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이브 -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
핼리 루벤홀드 지음, 오윤성 옮김 / 북트리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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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인 가해자의 서사가 횡행하는 곳에서 영원히 잊힐 뻔한 무명의 희생자의 삶을 구체화하여 그들도 사랑하고 소망하고 꿈꾸고 실망하고 슬퍼했던 딸, 여동생, 어머니, 아내, 연인이었음을 기억하게 해 준 이야기. 저자가 소망했던 이들의 존엄의 구원은 마침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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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 커피를 하루에 서너 잔 마셨다. 그 이전에는 아침을 먹지 않고 믹스커피로 하루를 열기도 했다. 속이 이따금 쓰리기는 했지만 큰 이상이 없었고 카페인이 들어가면 그 정신이 찡해지는 청량감이 너무 좋아 거의 중독 수준으로 커피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것에 제동이 걸린 건 건강검진 덕분이다. 만성 위염에 빈혈이 왔다. 오후 커피는 수면을 방해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줄인 게 하루 한 잔이었지만 이것조차 매일 마시니 주기적으로 역류성 식도염, 만성두통이 왔다. 커피를 다시 끊어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거의 몸에 이상이 온 수준으로 근육통, 구역감, 두통으로 고생했다. 그러다 사흘이 되던 날 커피 마시기 전보다 오히려 몸이 덜 피곤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건 비단 커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마음껏 탐닉하던 간식류들을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으면 공복혈당이 정상치 경계까지 오르는 경험도 하고 있다. 난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내 몸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 이름은 노화다. 젊었을 때와 똑같이 하면 내 몸은 저항했다. 하고 싶은 것들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에 순응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 싶었다. 나만 특별할 리 없었는데, 내심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니...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중학생의 아이가 뚝 떨어진 게 아니듯이 내 몸도 영원히 청춘일 리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명약관화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간단치 않다. 나이듦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노년내과 의사가 쓴 노화에 관련한 책이다. 굉장히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년을 맞이하는 일에 대한 의료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의미와 현실, 제도적 보완책, 개인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이 가감없이 서술된 책이다. 노화 지연을 위한 "내재 역량을 잘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 빼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와닿는다. 혀끝에 감기는 과당 음식들의 범람, 성과를 내라고 강요하는 사회, 오감을 자극하는 SNS 속에서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고 마음챙김을 기억하기란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실제 이런 작은 노력들이 쌓여 결국 우리의 노년의 모습을 만들어가게 될 거라는 예언은 가벼이 넘길 일만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환자가 바로 분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편리한 의료 시스템이 노인들이 여러 분과를 전전하며 통합 관리를 받지 못하고 중복 처방을 받거나 서로 각종 예기치 않은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들을 한꺼번에 복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은 노인 환자의 특수한 상황인 노쇠를 간과한 치료가 그 노쇠를 더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늙음이라는 상황을 직시하지 않음으로써 노인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일상을 건강하게 자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데 때로는 더 방해가 되는 의료적 처치나 처방, 치료를 남발함으로써 노인을 그저 젊은 세대들이 부양해야 하거나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성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린게 아닐까. 


누구나 결국 나이가 든다. 나는 노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예외주의적 사고는 머지않아 나에게 차별로 돌아올 것이다. -<지속가능한 나이듦> 정희원


늙음에 대한 오롯한 사유의 문장화는 박완서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년의 여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치매 시어머니를 통해 그 늙음의 현실화를 목도하고 충격 받는다. 그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처럼 자연스럽지도 곰삭은 아취가 있지도 않았다. 적나라했고 원시적이었다.


