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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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중언부언할 수 없다. 섣불리 거창해질 수 없다. 한정된 지면과 시간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하려는 말을 최대한 응축하여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서 쉽게 성공하기 어렵다. 할 수 있거나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이번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들은 명료하고 농밀하다. 하려는 이야기가 모호하거나 지리멸렬하지 않지만 읽는 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핍진성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고 서걱거리지 않은 반가운 이야기들이었다. 한동안 너무 어려운 문학, 모호한 메시지, 파격이 진부하게조차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다. 다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대상작인 윤성희의 어느 밤의 화자는 "일주일 전,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쳤다."로 재기발랄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삶의 그 수많은 고충들에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할머니라는 반전을 가지고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구원자가 되어준 청년과의 조우는 저마다의 상실과 고통의 몫을 소화해야 하는 양세대의 화해와 소통의 지점을 확인시켜 준다. 아이의 새 킥보드를 어이없이 도난당한 경험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에선가 그 킥보드를 타고 있을 그 누군가가 연상됐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는 종교 공동체 안의 나이 든 여인들의 시선이 교차하고 중첩한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해 보였던 한 여인의 죽음은 뜻밖의 성찰의 시간을 가져온다. 저마다의 사적인 삶은 사회적인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었다. 여자 노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격랑을 통과해 온다는 것이 가지는 그 무게와 의미가 조명되는 순간이었다. 


편혜영의 <어쩌면 스무 번>은 여전히 편혜영 답다. 울울한 정서, 인간의 내면의 그 어두운 욕망, 기만. 큰 사건 사고가 없어도 절대 늘어지거나 긴장이 늦추어지는 법이 없는 그녀만의 서사의 그 팽팽함은 여전하다. 여기에 병든 노인의 부양에 관한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이 한 가족 구성원들의 은밀한 욕망과 패배감과 연결될 때 빚어질 비극의 깊이는 상상불가다.


개인적으로 초기에 줄거리를 따라잡기 힘들었던 황정은의 <파묘>가 참 좋았다. 쉽게 들어오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실명의 명명이 가지는 의미가 차차 밝혀지고 '파묘'라는 일회적 사건을 둘러싸고 노출되는 한 가족사의 요약이 가지는 응축도가 대단했다. 단 한 문장도 낭비되거나 부족한 면이 없이 예리하게 조탁되어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최은미의 <운내>는 이 작품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두 소녀의 성장기에는 어떤 무시무시한 한국적, 무속적인 은밀함이 스며 있다. 하지 않고 참은 이야기의 여백에 끼어드는 상상력의 여파가 두려울 정도다. 쓰는 행위에 이미 읽을 자들의 역할이 가정되어 있는 영리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작품들은 한결 같이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여성의 개인적 삶에 가하는 어떤 폭력에 대한 예리한 관조가 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사실 공적인 이야기의 변주이기도 하다. 그러한 면에서 이야기들은 흩어져 있는 듯해도 결국 집약한다. 수상작들이 모여 일련의 메시지를 전하는 놀라운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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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그 혼돈의 연대기
론 파워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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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바로 그 책이다. 아내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2005년 7월, 3년 동안 조현병에 시달리던 작은아들 케빈이 스물한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 집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을 맨 뒤 10년 동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왔다.

- 론 파워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머리말 중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왕왕 일어난다. 그것은 삶을 통과하는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이 그런 약속을 했던 나 자신조차도 때로 변화시키기 때문일 테고 그렇게 했던 결심 그 자체가 가치는 의미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 지극히 사적인 애통한 상실과 그 상실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천착한 보기 드문 책이 있다. 저널리스트 론 파워스에게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 딘과 케빈은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보통 형제 이상의 교감과 연대감을 나누었다. 과학자인 어머니와 작가인 아버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연으로 부부가 된 낭만적인 사연을 가지고 영민하고 아름다운 형제를 버몬트의 동화 같은 풍광 속에서 키운다. 너무나 현실 같지 않은 빛나던 시간들은 비극적인 결말의 지점으로부터 돌아서 바라 본 지점에서 회고된다. 그 시간들의 마침표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왜 이러한 일을 이렇게밖에 겪을 수밖에 없었는 가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가지고 온다.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조현병도 함께 앓게 된다. 동생은 형과 함께 연주하던 시간을 눈물어린 추억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적인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과한다. 론 파워스의 경우 비단 조현병 뿐 아니라 광범위한 의미의 정신질환을 둘러싼 미국의 200년간의 역사의 개관을 활용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무력한 자들을 어떻게 가장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를 지향한 철저한 몰이해와 오판의 사례다. 정신질환의 범죄화가 바로 그것이다. 


