 세계가 전부인가? 접안과 피안 사이에서 작가는 치열하게 자신의 인물들 내면의 심연을 길어오르며 독자의 그것을 발굴한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다. 그가 파고드는 이야기는 으스스한 판타지인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읽지만 일단 그의 월드에 입성하면 절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그런 면에서 그의 리얼리티는 감히 최고다.


<면도날>은 삶의 그 허위가 숨기고 있는 삶의 그 연약한 속살에 가닿으려는 작가의 기민한 시선에 찔리는 이야기다. 모옴은 이런 일에 천부적이다. 누구나에게 숨겨진 그 욕망이 삶을 끌고 달릴 때 놓치는 것들. 우리는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현실도 이상도 전적으로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 늙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함에도 끝까지 그 초대를 기다리는 엘리엇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오늘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며 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해도 결국 인생 그 자체가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사는 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직 내 인생의 네 권은 완결된 게 아니다. 이 목록이 한번 뒤집혔으면 좋겠다. 그만큼 좋은 책은 끊임없이 태어난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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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2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크게 인상 깊게 읽지 못했던 저는 블랑카 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이 나이에 한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지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4-04-25 11:04   좋아요 0 | URL
오 찌찌뽕~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아주 감탄하며 읽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다시 읽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21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마음이 내키실 때 천천히 다시 읽으시면 또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이 목록엔 없지만 저는 <죄와 벌> 정말 지루하고 싫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니 정말 완전 새롭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독서에도 어떤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4-2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작품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잃ㆍ시를 꼭 완독해야겠단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30   좋아요 1 | URL
마지막 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과 감동이 오더라고요. 여기까지 오느라 그렇게 프루스트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했구나 싶었어요. ^^;;

다락방 2024-04-2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정말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글입니다, 블랑카 님.
인생 네권 중 저랑 겹치는 건 없지만 블랑카 님의 목록은 그 자체로 너무 좋네요.
[안나 카레니나]야 말로 책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안나 카레니나가 불륜을 저질러 자살한 이야기로 알테지만,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 들고 읽는다면 그게 그게 아니잖아요. 안나도 안나지만 레빈의 이야기도 그렇고 저는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심지어 사냥개의 입장이 되어서도 글을 써내는 천재라고 생각했더랬어요.

그리고 아오마메를 좋아합니다.

blanca 2024-04-25 12:3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그렇고요, 하루키도 그렇고요. 여자에 빙의하는 순간이 있어요. 남자 작가로서 여자를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되는 순간.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가능한 작가는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해요. 인생 네 권 재미있네요. ^^

은하수 2024-04-25 21:02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도 아오마메 좋아요
또 만나고 싶어요
전 다음권 나오는 줄 알고 한동안 계속 기다렸잖아요. 끝인게 믿기지 않는 작품이었죠!

stella.K 2024-04-25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의 이 글 읽고 읽다가 밀어뒀던 안나를 다시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러는 줄 알았거든요. ㅋ
근데 따님이 벌써 그렇게 자랐군요. 크니까 좋지 않나요? 대화도 잘 통하고 친구같고. 브랑카님 닮았으면 분명 미인이겠어요. 전엔 가끔 따님 얘기도 들려주시곤 했는데 말이어요. ^^

blanca 2024-04-26 09:19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벌써 열일곱이 되었답니다. 세월 빠르죠? 딸은 크고 저는 늙네요. ^^;;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벌써 알라딘에 머무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그런 추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새파랑 2024-04-2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인생네권인데 선택하신 권수는 20권인데요? ㅋ 1.2.3 완전 동의합니다~!!!

면도날 고르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궁금합니다~!!

blanca 2024-04-26 14:37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무려 20권. 일단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서머싯 몸 소설은 대체로 서사 장악력이 좋아 대부분이 영화화됐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4-26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고르겠어요ㅠㅠ

blanca 2024-04-28 08:44   좋아요 0 | URL
^^ 저도 쓰고 나니 또 생각 났어요.

