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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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는 아련하게 찬란하다. 해가 저무는 중일 수도 있고 해가 뜨기 전일 수도 있다. 레이스 커튼의 아랫단은 자기 그림자와 만날 듯 말 듯하다. 표지가 제목인 <참담한 빛>과 더불어 이야기에 진입한다. 이 역설은 언제나 그래왔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슬며시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할 감정, 기억, 언어는 오곤 한다. 그게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숨을 쉰다. 정합과 논리는 이론의 지지대지 현실의 완충 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백수린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읽지 않았다. <중국인 할머니>부터 시작했다. 중국인 새할머니의 죽음에서 역주행한다. 가족은 핏줄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애초의 출발이 그런 것이 아닐 때 조금씩 서걱거린다. '나'는 거기에서 출발했고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 끝낸다. 머뭇 머뭇 과하지 않게 딱 좋은 곳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기민하게 조절한다. 새할머니, 새외삼촌, 새사촌. 그들과 감동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랬으면,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 새할머니와 교감한 '나'만의 비밀이 진실이든 왜곡이든 그것을 밝히며 그녀를 애도한다. 빛나는 달을 보며 아직 다 크지 않은 '나'를 두고 중국인 할머니가 중국 민요를 불렀던 장면, '덧없이 짧은 한 순간' 이었지만 중국인 새할머니와 당신이 데리고 온 아들이 낳은 사촌 진운이와 그렇게 셋은 잠시 '가족'을 느꼈었던 기억은 그녀 안에 쌓여 기억을 이루고 그게 삶의 과거를 만든다. 서늘하고 찬란한 이야기였다.

 

만난다. 낯선 이를. 그것은 우연한 조우지만 공유되는 시간의 충실성은 그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다. 충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기대는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고 실망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시차>에서 외국으로 입양 간 사촌과의 조우도 그러했고, 아버지의 몰래 한 사랑이 낳은 딸과의 만남을 그린 <북서쪽 항구>도 그러했다. 표제작인 <참담한 빛>에서 남자와 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함께 한 잠깐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소통은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지 않지만 양자를 변화시킨다. 작가의 문장은 몹시 담담하다.

 

영원할 듯 빛나던 순간은 사라지고 모두 종국에는 늙고 병들어 종료되는 것이 삶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사람들은 피로한 얼굴로 묵묵히 집에 차오른 물을 양동이 가득 퍼서 창밖으로 버렸다.

-<높은 물때> 중

 

환상은 없다. 러시아 문학 스터디를 주관했던 근사했던 첫사랑 선배도 생업에 찌들어 영업을 하고 <첫사랑> 촉망 받던 미술학도는 머나먼 타국에서 불법 민박을 운영하며 늙어간다.<높은 물때> 그러나 종국에 이 모두를 훓고 지나가도 남는 것에 대한 응시가 작가의 이야기다. "어렴풋한 빛"이 떨어지고 살아남는 이야기에 다시 표지로 돌아온다.

 

바람이 불고 커튼은 흔들리며 자기를 투영해 내고 자기를 응시하고 그 공간 안에 우리 시선은 떨어진다. 찰나에 아련한 과거와 두려운 미래가 중첩되며 남기는 어딘가의 현재에 발을 담근다. '참담한 빛'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통과한다. 참담해도 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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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10-0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키님, 참 글 잘 쓰시죠.

블랑카님, 작가시죠??

blanca 2016-10-09 20:54   좋아요 0 | URL
음... 사람 참 기분 좋게 만드시는 재주가... 고마워용^^
 

구치 수석 디자이너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론칭한 브랜드로 승승장구 중인 톰 포드는 2009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A sigle man>을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를 만들어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한다. 주인공인 중년의 영문학 교수 조지를 연기한 콜린 퍼스의 찬란한 연기, 디자이너 출신 감독 특유의 색채와 소리에 대한 섬세한 감각은 원작의 충실한 재현을 뛰어 넘는 완성도와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침대 위에서 사랑했던 사람의 차갑게 식어버린 입술에 입맞추며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교수 조지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관통하는 접점에서의 현재와 자아의 조우를 묘사한 독백은 원작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서늘한 음악, 에메랄드빛의 차를 스치고 지나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무의식에서 깨어나 '하루'와 '나'의 옷을 입는 우리들의 나날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펼쳐내고 있다. 이미 우리 앞에 당도해 있는 죽음 안의 하루 하루는 갑자기 성큼 눈 앞에서 숱한 날들 중의 하나지만 또 특별한 여기에서의 지금으로 그려진다.

