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보르스카의 <박물관>이라는 시는 유물이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와 무게를 노래한다. 박물관의 유물 앞에서 쉼보르스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를 절감한다. 이건 역설이었다. 우리를 앞서고 우리를 떠나 남고야 말 그 유물들의 힘 안에는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고 세대를 아우르는 영혼의 승계가 있었다. 삶의 종결이 우리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멸자인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언.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쉼보르스카 <박물관> 중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렸을 때에는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유물들 앞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휘몰아쳐 놀랐다. 심지어 구석기의 돌도끼들, 신라의 봉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관들마저 그것을 썼던 이미 사라져간 그들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서성거리게 됐다. 머나먼 과거와 연결된 현재에서 그 유물을 매개로 조우하는 듯한 각별한 공감지대에서 나는 그저 나이든 게 아니라 성장했다는 실감이 왔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파괴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정명희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남는다. 비단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 심화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하다. 두고두고 인상적인 유물을 보고 온 마음처럼 그녀의 문장들을 곱씹게 된다. 박물관에서 흔히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유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지 친절하고 세심한 가이드 역할은 덤이다. 700년 전의 고려 여인의 서원이 깨달음으로 인한 윤회의 종결과 더불어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중국의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멈춰서게 된다. 부귀영화가 아닌 삶의 독립을 위한 남자로서의 재탄생을 꿈꿨던 그녀의 고단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상해 본다. 거기에서 오늘은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아니 앞으로 나아가긴 한 것인지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된다. 발원문에 두 살 아이의 장수의 꿈을 곱게 적은 부모의 마음도 상상해 본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만을 바랐던 소망이 큰 꿈이었던 시대와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교육열로 포장되는 현시대의 간극을 가늠해본다. 내가 사는 지금으로부터 700년이 지나고 나서 후세인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들이 보기에 천박하거나 사소하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 


현재에 발을 담그고 그렇게 과거의 것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떠올려 본다. 



현재에 머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것에 맞추다 일과 삶을 혼동했다. 익숙한 것을 소흘히 대하고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했다. 내가 없는 것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정명희 <멈춰서서 가만히>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가  삶의 은유로 읽힌다.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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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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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생명의 가치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그 어떤 명분을 붙여도 그렇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가장 좋은 건 전쟁 자체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최대한 그런 희생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 말콤 글래드웰의 승리했지만 통계로도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민간인을 죽게 했던 1945년 미국의 도쿄 대공습에 관련한 의사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도발적이다. 전쟁 수행 방법에 대한 이견을 보인 두 지휘관 헤이우드 핸셀과 커터스 르메이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은 우리가 내리는 올바른 선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부조리하지만 불가피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미국의 일본 공격에 대한 이야기는 원폭 투하를 제외하고는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모두 일본의 종전 선언을 이끌어낸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떠올리지만 일본의 패망은 이미 그 이전 반년에 걸쳐 67곳의 일본 도시에 이루어진 소이탄 폭격으로 인한 여파의 누적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지휘관이 있었다. 헨셀과 르메이. 이 둘의 대조적인 선택과 결말은 드라마틱하다. 이것은 "전쟁 수행방법에 대한 도덕적 논거 발견"에 대한 논란을 촉발한다. <돈키호테>를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던 로맨틱 가이 헨셀은 폭격기 마피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인명 살상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기 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함께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조준 시설에 정확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폭격조준기를 장착한 폭격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람, 거리, 기압 등 모든 여건이 그것의 효율에 기여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결국 가장 빠르고 저돌적으로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적을 패배케 하는 승자로 남게 되는 르메이에게 밀려난다. 르메이는 헨셀이 가졌던 이상주의와 꿈을 방기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목재 가옥들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소이탄을 동경에 퍼부음으로써 승리를 거머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궤멸시켰다. 어쩌면 기대한 것보다 더 큰 무공을 세움으로써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반면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남은 헨셀은 적을 덜 죽임으로써 패자로 남았다. 말콤 글래드웰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 그것들은 대단히 어려운 종류의 문제이다. 반면 인간의 도덕성을 적용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다. 폭격기 마피아의 천재성은 그 차이를 이해한 것이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 그들이 옳았다.


