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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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화자가 연착된 기차로 인해 우랄 지역의 역 대합실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반사적으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이 떠올랐다. 역 대합실에 모인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한 고단하고 찰나적인 삶에 대한 은유가 공통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지난한 생의 집적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화자는 우연히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노인과 만나게 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그 노인의 스탈린 치하 개인의 삶이 익명화되고 파편화된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작가 안드레이 마킨의 문장은 잘 정제된 시어처럼 유려하게 흐른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고 소리를 듣게 하고 냄새를 맡게 기능한다. 피아노 연주회를 앞둔 소년이 시대의 잔인한 우연성으로 인해 그 연주회를 하지 못하고 전장의 병사들에 숨어들게 되고 죽은 또래의 병사의 신분으로 살게 하는 비극은 그러나 덮어놓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화자를 데리고 그 노인이 참석하게 되는 음악회는 그럼에도 가능한 그 무엇, 삶의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안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pp.119


한때 감히 사랑했던 상관의 딸 앞에서 했던 연주, 이미 피아니스트였지만 신분의 위장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학생으로 연주해야 했던 그날 그가 느낀 감정이다. 그가 그녀를 가질 수 없었던 열패감은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대신 그녀를 삶의 뒤안길에서 돌보고 끝까지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상쇄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삶에서 그렇게 기능한다. 기차의 우연한 연착, 늙고 가난한 연주자와 청년의 만남에서 건져진 삶의 비의는 그렇게 빛난다. 삶의 정경의 카메라의 렌즈처럼 기능했던 화자의 시선은 이윽고 이런 희망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순정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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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4 1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관심가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두었었는데 이런 느낌이군요. 뭔가 아련한 느낌도 들구요.

blanca 2022-09-04 14:06   좋아요 2 | URL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 요즘 웬만큼 좋은 소설은 사실 몰입이 잘 안 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빠져 읽었어요. 분량이 짧아서 너무 아쉬웠고요.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으려 합니다.

수이 2022-09-04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드레이 마킨 책은 아직 구입 전인데 블랑카님 글 읽으니 주저하는 마음이 접히네요. 얼른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blanca 2022-09-05 07:55   좋아요 2 | URL
1984Books에 대한 신뢰가 있긴 하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치게 좋더라고요,^^;;;

transient-guest 2022-09-12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아련한 추억이 느껴집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으니 언젠가는 저도 읽을 날이 있겠지요?

blanca 2022-09-12 13:28   좋아요 2 | URL
책 분량이 너무 짧아 아쉬웠어요. 참 좋더라고요. 잘 쓴 책에는 많은 지면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읽는나무 2022-10-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이 또 날아와서 읽게 되었습니다.
마침 관심있던 책이었거든요.
좋네요~^^

2022-10-01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1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따금 이런 글을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허투루 쓰는 혹은 쓰게 될 시간들을 아낄 수 있다. 쓸데없는 슬픔들, 쓸데없는 회한들, 쓸데없는 열패감, 소모적인 우울. 그리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것은 제니 오델의 말이 아닌 세네카의 말이다. 그러나 오직 온라인의 연결만을 강조하며 저도 모르게 소비 마케팅의 표적이 되면서 끊임없이 인터넷 세계를 유랑하며 보내는 시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으로 오인하는 우리들에게 저자가 하고 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의 계절 속에서 삶을 흠뻑 향유하기 위하여 여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세네카와 만난다. 


지하철에 타서 고요히 승객들을 관찰한 적이 있다. 정말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동승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필 그날, 그 칸은 그랬다. 순간 으스스했다.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거나 종이책을 넘기거나 종이 신문을 접어서 보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는 공간에서 나도 그전까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집단으로 우리는 이 가상의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훈련을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단 10분만이라도 그 강요된 연결에서 해제되어 진짜 물리적인 현실에 다시 발을 딛는 연습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다루는지 모르지만 그 세계에 오래 머무를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마케팅에 가장 효율적인 개인 정보들을 저도 모르게 노출하여 생산자들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공교롭게 뭔가를 하는 대신, 하지 않는 법, 최소한으로 하는 법에 관련한 고대,중세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읽게 됐다. 이번에는 스피노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저자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의 권위자로 꼽힌다. 이 책은 한 자리에서 주르륵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게 된다. 어렵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이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 않은 스피노자 철학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메멘토 모리도 아니고 죽음을 최소한으로 생각하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통념에 반하는 이야기는 그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나의 유한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현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이성적 기쁨을 누린다.