그 여자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늙음과 그 여자에게 실제로 맡겨진 늙음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자신이 실제로 늙음을 통과하며 그 늙음의 말로의 모습을 목격하며 그 부담을 홀로 떠안아야 하는 중년 여인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것은 가부장제를 통과한 효라는 미덕으로 포장되고 강요된다.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나이듦을 포용하고 지원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자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가을이 가고 있다. 따라서 나도 나이 들고 부모님도 늙고 아이들도 크고 있다. 이 시간의 무정함은 시시각각 또 다른 모습의 책임과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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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28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희원 저자의 저 문장은 선고와도 같네요
아찔해집니다. 정신차려야겠어요 ^^

blanca 2022-10-29 08:52   좋아요 1 | URL
저는 저자가 너무 늙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꽤 나이가 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놀랐고요. 군데군데 제가 요새 느끼는 지점들을 명확히 설명하거나 해석한 부분이 있어 정말 반가웠어요.

햇살과함께 2022-10-29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찜해둔 책인데 강력 추천하시니 꼭 읽어봐야겠네요~

blanca 2022-10-29 08:53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 저도 여기에서 추천하신 분이 있어 읽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약물이 서로 다른 분과에서 처방되어 때로 서로가 방해, 간섭,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대목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라 꼭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coolcat329 2022-10-29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도 필요한 책이네요.
저는 아직까지는 커피를 마시지만 만나면 같이 커피를 즐길 친구가 하나둘씩 사라져 순간 슬퍼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하나같이 커피 끊으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말들을 해요. 그러니 하루 한 잔은 괜찮다고 꼬시지도 못합니다. ㅎㅎ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친구들에게 추천해야겠어요.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커피도 커피지만 커피를 마시며 나누었던 교감이 참 그리워요. 오후에도 한 잔 같이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이 참 그립네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게 참 스산해지는 가을날입니다.

테레사 2022-10-29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 블노그를 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좋은 책을 추천해 주는 이웃들 때문에ㅎ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오래오래 여기 계셔야죠.

라로 2022-10-29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만 안 늙은 줄 알았다는 문장 읽고 깨달았어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구요. 😅
약처방에 대한 건 저희 간호학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여긴 이미 노인학을 전공하게 되지 꽤 되었어요. 어쨌든 그래서 노인들이 약국을 하나로 정하고 약국에서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경향이랍니다. 여긴. 어쨌든 이 책 저고 읽어봐야겠어요. 늘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blanca 2022-10-29 16:30   좋아요 0 | URL
라로님, 한국이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바로 의료분과 전문의를 만나볼 수 있는게 편의성 측면에서는 좋은데 노인분들처럼 복합처방 많고 여러 질환이 겹쳐져 있는 경우는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은 실제 노인을 전문으로 보는 전문의 자체도 많지 않답니다. 미국은 이미 그런 것들이 관리되고 있었다 하니 한국도 이제 점차 노인 환자를 그 입장에서 더 적극 케어하는 방향으로 가서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노년 건강 관리가 더 나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다락방 2022-11-05 1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안그래도 매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고 있어요. 받아들이려고 하면서도 툭 튕겨져 나오곤 합니다. 제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네요. 좋은 글 입니다, 블랑카 님. 언제나처럼.

blanca 2022-11-05 19:0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가끔씩 아니 자주 내 나이를 실감 못해요. 그리고 예전에 우리 다 젊었을 때 알라딘 기억나세요? 그 북적북적하던 날들, 그날들도 그립고요. 그래도 이렇게 다락방님과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아요. 사실 제일 슬픈 건 서서히 진행되는 노안이에요...이건 깊이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슬퍼져요.
 

"엄마, 아, 정말 넘 설레. 시험 끝나고도 설레고 크리스마스도 설레고 내 생일도 설레고."

거기에 대고 나의 답은.

"너는 좋겠다. 설레는 게 많아서..."

이런 중년이다.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다. 나는 이제 설레는 게 없다. 이건 진짜 나이가 들어야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원래는 설레는 게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친구를 만날 약속을 하면 일주일을 설레었고 단지 크리스마스가 온다는 것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것만으로 한 달을 그 기대로 살기도 했다. 설사 내가 기대했던 대로 오지 않은 결론일지라도 내가 바라는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며 기다리고 기대하는 나날들은 이제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계속되는 실망, 좌절의 누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냥 사람은 저절로 나이가 들면 그 설렘의 능력이 마모되어 버리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가슴이 아프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소나기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현금,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리는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게 실감하곤 했다. 