승리한 전쟁의 불온한 지점을 지적한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어떤 의심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한 것들에서 과연 놓친 가치는 없을까. 그리고 그것은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었을까.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가 결국 져도 끝까지 사수하게 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유의미한 자문을 가능하게 하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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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4-29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커티스 르메이의 유명한 말이죠.
최상의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이 문제를 전쟁에서는 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2-04-29 19:16   좋아요 1 | URL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건 쉬운데 전쟁의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건 정말 대단히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전장에 나가는 지휘관의 결정은 어떤 형태로든 비난받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어서 작가가 정말 다각적으로 검토한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cott 2022-05-04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전의 말콤 작가가 다루었던 주제가 아닌 [전쟁]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발발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책 ^^

blanca 2022-05-08 08:24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보다 너무 좋아 깜놀요. 말콤 글래드웰 책을 어느 순간부터 안 읽게 됐는데 역시 이 사람은 탁월한 저술가구나 싶더라고요.
 

과거를 떠올릴 때 내가 수정 보완할 거리들을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정말 땜질하고 잘라내고 덧붙여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그 그림 속의 나는 좀더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걸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은 걸까.

















만약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을 다시 겪으며 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처음보다 실수도, 오점도, 공백도 없이 훨씬 더 잘살 수 있다면......그건 마치 정정한 곳투성이의 육필원고를 깨끗하게 다시 베껴 쓰는 것 같을 거야......

-파트릭 모디아노 <잠자는 추억들>


파트릭 모디아노가 나의 그런 마음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파리의 공간을 배경으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만난 여인들에 대한 기억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오토픽션이다. 전적으로 자전적이라 보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만들어낸 이야기라 보기도 힘든 그 어느 중간 지점의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청춘의 만남에 대한 공감지대에 놓인 그런 매력적인 이야기다. 나보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그러나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거리가 아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인, 남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자와의 의도치 않은 도피 등은 흐릿하고 신비롭다.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젊은 시절의 파트릭 모디아노는 다시 돌아가도 그 시절의 실수,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의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청년은 때로 무책임하게 귀환을 기약하며 도망쳐 버린다. 그 탈주는 비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그 자리에 정말 약속한 대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청춘의 무책임은 때로 이미 예비된 미래의 현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존 버거의 '한때'에 관련한 단상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한때를 소환하며 그 덧없음을 환기시키지만 그렇다 해도 그 덧없음이 무의미와 동의어는 아님을 방증하는 이야기들은 무겁고 저릿하다. 존 버거가 이야기하는 과거는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현재적이다. 우리 존재의 기저에 깔려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추억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덧없지만 덧없게 될 것을 알지만 영원할 것처럼 깊이와 밀도를 부여하는 현재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 없지만 그렇기에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추억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다. 수정할 수도 덧붙일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우리가 만나서 그 공간과 시간을 채웠던 만남들에 대한 기억의 복원은 우리 내면을 채우는 존재의 밀도의 기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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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거를 돌아보면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 할 거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럴 땐 반성을 하죠.
똑같은 상황에 또 처해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사람은 참 안 변한다는 생각이 들죠.

blanca 2022-04-29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아요. 이젠 받아들이기가 숙제인 것 같아요.
 
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어떤 특정 규격과 기준, 범주에 넣기 곤란한 책이다. <달몰이>의 작가 조에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했다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어 남은 생을 자신의 침실에 갇혀 지내게 된다. 나는 그러한 자기 상황에 대한 절망, 연민, 승화의 개인적 경험담일 거라 여기고 책을 펼쳤다. 구체적인 고통의 현시들이 줄을 이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 멀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몸으로 산 세월보다 침실에 유폐되어 보낸 시간이 더 긴 작가가 내면으로 침잠하여 삶과 고통,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여 길어낸 진실들에 대한 거대한 산문시에 더 가깝다. 그 발견들과 그것을 표현한 언어의 깊이와 밀도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지금 산문을 읽는 것인가, 시를 읽는 것인가가 가끔 헷갈릴 정도로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에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스무 살에 포탄을 맞고 "나의 유령"이 된 조에 부스케는 그 순간부터 시인이 된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재난을 그의 바깥에 흐르고 있는 삶의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 사실들을 관통하며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우리에게 우리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겪은 일들은 내 바깥에 있다. 나는 생을 통과한다. 나는 결국 허무로 수렴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들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불행은 나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와닿아 떠나간다. 내 앞에 선 사람들, 내 옆에 선 사람들, 내 뒤에 올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생의 근본적 속성이다. 조에 부스케는 자신의 불운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생을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거대하고 심원한 하나의 본질에 합류되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 고통마저 그러한 차원의 것이라고.