-스티븐 내들러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여기에서 자유인은 스피노자가 상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다. 현실의 격랑, 정념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이성적인 준거틀에 의해 모두에게 유덕한 판단을 내리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 우리는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완벽하게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현실의 쾌락과 충동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진정한 의미에서 아름답고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인은 쓸데없는 감정, 회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성적 삶을 누리며 자신의 관념이 더 큰 전체의 일부로 영원히 편입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명확하지만 존재의 소멸로 삶을 일회성으로 폄하하는 차원이 아니라 더 큰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사물과 삶의 필연성을 이해하며 모든 이행을 관조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 덤비는 대신 그는 평온하고 평화롭게 그것을 지켜본다. 마치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 내 삶은 나에게서 결국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양질의 것으로 충실하게 키워낸다. 


어떤 일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좋다.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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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30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
삶의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시기 인 것 같습니다.
몇 일 후면 가을, 9월
추석 앞 두고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올 여름 물, 비가 넘치게 와서 걱정 ^^

blanca 2022-08-31 09:02   좋아요 2 | URL
이제 비만 오면 무섭네요. 세계 정세들 둘러싼 온갖 우울한 소식들 일색이지만 그 와중에 즐거운 일상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mini74 2022-09-0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blanca 2022-09-09 21: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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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인 엄마와 대만인 엄마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던 몇 년 전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의 우리는 대의나 이념과 멀었다. 같이 아이를 키우고 하루하루를 사는 일들로 교감할 때 국경이나 지도자들이 내건 어떤 명분들은 무력했다. 그러나 이것과 무관하게 역사적 현실에서 개개인들은 평온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무고한 이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하루아침에 자신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가족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역사와 개인은 영원히 길항한다.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대만 태생의 일본 작가의 이러한 역사 속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예치우성이 할아버지 예준린이 젊은 시절 중국 마을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한 현장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는 이야기는 한 개인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저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그 폭력적 우연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그러한 역사적 부책감을 짊어진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의 소망, 꿈의 좌절과 회복에 대한 생생한 서사이기도 하다. 같은 민족이 이념 분쟁하에 영토가 분할되고 서로 적대하게 되는 과정은 우리나라의 그것과도 많이 닮았다. 노인들이 고향을 두고 떠나와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들의 마음을 묘사한 대목도 그러하다. 대만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 많은 대목들을 공감하며 우리의 상황을 투영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할아버지는 살해 당한다. 그 범인을 손자가 추적하는 큰 스토리는 그러나 이야기 자체의 핵심 동력은 아니다. 그보다는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청춘을 소모하고 첫사랑에 실패하는 예치우성의 이야기들이 7~80년대의 대만의 거리 풍경의 생생한 묘사와 어우러져 거리의 소음이 들리고 대만 음식들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친구들끼리 분신사바를 하며 영혼을 불러내는 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은 환상적인 감각적 즐거움이 컸다. 비장한 정치적, 역사적 이야기들을 무겁게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개인이 역사 속에 그려내는 현실적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 특유의 문체가 매력적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란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개인의 일상을 넘어서서 다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그 간단한 진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하고 장엄한 이념, 명분을 두고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예치우성이 본인을 아낌 없이 사랑해줬던 할아버지와 입양된 삼촌의 진실을 찾아낸다고 해서 예치우성의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들이 퇴색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실을 알아내는 것과 착각한 현실의 가치는 어쩌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라고 믿고 살았던 시간들이 가족적 진실일 수도 있다. 


물고기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속에서 살기에

당신에게는 내 눈물이 보이지 않아요.