'문명'사회가 그 사회에서 가장 무력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사례로 끝없이 채워져 있는 나의 파일은 그 자체로 대대적인 잔혹함에 관한 하나의 서사다.

-p.261


결국 정신질환자들은 병원보다 감옥을 더 많이 채우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낳았다. 이 안에서 애초에 받았어야 할 적절한 치료와 보호 대신 이들은 철저한 고립과 학대, 방임으로 더욱 망가진 상태로 세상 밖으로 내쳐진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것이 론 파워스의 결론이다. 적시의 진단, 적절한 개입, 인내심이 필요한 약물치료와 사회적 지지 대신 즉각적으로 손쉬운 교화, 분리 등을 택하는 사례는 그러나 용기 있는 이들에 의하여 재고되고 그 방향을 트는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의학적 진보는 질환에 대한 이해를 수반했고 이는 결국 이 책의 원제처럼(No one cares about crazy people)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개혁적인 움직임도 가지고 왔다. 명료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그 가름끈을 선악의 구도로 속단하지 말고 그러한 비극을 철저히 타인의 것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닌 공감어린 정책에 힘을 실어주자는 목소리는 저자 자신의 처절한 상실로 깊이 공명한다. 사적인 상실의 애도는 심오하게 깊어지고 확장되어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적인 시선으로까지 나아간다.


너무나 정상적이었던 그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당연시하고 꿈꾸었던 한 가정이 어떻게 갑자기 몰아닥친 비극으로 흔들리고 그럼에도 그 상실을 딛고 또 다시 삶이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지금 여기에서 숨을 쉬고 생을 산다는 일의 그 엄중한 무게를 실감케 한다. 꽃길만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맨발로 때로 유리에 발을 베는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쌓는다. 그것을 개인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확장하려는 저자의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강고한 의지와 노력이 전해져 뭉클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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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잊지 못할 가교 역할을 한다. 그것은 사람, 장소, 취미 때로는 책이 될 수 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텍스트의 링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서점에서 책의 실물이 단박에 나를 사로잡아 작가도 내용도 제대로 짐작조차 못하고 이 책을 샀다. 실제본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등, 어디 하나 걸리적거리지 않고 백팔십도로  활짝 펼쳐지는 책의 제본이 내용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읽다가도 자꾸 책등을 쓰다듬고 책을 펼쳐보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책은 흥미롭게도 그 책을 대책없이 사랑하는 출판인의 자신의 책에 대한 열정의 기록이었다. 



















저자 김흥식은 우연히 한문으로 접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류성룡의 <징비록>을 대중들이 읽기 쉽게 번역하게 된다. 예상 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임진왜란의 포화 속에 임금을 수행했던 고위 관료가 우리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란이 수습되고 난 후 후손들에게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한 글은 우리 스스로 우리 국토를 수호하지 못해 명나라 구원병의 도움에 기대어야 했던 그 비굴한 상황과 오버랩되어 한없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저자 또한 수십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했다. 제대로 된 무기도 방비도 없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쫓기는 신세에서 백성들은 도륙 당하고 사방에서 곡성이 치솟을 때 한양의 궁성을 빠져나가는 임금 곁에 서야 했던 류성룡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신하들과 병사들 앞에서야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 자주 눈물을 흘렸다. 

