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에 과도하게 힘을 줬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맹신했다. 심지어 관계까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했던 이야기.
직장, 사랑,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각종 위계, 계층, 계급, 그래도 진심이고 순수하고 싶은 마음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공감이 갔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지만 그 여성의 마음과 시점에 최대한 근접해 가려 애쓴 흔적과 상대에 대한 마음이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아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간파한 예리한 시선이 놀라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함한 얘기다. 어떤 사랑을 포기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겁함도 그렇다. 하상수가 찌질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직장에서의 직군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소위 금수저인 박미경 대리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그녀가 무심코 안수영 주임에게 하는 배려들, 이를테면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안 주임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선뜻 풀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이 가지는 어떤 뉘앙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악의로 인한 행동보다 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실수가 된다. 서로에게 하는 배려가 그 조직의 기저에 깔린 차별을 공고히 하는데 저도 모르게 기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때는 읽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와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내가 받은 상처를 다시 복기하게 됐다.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지점 남자 동기와는 달리 내가 배우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각종 자질구레한 서무 업무들이 주가 되었던 일,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그 어려웠던 마음. 하루하루 안 힘든 적이 없었다는 안 주임의 눈물나는 고백의 무게들이 가로지르고 간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먹고 사는 일의 비장함에 갇혀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 받는 정과 사랑, 배려에 갑각류처럼 몸을 움츠렸던 것도 같다. 내 상처에 골몰해 타인들의 상처에 정작 무감각했던 것도 같다. 고마웠던 사람들도 많고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는 추했던 언행의 사람들도 있다.
사랑의 이해는 내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행위와 겹친다. 중의적인 의미에서 그 이해는 의미를 가진다. 전적으로 순수한 감정도 오직 속물적인 계산도 아니다. 조건을 찾아 떠난 사람도 사랑에 모든 걸 맡긴 사람도 다 그 시간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생활의 무게, 사랑의 진정성 어느 한 쪽도 소흘히 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니까.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배수아 <작별의 순간들>
음악 같은 산문.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배수아의 글. 독일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투야 울타리 너머의 정원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하루하루 그들의 별일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문학 안의 텍스트와 교유하는 그 은은한 삶에 가만히 동행하는 듯한 환각을 주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줄어들 때마다 '작별의 순간'들로 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마치 삶처럼. 이 모든 지금과 이 모든 열심이 결국 무로 화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자각을 일깨우는 조종 같은 그녀의 문장들이 탐스럽다. 언제나 끝내지 못한 책처럼 물러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그러모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다. 사는 일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잘 사라지는 일이라고. '작별의 순간들'을 음미하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