_왕쉬안, <물고기가 묻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되어 있는 물고기의 눈물은 우리 모두가 역사 속에서 흘리는 고통의 신음이다.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느라 묻혀 버리는 숱한 개개인들의 삶의 이야기에 빛을 비춘 <류>는 결국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의 가치를 일깨운다. 할아버지와 삼촌의 이야기를 찾아 중국을 방문하는 예치우성이 찾아낸 답이 결국 그의 삶에 던져준 교훈은 그런 것이다. 


열일곱 살의 예치우성은 첫사랑에 실패하고 첫결혼에 실패하고 첫아이를 잃게 되는 현재 시점에서 회고되지만 그러한 미래를 품고도 희망을 품으며 끝맺는다. 그것은 손쉬운 자기기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사는 삶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 마침표를 알고 회고하는 과거가 가지는 가치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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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08-15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인기 신간이라
너에게는 순서가 오질 않네요...

blanca 2022-08-16 11:25   좋아요 1 | URL
저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사 버린 다음날 바로 도서관에 신간 구입해서 눈앞에 꽂혀 있더라고요. 조금 더 기다릴걸 하다 책이 좋아서 소장하기로^^;;;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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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행기가 난기류에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다. 이 순간 추락해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생각하다 우연히 보게 된 통로 건너편의 백인 아저씨는 유유히 킨들로 뭔가를 읽고 있다. 기체가 요동치는 순간에 그는 그의 그런 태평한 모습이 한 동양인 아줌마의 심리 안정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고 좀 안정이 됐다. 


이후로 나는 킨들을 스마트폰에 다운 받아 어쩌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아저씨 코스프레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안정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도 괜찮다는 착시를 내 자신에게 주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깝다. 비록 그것이 '아노말리'(비정상)적 상황이라 해도 착각한 상태에서 계속 비행할 수 있다면 나는 견딜 수 있다고 주문을 왼다.


이 책에서 승객들을 태운 에어프랑스 여객기는 난기류를 뚫고 착륙한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는 이 여객기의 승객들의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산층 소시민을 연기하는 살인 청부업자, 사후 유명 작가가 되는 작가, 죽음을 앞둔 기장, 가족 내 성폭력에 노출되는 소녀, 연령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연인. 그들 개개의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처럼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아노말리>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개개의 삶에 있지 않다. 이들의 분신이 다시 석 달 여의 시차를 두고 착륙하며 서로를 만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시차를 두고 분열된다. 한 명의 나는 다른 한 명이 그 시간 동안 겪은 일을 알지 못한다. 한 선택에 놀란다. 하지 않은 일에 당황한다. 이건 노년의 내가 이십 대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처럼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다. 내 모습을 대면하는 나는 생각보다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없고 거기에 익숙해질 수 없다. 시간의 벽을 두고 분리되어야 하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내가 공존하는 세계는 혼란스럽다. 


<아노말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이라 착각하며 유지되는 것임을 간파한다. 지금이라도 환경의 재앙과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좌절하고 집착한다. 끝에 인용한 니체의 "진리는 우리가 환상임을 망각한 환상이다."는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깨달음은 삶 전체를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여전히 착각하며 살기를 택할 것이라는 작가의 예견은 과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소설가 미젤의 이야기다. 우리의 무능력함과 우리의 수동성을 그리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인정과 더불어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착각 속에서 여전히 선택한다고 살아나간다고 믿는 우리의 모습의 성공적인 희화화 때문일까. 


에르베 르 텔리에는 수학자이자 언어학자라고 한다. 그의 이런 배경은 다양한 차원의 지적 실험으로 풍성한 읽을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란한 지적 유희의 현장 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낸 작가의 공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의 매력은 독자가 몸소 에어 프랑스 여객기에 탄 한 명의 탑승자처럼 스스로를 이야기 속에 넣어보게 되며 일종의 평행우주적 삶의 실험을 해보며 스스로의 삶 자체를 살펴보게 한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나와 대면한 현재의 나를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노말리>의 미덕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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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4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설정이 굉장히 끌리네요. 이 책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꼭 읽자 주먹 꽉 쥐면서 말입니다. ^^

blanca 2022-08-04 21:11   좋아요 2 | URL
^^ 저도 설정, 줄거리가 마음에 들어 시작했는데 역시 기대를 충족시켜줬어요. 일단 재미있더라고요.