허망감을 모를 때에는 설렘도 없었다. 설렘이 시작되자 차곡차곡 쌓아온 경력의 켜가 쉬어터진 시루떡만큼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이렇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예리하게 간파한 작가가 박완서 말고 있었을까. "후둑후둑 소나기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는 마음. 어떤 전조로 젖기 전의 그 울렁이는 기분. 그러나 그것이 이윽고 지나가고 나면 남는 허망감. 그것들이 연륜과 섞여 퇴적되면 어느새 삶의 기대는 절로 누그러지곤 한다. 그러나 그래서 아무것도 기대하고 설렐 것이 없는 그 나날들이 더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허망감도 실망도 덜해서 덜 흔들려 편안한 건지, 아니면 그것이 결국 생의 에너지일 텐데 그것이 물러난 자리의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바싹 말라버리는 걸까. 아직은 뭔가에 부쩍 설레는 사람이 부럽다. 질투날 만큼.

















올 연말 나를 조금이라도 설레게 할 것은 아마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드디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민음사에서 완역으로 출간된다. 이 두 권을 다 읽게 된다면 나는 드물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독자가 된다.^^ 2012년부터 김희영 선생님 번역의 민음사 출간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십 년에 걸친 대장정이 되어 버렸다. 십 년에 걸쳐 번역되어 출간되었기에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파괴해 버리고 붕괴해 버리는 것들의 그 찰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처절한 복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읽기는 따라서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그 안의 인물들과 내 시간은 겹치고 어긋나고 마침내 노화와 죽음으로 만난다. 


이런 결론을 만나려 설렌다. 찰나의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 다 스러진다. 허망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것이 마치 영원히 나의 존재와 삶을 바꾸어 줄 것처럼 그렇게 기다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과거를 본다. 섣부른 조언, 단정은 하지 말아야지. 그건 알 필요가 없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나이듦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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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25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감격! 어느새 분홍공주가 자라서 저래 예쁜 말을 하네요. 블랑카 님의 설렘도 막 전해져옵니다. 완독자가 곧 되는군요. 미리 축하합니다 ^^ 저도 내년엔 잃시찾 완독자를 향해 출발해 볼까 해요. 언제 다 읽나 ㅎㅎ

blanca 2022-10-25 16:52   좋아요 1 | URL
말도 마세요. 둘이 싸우는 것 듣더니 남편이 여중생 두 명이 싸우는 수준이래요. 이게 문제가 자꾸 앞의 내용을 잊어버려서 연결이 안 됩니다. 프레이야님은 한꺼번에 다 구비해 놓으시고 한꺼번에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하이드 2022-10-25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날씨가 너무 좋아서 설레요. 2023년 다이어리 쓸 생각에 설레고요. 고양이들 보면 설레고요. 이 감정이 설레임인가 싶긴한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거품이 보글보글거려요. 거품이 크게 팡팡 터지는건 도서관 다녀올 때!

blanca 2022-10-25 16: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지금 이 순간 제일 부럽습니다. 그게 사는 거죠. 저는 요새 음, 설레는 게 1도 없어요. 먹고 싶은 거 앞에 놓고 설레었는데 이제 살 빼기로 하니 그 낙도 없어져버렸어요. 다이어리는 음, 저도 지금 아주 신중히 고르고 있답니다. 구입하셨나요?

하이드 2022-10-25 17:37   좋아요 0 | URL
네, 9월 1일에 ㅎㅎ 올해도 호보니치 다이어리 씁니다.

blanca 2022-10-25 17:38   좋아요 0 | URL
저 안 그래도 호보니치 보고 있는데요. A6 너무 작지 않나요? 안 써봐서 계속 망설이는 중이에요.