페크pek0501 2024-04-2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카레니나를 오디오북으로 듣는 중에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오디오북이랑 같은 출판사의 책을(더클래식) 사야 되나 제가 좋아하는 민음사 책으로 사야 되나 고민이 됩니다. 면도날은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서머싯 몸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네요.
잃어버린~ 시리즈는 저로선 엄두를 못 낼 독서입니다. 뿌듯하실 것 같네요. 완독을 축하합니다.^^

blanca 2024-04-28 12:57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더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것 같아요. 서머싯 몸은 심지어 에세이도 재미있더라고요. ^^
 

다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렵다. 주류에서 배제되는 일은 서럽다. 인종, 직업, 연령. 심지어 어느 연령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도 그러하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산다는 일은 어쩌면 이런 사회적 압력과 기준에 억지로 나를 순응시키고 맞추거나 거부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합해도 벗어나도 매일은 투쟁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생명과 나름의 주관을 지닌 내가 그런 것에 매순간 들어맞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자아내는 고립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단지 거기에 그런 기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정답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는 군중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뇌에는 무리를 추종하는 습성이 생존 전략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그게 일종의 진화론적 생존 전략이라는 발견은 놀랍다. 즉 인류는 다수의 선택에 기대어 생존해 왔기에 군중논리에 휘말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모두가 따르는 무리의 규칙, 기대를 벗어날 때 생존에는 위기가 온다. 그 무리에서 제거되거나 배제되는 걸 기꺼이 감수할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설사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결행의 순간은 어렵다. 
















아사이 료의 <정욕>에서의 욕망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정욕이 아닌,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정욕이다.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 이성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정작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대학생, 식품 영업부와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중등 동창들이 만나는 지점은 사람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특이한 페티시즘이다. 사회에서 흔히 연상하는  이성애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욕망의 대상은 그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다수에 설 수 없는 욕망의 접점에서 그들이 소통하게 되고 연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정욕>은 분명 힘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작가의 힘은 이야기의 서사력 자체에 있지 메시지에 있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비틀린 욕망조차 소수자이기에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사고의 불균형이 언뜻 노출되는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는 욕망으로서 분류되는 기준 안에 있지 않다. 그 욕망조차 타고나는 것이라 항변한다면 이 세상 모든  도덕률이 설 지점을 잃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과 읽게 만드는 흡인력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숙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위험하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서사가 메시지의 방편이 될 때 그건 때로 칼이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이야기에 간섭한다. 이 간섭조차 때로는 작가 자신이 경계했던 일종의 배제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모두가 분투한다. 그걸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다수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도 때로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의 독특한 욕망이 타인의 몸을 매개로 하는 관계성에서 실현될 때 그것은 어떤 한계와 한도를 상정한 상태에서 기능하여야 한다. 상호 합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독자적으로 성숙한 판단을 내릴 여건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하여야 한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다. 소수도 절대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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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4-07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휴 정말 감탄하며 읽는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여기에 기립 박수 칩니다. 바로 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건 블랑카 님의 문장과 약간 다르게 표현되는데요, 저는 그걸 ‘작품에 작가가 드러나는 순간 싫은 작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작품에 참견하는게 보이는 순간 너무 싫어요. 확 멀어집니다. 블랑카 님이 그걸 우아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셨네요.

게다가 이 페이퍼의 마지막 문장도 명문입니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지만, 소수라고 해서 절대선인것도 아니죠.
이 작품을 블랑카 님이 읽고 써주셔서 참 좋네요.

blanca 2024-04-08 08:59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에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손에서 놓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건 소설의 미덕이죠. 문장도 좋았어요. 분명 재능 있는 작가더라고요. 그런데요. 욕망의 다양성을 얘기하며 슬쩍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입장 표명이 없더라고요. 제가 잘못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다양성의 예시로 든 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양성과 소수자적 위치와 소외와 거기에 대한 배려 이야기를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하면서 그것의 예시로 든 게 하필 그거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작가가 욕망을 이야기하며 사실은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직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 게 하는 그런 아쉬움과 우려가 들었어요. 다락방님 덕분에 잘 읽었고 오랜만에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고마워요.

다락방 2024-04-08 12:53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블랑카 님. 제가 바로 그 지점에서 엄청 빡쳐버린 거에요. 작가가 하다하다 소아성애를 가져오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세상에 숨겨야 할 성욕, 남들이 배제하는 성욕, 감히 말도 못하는 성욕을 표면적으로는 사물에 대한 것으로 두었지만 슬쩍슬쩍 소아성애를 가지고 오죠. 과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배제와 소수자에 대해 말한게 사실은 결국 이것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이 책을 무심코 읽는다면 어느 순간 아 소아성애도 이상 성욕의 하나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이 싫은 제일 처음 이유,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소아성애 가지고 오는거요.
 