 

Waking up begins with saying am and now.

 

 

 

 

 

 

 

 

 

 

 

 

 

 

 

 

 

 

영화도 원작도  동성애자인 조지가 반려자였던 짐을 사고로 잃고 여느 날처럼 시작했지만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최후를 맞는 하루를 그려낸다. 그는 누구나가 기대하는 중년의 교수가 입어야 하는 정체성을 관성처럼 입고 학교에 출근하지만 내면은 잃은 사랑으로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는 상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강의하고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학생을 상대하지만 내밀하게 스스로 삶을 종결짓는 하루를 공모하고 있었다. 영화는  원작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동일시, 감정 이입,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장면들이나 이야기가 많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톰 포드와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정확히 교감했다는 느낌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역시나 원작의 서문에는 디자이너 톰 포드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그는 열아홉 살때 처음으로 <A single man>을 읽었고 사십 대 후반이 되어 또 다른 감동으로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다. 톰 포드가 실제로 작가 크리스토퍼 어셔우드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톰 포드는 이성애자의 세계에서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이질감, 고립감을 충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예기치 않게 끼어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회가 입히는 강제적 정체성의 감옥 속에서 진정한 실재와 자기를 발견해 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 앞에서 엄중해지는 시간성이 난타하는 삶의 편린으로서의 하루에 대한 예민한 인식의 촉수도 날카롭다. 누구나가 하루를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하루가 담겨 있는 병의 입구가 임의적으로 닫힌다는 것을 감안하면 크게 괴로워할 것도 상실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래도 역시 그렇게나 슬퍼하고 번민하고 끄달리는 누구나의 단 하루는 언제나 얼마간의 찰나의 아름다운 예술성을 지닌다. 아름답지만 처절하게 슬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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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6-10-14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안되었나요? 블랑카님 혹시....배우 김혜수는 아니신가요?ㅎㅎ

blanca 2016-10-15 10:12   좋아요 0 | URL
헉,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너무 궁금하네요.^^;;;; <싱글맨>은 번역은 되었는데 현재 절판 상태라
도서관에서 빌려 보실 수 있어요.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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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틈에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사랑에 빠질 때에도 헤어질 때에도 왜 그랬는지 누군가에게 설득력 있게 혹은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어제까지 손잡고 걸었던 길을 오늘 혼자 걷게 될 때 "너는 왜 그랬어? 너희들 좋았잖아."라는 말에 대답할 수 없다.

 

어색하게 헤어지고 연락이 끊길 때 우리의 서사는 나름의 이야기로 왜곡되고 종결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하나는 분명히 다른 식으로 윤색된 연애 이야기를 갖게 된다. 현실?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연애는 삶을 닮는다. 시작하고 변하고 마친다.

 

권여선의 이야기 속 연애는 슬프다. 만나고 헤어지고 각자가 간직하는 서사가 다르다. 서로를 철저히 오해해 버리고 만다.

<카메라>에서 여자는 직장 동료의 남동생을 그녀 몰래 만나게 된다. 그러다 어처구니 없이 헤어지게 된다. 재회한 것은 그 남녀가 아니라 그 여자와 남자의 누나다. 남자의 누나는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모른 척해 준다. 하지만 여자가 미처 알지 못한 남자의 서사를 완성해 준다. 그것은 사려깊고 애달프다. 남동생의 삶과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 누나의 이야기는 미처 남자의 전부를 알지 못한 여자를 울린다. 두 여자는 손을 잡는다. 끝났다,고 생각한 사랑은 그의 가족으로 인해 영원히 흐른다. 남자는 미처 그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고 마침표를 누나에게 맡겼으므로.