하이드 2022-10-25 20:11   좋아요 1 | URL
저 A5, A6 둘 다 써요. 오리지널은 독서노트로 커즌은 모닝페이지와 회고로요. 글쓰기에는 커즌이 낫습니다.

blanca 2022-10-25 21:2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이원화하셨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 2022-10-25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불-영 에서 출간된 *주년 기념 판본별로 읽었는데 드디어 마지막 한국어판으로 되찾은 시간으로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연수옹도 잃시찾 완독 못하셨는데
블랑카님 대단 👍

blanca 2022-10-25 16:54   좋아요 0 | URL
헉, 그렇다면 영어로 읽으셨다는 이야기? 이미 완독하신 분 앞에서 저야 뭐 ^^;;; 이렇게 두 권 놔두고 설레발 치다 정작 마지막에 무너지는 것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마지막 대목 돌아다니는 것 보니 감동의 도가니라 꼭 완독하리라 다짐해봅니다. 김연수 라디오 들으셨나요? 정말 너무 좋았어요.

새파랑 2022-10-25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드디어 출판되는군요 ^^ 전 이제 밀린것만 읽으면 되겠군요 ~!!

blanca 2022-10-25 21:24   좋아요 1 | URL
아, 십 년에 걸친 대장정이라니 감격스럽네요.

stella.K 2022-10-25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요, 잘 생각해 보시면 크진 않아도 소소하게 브랑카님을 설레게 하는 게
있을 겁니다. 벌써 찾으셨네요.
그러고 보니 막상 저도 말하라고 하면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ㅎ
저는 요즘 코로나 땜에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살살 만나고 있는데 이게 넘 좋더라구요.
11월 초에 친구 모임에 20년 넘게 못 만났던 친구가 합류하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설레더군요.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그것도 설레잖아요.
정말 분홍공주가 벌써 중학생이 됐나요? 세월 정말 빠르네요.
잃찾사 완독을 앞두고 있다니 대단하네요.
책 보면 사고 싶은 생각이 들긴하는데 잘 읽을지 모르겠고 쌓아놓은 책이 많아
매번 비껴가네요.ㅠ

blanca 2022-10-25 21:26   좋아요 1 | URL
아, 스텔라님, 제가 좀 침체기(항상 침체기긴 했지만 ㅋㅋ)인지 요새 좀 그렇네요. 아, 사람들 만나시는 군요. 20년 만에 만나는 친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올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요. 남은 두 달 행복하게 잘 보내 보아요. 저도 설렘을 좀 장착할 수 있기를요.

라로 2022-10-26 0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박완서 선생의 글을 정말!!! 그나저나 우리 분홍공주 그런 말 하는 거 보니까 이쁘게 잘 자라는 거 같아요. 우리 초록왕자(ㅋㅋㅋ 해든이;;;)랑 언제 만나야 하는뎅. ㅎㅎㅎㅎㅎ