유독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속 레빈이 그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노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유한함에 대하여 사색하는 대목, 제임스 조이스 <사자>의 주인공 아내가 십 대 시절 자신을 빗속에서 기다리다 죽은 소년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장면. 이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나는 레빈의 시선으로 광활한 대지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내 존재의 미소함을 떠올리게 되고, 남편을 따라 간 파티에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몰고 온, 십대 시절 떠나보낸 첫사랑의 추억으로 울먹이는 여인의 그 먹먹한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모두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법과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바깥의 이야기와 통합되는 순간, 그 서사는 내 안으로 스며들어 녹는다. 이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 순간, 그 이야기는 나의 것처럼 숙성되어 새로운 서사로 변환될지도 모른다. 나의 것으로 여기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어디에선가 들어와 흡수된 것.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와 소설가 보르헤스는 우리가 가진 이 거대하고 끈질긴 '자아라는 감각'의 허구성을 간파한다. 우리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현재의 자신, 미래의 자아에 대하여 어떤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정한다. '나'라는 감각은 살아가는 데 있어 거의 절대적이다.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건 내가 의존했던 세계가 붕괴되는 충격이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 해체될 자아 감각에 우리는 왜 이토록 집착하게 되는 걸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갱신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의 화자에 대한 통일성 강박으로까지 보인다. 사춘기의 나, 청년 시절의 나, 지금의 나, 노년의 나가 다 각각 분리되어 공중에서 떠돈다면 우리는 마치 다중 화자로 난삽한 소설을 읽으며 길을 잃은 듯한 심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 누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아마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맞다,고 그레고리 번스는 본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다 각각 떨어져서 존재하는 하나의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에 의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나를 달래기 위해 그런 절대적인 자아 개념에 얽매이는지도 모른다. 일관된 내가 영원하다는 망상은 일상의 고통을 견디게 하니까.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가 한데 엮인 한편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사는 당신이 항상 같은 사람이라는 '필요한' 망상을 유지하게 한다. 

-'나'라는 착각<그레고리 번스>


심지어 현실조차 사회 구성원의 집단적으로 '공유된 망상'이라는 그의 주장은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과학자의 엄정한 시선으로 본 과학적 진실이다. 실제 십 년 전 우리의 몸을 이룬 분자들과 오늘 내 몸의 분자는 같은 것이 없다. 보르헤스 또한 그러지 않았나. "어제를 살았던 사람은 오늘은 죽은 사람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내일이면 죽을 사람이다." 라고.


그러니 우리의 읽기는 이런 우리의 서사에 틈입하여 우리의 한정된, 편견으로 가득한 서사의 균형을 맞추고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단지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고 살다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레고리 번스는 우리가 읽기를 통해 실제 감각적 체험을 하는 뇌의 부분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내면의 서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실제의 이야기와 허구의 그것을 우리의 뇌는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이 발견은 우리가 읽는, 듣는 이야기의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함을 시사한다. 나쁜 이야기는 우리는 망친다. 음식처럼.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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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살아도 절대 모르는 영역이 있다. 구역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내가 차마 떠올릴 수 없는 삶의 비의를 가르쳐 줄 때가 있다. 


"그거 아세요? 미국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 총에 맞아 죽는지... 우리나라 하루 자살자가 몇 명인지...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하지만요. 지금 시급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평균 36명이 목숨을 스스로 끊어요."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아마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그 숫자가 충격적이면서도 그럴 수 있다, 그러 경우가 있다, 에 생각이 가 닿았던 것 같다. 매일이 축제인 사람이 있을까. 때로는 정말 버티기 힘들 때도 있다. 


















무거운 책이다. 우리가 쉽게 비난하고 쉽게 무시하고 너무 가까이 느껴서 그 권위를 종종 인정해주지 않는 경찰관, 젊은 여자 경찰관의 이야기다. 과학수사과에서 현장감식 업무를 담당하며 수백 명의 변사자를 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주변에서 비상식적인 대한민국과 사람들의 무서운 밑바닥을 봐버린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 무슨 사건인가 싶어 호기심 그득한 구경꾼들만 바글바글했던 현장에서 절망한 이야기다. 영화 <아바타2>를 꼭 보고 싶어했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못 보고 간다는 유서를 영화 개봉 3일 전에 남기고 간 이야기다. 상관의 실적 압박에 손님을 태우러 중앙선을 침범한 개인택시 기사에게 6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하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을 때로 희화화하며 그들에게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권한과 대우를 해줬나? 나도 그런 불신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지 않았나? 미국의 경찰들과 비교하며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그들의 소극적 대처를 입으로만 쉽게 성토하지 않았나? 