 

<층>에는 남녀 간의 사랑 안에 흐르는 현실의 묘한 위계를 감지한다. 백 퍼센트 순수한 사랑은 힘들다. 끊임없이 사회적 경제적 위계는 남녀 사이를 침투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묵인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남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공부도 많이 한 여자에게 아픈 가정사를 숨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여자가 떠나자 남자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가 여자를 떠나게 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여자가 떠난 것은 그런 남자의 처지보다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려는 그 거친 폭력에 진저리를 느낀 것이었다. 그러한 계기가 아니더라도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완성될 수 없었다. 작가는 그 미묘한 지점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지나가고 난 자리에서 여자와 남자는 자신들을 처음부터 다시 정립하고 나아간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권여선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 누군가가 시작한 이야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이는 것 아래의 뒤의 속살을 담담하게 관조하며 그녀는 애써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관계도 사건도 살아나가는 일도 다 그런 것이라는 그녀의 기본적인 어조가 때로 냉정하지만 그 명징한 맛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울린다. 끔찍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위안인 사랑조차도 결국은 그 안에서 회자되는 것임을 기억하는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읽는 이들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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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9-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무척 와닿았어요. 주정뱅이 1인으로서..ㅠㅠ;;

blanca 2016-09-29 14:06   좋아요 0 | URL
주정뱅이라는 말이 되게 뭐랄까, 귀엽게 느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달밤님도 ㅋ 귀여워요...
 
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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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실을 겪고 해거름이 지면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심장이 따갑고 쓰렸다. 둘숨마다 날숨마다 알알이 아팠다. 여지없이 해가 지면 그렇게 아팠다. 물속에 빠져 영원히 허우적댈 거라 생각했는데 삶이란 놀라웠다. 1년의 시간이 흐른뒤 나는 박차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그때 겨우 아홉 살이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영웅적인 행위보다 그러한 상실을 이겨낸 조그만 내가 대견하다. 그대로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회복기제나 계기가 어떤 것이었을까? 정확히 답할 수 없다. 거기엔 어떤 신비한 요소가 분명 있었다. 삶의 골목마다 많은 사람들이 앓았다. 잘 해낼 것 같은 사람도 그렇게 보이지 않던 이들도 다 외부적인 계기든 내면적인 것이든 상실에는 주춤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잘 해내는 사람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삶의 지축을 흔드는 일을 경험하고 때로는 그것에 송두리째 무릎꿇기도 한다는 것. 그러한 일은 살아가는 일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다. 유한한 삶 자체가 이미 상실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미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모험일 것이다. 사랑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두려워서 시작도 안 한다면 그것 또한 삶 자체를 살지 않기로 결심하는 모순을 예고하는 것일 거다.

 

이 책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책이다. 동시에 성장시키는 책이다. 생명과 삶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어두운 요소를 응시하고 파헤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다. 지금 아픈 사람도 그것을 통과한 사람도 혹은 그런 사람 곁에 있는 사람도 아니 차라리 이러한 고통 자체에 대한 경험과 이해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은 반드시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우울증을 통과하고 그 우울증에서 걸어나온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울증 자체에 대한 의학적, 사회심리학적, 정치적, 역사적 이해를 도모하는 개괄서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하고 철학적 이해에 대한 설득력 있고 현실감 있는 사례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숱한 상실, 해체, 붕괴를 균형감 있게 관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어떻게 통합하여 걸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역치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저마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품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한 각자의 삶의 서사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이러한 단순한 깨달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면 타인의 고통이 보인다. 눈물은 안 흘리고 가면 편하지만 흘리면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빛나는 것이 남는다.

 

 

 

당신이 우울증을 겪으며 보내는 순간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참을성 있게 견뎌 내면서 그 견딤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우울증 환자들에게 주는 중요한 조언이다. 시간을 꽉 붙들어라. 삶을 피하려 하지 마라. 금세 폭발할 것만 같은 순간들도 당신의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p.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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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블랑카님의 리뷰도 너무나 좋은데 인용문도 참 좋네요.

blanca 2016-09-27 18:1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에서 좋은 대목이 너무 많아서 그 부분만 다 체크해서 다시 읽기를 해도 한 권의 읽기가 될 정도였어요.