blanca 2022-10-26 09:22   좋아요 0 | URL
ㅋㅋ 아이들 크는 것 보면 정말 지나가는 시간을 실감해요. 어릴 때 모습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워요.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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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와 뼈대가 있는 소설이 내 소원"이라는 박완서 작가의 말이 여실히 증명된 작품인 것 같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속악함과 가부장제도의 그 주도면밀한 세뇌성을 다층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 묵직하다. 서문에 인용한 전경자의 <꿈>에 나온 아득한 옛날 왕뱀한테 반한 새끼여우가 마침내 왕뱀을 찾아 땅으로 내려간 날, 공교롭게도 왕뱀은 용 되어 하늘로 오르던 날이었다는 우화 같은 시가 애틋하게도 여운이 길어 한참 머뭇대다 드디어 의사 심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광과 현금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심영빈은 초등 시절 동창 현금을 두고 친구 광과 묘한 애정 다툼을 벌인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현금에 대해 느낀 은밀한 사랑은그녀의 집 앞에 피어 있던 능소화로 환기된다. 결국 이 짝사랑은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우연히 재회하게 된 현금과의 외도로 귀결된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재벌가에 시집간 나이 차 많은 여동생 영묘의 오빠, 홀로 세 남매를 키워내고 며느리에게 이런 저런 유세를 떠는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은 이 모든 책임의 갑옷을 은밀하게 벗어 던지고 현금이라는 여자 앞에서만은 하염없이 욕망하고 설레고 허무해한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만큼,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릴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니 실감하곤 했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둘의 사랑이 중심 이야기는 아니다. 뼈대는 오히려 동생 영묘의 남편, 영빈의 매제 송경호의 때이른 죽음이다. 재벌가의 후계자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폐암 진단을 받은 사실은커녕 죽음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모른 체 두 어린 아이와 젊은 아내를 남기고 눈을 뜨고 죽게 된다. 투병 과정, 죽음, 장례식도 하나의 전시 효과처럼 전시되고 사후 유언조차 남길 기회를 박탈하는 재벌가의 추악한 작태를 목도하게 되는 심영빈은 물질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생명을 하찮게 폄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자본주의의의 폐해는 추상이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집안에서 한 사람의 생의 서사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박완서의 서사는 현실의 요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며 결국 잃게 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심영빈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시며 맞벌이를 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다는 점, 아내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고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가지겠다는 일념으로 동창 광의 병원까지 찾아가게 한 가부장제의 방관자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난 받을 여지가 많은 주인공이다. 박완서는 여동생 영묘의 시가의 작태로는 물질만능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심영빈의 유약하고 자기합리주의의 뻔뻔함으로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병폐를 드러냄으로써 이중의 뼈대를 갖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쩌면 그 중간의 그물에 걸린 심영빈은 두 제도의 포로이자 은밀한 공모자로서 역할 했는지도 모르고 그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 출간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서야 전경자의 시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 하루가 하루가 아니던 그 옛날"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걸어왔나. 여전히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땅으로 추락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은 그 타이밍을 기가 차게 파악하고 승천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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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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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는 중인데 잠시 덮었다. 너무 좋은데 너무 얇아서 아까워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평범한 한국의 부자 간의 대화라 해도 믿어질 정도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아들을 원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도저히 부합할 수 없는 평범한 중년의 아들의 이야기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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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0-07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 장바구니 지금 결제 하려다가 이 리뷰를 봤어요. 이거슨 이 책과 만나라는 운명이겠죠!! 지릅니다! 땡투~

blanca 2022-10-07 17:21   좋아요 0 | URL
너무 아까워서 덮어버림요. ㅋㅋ 책은 또 얼마나 얇은지...솔 벨로 다른 책 읽어보려니 다 절판이네요.

scott 2022-10-07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울 아부지 최애 작품 중 한 권! 넘 어렸을 때 읽어서 저에게 솔 벨로우는 아부지 세대 ㅎㅎㅎ

blanca 2022-10-07 17:34   좋아요 2 | URL
헉, 저는 솔 벨로는 난생 처음 읽어요. 그 가스라이팅하는 할부지 이야기도 너무 웃기고... 이건 고전이라기보다는 지금 현대 소설이라고 봐야 할 정도더라고요. 근데 왜 다 절판이에요? 본격적으로 좀 읽어보려 했더니만요. 스캇님 아부지도 책 좋아하시는군요. 그리고 아부지, 이거 저만 쓰는 용어인 줄 알았는데 ㅋㅋ 카톡에도 맨날 쓰는데 너무 신기하네요. 저희 아부지 최애는 로라 잉글스의 <큰숲작은집> ㅋㅋㅋㅋ

scott 2022-10-07 17:40   좋아요 2 | URL
저희집 솔 벨로우 세로줄로된거 있고 모던 라이브러리 양장본도 ㅎㅎ 비의 왕 핸더슨 추천합니다
미쿡 또람프랑 비슷한 인물이 나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