네 고통도 의인화해야 그것을 이겨내는 격조차 생긴다.


'나'와 '나의 세계'와 '나의 삶'을 혁명적일 만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게 하는 책이다. 고통의 심연에 빠져 마땅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야망을 "사는 것"으로 치환하는지 보여주는 전범 같은 책. 


"우선 내가 내 심장에서 뜯어낸 책 한 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 바로 이 <달몰이>다. 내가 초래한 것들이 삶이고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그 경계를 뛰어넘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의 빛나는 언어로 보여준다.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발췌된 조에 부스케의 덧붙여진 해석은 멋진 미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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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18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분에 읽게 된 책 ˝랭스˝.
조에 부스케도 읽게 되면 다 블랑카님 덕분이겠습니다.

이 글이야 말로, 리뷰인지 산문시인지 모호하고, 모호해서 더욱 아름답네요.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이 문장은 특히 아름답지만, 솔직히 그 뜻을 제가 다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해본 적이 없이 관성적으로 매일을 채워와서 어렵게 느껴지는 지도.


blanca 2022-04-18 12:27   좋아요 1 | URL
그 문장은 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조에 부스케의 생각을 제 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요.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한 번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표시한 곳 위주로 필사를 해봤는데 역시 기분이 정말 오묘해졌습니다. 제대로 잘 읽어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수이 2022-04-18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개 주신 책들은 제가 다 좋아하는 책들이거나 좋아할 것만 같은 책들이더라구요. 달몰이는 아직 안 읽었으니;;;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2-04-18 12:28   좋아요 0 | URL
제가 후회하는 게 별 다섯 개 책을 엑셀로 좀 추렸어야 하는 건데...이 생각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서...언젠가 작업을 좀 해 보려고 해요. 누가 가장 좋았던 책 뭐였냐고 물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려서요. ^^;;

짜라투스트라 2022-04-1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진짜 한 번 읽어봐야 할 듯^^

blanca 2022-04-24 11:53   좋아요 0 | URL
네, 짜라투스트라님 정말 좋았어요.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겠다고 생각할 만큼요.
 

시대의 역사는 승자 독식이 되기 쉽다. 승자의 언어와 승자의 시선과 승자의 해석이 사실을 직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사료 고증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고 폄하되고 없었던 허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이미 한일합병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청년들을 상상해 본다. 독립된 주권 국가가 아닌, 일본의 지배하에 태어나고 일본어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했던 세대가 일본의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되어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하면 과연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설사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은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강요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결백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이 책은 1942년 8월 부산항을 떠나 남방에서 오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최영우의 이야기를 외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최영우는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 및 자카르타 인근 형무소에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구금된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만 피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전범 행위에 협조한 셈이 되는 이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러운 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놓였다. 왜 기꺼이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은 너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윤리적인 질문과 생존은 충돌한다. 생존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저돌적으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상충되는 지점에 놓일 때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존을 택했다. 그리고 손자는 그의 선택 아닌 선택과 그것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담담하게 복원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그 비애는 사는 일이 그런 참혹한 선택의 기로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 의지보다 시대 상황과 주변의 여건이 엄청난 위력을 행사할 때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최영우는 친척이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돌아온다. 이후의 그의 삶에서 이전의 그가 가졌던 희망, 활기. 꿈들은 돌아올 곳을 찾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없다. 어쩌면 가졌을 내일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회한조차 손자는 알 길이 없다. 손자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세상 바깥으로 마침내 들고 나온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숨기고 싶을 수 있고 잊고 싶기도 한 이야기들도 이 세상에 자리가 있다. 역사는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로 균형을 이룬다. 그들에게 걸맞는 언어와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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