세실 2016-09-27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숨마다 날숨마다 알알이 아프다는 표현이 제 가슴에 콕 박힙니다...전 제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편이거든요. 아닌척, 괜찮은척...
각자 삶의 영웅이란 표현 굿!

blanca 2016-09-28 12:36   좋아요 0 | URL
길을 걸어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르게 보여요. 그 많은 상실, 결핍을 다 견뎌내고 저 나이까지 이른다는 게 그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Conan 2016-09-2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작에 사놓고 아직 못읽은 책입니다.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6-09-28 12:38   좋아요 0 | URL
Conan님, 여러 다른 책과 함께 조금씩 천천히 읽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중간 이론적인 부분은 조금 지루한 대목도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책을 읽는 일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묵직한 느낌이 오더라고요...

clavis 2016-09-29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친구가 해 준 말..어두울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둠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서서히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래요 그러면서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되더라고..blanca님의 글을 읽으니까 떠오르네요
 

<부모로 산다는 것>의 저자 제니퍼 시니어는 "장차 부모가 될 엄마와 아빠가 부모로서의 기쁨을 상상할 때에는 아이들이 나중에 사춘기를 지나게 될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임신 중에 나는 중고등학생이 된 내 아이들과 말다툼을 하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항상 손 발이 조그만한 젖내를 풍기는 아기,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상상했다. 젊은 연인이 사랑에 빠졌을 때 노인이 된 상대를 떠올리고 결혼을 준비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하고 어렵고 삶의 전반에 걸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시기가 빠진 기간에 환상을 덧씌우고 삶을 기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와 정유정의 <종의 기원>에는 모두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아들들의 극악무도한 범죄 앞에 선 어머니를 묘사한다. 그녀들도 모두 한때는 아름다웠고 젊었고 보드라운 살을 가진 아들들의 발바닥에 입마추었다. 특별히 아들을 학대하거나 방임하지도 않았지만 아들들은 살인자로 컸다. 이제 그렇게 살인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그럼에도 품을 수 있느냐는 문제에 <케빈에 대하여>에서의 틸다 스윈튼은 담담한 포옹과 돌아올 아들을 위한 준비를 통해 대답한다. 자식은 타인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역사와 정체성과 얽히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선명한 대응이나 설명, 해명과 멀어져간다.

 

 

 

 

 

 

 

 

 

 

 

 

 

 

 

내가 부모의 결과가 아니듯이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교적 선의를 가지고 사회의 구성원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고 직업적 성취도 이루며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를 기대하지만 나의 선의와 계획이 백프로 나의 자식들을 통해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나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지만 사회적 압력은 그게 아니다. 잘못된 아이도 잘된 아이도 부모와 아이는 인과 관계로 섞인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부모가 된 그 순간부터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

 

여기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예시가 있다. 1999년 열세 명의 사망자와 스물네 명의 부상자(이후로 영구 장애를 입은 아이들도 있다.)를 낸 콜로라도 고등학교 총기 참사에서 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토머스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사건 당일 직장에 근무중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친밀감을 나누며 잘 지냈고 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을 하고 있었으면 아들 둘을 최선을 다해 양육하는 교외 중산층의 평범하고 좋은 엄마였다. 그 하루 수는 갑자기 살인자이자 자살자인 딜런의 엄마가 되어 무고한 아이들의 실현되지 않은 꿈, 그들을 추억하는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긴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그 전날까지도 그녀는 행복했다. 아이는 평범했고 오히려 아주 순하고 수월한 양육을 통해 자라났다. 몇 주 뒤에는 합격한 대학으로 갈 예정이었고 파티에 파트너를 대동하고 수줍어하는 사진까지 남긴 터였다. 그녀는 항상 아이와 대화를 했고 아이의 친구를 초대했고 아이들의 부모와 친분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중고차를 함께 수리하고 심지어 대학 기숙사의 도면을 가져와 아들이 편히 지낼 수 있을지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할 정도로 아들과 소통했다. 딜런은 사랑받는 아이였다. 부모에게 맞거나 방임되거나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도 않았다. 친구들에게 조직적으로 소외되거나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한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와 형이 아는 면 뒤에 우울 성향과 무력감을 토로하며 폭력적인 성향의 친구와 무기를 구입하고 이미 무서운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그 일이 있기 하루 전날, 아들의 "안녕"은 영원한 작별 인사였다. 수는 꾸준히 자신이 쓴 일기를 들춰가며 대체 아들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부모로서 자식을 양육하며 겪는 시행착오들이 어떻게 이렇게나 무섭고 끔찍한 수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복기하며 피해자 부모와 아이들에게 사죄하고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도정에 선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 날부터 딜런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슬픈 추억은 세상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아들을 추모하는 그녀 나름의 방법이었다. 세상은 당연히 가해자로서의 딜런만을 기억할 뿐 아들을 잃은 수의 애도마저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수는 살인자를 키우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 살인자를 낳은 뻔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유별나지 않다. 오히려 여느 보통 엄마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도 같다. 다만 엄마 앞에서 웃었던 아들의 내면의 심연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사춘기 아이의 신호는 별다를 것이 없었는데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녀의 순탄하고 평범하고 행복했던 삶은 결론적으로 그 심연으로 함께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내가 딛고 선 지반은 너무나 연약하다. 삶이라는 게 그렇다. 견고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 우리 모두 결국 이별한다는 명제 뿐이다. 특히 자식을 가지고 나면 그 이별의 의미는 순리를 따른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이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들이 삶을 다할 때까지 치유라는 게 가능할런지 진정성 있는 애도라는 게 가능할 지 의문일 정도다. 게다가 그러한 고통을 파생시키고 자행한 아이의 부모라면 아이가 파괴한 삶을 두고 삶을 붙든다는 것이 보통의 인내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여정을 따라가기가 너무 괴로웠다. 도서실에 있다 친구에게 총을 맞은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며 엎드려 숨어 있어야 했던 아이들, 그러한 아이들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하다 죽어야 했던 교사,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 딜런의 엄마는 끝까지 결국 그러한 모습의 아들과 어머니 일을 도와주고 수줍게 파티를 앞두고 턱시도 차림으로 웃던 아들 둘을 하나의 것으로 통합하지 못한다. 그것은 뇌의 병이었다,고 마음의 병이었다고 뭉뚱그리지 않으면 설명할 도리가 없었을 그녀의 마음도 한편 이해가 갔다. 딜런을 사랑했던 자신을 부정할 수도 그리고 그녀의 삶이 다할 때까지 사랑할 어머니로서의 본능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나머지 피해자들의 고통도 그녀는 영원히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답이 없고 숱한 질문을 남긴다.