 

돈의문을 지나 사현 고개에 닿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성안을 바라보았더니 남대문 안의 커다란 창고에 불이 나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 석교에 도착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류성룡 <징비록> 중


















그는 패색이 짙던 전란을 단 한번의 승리로 구도를 전환시킨 이순신을 천거했고 수시로 내빼고 싶어했던 명나라를 어떻게든설득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 일조를 담당하도록 지원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용단을 내려 임무를 재대로 수행하지 못한 병사와 신하를 징벌했다. 그 와중에 굶주린 백성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해 수시로 식량을 조달하고 구제를 도왔고 명나라에서 선진의 병법과 무기들을 전수받아 우리 군을 정비하는 근본적인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럼에도 그의 노후의 기록은 각종 당쟁과 사화들로 고립되는 것으로 나온다. 전란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세운 공은 결국 그가 조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후손들에게 이렇게 빛나는 기록으로 남았다.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담담한데 그 언어들이 그려내는 실상의 처절함과 생생함은 그 깊이와 넓이가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 광대하다. 참화의 가운데에 정작 우리는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한테 갈 때에 대한 묘사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젖먹이가 죽은 어미 옆에서 우는 풍경으로까지 나아간다. 그 와중에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용기있는 자들과 자신의 안위만 챙겨 도망가는 고위 관료들의 모습의 대비가 극명하다. 사백 년도 전에 이 가난하고 척박했던 땅을 사수하고자 초개 같이 목숨을 버렸던 숱한 선현들의 피땀이 오늘날의 평온한 일상을 가져왔다는 각성에 숙연해졌다. 여전히 깊은 울림을 가지는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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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는 묘한 삼십 대의 정서가 서려 있다. 청춘에서 중년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거기엔 청춘의 기억과 중년 초입의 어떤 체념이 섞여 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자각은 충분히 늙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직은 그래도 순수와 열정과 희망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시기. 그러고 보면 그녀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던 나의 마음과 지금 '오직 한 삶의 차지'를 앞에 둔 내 모습의 온도차는 제법 크다. 

















<체스의 모슨 것>의 노아 선배 같은 엉뚱함, 치기는 삶의 '변화의 완수' 앞에서 때로 무력하다. 우리 모두는 변하고 관계 또한 그러하다. 김금희는 그러한 시간의 강을 통과한 청춘의 소멸을 때로 한꺼번에 소환해서 펼쳐놓기도 한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에서  까페의 사장은 엉뚱하게 아직 너무 젊고 가진 것이 없는 작업장의 청년을 은밀하게 짝사랑한다. '내'가 그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 사장과 소통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오히려 같은 또래의 아르바이트생인 '그'와  공모한 기발한 반역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그렇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조차도 사실은 착각이었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사실 '우리'라고 생각했던 연대는 한없이 얄팍한 것이었다. 한데 뭉뚱그려 하나라고 생각하는 가상의 집단에 대한 허상. 청년 세대, 중년 세대, 장년 세대의 개별성과 구체성은 그 안의 서사에 귀 기울일 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K는 여자가 늙었다는 것,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여자는 거부하지 않았음을, 살 것을,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여자가 했다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 이 도시에서 어떤 무게를 감당하면서 거짓말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금희 <쇼퍼, 미스터리, 픽션>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은 순리라기보다 하나의 성취임을 자각하게 되는 나이, 생활과 삶은 함부로 비하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수용해야 하는 지점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걸어온 지난 청춘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과 이제는 꿈꿀 시간보다 견디고 그저 통과해야 하는 시간들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을 씁쓸하게 수긍하는 순간들과 만난다. 표제작인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는 책을 내는 일을 하다 실패한 화자가 결국 생활과 현실의 무게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순간들이 자꾸 금전적으로 기대게 되는 장인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부각된다. 현실과 삶에 자꾸 무릎이 꺾어야 하는 꿈꾸는 몽상가들의 좌절이 작가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김금희는 이들이 품고 있는 과거의 그렇지 않았던 시간들에 보내는 애도, 그리고 이제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의 지점에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그 비가는 왠지 서글픈 아름다움의 정조를 띤다.