그러나 무엇보다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그 죽음 이전에 그 죽음이 완벽하게 실현되도록 연습까지 하는 그 절망을 삶의 의지 부족으로 치환해서 무조건 살아야 하고 내일에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쉬운 기만적 답안으로 교체했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삶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희망 그 자체를 꿈꿀 수 없는 그 바닥을 내가 감히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싶었던 순간과 죽음 그 자체를 결행한 사람들과의 그 간극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내가 속단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피어나는 곳에서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마음이, 그러나 여전히 그런 딸의 안부를 간절히 챙기는 아버님의 틀린 맞춤법이 사랑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여전하구나 싶은 체념어린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랑이다,는 희망이 아니다. 어쩌면 삶의 그 지독한 중독성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여전히 그 사랑을 기억하며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참으로 지독하다.

















여성 장례지도사인 김수이 작가의 글이다. 표지만큼 정갈하고 담백한 글들은 죽음 이후의 그 의례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것은 삶의 축제의 저 반대편에 가 있지만, 우리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결국 통과해야 하는 순도 백퍼센트의 통과의례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녀가 일했던 장례식장 풍경이 내가 가 있었던 그 장례식장과 너무나 닮아 있어 기시감이 들었다. 그 장례식장행 셔틀이 없어진 이유가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면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갔던 장례식장은 병원에 정차하고 마치 종점처럼 서곤 했으니까. 제목처럼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게 희망의 영역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엄연히 삶의 심연에 속한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꿈꿀 수 있을까. 청년들의 절망을 읽을 때마다 기성 세대로 가고 있는 나는 미안하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긍정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희망과 미래를 노래했던 우리 세대의 책임은 없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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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절대적인 선인도 절대적인 악인도 대체로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 조심스럽다. 인간은 무엇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그녀는 1927년에 이미 파리에 간 여성이다. 1934년에 남편과의 이혼 과정과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했다. 가부장제의 위선과 모순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것을 공론화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글은 지금 읽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로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급진적이었고 깨인 여성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태어나 독립적으로 대등한 부부관계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결혼 생활 등 그녀의 화려한 전반기의 인생은 그러나, 질병과 빈곤 등으로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나혜석의 인생 그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하나의 드라마다.


나혜석은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나문희 배우는 어린 시절 본 나혜석이 파킨슨으로 투병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적 재능이 흐르는 집안이었던 듯하다. 명배우 조카에게 남긴 마지막 기억이 안타깝다. 
















<경성에서, 정월>이라 했을 때, 나는 무심코 1월에 관한 나혜석의 글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정월'은 나혜석의 호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정체성에 관련된 나혜석의 글들이 실려 있다. 나혜석은 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의 필력도 대단하다. 주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 데 짧은 단편처럼 생생하고 풍성한 글로 장면을 그려낸다. 자신만의 논리를 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설득당해 버릴 정도다. 결혼생활에 관련한 그녀의 생각은 지금 시대에도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대목이 여전히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네 아이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진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뭐라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녀가 결국 벗어던지고 남은 정체성이 그녀 자신 그 자체로서 존중 받고 인정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모두가 침묵하고 체념하며 따랐던 정통 가부장 구조가 한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을 적시한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돌올한 나혜석의 유산이다. 그녀는 자기가 한 명의 '언니'로서 전인미답의 길에 발자국을 낼 것을 예감했다. 


아직 밝지도 않은 이 새벽에 누가 벌써 수레를 끌고 가는구려. 그 바퀴 구르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와 같이 내 귀에 들리오. 이 이른 새벽 깊이 든 잠에 몇 사람이 깨어서 저 바퀴 소리를 들었겠소. 이와 같이 만물이 잠들어 고요한 중에 그는 먼길을 향하고 일찍이 일어나서 튼튼히 발감개하고, 천천히 걸어가며 새벽하늘의 고운 빛을 노래하고 맑은 공기에 휘파람 불며 미소하리다.

-나혜석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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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2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문희 씨가 조카군요.
호가 정월이라니. 넘 불행한 삶을 살았던지라 어떨까 싶은데 이 책 관심이 가네요. 표지도 예쁘네요.^^

blanca 2024-02-28 09:44   좋아요 1 | URL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표지도 판형도 참 예뻐요.

등대지기 2024-02-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누구든 쉽게 비난하지 말자 싶어요. 다들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나혜석을 알게 되었을 땐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아갈수록 멋진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02-28 09:46   좋아요 0 | URL
자녀들에 대해서는 분명 무책임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선각자적 면도 있고 참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