 

대체 아이를 품고 낳아 기른다는 게 무엇일까? 과연 상식, 정도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누구나 자신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텐데 저만치 뻗어나가는 아이의 삶이 어디로 튈 지 과연 엄마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미 가고 없는 두 사람은 그녀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그녀가 먹이고 입힌 사람들이며, 그녀가 때로 실수해서 잘 돌보지 못하기도 한 사람들이며, 그녀가 때로 구조해주기도 한 사람들이며, 인생을 살면서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감정과 그 어떤 것보다 최악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이다.

-제니퍼 시니어 <부모로 산다는 것> 중

 

 

아이들은 영원히 엄마와 함께 남는다. 부모가 되는 일은 어떤 순간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일이다. 정말 무겁고도 귀중하고 아픈 일이다. 자식이 먼저 떠나도 어머니는 남는다. 지겨운 애도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이유다. 사랑하는 일은 달콤하지 않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아픈 노릇이다. 내가 아니면서 나 만큼이나 사랑하는 독립된 개체가 세상에 나와 나와 함께 호흡하다 그것이 스러지는 자리에는 갈피마다 눈물이 스밀 수밖에 없다. 그 아이들이 미처 살아내지 못한 삶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남은 삶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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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9-16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많이 생각하게 하는 글이예요.
부모로서 또 자식으로서요.
blanca님 페이퍼는 항상 좋지만...
이 페이퍼는 정말 좋네요.

blanca 2016-09-17 09:25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참 불편하면서 스산하고 이 아이들을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고 복잡한 심경이었어요. 요새는 참 산다는 건 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6-09-1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7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9-17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혼 전,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에 어떻게 골인할 것인가 보다 결혼의 후의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 또는 안해가 죽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유년시절에 백혈병이나 교통사고로 죽을 가능성(생물학적 이별), 외국 유학이나 결혼으로 헤어질 가능성 (사회적 이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결론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 역시 `어떤 순간에도 딸아이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지만, `잘못된 아이도 잘된 아이도 부모와 아이는 인과 관계로 섞이고,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없`지만 모든(?) 부책감과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blanca 2016-09-17 09:29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저는 그런 상실의 각오가 잘 안 돼요. 사실 부모가 된다는 건 마립간님이 말씀하신 그러한 것들조차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두렵고... 그래서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이겨내고 묵묵히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게 때로 참 경이롭습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부모로서의 책임, 죄책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사회가 일정 부분 담당해야 하는 역할에서 도망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