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답거나 예쁜 걸 보면 이상하게 슬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 대상은 자연이 될 때도 있고 사람인 경우도 있고 심금을 울리는 연주회인 경우도 있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일까? 가짜 중에 진짜를 봐서 그런가? 진짜가 있긴 한 건가? 이것도 결국 사라질 텐데...
체호프의 <미녀>를 읽다 무릎을 쳤다. 십대의 소년은 할아버지와 우연히 아르메니아인 마을에 들렀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아름다움을 은밀히 음미하다 그만 슬퍼지고 만다. 소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이윽고 늙은 할아버지, 소년 그 자신, 소녀를 모두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든 촉매제가 된다. 우리가 사는 삶은 아름다움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다. 우리 모두 그 삶을 통과해서 사라지니까. 바로 그거였다. 내가 언어로 형상화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체호프는 당연히 해냈다. 그만의 방식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마샤가 나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면 어떤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그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마치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할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이, 나아가서는 이 아르메니아 소녀까지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체호프 <미녀>
체호프의 모든 단편이 그러하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데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굳게 믿는 친구의 아내와의 외도의 현장을 결국 그 친구에게 들켰을 때에 느끼는 자괴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주교가 되어서도 자신이 죽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 속에 느끼는 허무, 한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내기에서 그 판돈을 아꼈음에도 패배자의 고뇌를 절절히 경험하게 되는 그 아이러니. 이 모순, 역설, 아이러니 그 자체가 체호프가 우리의 삶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치트키인지도 모른다. 체호프의 이야기는 설사 그게 체호프에게 실패였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지혁 작가가 미국에서 한국어 교사를 한 경험과 귀국하여 글쓰기 창작 수업을 한 과정 자체가 두 이야기의 뼈대다. 수업 시간 에피소드들과 군데군데 작가의 어린 시절, 문학에 대한 감상, 가족의 이야기가 잘 버무려져 있다. 실제 학생들과의 교감이 느껴지는 생생한 현장감, 어린 아이를 키우며 경험하게 되는 경이로움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야기로서의 힘과 잘 정제된 단단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몰입감이 좋다. 개별적인 자신만의 경험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작가 특유의 힘이 느껴졌다. 재미있고 뭉클한 대목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써내야 하는데 어린 시절 기억이 아예 없다고 했던 학생 무영은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쓰인다.
장강명 작가의 문장은 리듬감이 있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단문의 깔끔한 문장이 읽는 행위 자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소설가로 살며 느끼는 단상들, 글을 쓰는 자로서 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눈치 보지 않는, 포장하지 않는, 솔직담백한 자신의 입장, 의견에 대한 이야기들에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한편 집 청소를 전담하게 되면서 그 일을 조직화한 작가의 노력과 위트에 박수를 보낸다. 청소 동선, 배분이 정말 효율적이라 따라하고 싶어진다. 참, 그러고 보니 두 남자 작가가 다 카버의 이야기를 한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보는 카버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같다.
내가 하는 경험은 언어화하기 이전에 결코 내면화할 수 없다. 막연하게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의 이름을 잃어버렸을 때의 허탈함을 모처럼 세 작가 덕에 잊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달콤한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