"그렇게 눈을 녹이는 것이었다. 붙들 것이 없다면 그냥 자기가 걸어서."<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이제 작가는 그렇게 자기가 걸어서 수많은 좌절들과 상실들을 겪어내며 어떻게 늙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향해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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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9-29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4세까지는 청년이랍니다.노인도 70세 이상으로 상향조종 된다고 하니 그 중간은 그냥 장년층이라고 부르는것이 맞겠지요^^

blanca 2019-09-30 14:14   좋아요 0 | URL
이제 육십 대는 노인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중장년층으로 보이더라고요. 평균 수명이 길어지니 조종이 필요한 부분인 게 맞는 것 같아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이 도저히 어쩌지 못할 국가재난 사태나 자연재해일 경우 외부자의 시선은 더욱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한편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은 감정적 동요나 주관적 편견을 극복하고 투명하고 넓은 지평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2011년 3월 동일본을 강타한 쓰나미의 대참사는 원전의 폭발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국의 외신 기자 리처드 로이드 페리가 르포 형식으로 쓴 이 책은 그 쓰나미의 직접 피해지역인 작은 어촌 마을 오카와의 초등학교의 아이들 몰살에 관련한 6년에 걸친 취재의 기록이다. 비교적 재난방비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다고 알려진 일본에서도 한 초등학교 아이들이 교사의 지시에 따랐음에도 거의 전원이 죽음에 이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자는 오카와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을 잃은 학부모들과의 심층면접으로 평범한 하루가 어떻게 예기치 않은 대재앙으로 붕괴되는지 그 상흔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다시 불행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밀하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나간다. 이야기는 현 아베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일본 대다수의 국민성에 대한 분석으로까지 확장된다. 



오카와가 위치한 도호쿠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고립되고 낙후된 이미지가 강했다고 한다. 쓰나미와 지진에 대한 학교의 매뉴얼은 형식적이었고 관료주의에 찌든 교사진은 실제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처가 안이해서 아이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쓰나미가 오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음모가 아니라 평범한 우둔함과 어리석음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사는 아이들을 찾아 울부짖는 학부모들을 피해 다니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아이의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행정당국이나 학교보다 부모들에게 더 처절한 것이었다. 심지어 한 엄마는 딸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직접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땅을 판다. 가까스로 아이를 찾아낸 엄마는 아무리 아이에게서 닦아내도 없어지는 않는 진흙 앞에서 절망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시토 사요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에 의해 키워진 것은 바로 우리, 부모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우리는 아이들이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애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애들이야말로 주춧돌이었어요. 다른 모든 조각은 그 위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리처드 로이드 패리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아이를 잃은 부모들 간의 갈등과 내분에 대한 이야기도 슬프다. 상실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어서 그 안에서도 차이와 차별이 있었고 서로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의 골이 때로 그들을 싸우게 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책임자를 가려내고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의견은 자신들의 동료들을 공격해야 하는 민감하고 어려운 위치에 있는 다른 학부모들의 저어와 충돌했다. 어제까지 함께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던 관계는 서로를 반대편의 스파이로 오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또한 공권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일본의 국민성과도 만나는 이야기였다. 체념과 순응의 정서는 진실의 규명을 위해 취해야 하는 여러 적극적인 절차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쓰나미는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것은 때로 불편하고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우리의 어제와 같은 나날들은 사실 갑작스럽게 붕괴될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충격이 주어지면 찢어져버고 만다. 인간이 다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살 같은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린 경험은 사실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이야기들에 닮은 구석이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고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사지로 내몰고 혼자 살아남은 교사 대신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 마지막을 맞이한 많은 교사들이 있었다. 


"오늘 평결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경험의 총합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로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한 일이 가지는 의미의 일부입니다.<중략>"


법정에서 부모들을 대변한 변호사의 이야기는 많은 울림을 가진다.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한 일이 가지는 의미의 일부"로써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고 사후 대책을 수립하는 일이 그토록 절실한 이유다.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여전히 그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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