scott 2022-08-0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노말리 작가
어떤 문예지에 인터뷰가 실렸는데
블랑카님 리뷰 읽으니
읽고 싶어지능 ㅎㅎ


저는 제가 탔던 엘레베이터가 급 멈춰 버린적이 있는데(그 엘레베이터 사방이 유리였음)
당황 하기 보다 밖에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눈빛이 더 무서웠습니다 ㅎㅎㅎ

blanca 2022-08-09 08:45   좋아요 1 | URL
흑, 알죠. 안 그래도 꼭 읽어보려고요. 해외 인터뷰 기사 검색해 보니 모조리 초반 제공에 돈 내라 하네요. ^^‘‘ 내가 나와 잘 지낼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는 말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연세도 있는데 여러 분야에 대한 지적 열정,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모습 저도 자극 받았어요. 저는 최근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갑자기 답답해서 마스크를 본능적으로 벗어서 안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라더라고요. ㅋㅋ

폭우가 쏟아져 난리네요. 스캇님도 비 피해 입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더 이상 비가 안 오기를 바랍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책을 읽으며 다음 읽을 책을 바로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책이 기대 이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독서도 만남처럼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로 대학교 시절 들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공부의 의미와 위로에 천착한 책은 수많은 그 시절들의 추억을 소환했다. 쓰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교양국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친구를 꼬셔 함께 들은 <여성 심리학>, 새로운 언어는 세계의 확장이라는 깨달음을 준 <교양 스페인어>...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책은 주인공이 고고학자인 강석경의 <내 안의 깊은 계단>으로 나를 이끈 책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저자 곽아람은 여러 번 이 소설을 인용한다. 그 인용 대목이 인상적이고 주인공의 직업에 관심이 가서 구입하게 된 책은 마치 과거에서 온 책 그대로인 것처럼 99년의 색깔, 판형, 활자, 가격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 책이 아직도 남아 이렇게 오롯이 독자의 품에 안긴 걸까. 


층층이 쌓인 삶의 각질과 죽음,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 속에 인류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오늘도 주검을 거두며 시간의 강은 살쪄가는 것이다.

-pp.10


고고학자인 강주는 학생들을 이끌고 경주의 유적 발굴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연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 사촌으로 연극을 하는 강희, 사서 소정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작가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탐사,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깨달음이 한데 어우러져 깊이가 있고 탄탄하여 감동과 여운이 길다. 특히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에서 직접 함께 오랜 시간을 가로질러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로 인한 남성, 여성의 묘사는 때로 거칠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소정이 자신을 억압하는 가정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찾는 구도는 작가가 그 시대 안에서 고민한 여성주의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주, 강희, 이진이 아닌 소정이 아닌가 싶다. 


업의 비늘이 떨어져나가 우주의 바람에 묻어가는 듯했고 소정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눈앞에 펼쳐 있는 구름 이불 위에 던지고 싶었다.

-pp.308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네 남녀의 얽히고 설킨 사랑, 이별의 교차로에서 삶의 비의를 건져올린 작가의 저력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이 삶의 "고통의 낭비"과 되지 않도록 "내 안의 깊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 본질을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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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1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독서. ^^ 그래서 읽어야 될 책탑은 산처럼 쌓인다죠. 그럼에도 저렇게 내 맘에 꼭 드는 책을 새롭게 발견했을 때는 역시 감동입니다. ^^

blanca 2022-08-01 09:4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가장 우울할 때는 읽을 책도 읽고 싶은 책도 없는 상태인 것 같아요.

scott 2022-08-04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읽고 놀라웠던건
대학 시절의 모든 교재와 과제 리포트까지 전부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거!ㅎㅎㅎ


blanca 2022-08-05 09:06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자가 저랑 비슷한 학번인 것 같은데 저는 1도 기억 안 나더라고요. 한편 참 부럽더라고요. 그렇게 자기의 대학 생활을 아카이브로 구축해 놓았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